김정길 전 장관을 만나다 (2/2)
2011. 5. 30. 월요일
정치부장 물뚝심송
전편에 이어 김정길 전 장관에 대한 인터뷰는 계속 된다.
지난 인터뷰 보기 (클릭)
1부를 안 보신 독자분들은 반드시 위의 링크를 눌러 1부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그러면 이제부터 또 다시, 故노무현 전 대통령과 수십년이 넘게 같은 지역 부산에서 똑같이 지역주의 철폐를 위해 싸워온 동지이자 친구였던 정치인 김정길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인터뷰는 2011년 5월 18일,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전 청와대 비서관 출신 노혜경씨가 배석한 가운데 행해졌다.
딴지측에서는 본 우원과 자칭 지구 최강의 미남, 죽지 않는 돌고래 기자가 참여했다.
- 배신자 취급을 받다
김 : 그렇죠. 그런데 그 다음번 선거에서는 더 끔찍했어요. 우리 집사람 고향이 전남 고흥이에요. 근데 삼당합당이 있었잖아요.
삼당합당이 벌어지면서 국민들에게 야당하겠다고 약속했다가 김영삼이 따라서 약속을 뒤집고 여당노릇을 하던 국회의원 57명이 배신자가 아니고, 안 따라가고 남은 노무현과 김정길이 배신자가 된거에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런 저열한 배신행위가 어떻게 전통 야도이며 부마항쟁의 중심지였던 부산 시민들에게 받아들여 졌는가에 대해서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현실은 꿋꿋이 버티며 남아있던 두 정치인, 즉 노무현과 김정길에 대한 가혹한 낙선의 연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정길은 이러한 가혹한 응징을 버티며 노무현과 함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다.)
근데 거기다가 김영삼이 배신했다고 내가 먹어야 할 욕이 나한테 안 쏟아지고 우리 집사람에게 쏟아지는 거에요. 무슨 말이냐면, 우리 집사람이 고향이 전남 고흥이니까, 김정길이는 여편네 잘못 만나서 신세 망쳤다 이거에요. 김영삼이 따라 갈건데, 김영삼하고 제가 거제도 같은 동네 출신이거든요. 김영삼이 따라 갈건데 여편네가 못가게 해서 김영삼이 버리고 김대중한테 갔다 이거에요. 이렇게 비방을 하는 거에요.
그렇게 욕 먹으면서 이십년 동안을 떨어지는 선거만 했어요. 나야 뭐 내가 내 소신대로 지역감정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싸우는 거니까 상관 없지만, 내 집사람이나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이십년간을 그 고생을 같이 해야 하는 겁니까?
이건 무슨 선거가 한번 떨어지면 다음엔 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그 희망조차도 전혀 안보이는 거에요. 그런 지옥같은 경험을 우리 집사람은 이십년동안이나 해 온거에요. 국회의원 선거 다섯 번, 부산 시장 선거 한번, 여섯 번 낙방에 이십일년차입니다.
(이 부분에서 김정길 전 장관의 목소리는 톤이 높아지다 못해 고통과 분노에 떨리는 수준까지 올라갔었다. 사람이 겪는 고통은 자신이 겪을 때 가장 큰게 아니다. 특히나 자신의 소신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본인은 오히려 고통이 영광의 상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주변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족들,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들이 겪게 되는 고통은 오히려 자신이 받는 고통보다 더 크고 무서운 상처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한다. 그저 청문회에서 한번 반짝했던 스타로 사라질 수도 있던 노무현이 본격적인 정치가로 변신하게 되고 나아가 우리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정도의 훌륭한 정치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런 울분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울분을 과거 노사모 시절에 함께 했던 모든 친구들은 "울분이 소낙비처럼 쏟아진다"고 표현을 했었다. 단순히 비교하기는 좀 무엇하지만, 김정길의 경우라면 울분이 소낙비 수준이 아니라 장마비 수준으로 이십일년간 쏟아지고 있는 셈이다. 그걸 맞으면서 버텨온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
- 다시 가족 얘기로
물 : 지금도 루머는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저기 알아본 바로는, 김정길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낙선을 계속하면서도 정치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처갓집이 상당한 재산이 있어서 그 힘으로 버티는 거다, 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실제로 부산에 계시는 분들에게 들은 얘기고요.
김 : 전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집사람의 집안은 정말 가난한 집안이고요. 저와 만날때에 집사람은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오빠들 뒷바라지 하고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물 : 아까도 제가 여쭤 봤지만, 장인어른 직업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얘기거든요.
김 : 재산도 하나도 없고 아주 일찍 돌아가신 분이었어요. 빨치산 뭐 이런 거 하던 사람은 아니었고요. 가난하게 사셨던 분이죠.
물 : 그럼 만나시게 된 계기는 어떤가요?
김 : 서울에서 제가 조그만 중소기업을 했었어요. 국회의원 보좌관 하다가 중앙노트산업사라고 사업을 했었어요. 예전에 나왔다~ 만화노트~ 해가지고 꽤 유명했었어요. 신세계 백화점에서 제가 만든 노트만 팔던 시절도 있었거든요.
물 : 그게 기억이 날것도 같은데요.
김 : 그 때 그거 해서 돈도 좀 벌었어요.
물 : 그럼 그 때 자본을 좀 축적 하신건가요?
김 : 첫 번 선거때 홀랑 날렸어요. 뭐 브로커에게 당하기도 했고. 그 때는 선거하면 돈 많이 들었습니다.
물 :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선거를 무슨 돈으로 하셨습니까?
김 : 나중엔 진짜 돈 안드는 선거를 한거지요. 돈도 안 가지고 맨입으로 했어요.
물 : 선거는 그렇다치고, 그 사이사이에는 어떻게 생활을 하신 겁니까?
김 : 선거 사이사이에는 진짜 힘들었어요. 쫄딱 망해서 친구 동생 단칸방에 얹혀 살기도 하고 제가 진짜 안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입니다. 배추장사까지 해 봤으니 말 다했죠. 이혼하고 재혼하기 전에 그런 겁니다. 큰누님 집에 얹혀 살기도 했고..
물 : 그러다가 사모님을 만나신건가요?
김 : 그 사업할 때 서울에서, 아는 지인이 소개해 줘서 만난 거에요. 젊고 예쁘고 해서 살살 꼬셨더니 살살 넘어오더라고. (일동 폭소)
다들 힘내서 살살 노력해보시라.
근데 살살 꼬시는 건 어떻게 하는 건지 그것까지는 자세히 물어보지를 못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자세히 물어볼 것을 약속드리는 바이다.
)
물 : 사모님 얘기는 그 정도로 하고, 자녀분들은 어떠십니까?
김 : 집사람 포함해서 우리 가족 전원은 아빠가 정치 안하는 것을 바라죠. 이제는 그만 좀 편케 살았으면 좋겠다, 이겁니다. 이번에도 사실 부산시장 선거 나오는데, 집사람은 이혼서류에 도장찍어 놓고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쫓겨나서 보름만에 겨우 집에 들어갔어요.
물 : 이거 꼭 쓸 겁니다. (전체 웃음)
(이 얘기는 인터뷰 과정에서는 이걸로 끝이다. 그러나 인터뷰 끝난 뒤에 식사하러 간 자리에서 자세한 얘기가 나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얘기지만 간략히 정리해 보자면 이런 스토리였다.
부산 시장 선거에 출마할 것을 결심하고, 이 내용이 언론에 알려진 뒤에 하루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을 언론 측에서 어기고 발표해 버린 것이다. 덕분에 가족들에게 출마 결심을 얘기하기도 전에 신문에 출마 사실이 발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걸 집에서 먼저 보게 되고..
격분한 사모님께서는 실제로 가방에 옷까지 싸서 말 그대로 "쫓아낸" 것이다.
결국 그 자리를 피해 옷 가방을 들고 집에서 나온 뒤에 며칠 뒤에 슬그머니 집에 가본 결과 현관 자물쇠 비밀번호까지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전화해서 번호를 물어봐도 안 가르쳐 주고...
결국 가족들을 설득해서 선거를 치루기는 했지만, 이런 일화는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선거라는 것이 당사자야 스스로 결정해서 하는 것이지만 가족들에게 감당키 힘든 고통을 주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에도 그 자녀들이 겪은 고통은 타인이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 된다. 하물며 비명에 스러진 남편과 아버지를 보게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족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인 김정길의 앞에는 이러한 과정이 또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여태껏 겪었던 규모와는 비교하기 힘든 규모로 더욱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가능성이 많다.
부당한 권력과, 그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위해 이런 과정들을 교활하게 겪어 내는 경우 말고, 진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이룩하기 위해 이런 과정에 뛰어드는 사람들, 과연 그들은 행복할까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부디 그런 이상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진정한 정치인의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하는 기원을 해 본다.)
- 부산 시장 선거, 그리고 왕바보 김정길
김 : 그래가 마지막에는 가족들하고 가까운 친지들이 이젠 뭐 신문에도 나고 그래서 무를 수가 없으니까, 진짜 이혼할 수도 없고, 정 그렇게 부산시장 하고 싶으면 민주당으로 하지 말고 무소속으로 하라고 그럽디다. 민주당으로 하면 떨어질거고, 무소속으로 하면 될 수도 있다 이거에요.
전에 국회의원할 때에도 그런 소리 많이 나왔어요. 무소속 하면 될 수 있다.
제1야당 원내총무 할 때, 공천심사위원장을 했었어요. 김원기의원하고 같이 공동으로 했는데, 그 때 이철, 노무현, 유인태 이런 분들이 같이 했었어요. 공천심사위원장은 공천 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도 노무현하고 나는 지역감정하고 싸워야 된다고 부산에다가 공천주고 그랬었어요. 우리 스스로. 우리는 떨어지는 곳에다가 공천하고.
생각해 보세요. 김대중 대통령 입장에서야 우리가 김영삼 안 따라가고 남아 준거만 해도 얼마나 고맙겠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디를 보내 달라고 한 들 안 보내주겠어요? 서울에 제일 좋은 곳으로 호남 출신 유권자들 많고 언제나 민주당이 이기는 곳, 그런데 가면 우리도 좋죠. 비례대표 달라 그러면 1,2번 안 주겠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역주의하고 싸운다고 맨날 떨어질 곳으로 찾아다니니 이런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니까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도 나오고..
요번에 부산시장 떨어지고 나니까, 부산 사람들이 나보고 그럽디다. 노무현 보다 더 바보라고, 왕 바보 김정길이라고.
물 : 그 정도로 자녀분들이 반대를 하시고 그러는데, 부산시장하고 비교도 안되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김 : 난 사실은 부산서 국회의원 다섯 번 떨어지고 나서 정치를 그만두려고 그런거에요. 내 한계가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한거죠. 내가 된건 아니지만, 나와 함께 3당 야합에도 반대를 했었고, 계속 친구이자 동지 사이로 함께 가시밭길을 걸어온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고, 그건 내 가슴에 맺힌 한이 반넘게 풀리는 것 같았어요. 부산 시민들이야 안 알아주지만 국민들이 알아주는구나 하는 거였죠.
그래서 내 정치 인생을 마감하려고 한거에요. 김대중 정부에서 행자부 장관도 하고 청와대 정무수석도 하고 했기 때문에, 또 실제로 제가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한 살이 많습니다. 제가 45년생이고, 노 전 대통령이 46년생이시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친구이자 동지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내가 또 굳이 행정부에 들어갈 일은 없다는 생각도 든거에요. 장관을 하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그래서 임명직은 안하겠다 하고 물러 나온거에요. 그러고 자청해서 대한체육회장을 한 거에요. 그건 임명직이 아니고 선출직이니까. 거기선 선거해서 이겼어요.
그래 갔다가 체육회장 그만두고 중국 북경에 북경대 동북아 연구소에 가서 공부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그러다가 그런 일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놀라서 봉하에 갔다가 다시 정치를 시작하게 된 겁니다.
- 노무현이 김정길에게 진 빚 세가지
물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좀더 자세히 듣기로 하고요. 그렇게까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굳이 민주당 당적을 유지하시는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지역감정하고 싸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김 : 내가, 김영삼 따라 갔으면 벌써 7선의원입니다. 안 그래도 국회의원 한번 더 하려고 생각했다면, 부산서 출마 안하고 서울로 옮겼으면 더 했겠죠.
사실, 노대통령이 부산 국회의원 한번, 부산 시장 한번 떨어지고 나서 저한테 상의를 했었습니다. 김의원, 내 도저히 부산에서는 안될 거 같아서 서울로 옮겼으면 하는데, 명분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습니다, 하시더라구.
그 때 그 분 선거구가 중동구였고, 내가 영도였는데 사하 보궐선거에 내가 떨어진 다음에 중동으로 가느냐 영도로 가느냐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한 것이 노 대통령 선거구였던 중동구를 내가 맡아줄테니, 서울로 올라가시라고 권한 겁니다. 그렇게 명분을 만들어 드렸던 거에요. 그 명분으로 서울로 올라가신 거에요.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사실 노 전 대통령은 저한테 빚이 세 가지나 있다고 평소에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 중에 한 개도 안 갚고 저래 서운하게 떠나버린 겁니다.
물 : 그 세가지가 뭔가요?
김 : 노 전 대통령이 부산 시장 출마를 할 때, 조직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제가 이기택 계 2인자였습니다. 제가 부산시장 출마하려고 그랬거든요. 그 때, 노의원이 저한테 얘길 하신겁니다. 제가 부산시장 나가고 싶은데, 김최고위원, 그 땐 제가 최고위원 할 때였거든요. 김최고위원이 하실거면 제가 못하고, 혹시 생각이 없으시면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하시더라구요. 다른 사람도 아닌 노무현이 하고 싶다고 하는데, 제가 하겠다고 말은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제가 저는 생각이 없으니 한번 해 보세요, 해서 노대통령이 부산시장 선거에 나가게 된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이기택 쪽에서 황백현이라고 무명의 후보를 낸 겁니다. 경선에서 당시 노의원이 겨우겨우 이긴 겁니다. 한 사오십표 차이로 이긴거 같은데, 그 때 돌아가신 손태인의원이라고 있었는데, 손태인 의원하고 저하고 말이 좀 통하던 사이였던 겁니다. 그 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황백현이라는 사람을 공천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손태인의원한테 얘기해서 무조건 노무현을 밀자, 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제 지역구하고 손의원 지역구하고 모두 노무현을 지지함으로써 겨우겨우 부산시장 후보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게 하나 큰 빚이죠.
그 다음이 방금 전에 얘기했던 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울 종로로 가면서 제가 지역구 맡아 준 게 또 하나의 빚이고요.
세 번째는 노 전 대통령의 책, "여보 날 좀 도와줘"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92년 최고위원 선거 하는데, 저는 92년 대선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직접 모시고 전국 캠페인을 했어요. 이걸로 동교동계나 호남에서 저한테 무척 고마워 했었다는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 본인은 물론이고요. 그러니 그 쪽의 지지를 아주 많이 받았던 시점이죠.
거기다가 이기택 계에서는 제가 2인자에요. 결국 당시 언론에서도 민주당 최고위원 선거 하게 되면 전부다 김정길이가 일등을 할 거라고 예측을 했었죠. 동교동 호남계에서도 밀고, 이기택 계에서도 밀고, 이러니 당연히 일등이죠. 모든 최고위원 후보들이 전부다 나랑 손잡길 원했었어요.
최고위원 선거는 네표 찍기입니다. 그 때 노 전 대통령이 저한테 와서 또 상의를 한 겁니다. 김 최고위원님, 제가 최고위원을 한번 해 봐야 겠으니 좀 도와달라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승낙을 하고 같이 나간 겁니다. 그렇게 시작이 되었는데 각 시도를 다니면서 합동 연설회를 하는데, 제가 뭐라고 연설을 하고 다녔냐면, 이랬어요.
여러분, 첫 번 한 표는 동교동계인 권노갑 의원을 찍어 주시고, 두 번째 표는 저와 같이 영남에서 고생하는 노무현 의원을 찍어 주십시오. 그리고 세 번째 표는 저한테 주십시오, 뭐 이러면서 아주 낭만적으로 선거운동을 한거죠. 아무리 네표 찍기라고 해도 세 번째로는 부탁을 해 둬야 나도 찍어 주지, 네 번째로 부탁하면 여차하면 밀리잖아요.
물 : 다른 분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대신 해 주신 거네요.
김 : 그런 셈이죠. 그러는 중에 노 전 대통령은 선거운동을 어떻게 했냐면, 광주 호남쪽에 가서, 그 쪽에 아무래도 김정길 표가 많으니까, 김정길 의원은 어떻게 해도 당선이 될테니, 저를 좀 찍어 주세요 하고 연설을 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동교동계에서도 그렇고 호남도 그렇고 이기택 계도 그렇고, 맞다, 어차피 김정길이야 우리가 안 찍어도 당선이 될거니까 고생하던 노무현을 찍어 줘야 된다, 뭐 이런 분위기가 생긴 겁니다.
결과를 까보니 예상밖으로 저는 떨어지고 그 분은 당선이 된거에요. 그래서 그 책에도 보면, 나는 김정길 의원의 낙선을 딛고 최고위원에 당선이 되었다, 라는 식으로 적히게 된 겁니다. 이거 저한테 빚진 거 맞죠.
물 : 그 빚은 이제 평생 못 받으시겠군요.
김 : 그렇겠죠.
그 때, 부산에서 두 번 떨어지고 종로로 갈 때, 저라고 왜 서울로 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생각이 들었어요. 3당 야합 할 때, 딱 둘만 남아서 싸우기로 했는데, 선거 한 두번 하고 둘다 서울로 도망가 버리면, 이건 정말로 좀 창피한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 하나라도 좀 남아서 싸움을 계속 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을 해서 양보는 양보대로 하고, 저는 남아서 계속 바보 같은 싸움을 계속 한 겁니다. 아마 만약에 제가 서울로 갔다면 노 전 대통령이 남아서 제가 해왔던 싸움을 계속 했을 수도 있겠죠.
어찌 했던 간에 요즘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역구도 옮기고 심지어 정당도 옮기고 이리저리 이익을 좇아 너무나 가볍게 처신을 하는 세상에서 누군가 한 두명은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어찌되었거나 결국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바보의 칭호를 받게 된거고, 이십일년 동안 국회의원 선거 다섯 번 낙방도 모잘라서 부산시장 선거까지 나가 또 떨어진 저는 왕바보 소리를 듣게 된 겁니다. 후회는 없어요.
- 3당 야합을 반대한 이유
물 : 얘기를 좀더 진전시켜서 꼭 묻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3당 합당을 반대하면서 남으신 건데요, 이런 일은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 피해를 보게 되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자신의 내부에 변화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김 : 그렇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만 해도 군정종식을 약속한 거고, 59명의 국회의원 모두가 야당 역할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국민들에 의해 당선된 거 아닙니까? 한 정당의 국회의원들 모두가, 몽땅, 야당을 버리고 여당으로 가겠다고 하는 거, 이것은 치욕의 역사입니다.
또한 어느 시대고 그 시대의 양심을 지키는 소수는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소수일 수 밖에 없어요.
조선시대를 봐도, 생육신 사육신 같은 분들은 왜 그랬겠습니까?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만 하면 누구보다도 더 영화를 누렸을 사람들이 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자손들까지도 다 죽임을 당하고 왜 그랬겠어요? 그들에게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당시 시대의 양심이 있었고 그 양심을 지킨 겁니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그들을 위인으로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일제 때도 마찬가지죠. 천황폐하 만세만 부르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것을 거부한 소수가 있었기에 시대의 양심이 지켜진 겁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양심을 지킨 겁니다.
광주도 마찬가지에요.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겁니다. 그 양심은 민주주의였죠.
3당 합당 당시에, 그렇게 몰려가는 59명 중에 그래도 한 두명 양심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 역사를 남겨야 하는 겁니다. 국회의원 한 두번 더 하는게 옳은 일이냐, 국회의원 한번 못하게 되더라도 그 시대의 양심을 지키는 게 중요한 것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한 겁니다.
저는 고향 선배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 해도, 대통령 김영삼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 보다는 김영삼의 이름 석자가 훌륭한 이름으로 기록되는 게 더 중요한 거라고 봅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마르코스가 대통령을 했지만 역사가 그 이름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비록 대통령은 못했지만 김구 선생의 이름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한 거에요.
그래서 난 반대를 한 것이고,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지금이야 자식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손자, 그 아래의 후손들이 저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을 할 것인지, 국회의원도 좀 하고 그런 사람이었는데, 시대의 양심을 지켰던 사람이다, 라고 기억을 해 주는 게 더욱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 때 국민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국회의원 하려고 따라다닌 걸로 기억이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한 덕분에 국회의원도 못하게 되고 피해를 본다 할 지라도 그게 훨씬 더 소중한 일이라는 거죠. 후손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일이고요.
거기다가 저는 부산시민들이 언젠가는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언젠가는 알아 줄 것이라고 믿어서 이십년간 싸워 오다가 이십년 동안 안 알아 주길래, 그러면서 친구이자 동지였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이제 대리만족이라도 했으니 이제 마무리 해도 되겠다고 맘을 먹었던 거죠. 그래서 이제부터 남은 인생은 정말로 가족들에게 소홀히 한거 사과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책도 쓰고 농사도 좀 짓고 한다고 약속했고, 밀양에 텃밭도 마련하고 집 설계까지 다 해놨던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거에요.
그 냥반이 그렇게 되시는 바람에 이제 또 다시 시작된 겁니다. 저도 아주 힘들어 죽겠어요.
이 과정에서 문재인 비서실장하고 얘기도 많이 했어요. 정치 좀 안하려고, 문재인 실장한테 부산시장 출마하시라고, 그러면 내가 선거대책본부장도 다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설득을 했더니, 오히려 저보고 이럽니다. 장관님 무슨 소리시냐고, 장관님은 노무현 대통령하고 똑같이 정치를 해 왔고, 지역주의하고 이십년이 넘게 싸워 왔고, 그걸 부산시민들이 다 아는데, 저는 정치를 안 해온 사람 아니냐고, 그러면서 오히려 저보고 하라는 거에요. 그렇게 저는 문실장한테 하시라고 그러고, 문실장은 저한테 하라고 그러고, 그러다가 결국 그렇게 임박해서 결정이 되어 가지고 제가 부산 시장 선거에 참여한 겁니다. 공식 선거운동을 23일밖에 못했어요.
- 문재인 비서실장
물 : 이 부분은 진짜 여쭤보기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솔직히 여쭤 봅니다. 문재인 비서실장님하고 대선 문제로 진지하게 얘기해 보셨지 않습니까? 어떻게 되는 건가요?
김 : 실제로 여러차례 얘기를 했어요. 저나 문실장님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다 같이 삼십년 넘게 함께 활동해온 아주 오래된 친구들입니다. 서로 쳐다만 봐도 다 속내를 이해할 정도에요. 제가 보기에는, 문재인 비서실장님은 정치를 안하실 겁니다. 물론 상황이 어떻게 바뀌고 주변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금 현재로는 안하실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건강도 문제가 된다고 하시더군요.
물 : 그래도 문실장님에 대해서 너무 강하게 기대를 하시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요.
김 : 부산시장 선거 끝나고도 많이 얘기를 했어요. 워낙에 본인이 자기 소신이 뚜렷하신 분이고 정치에 직접 참여는 안 하실 것 같습니다. 물론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른다고 얘길 해야겠죠.
- 다양한 분야의 경험을 섭렵하다
물 :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김정길 전 장관님의 전문적인 경험분야에 대한 얘기를 좀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인터뷰 전에 살펴 봤더니, 놀랄 만큼 다양한 경험을 하셨더라구요. 일단 국회의원 두 번, 그러니까 의회 경험이 있으시고요, 거기에 장관, 그것도 제일 중요한 행자부 초대 장관을 하셨습니다. 또한, 행정 전 분야를 조망할 수 있는 청와대 정무수석도 역임하셨고, 대한 체육회장하고 KOC(대한민국 올림픽 위원회)도 하셨고, 그런 거 하시면서 외교적 역할도 수행하셨더군요. 대북 외교 차원에서도 김정일 위원장하고 맞대면 하셨던 소위 "김정길의 굴욕" 사건도 있었고..
사법부 빼고는 거의 모든 분야의 행정 경험을 가지신 건데, 이런 경험을 하신 분은 진짜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 그것 뿐이 아니고, 중소 기업도 하고 장사도 많이 했습니다. 이것도 꽤 큰 경험이었어요. 중소기업 하면서 매번 돌아오는 어음 막으려고 밤잠 못자고 노심초사도 해보고, 장사한다고 시장통에 나가서 배추 사다가 트럭에 싣고 큰 식당 찾아 다니면서 납품도 해보고, 이런 경험을 가진 정치인이 흔하겠어요? 별로 없을 겁니다.
사실, 모 월간지에서 저에 대한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월간조선 김민배 기자의 글이다.) 이달의 인물 뭐 이런 코너에 실린 기사였는데, 김정길 장관이 행자부 장관을 하면서 두가지 일화를 남겼다 라는 거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행정 주무 장관으로 공무원을 질타하는 "공무원은 상전이 아니다" 라는 책을 썼다는 거였습니다. 그 책이 11주 연속 베스트셀러로 올라가서 오만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또 하나는 제가 장관 재직기간 중에 제 동생을 구속시킨 적이 있습니다. 제 동생이 작은 공장을 하다가 부도를 냈어요. 일억 얼마 정도 부도였는데 경제사범인거죠. 그래서 도망을 다니고 수배가 되었다가 불심검문에 걸린거에요. 경찰이 불심검문으로 잡고 보니까, 장관 동생인거에요. 모르고 잡은 거죠.
그 때 정기국회 와서 있었던 상황인데 비서가 들어와서 얘길 하는거에요. 장관님 큰일 났습니다. 하면서 동생분이 어딘가에 경찰서에 잡혀 있다는 겁니다. 이걸 어째야 할까요? 하고 물어보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고 나무랐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법대로 하는 거지 그런 걸 왜 나한테 묻냐고 한겁니다.
그게 보도도 안되다가 며칠 후에 보도가 좀 되었었죠. 장관 동생이 구속되다.. 이런걸로. 아마 꽤 보기 드문 일이었을 겁니다. 현역 장관의 동생이니까요.
그게 집안에선 저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몹쓸 짓을 한 셈이 되는 겁니다. 무척 미안했지만 제 입장에선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지요.
(제대로 된 공직 생활을 한다면, 거의 대부분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게는 나쁜 짓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당히 타협을 하면서 조금씩 망가져 가기 마련이다.
한 국가의 최고 장관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동생이 돈 일억을 못 막아 부도가 나는 상황에 빠졌음에도 아무런 도움도 못 줄뿐더러 수배 중에 구속당하는 상황에서조차 외면을 하게 된 것이다.
그냥 쉽게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란다. 만약 지금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각 개인의 친형이 정권의 실세인데 내가 돈 일억을 못 막아 범죄자가 되는 상황에서 매정하게 외면을 했다고 생각해 보시라. 아마 십중팔구 형제의 의를 끊겠다고 하게 될 것이다.
공직이라는 것, 공공에 봉사한다는 것, 그만큼 권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 무섭고 힘든 일이다.)
또 하나 기억나는 건 IMF 시절입니다. 그 때에 제가 장관이었는데 구조조정 하면서 공무원들 무수히 짤라 냈습니다. 제 손에 피 묻히면서 다 잘라낸 겁니다. 정말 가슴 아픈 기억이에요. 그래서 해직 공무원들이 우리 집 앞에 와서 항의 농성하고 막 그랬습니다. 그 분들 한분 한분은 모두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 아닙니까, 그런 일들이 참 힘들었어요. 그래도 은행도 감원하고 기업도 감원하고 다 그랬던 시절이니까요. 공무원이라고 다를 수가 없었죠. 그런데 그 시절에 외국에 출장갈 일이 있었습니다. 앨 고어 부통령 초청으로 워싱턴에 정부 핵심포럼에 가게 되었던 거에요.
장관은 의전이 있잖아요. 그 의전에 따르면 비즈니스석을 타게 되어 있는 겁니다. 호텔은 오성급 호텔 스위트룸을 쓰게 되어 있고. 그런데 제가 생각해보니, IMF로 전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고 내 손으로 공무원들을 그렇게 잘라내 놓고, 내가 장관이라고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던 거에요. 거기다가 일행 중에 교수분 들도 있고 한데, 그 분들은 삼등석에 타고 가고, 나 혼자 비즈니스석에 타고 가는 건 맘도 편치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삼등석으로 예약을 지시 한거에요. 이코노미 클래스인거죠.
그랬더니 대한항공 측에서 소동이 벌어진 겁니다.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다는 거죠. 장관이 삼등석을 예약하다니. 그래도 저는 그냥 삼등석 타고 다녔습니다. 해외에서도 그랬고, 호텔도 가급적이면 사성급, 삼성급으로 한단계씩 낮춰서 이용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절약을 했더니 한번 출장에 여비가 천팔백만원 정도가 절감이 되더군요. 그래서 그걸 반납을 하게 된거죠.
체육회장 할 때에도 핸드폰 사용요금 같은 것도 내가 사적으로 쓴 건 내가 냈습니다. 한번은 평창 유치 건으로 큐바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또 동생이 무슨 문제가 있었어요. 그래서 영 맘이 편치 않아서 국제 전화를 좀 했더니 요금이 백만원이 넘게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쓴거니까 내 돈으로 계산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체육회장을 임기를 못 채우고 사표를 냈잖습니까? 그 때 감사원 감사를 한다고 와서 한 일주일을 뒤졌습니다. 뭐라도 한건 걸리면 언론에 흘려서 망신을 주고 창피주고 모욕을 하려고. 아무리 뒤져도 하나도 안 나오니까, 결국 그냥 가더군요. 만약 그런 사소한 핸드폰 통신 요금 같은 것도 이 때 흠결로 걸릴 수도 있었을 거 아닙니까? 저는 최소한 공직자 윤리는 철저하게 지켜 왔다고 자부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와서 벌였던 많은 짓거리들, 그 중에서도 치졸하기 짝이 없던 전임자 모욕해서 쫓아내기 수법의 하나에 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나름대로 철저한 자기 관리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인 듯 하다. )
- 김정길의 굴욕 사건
물 : 그 체육회장 시절에, "김정길의 굴욕" 사건이 있잖습니까?
김 : 굴욕 혹은 과욕! (웃음)
이른바 김정길 굴욕 사건 당시의 화면
물 : 김정일 위원장하고 직접 대면하면서 뭐라고 막 얘기하신 거, 그게 미리 준비를 하신건가요? 즉흥적으로 벌어진 일인가요?
김 : 그게 어떻게 된거냐면, 저는 그 때 북경 올림픽에서 남북 단일팀 만드는 게 최대의 과제였어요. 그 자리는 뭐였냐면, 그게 환송 오찬 하는 자리였어요. 환송 오찬에서 노무현 대통령 부부하고 김정일 위원장하고 서서 와인 한잔씩 손에 들고 전부 인사하고 그러는 자리였어요.
그런데 남북 합의문에 보면, 단일팀 얘기는 없고 공동 응원단 얘기만 있어요. 공동 응원단이라면 단일팀을 전제로 공동 응원단이 있는 거지, 단일팀 없이 공동 응원단이라는 건 말이 안되는 거에요. 제 생각에요. 그래서 실무회담을 계속했는데 결론이 안 나왔고, 합의문에는 공동 응원단 얘기만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먼저 노무현 대통령에게 물었어요. 김정일 위원장 바로 옆에 있으니까 들으라고 한 겁니다. 제가, 아니 합의문에 보니까 단일팀 얘기는 없고, 공동 응원단 얘기만 있어요,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물어본 거에요.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어? 그거 난 단일팀을 전제로 한걸로 알고 있는데요, 합의서 쓰는데 단일팀을 전제로 쓴 걸로 알고 있어요, 하고 받아 주시더군요. 김정일 위원장 들으라고 한 소리 같습디다. 그래서 바로 옆에 김정일 위원장에게 갔지요.
자연스럽게 옆에서 귀를 쫑긋 하고 듣고 있던 위원장에게 간 겁니다. 그러면서 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위원장님, 저는 위원장님과 이름이 한자 밖에 안 다릅니다. 이러면서 농담을 던졌죠. 위원장님은 김정일이고 저는 김정길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합의문에 보니까 단일팀 얘기는 없고 공동 응원단 얘기만 있는데, 이게 단일팀을 전제로 한 겁니까? 아니면 공동 응원단만 하는 겁니까? 라고 물어 보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옆에서 거들어 주시더군요. 아, 나는 그거 단일팀을 전제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위원장님, 요구사항 다 들어 드릴테니까 우리 단일팀 한번 만듭시다,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하는 말이, 남한은 올림픽도 한번 하고 기량 차이가 너무 나서 단일팀은 안된다고 합디다, 그렇게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러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한번 더 재촉을 한 거에요. 이번에 북경 아니면 또 못하니까, 두 번 세 번 재촉을 했어요. 그러니까 약간 짜증을 내는거 같아요. 그래도 그냥 북한 스타일로, 위원장님만 결심하시면 됩니다, 결심을 좀 해 주세요. 뭐 이러고 조른 거죠.
물 : 그게 실무회담에서 완전히 결렬된 상황이었나요? 아니면 뭔가 정보 전달이 잘못 되었던 건가요?
김 : 사실 그걸 정확하게 확인을 하려는 거였어요. 사실 깨진 것도 아니고, 유보상태로 있다고 저는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합의문이 그렇게 나오니까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얘기를 꺼낸겁니다. 이게 만약 무슨 실무자들 보고가 잘못 되어 있는 상태였다면, 이렇게 하면 다시 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위원장의 의지를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요.
물 : 결국 위원장이 의지로 하기 싫었다는 걸로..
김 : 사실 그것은 모르겠어요. 뭐 현실은 결국 단일팀도 안되고, 공동 응원단도 실패하고 그렇게 되긴 했었죠. 참 아쉬운 일입니다.
물 : 올림픽 위원장 하실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나요?
김 : 많죠. 저는 어떤 일을 할 때, 가급적이면 큰 그림에서 이익이라면 제가 손해보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스토리가 참 많아요.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할 때, 당시 우리나라에서 저 혼자 IOC 위원 자격을 갖추고 있었어요. 이건희 위원이 IOC위원이었고요. 우리가 스포츠 십대 강국인데, 일본도 IOC 위원 자리를 두 개로 가지고 있고, 우리만 하나에요. 그래서 전에 김운용 위원도 있었고 한 자리를 더 가져올 수가 있었는데, 그 한자리에 들어갈 자격이 되는 사람은 저 하나였던 거죠. 그게 좀 힘듭니다. IOC 위원 추천도 있어야 되고 집행부에서 경력도 심사하고 그래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제가 IOC 위원을 하게 될 수도 있었는데, 우리 쪽에서, 정부도 그렇고 다들 평창 유치 건 때문에 신경을 무척 쓰더라고요. 그러니까 IOC 위원 자리를 가져오는 것 하고 평창 유치하는 거하고 다 우리나라가 뭔가를 가져오는 거 아닙니까? 그걸 두가지 다 하기는 힘들다고 본거죠.
그래서 제가 생각해보니까, 제가 IOC 위원이 되는 것은 저의 개인적인 명예고, 평창 올림픽 유치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하는 일 아닙니까? 저는 그럴 때 제 개인적인 것 보다는 국가적인 이익이 중요하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제가 IOC 위원 되는 것을 포기하고 평창 유치를 위해 노력을 하게 된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제가 손해를 보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성격인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IOC 위원도 안되고, 평창 유치도 실패하고 그렇게 되긴 했었죠.
물 :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이 우선이다?
김 : 부산대 총학생회장 때도 그랬고, 중학교 3학년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웃음)...
물 : 언론을 뒤져보다 보니까 태권도 협회 문제도 자주 거론되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김 : 무슨 일은 아니고, 태권도 협회가 파벌이 참 심하고 그래요. 제가 열린우리당 상임집행위원하던 때였는데, 김운용 회장이 태권도 협회 회장 하다가 구속되어서 그만두고, 구천서 회장이 되었는데 또 무슨 사건으로 구석되고 그러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권도가 전직 회장이 둘이나 구속되어서 그만두고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진거죠. 그래서 협회 사람들이 우리에게 온 겁니다. 여당의 실세를 모시겠다는 의미에서 나하고 김원기 국회의장, 이강철, 원혜영 이렇게 네 사람 중에서 한명을 회장으로 데려가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야 좀 정리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태권도계가 또 영남하고 호남하고 갈려 있는 겁니다. 지역구도 였던거죠. 이 때, 거기에 사무총장 하던 양준방 사무총장이라고 있었고, 용인대학교 태권도 교수였죠. 삼성 에스원 감독하던 사람하고 몇이 와서, 전체 태권도 인들하고 얘기를 해보니까 저에 대한 선호도가 제일 높더라는 거에요. 저는 영남하고 호남에서 다 반대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영남이 좋아하면 호남이 싫어하고 호남이 좋아하면 영남이 싫어한다는 거였지요. 그러니까 내보고 와서 좀 혼란을 정리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출마해주면, 태권도인 중에서 출마한 충남 태권도 협회장 출신인 이종승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분으로는 안정시키기 어려우니까 나오라는 거였습니다. 제가 출마하면 그 분은 사퇴할 거라는 얘기도 있었죠. 그런데 막상 출마를 하니까 사퇴를 안해요. 결국 선거까지 가서 일차투표에서 12:12로 동표, 2차 투표로 가서도 또 동표, 이렇게 되는 바람에 회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그 분이 사퇴하고 저를 지지한 뒤에 상근 부회장이나 수석 부회장을 하시는 걸로 결정이 된 겁니다.
그러다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니까, 태권도 협회 내부에서도 정권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를 싫어하기 시작하더라는 거죠. 안 그래도 대한 체육회장도 사퇴하는 마당이라 사퇴하려고 생각 했던 건데 시간이 좀 걸린 이유는 그거였습니다.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퇴출될 위기에 있었고, 또 체육회 내부에서 제가 자정운동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체육회 쪽이 파벌도 있고, 비리도 있고, 특히 입시 관련해서 비리가 많았고, 폭력 문제도 많았고, 그래서 추진하던 자정 운동이 있었고 그게 진행중 이었던 겁니다.
결국 반대편에서 자꾸 뭐라 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걸 다 정리하고, 체육회장을 사퇴하면서 동시에 태권도 협회장도 사퇴하게 된 겁니다.
물 : 거기서도 뭔가를 바로잡으려고 노력을 하셨군요.
김 : 아마 체육계에서 체육회와 태권도 협회가 생기고 나서 자체적인 자정운동으로는 최초였을 겁니다. 그 때 어느 정도 였냐면, 제 손으로 직접 태권도 협회 전무를 검찰에 고발하기까지 했었습니다.
- 부산 시장 선거
물 :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셨군요. 그러다가 광역 단체장 선거까지 진출하게 되시는데, 부산 시장 선거때 일을 좀 얘기해 주시죠.
김 : 그건 저 냥반이 원흉이에요. (웃음)..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관 출신인 노혜경씨가 김정길 전 장관과 대학 선후배 사이이면서, 지난 지방선거에서 김정길 전 장관을 설득해서 부산 시장 선거에 출마시키고 캠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은 꽤 많이 알려진 얘기이다.)
물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건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잖습니까? 그렇게 높은 득표율을 보인 것도 매우 특이하고, 그렇게 많이 득표하고서도 또 떨어진 이유. 이런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김 : 주위에서는 제가 만약 김두관 지사처럼 무소속으로 출마했다면 당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시골보다 도시가 오히려 민주당에 대한 거부감이 더 강하거든요.
사실은요, 제가 이십년이 넘게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 알았는데요, 집사람이 이번 선거때 성당에서 어떤 여성분을 한분 만났었다는 겁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사모님, 저는 김장관님 너무너무 존경하고 꼭 찍어 드리고 싶은데 투표장에만 들어가면 민주당 이름만 보면 찍을 수가 없어서 못 찍었어요, 하면서 이번에는 꼭 약속을 드리겠는데, 절대 당 이름을 안보고, 아예 손으로 가리고 김장관에게 투표하겠습니다, 하면서 약속을 하더라는 거에요.
세상에, 별 여자가 다 있다 싶었는데, 선거가 끝나고 더 충격을 받았어요. 두 세달 전의 일인데, 해운대에서 고등학교 한해 선배에요. 부산에서 사업하는 선배인데, 동아고 총동문회 회장도 제 바로 앞에 한번 했고, 제가 그걸 이어서 회장을 했었고, 사석에서는 아주 친해서 형 동생하는 사이입니다. 고등학교 선후배고.
그런 분이 해운대에서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얘길 하는데, 어이, 김장관, 내가 이번에 부산 시장 선거 하면서 투표용지 받아들고 일분이상 고민을 했다 라는 거에요. 나랑 그렇게 친한 사람도 투표소 들어가서 나를 찍는데, 일분이상 고민을 해야 된다는 얘기에요. 오로지 민주당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러니 보통의 부산 시민들은 어떻겠어요. 민주당은 김대중당, 민주당은 전라도당, 왜 부산에 전라도 사람이 와서 시장을 하고 국회의원을 해야 하느냐, 이런 사고방식이 아예 각인이 되어 있는 거에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44.6%의 득표를 했습니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 시장선거에 출마했을 때, 36.7% 를 득표했다. 2002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과정에서조차 부산에서의 득표율은 29.9%에 그쳤다. 사실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저 수치는 참으로 암담한 수치일 수도 있다. 그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이 사람은 무려 44.6%의 득표를 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감정, 지역주의가 수그러들고 있다는 증거일까? 김 전장관의 해석은 좀 다르다.)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잘나서가 절대 아니에요. 이명박 대통령이 도와준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과 허남식 부산 시장에 대한 거부감, 이게 반사 이익으로 저한테 돌아온 겁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야권단일화였습니다. 야권 단일화 없이는 도저히 저런 득표율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이유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1주기 덕택을 본 겁니다. 아무리 부산 사람들이라 해도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거든요.
이 세가지 원인이 모두 작용하면서 저런 득표율이 나온거죠. 사실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40% 이상의 득표를 한다, 이런 것은 완전히 무슨 마의 벽 같은 걸로 인식이 되고 있었어요. 그게 처음으로 깨진 겁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는데, 부산 사람들이 노무현과 저에 대한 선호도가 약간 다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젊은 사람들, 극빈층, 노동자, 이런 계층에서 지지도가 높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좀 지식인 계층, 중산층, 이런 쪽에서 좀 지지율이 높아요.
그러니까 노 전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36.7%의 전통적인 지지자들은 모두 다 오고, 거기에 저만이 가지고 있던 지지율이 더해지고, 뭐 이렇게 되었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 : 제가 진짜 궁금한 것은 아주 작은 양이라 해도, 부산 시민들의 심리가 민주당 이름만 봐도 손이 다른 데로 가 버리는 그런 각인, 이런 현상이 조금씩이라도 줄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 : 확실히 줄고 있죠. 물론 그게 큰 폭으로 줄진 않았습니다. 또 민주당에 대한 거부감이 줄었다기 보다는 한나라당에 대한 거부감이 늘어난 것일 수도 있어요. 워낙에 엉망으로 망치고 있으니까요. 실제로 제가 놀랐던 것 중의 하나가 선거 끝난 뒤에 만났던 많은 부산 분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택시를 타도 그렇고, 만나게 된 많은 분들이 이런 얘길 합니다. 확실히 제가 이렇게 높은 득표를 한 것에 대해 부산 시민들 스스로가 놀라고 있다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안 될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많은 분들이 아이고, 장관님, 표가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럽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난 안될 줄 알고 기권 했는데, 가서 찍을 걸 그랬다, 이러기도 하고, 또 안될 줄 알고 그냥 한나라당 찍었는데 이렇게 표가 많이 나올 줄 알았으면 찍어 드렸어야 되는 건데, 뭐 이런 얘기를 무수히 들었습니다.
결국 한나라당 정권에 대한 거부감은 아주 높은데, 그걸 효과적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죠. 이거 진짜 쪽팔린 얘깁니다. 우리가 잘해서 이득을 보는게 아니라 상대방이 못해서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는 거, 이거 하루 속히 바뀌어야 될 문제입니다.
(실제로 나이 육십을 훌쩍 넘긴 노련한 정치인의 입에서 쪽팔린다는 어휘가 튀어 나왔다. 이거 정말 쪽팔린다는 뜻이다. )
- 병역문제와 전과 기록
물 : 이제 좀 부담스러운 얘기를 할 차례입니다. 최초에 총학생회장 때에 구속되었던 사건은 구속적부심에서 그냥 풀려나시는 걸로 마무리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범죄 전과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먼저, 군대문제부터 얘기해 주시죠. 면제를 받으신 걸로 되어 있는데, 군대를 왜 안가셨습니까?
김 : 안간게 아니라 못 간거에요. 66년도인가 68년도인가 그 때쯤에 군대를 가려고 신검을 받았죠. 그 때 갑종 판정을 받고 창원에 있는 39사단에 입소를 했었어요. 근데 제가 거제도 출신이라 수영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귀에 물이 들어가 염증이 생긴걸 모르고 그걸 또 막 쑤셨다고요. 그러다 보니 이게 만성 중이염으로 발전해서 고생을 한거죠.
창원 훈련소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그게 문제가 된 겁니다. 결국 귀가조치를 받았죠. 그런 상태에서 다시 신검을 받게 되었는데, 병종이 나온거죠. 이러면 면제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시절은 학생운동 하다가 잡히면, 무조건 군대 보내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학생회장 하다가 잡혀서 또 끌려가서 신검을 다시 받았어요. 무조건 학생운동 하던 놈들은 잡아다가 최전방 보내서 고생 시키고 그러던 시절이니까.
그렇게 수갑차고 가서 신검을 또 다시 받은 거에요. 검사실에 수갑차고 수의입고 가서 부산대 이비인후과 의사를 불러다가 다시 검사를 받은거죠. 그랬는데 의사가 보더니 만성 중이염으로 고막이 파열 되었다가 재생된 흔적이 있다, 하는 거에요. 검사가 막 혹시 면제 대상이 안되는데 면제된거 아니냐고 윽박 지르고 그랬음에도 병종으로 다시 확인된거죠. 그 검사 아직도 기억합니다. 최근에 동두천 어디에 있다고 그러던데..
아직도 귀가 좀 안좋습니다. 코도 알러지가 좀 있고, 다 연관된 거겠죠. 장관 시절에 또 귀가 도졌습니다. 중이염이 또 생긴거죠. 그 때 세브란스에서 한달 정도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한테 물어봤습니다. 혹시 과거에 만성 중이염이 걸린 적이 있었는데, 그거랑 관련이 있는가 하고 말이죠. 그런데 별 관련은 없다 하더군요. 어찌 되었거나 지금도 귀가 좀 안좋긴 해요.
물 : 그럼 청력에도 지장이 좀 있으십니까?
김 : 그 정도는 아니고, 말소리 같은 걸 가끔 잘 못알아 듣는 정도지, 생활에 불편하거나 한 점은 없어요.
물 : 그러니까 만성 중이염으로 인해 군대는 면제를 받으신 거군요.
김 : 그렇죠. 신검을 세 번씩이나 받았고, 최종적으로는 검사 앞에서 수갑차고 받아서 확인 받은 겁니다.
물 : 2000년도에는 선거법 위반 사실이 있으시군요.
김 : 선거법 위반은 이거 참 말도 안되는 일인데, 이 때 변론을 담당하신 분이 또 문재인 비서실장이었어요. 질긴 인연이죠. 이 선거법 위반 내용이 뭐냐면, 선거 홍보물에 내 홍보내용이 많다는 거였어요. 이게 선관위 유권 해석이 후보에 대한 홍보를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너무 많다는 거에요. 이 너무 많다는 기준이 없어요.
또 웃기는 건, 이걸 가지고 1심에서 80만원 벌금을 받았어요. 선관위 유권해석에서도 무죄였는데. 문재인 변호사도 무죄를 주장했었고요. 그런데 2심에서는 오히려 벌금액수가 늘어났습니다. 원래 1심 2심 올라가면서 형량은 같거나 줄어드는게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2심에서는 150만원의 벌금형을 받은 겁니다. 사실 이게 액수 차이는 작지만 굉장히 큰 차이잖아요.
제 생각에는 이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가, 소위 말하는 향토판사, 부산에서만 판사를 계속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 지역감정이 좀 심한 경우였거나, 혹은 상대쪽하고 관련이 있거나, 아니라면 뭔가 괘씸죄가 약간 적용이 된게 아닌가 싶어요. 전에 장관도 했고 그래서 그런건 아니지만 판사를 찾아 뵙지도 않고 좀 소극적으로 대응을 한거죠. 문재인 변호사도 1심에 80만원 선고가 나오니까 피선거권 박탈하고 관계가 없으니 2심 때에는 별 신경도 안 쓴거죠. 그러니 다분히 감정적인 판결이었다는 겁니다. 제 추측이에요.
결국 2심선고를 받아 들이고 그에 따른 피해를 보는 걸로 마무리 되었던 사건입니다. 그걸로 인해 피선거권 제한이 되어 버렸어요. 정치인에게는 사형선고지 뭡니까. 그게 전과 한 개 생기게 된 배경입니다.
다음으로 정치자금법 위반문제는 이런 겁니다.
제가 피선거권도 박탈되고 공식적으로는 선거운동을 할 수가 없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앞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2002년 대선은 다가오고, 그래서 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돕고 다니던 때였어요.
그 때, 부산에 가니까 문재인 실장이 선거대책위원장인가 하고 있고, 최도술이라고 청와대 총무 비서관 하던 사람인데, 경리 책임자로 있더라는 겁니다. 제가 내려가니까 이 사람이 하는 얘기가, 장관님, 선거가 시작되었는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장관님이 부산에 기업인들도 많이 아시고 하니 좀 도와 주셔야 되겠습니다, 하더라구요.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나? 하니까, 미니멈 2-3억은 있어야 되겠다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해 보겠다고 나선 겁니다. 실제로 캠프에 돈이 하나도 없어요. 중앙에서 내려오는 돈이라고 해봐야 조족지혈이야.
그래서 전에 장관 하고 국회의원 할 때 만나고 알고 그랬으니까, 부산 모 기업의 회장을 찾아 갔어요. 그런데 안 만나주고 피하는거야. 그 때야 다들 이회창 후보가 되는 걸로 당연하게 알고 있던 시절이고 노무현 후보는 당연히 떨어지는 걸로 되어 있던 거에요. 거기다가 이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 돕다가 저 쪽에서 협박도 받고 막 그랬나 봐요.
그렇게 피하다가 제가 자꾸 연락을 하니까, 결국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조용히 만났어요. 만나서 부탁을 했죠. 캠프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그러는데, 좀 도와 달라고. 그랬더니 막 죽는 소릴 해요. 전에 김대중 대통령 돕다가 저 쪽에서 막 험한 소리도 하고 괴롭혀서 난처하다 이거죠. 그래도 내가 자꾸 부탁을 하니까, 준단 얘기는 안하고 뭐 알아 보겠다, 의논을 해 보겠다 이런 식으로 자꾸 피해요. 그러더니 소식이 없어.
일주일이 지나고 연락이 없어서 할 수없이 제 친구들을 찾아 갔어요. 사업을 크게 하는 친구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또 노무현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랑 친한 줄 알면서도..
그래서 결국 그 중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서 부탁을 했죠. 기업의 정치 후원금이 한도가 일억이니까, 일억씩만 좀 해 달라고. 공식 후원금으로 영수증도 다 끊어준다 이런거죠. 그랬더니 처음에 딱 거절하더라구요. 자기는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출마한 거라 생각하고 좀 도와달라, 내를 보고 좀 해달라, 이런거에요. 왜 그렇게 무리하게 부탁을 했냐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돈이라도 좀 내야 표도 좀 도와줄 거 같은 거에요. 제 느낌이.. 돈을 안주면 표도 안 줄거라 말입니다. 최소한 이 사람들을 우리편으로 끌어 들이려면 돈이라도 좀 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 거에요.
그렇게 졸라서 결국 급한 불은 좀 끈거에요. 받아 낸거죠. 그러고 났는데 한 일주일 지나서 상공회의소 회장한테 연락이 왔어요. 자기는 무슨 중국에를 가는데, 누구를 만나면 아마 돈을 줄거다 그러더라구요. 가봤더니 이억을 주는게 아니라 한 칠천만원을 주더라구요. 그러고 나선 뭐 이천만원, 삼천만원 이렇게 찔끔 찔끔 주는 거에요.
그러더니 막판에 이제 막 여론이 바뀌어서 노무현이 당선될지도 모른다 하는 분위기가 되니까, 외국에서 돌아왔다면서 와가지고서는 마지막 몇천만원을 주면서 명함만한 쪽지를 주면서 거기 보니까 누가 얼마, 누가 얼마 이런 식으로 적혀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여기 적힌 내용대로 영수증을 어떻게 끊어달라 그럴지 모르겠는데 각자 원하는 대로 끊어줘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이 돈을 다 최도술씨에게 가져다 줬으니까 이 명단을 최도술에게 가져다 줄거고, 영수증은 최도술에게 얘기하면 원하는대로 끊어 줄거다, 이렇게 얘기를 한거죠. 그러고 나서 선거 때문에 바빠서 서울로 또 올라가고 그러는 와중에 내가 이 명단을 최도술에게 가져다 주질 않은 겁니다. 호주머니에 그대로 들어 있더라고.
서울와서 보니까 선거는 끝났는데 이게 그대로 있는거야. 그래서 바로 다시 내려가서 최도술에게 이 명단을 주면서 연락 왔더냐고 물어 봤더니 아직 연락이 안 왔다는 거에요. 그래서 다행이다 싶어서 회장한테 연락오면 이대로 영수증을 끊어주라고 그런거죠.
근데 막상 선거가 끝나고 나니까, 이 사람들이 그 돈 꼴랑 이억가지고 영수증 끊어달라 뭐해라 하기가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그래서 영수증을 끊어 달라고 안한거에요.
물 : 그래서 영수증이 발급이 안된거군요.
김 : 그렇죠. 그러다가 그 뒤로 이제 한나라당 차떼기 뭐 이런거 조사하면서, 구색을 맞추려고 여당 쪽에 거물급 정치인을 하나 걸려고 그랬던거 같습니다.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최도술을 조사하는데, 이게 문제가 된 겁니다.
그래서 이 쪽에서는 영수증을 끊어 달라 그랬더니 그런 얘기 못 들었다고 그러고, 최도술 쪽에서는 그런 얘기 들은 적 없다고 그러고.
이건 좀 확실하지는 않지만, 검찰의 의도가 보이는 거죠. 결국 재판 과정에서 밝혀질 줄 알았는데, 끝까지 못 들었다고 주장을 하더군요. 결국 삼천만원 벌금을 내게 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전과가 한 개 더 늘었죠.
나중에 노 대통령이 초청해서, 부부 같이 청와대로 만찬을 하러 들어갔더니, 허허~ 웃으시면서 벌금 낼 돈은 있습니까? 하시더군요. 그래서 걱정하지 마시라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된거에요.
결국 그 돈 이억 받아서 한푼도 안쓰고 다 가져다 줬는데, 최도술씨가 오히려 그랬다니까요. 장관님도 돈좀 쓰셔야 되지 않습니까, 해서 내 걱정은 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따로 각 지구당 돌면서 도와주고 그랬던 겁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더군요.
물 : 참 고생도 많이 하셨군요. 이제 살아오신 얘기는 어느정도는 들은 것 같습니다.
- 정치인 김정길
물 : 이제 좀더 정치적인 얘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최초 정치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하신거고, 그러다가 3당합당을 기점으로 정치적 운명이 확 바뀐 건데 그 과정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 주시죠.
김 : 그러니까 저는 3김을 모두 함께 가까이서 상대해본 경험이 있는 보기드문 사람이에요.
물 : 아니, 김종필씨도 같이하셨다는 겁니까?
김 : 내가 장관 시절에 대통령 의전담당 주무장관 아뇨? 당시 대통령은 김대중이었지만 총리가 김종필씨 아닙니까? 행자부에서 대통령 의전 하면서 총리 의전도 같이 하니까.
물 : 아, 그 시절에 그렇게 된거 였군요.
김 : 그 3김씨를 가까이서 보면 다 인간적인 면모들은 있어요. 김종필씨도 가까이서 보면 장점도 있고 따뜻한 정도 있는 사람입니다. 유머감각도 있고. 그런 분입니다.
김영삼 대통령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보면 민주화 관련 큰 기여가 있잖아요. 3당 합당하면서 갈라지게 된건데, 같은 고향 아닙니까? 인간적으로는 고향 선배고, 저한테 정치적으로 중요한 심부름도 많이 시켜주고 저를 챙겨줬습니다. 인간적으로 미안한 마음도 있어요.
물 : 고향이 얼마나 떨어져 있었습니까?
김 : 오리 사이였어요. 거제도 장목면 이죠. 김영삼 대통령 아버님하고 저희 아버님하고 친한 사이였습니다. 친한 친구사이고, 김영삼 대통령 아버님이 어디 갔다 오실 때에는 우리집에 들러서 소주 한잔 하고 가시고 그러던 사이에요. 저도 김영삼 대통령 아버님한테 아버님 아버님 하던 사이고요.
김영삼 대통령은 외동이에요. 사촌도 있었는데, 그 사람도 외동이라 둘이 형제처럼 지냈죠. 지금은 돌아가신 분인데.. 제가 처음 국회의원 될 때, 이 사람이 제 사실상 사무장이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친한 사이라는 거죠.
그런데 제가 국회의원 된 건 김영삼 전 대통령 덕분은 아닙니다. 신민당 공천을 못 받아서 민한당으로 나갔었으니까요. 그 때 저한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역구 나가지 말고 비례대표 하라는 걸 제가 거절하고 지역구 나간 거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내려와서 박찬종씨 선거운동 하고, 그 사촌은 제 선거운동하고 그랬던 겁니다.
더구나 제가 나온 장목초등학교에서 유일한 정치인 선후배였습니다. 딱 국회의원 둘이 있었는데 한분은 김영삼, 또 한 사람이 김정길이었던 거죠. 그런데 내가 그런 김영삼을 안 따라간거에요.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이 책에도 쓴 겁니다. 자기는 재야운동 했었고 변호사 자격증도 있고 먹고 살 수는 있는데, 김정길은 국회의원 안하면 진짜 실업자 되는 건데 안 따라간 건 진짜 존경 할만 하고 좋아한다라고 쓰신 거에요.
물 : 그런 상황에서 또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김정길 전 장관이 "최후의 동교동계"라고 평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건 어떻게 봐야 할까요?
김 : 그렇게 볼 수도 있지요. 굳이 분류하자면,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장관을 하고 정무수석을 했으니까 그렇게 분류해도 틀린 건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도 앞장을 섰었으니까. 그런 점에서는 김대중의 사람일 수 있지요. 동교동계일 수도 있고.
또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저는 "노무현의 사람"은 아니에요. 친노는 맞고,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이자 동지이지만, 참여정부에서는 임명을 받아 뭔가를 한 적이 없었어요. 그런 점에서는 노무현의 사람으로 분류될 수는 없지요. 문재인이나 이광재나 안희정이나 김두관은 모두 노무현의 사람이 맞지만 저는 그렇게 분류되지는 않겠죠.
사실 또 노무현 대통령 선거에서 첨부터 돕지를 못했습니다. 당시 피선거권도 박탈 당해서 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솔직히 말해서는 "되겠나?"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웃음)..
(이 대목은 읽기에 따라 매우 묘한 뉘앙스를 가질 수 있는 부분인 듯 하다.
김정길 전 장관은 분명히 김영삼 밑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3당 야합 이후로 김영삼과 결별하게 되고, 그 이후에는 김대중의 사람이 된 것이다. 이 부분은 스스로 인정한 부분이기도 하며 누가 봐도 명백한 국민의 정부 시절 각료 출신임으로 입증이 된다.
그리고 참여정부에서는 행정부의 수장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아무런 임명직도 받지 않는다. 실제로 대한 체육회 등 정치권 외곽으로 돌면서 참여정부에 대한 외곽지원만으로 만족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정치인 김정길의 앞날에는 노무현의 후광이라는 무기는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자신과 노무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과장을 섞어 서라도 절친한 사이임을 강조하거나, 자신 역시 친노 그룹의 핵심이라는 식의 미화가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정길은 오히려 자신은 "노무현의 사람"은 아니라고 단정지어 얘기를 하고 있다. 친노이면서 노무현과 친구이자 동지일 수 있지만, 노무현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일까.
단지 비록 대통령까지 되었지만 자신보다 정치에 늦게 입문한 후배였던 노무현에 대한 자신만의 자존심일까? 아니라면, 노무현의 못다한 과업을 이어서 완수하고자 하지만, 그 과정에서 노무현의 후광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는 경상도 남자 특유의 가오일까?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은 정치인 노무현과 매우 비슷한 길을 걸어왔고, 어려울 때 서로 돕던 절친한 친구이면서도 무엇인가 확실하게 다른, 정치인 김정길 고유의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과연 어떤 것일까? 그 차이점이 과연 정치인 김정길에게 득이 될까, 해가 될까? )
- 민주당과 김정길의 총선 전략
물 : 현재 민주당 내부에서의 위치는 어떠십니까?
김 : 저는 민주당 내부에 아무런 큰 비중이 없어요. 정말로 난 민주당한테 아무런 대접도 못 받으면서 지키고 있는 겁니다. 현재 당 고문인데...
이십년을 지역주의에 맞서서 매번 떨어지면서, 서울에 공천을 못받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내가 공천심사위원장을 해 가면서까지 부산에서 매번 떨어지고, 이번에 부산 시장 선거에 나가는 과정에서도 정세균 대표까지 내려와서 나갈 사람이 없다고 설득을 해서 된거고.
사실 저는 내년에 총선에서 가만히 있어도 비례대표 상위 순번을 받을 수가 있어요.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하는 얘기가 아예 당규에, 어려운 지역에서 광역자치단체장에 나가 의미있는 득표를 하고 떨어지면 비례대표 상위순번을 주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민주당 당규를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충분히 제시될 만한 조건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만큼 영남지역에서의 민주당의 위상은 어렵기 그지없다.)
그래서 제가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관심도 없고요. 그 규정에 딱 하나 저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내년에 전국구 안하고 지역구로 또 나갈 겁니다. 내 혼자만이 아니라 나 한석 건지고, 부산 경남에서 제가 좀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가능한 인물들을 만나 좋은 후보 내고 열심히 뛰어서 부산에서 한 오육석 만들고, 경남 지역에서도 한 삼사석 해서, 합해서 한 열석 되지 않겠습니까? 민주당이 이렇게 부산 경남에서 한 열석 정도를 확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은 그거라고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차기 총선에서의 민주당의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민감한 부분이다. 단순히 한나라당의 몰락에 대한 반사이익의 차원이 아니라, 민주당이 전국 정당으로 다시 발돋움 할 수 있는가 하는 역사적인 문제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부분이라는 얘기이다.
민주당에서는 이미 당차원에서 차기 총선에서 영남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전략이 준비되고 있다. 하지만 그 당 차원의 전략은 김정길의 전략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 지역에서 오래도록 자리잡고 있는 정치인이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규합해서 대거 의석을 차지하게 될 경우는 결국 당권에 대한 얘기가 따라나오게 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다음 총선은 바로 같은 해에 있는 대선까지 겹쳐 당내의 권력투쟁에도 민감하게 영향을 받게 된다. 지금 김정길 전 장관은 이런 부분을 모두 고려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의 예정된 행보가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민주당 내부의 견제부터 걸림돌로 작용할테니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제가 대접 받을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대접도 못 받으면서 민주당을 위해 뛰고 있는 겁니다. 그 이유는 민주당이 좋아서 그런게 아닙니다. 지금 현실에서 민주당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민주당을 위해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에요.
난 지금 민주당이 하고 있는거 보면 굉장히 불만스러워요. 민주당이 제대로만 하고 있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저렇게 죽을 쑤고, 한나라당이 저렇게 죽을 쑤고 있는 상황에서 지지율이 현저하게 올라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지 못하고 있잖아요.
겨우 반사이익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조금 앞서기 시작하고 있는 거잖아요. 이래서는 곤란하다는 겁니다.
물 : 지금 얘기하신 것이 바로 차기 총선에서 계획하고 계시는 내용이군요.
김 : 그렇죠. 내년에 제가 직접 출마하고, 부산 경남을 위해 함께 뛰고, 그래서 십석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영남에서의 민주당의 교두보를 확보해야 된다는 거죠.
물 : 굉장히 어려운 목표입니다.
김 : 어렵죠. 하지만 저는 자신이 있습니다. 이번에 가능성이 보였잖아요.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또 떨어지면 다시 하면 됩니다. 아니 이번에는 될거에요. (웃음)~
물 : 그렇게 대접도 못 받으면서 민주당 입장에서는 완전한 불모의 땅인 부산에서 이십년이 넘게 고생을 하고 계시는 건데, 그래서 그런 걸까요? 호남 쪽에 많은 지지세력을 가지고 계신다고 그러더군요.
김 : 예, 호남 쪽에서 많은 분들이 저한테, 내년에 대선에 나와 줄 것을 요청하고 계시죠.
물 : 그 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김 : 주로 현재 지자체에서 활동하시는 분도 있고, 당 간부들, 당원들, 일반 시민들.. 이런 분들이죠. 제가 영남 사람이면서도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면서 전국을 돌았고, 국민의 정부에서 장관도 하고, 수석도 하고, 이런 것들을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거기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하고 함께 오랜 시간동안 지역주의에 맞서 싸워 온것을 알아 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거기다가 제 처가가 전남 고흥 아닙니까? 그 쪽에서도 지지를 좀 해주고 계시고..
거기다가 제가 또 광주 일곡동에서 살았던 적도 있어요. 2003년 때입니다. 우리 늦동이가 거기서 초등학교 4학년을 다녔어요. 아토피도 심했었는데..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명예 경제학 박사학위도 받았고 해서 광주 전남하고는 남다른 인연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광주 분들이 저를 많이 좋아들 하십니다.
그런데 광주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2002년 대선 당시에 30% 이상의 지지율을 받던 이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선 후보로써는 1-2% 지지밖에 없었던 노무현을 대선 후보로 만들어 낸 곳이 또 광주 아닙니까?
저는 우리나라 정치 일번지가 종로가 아니고 전남 광주라고 생각을 해요. 광주 분들의 정치의식 수준은 매우 높습니다. 이 분들은 정치적 판단을 하십니다. 그런 분들이 저한테 대선에 나오라고 요구를 한다는 것은 지금 드러나 있는 후보들로는 다음번 대선에서 정권 교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어떤 기대를 좀 가지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친구이자 동지인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는 임명직을 모두 거절하고, 정치권을 떠나 있었지 않습니까? 사실 이게 무척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물 : 안 그래도 그런 질문을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인지도 부족이라는 것은 상당히 힘든 문제인데요.
김 : 예를 들자면 김근태 의원만 해도 겨우 한텀 쉰 건데,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잊혀지고 있잖습니까? 저는 무려 8년, 임기로 두 타임 쉰 겁니다. 정치라는 게 그래요. 잠시만 떠나 있으면 무척 빠른 속도로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강원도고 제주도고 어디서나 정치를 오랫동안 관심있게 보시고, 정당 생활 하시고 이런 분들은 저를 다 기억하고 지지해 주시곤 합니다. 그런 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활동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저를 전혀 모르시는 요즘 젊은 분들이나 여성분들이라 해도, 실제로 제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게 되신다면! 저를 지지해 주실 것으로 확신을 합니다.
저야말로 요즘 정치권에서 보기 드문 "천연기념물" 아닌가요? (웃음)
(도대체 이런 무모하고도 근거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내가 누군지를 알기만 하면 모두가 다 나를 지지해 줄 것이라는 확신, 사실 이런 것은 확신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자기최면일 수도 있다. 스스로에 대한 다짐을 반복하면서 스스로도 그것을 믿어버리는 현상 말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 긴 시간동안 한길을 걸어왔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긴 시간동안 낙선을 거듭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싸워왔던 투쟁의 경험이 이런 자신감의 근원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쉽다. 지금 당장 내가 멋진 말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지지도를 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수십년간 걸어온 인생의 역정, 이런 것은 한 순간에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가치이다. 인생은 한번 뿐이거든.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누적되어온 사실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그렇게 알려짐을 통해서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김정길은 여전히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정치가에 불과하다는 게 현실이고, 그는 이 장벽을 넘어서야만 한다는 고비에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이다.
인지도 부족은 정치인으로써 넘어서기 정말 힘든 최대의 약점이다.)
- 노무현과 김정길이 추구하는 가치
물 : 이제 사이사이 나왔던 얘기들 보다는 훨씬 더 심도있게 정치인 김정길과 정치인 노무현의 관계에 대해 얘기를 할 순간이 다가 왔습니다.
아까 말씀하시기를 나는 노무현의 사람은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노무현이 추구해온 가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의견부터 여쭤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 : 저는 대통령 김대중이 추구해왔던 길과 대통령 노무현이 추구해왔던 길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 : 그 점은 누구나 동의를 하고 있겠죠.
김 : 남북문제도 마찬가집니다. 남북이 우선 화해협력 관계로 가야 됩니다. 그걸 먼저 얘기해 보자면 요즘 이명박 대통령이 친미, 친일을 한다고 비판을 받는데 그건 전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친미나 친일을 한다고 비판해야 하는게 아니라, 왜 친러 친중 친북을 안하냐고 비판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친미도 해야 하고 친일도 해야 합니다. 물론 자긍심을 가지고 원칙을 가지고 해야 겠지요. 그것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아니 동북아 모든 나라, 저 멀리 남미나 아프리카 구석에 있는 어느 나라 하고도 친해야 되는게 기본입니다.
왜 이걸 안하냐고 비판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우리가 외교도 확장하고 자원도 확보할 수 있는 겁니다. 그건 필수입니다. 그걸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소통입니다. 북한하고도 친해지기 위해서는 소통을 하면 됩니다. 가장 문제는 소통을 안하는 겁니다.
국내에서만 소통을 안하는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소통을 안해요. 소통을 안하고 단절을 하잖아요. 국민하고도 소통을 안하고, 북한하고도 소통을 안하고.
- 남북문제와 소통의 중요성
물 : 소통을 안하니까 문제다?
김 : 그렇지. 소통을 안하고 단절을 하니까 문제인거죠.
물 : 이익이 충돌할 때에는 어떻습니까? 소통만 가지고 해결이 될까요?
김 : 이익이 충돌할 수록 더욱 더 소통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소통을 해야 서로 타협이 가능합니다. 타협해서 해결하는 게 훨씬 더 이익이에요. 제가 원내총무 할 때에도 협상의 명수 뭐 이런 소릴 들었는데, 저는 실제로 협상을 무척 잘 해왔습니다. 줄건 주고, 받을 건 받고, 이렇게 해 왔습니다. 그런 정치를 해 왔고 그런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사실 한나라당도 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나라 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내편을 적으로 만드는 정치를 한다는 겁니다.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정치를 해야지 가뜩이나 없는 내 편을 적으로 만들어서 뭘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그러면 영원히 야당밖에 못해요.
한나라당 지지자라도 우리편으로 끌어와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집권을 하죠. 이게 진짜 정치인 겁니다.
단적으로 지금 한나라당 내부를 보세요. 이명박과 박근혜 사이에서 서로를 적으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편들끼리 말입니다.
우리와 북한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북한하고 친해야 됩니다. 소통해야 되고, 서로의 이익이 충돌한다면 소통해서 해결해야 됩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고 같은 민족인데 우리가 왜 싸워야 되나요?
거기다가 북한의 문제라면 우리가 맏형의 역할 아닙니까? 망나니 동생이 하나 있다면 그걸 때려 잡아야 겠나요? 아니면 잘 다독거려서 사람 만들어서 써야 되나요? 아주 단순한 문제인 겁니다.
물 : 이익이 충돌 할수록, 소통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동감이 됩니다.
다음에는 정당개혁에 대한 얘기를 여쭤 보겠는데요. 참여정부 때에는 이 문제가 꽤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대연정 얘기까지 나오고, 지지자들에게도 받아들여 지지않고 문제가 크게 되었었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정당개혁과 선거제도
김 : 선거제도에 대해서는 지역주의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가 도입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당 명부제나 석패율 제도 같은거 말입니다.
소선거구제는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표율이 높아진다는 단점이 있으니 여러 가지로 보완을 해야겠죠. 석패율 같은게 좋은 도움이 될 겁니다.
물 : 대연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 : 사실 대연정은 좀 말이 안되는거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한나라당을 상대로 그 제안이 나왔다는게 더 말이 안되는 얘기죠.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최종적으로 한나라당은 사라져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민주당이 보수를 담당하고, 민노당이 진보를 담당하면서 양당제의 축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는 생각이죠. 이런 정권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물 : 그 쪽에서 들으면 적대감이 좀 생기겠는데요.
김 : 그래도 할 수 없죠. 내 소신으로 하는 얘기니까요.
- 복지와 양극화
물 : 경제적인 문제를 좀 여쭤 보겠습니다. 누가봐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양극화 문제인데요. 양극화 문제의 해결 방안을 놓고 진보와 보수가 충돌하고 있는 거겠죠. 이 양극화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결국 이 문제는 분배의 정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자꾸 부자 감세라거나 정책의 우선순위가 왔다 갔다 한다는 겁니다. 내년 선거에서는 아마 이 양극화 문제와 복지 문제가 가장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사실 복지를 하려면 돈이 드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는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제가 행자부 장관을 하면서 보니까 낭비되는 예산이 굉장히 많습니다. 매번 얘기가 나오면서도 잘 안 고쳐지는 문제인데 이 낭비되는 예산만 절감할 수 있어도 보편적 복지에 필요한 기초 자금은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다가 복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 세금을 걷게 되더라도 징벌적 조세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부유세 뭐 이런거 하게 되면 돈 많은 사람들은 꼭 정부에게 돈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조세를 회피하게 되죠. 자꾸 꼭꼭 숨기게 되고.
그래서 제가 하는 얘기가, "부자에게는 명예를, 빈자에게는 존엄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빈자와 부자가 공존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야지, 부자에게 고통을 줘서도 안된다는 겁니다. 물론 빈자에게도 고통을 줘서는 안되는 거죠.
물 : 그 구호는 어디서 쓰신 건가요? 인용하신 건지..
김 : 그건 그냥 내가 쓰는 얘기에요.
물 : 어디 책에라도 쓰신 문장인가요? 참 멋진 문장이군요. 부자에게는 명예를, 빈자에게는 존엄을....
김 : 그냥 평소에 생각하던 얘기일 뿐입니다. 그렇게 부자들에게는 명예를 줘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인 존엄을 지켜줘야 하는 겁니다. 국가는 모든 국민들에게 행복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반대로 가진 자에게만 좋은 집이 되어가고 있잖습니까? 이게 문제라는 거에요.
그렇게 방향을 설정하고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복지국가를 한다고 해서 바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저는 차기 정권은 복지국가로 향해 가는 레일을 까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점진적인 발전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무료 급식을 하자고 그랬더니, 한나라당 쪽에서 이건희 손자에게도 왜 공밥을 주자는 얘기냐, 하면서 나올 때 왜 민주당이 받아치지를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공밥을 주자는 얘기냐 하면, 그렇다, 공밥을 주자는 얘기다 라고 받아쳐야 된다는 겁니다. 당연히 주자는 얘기가 맞아요.
이건희 손자 손녀라고 해도 다른 밥 먹어야 되는건 아니에요. 걔들도 학교 와서 다 같이 좋은 밥 먹고, 대신 이건희 회장 같은 분들은 좀더 많은 아이들이 몇천명 몇만명 밥을 더 좋게 먹을 수 있도록 많은 세금을 내고 그 대신 명예를 가져야 하는 겁니다.
그런걸 왜 우물우물하면서 받아 치지를 못해...
4대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거 당에서 반대하고 있는데, 생태계가 어떻고 뭐 이렇게 반대하면 복잡해서 일반 국민들께서는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국민들은 아주 단순명료하게 얘기를 해 줘야 됩니다. 그걸 아주 잘하는 분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었어요. 단순 명료한 어휘로 국민들을 설득해 내거든요.
이건 이런 문제입니다.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겁니다. 국민들이 이걸 이해해서 분노할 수 있게 해 줘야 된다는 겁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죠. 만약 한달에 삼백만원 버는 가정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제일 우선순위가 뭐죠? 일단 의식주가 중요하잖아요. 다음에 아이들 학자금, 그리고 의료비. 사고를 대비해서 보험도 들고 저축도 하고. 그러고도 여유가 되면 외식도 하고, 여행도 하고. 그러고도 남으면 십년된 티비도 바꾸고 오래된 차도 바꾸고. 이렇게 우선순위가 있는 겁니다.
국가 예산도 그래야 합니다. 정부 예산은 국민의 세금을 걷어 집행을 하는 것인데, 제일 급한게 뭡니까? 국민들 중에 돈 없어서 밥 굶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에게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는게 최우선이에요. 이건 국가의 의무에요. 그리고 국민들 중에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치료받게 해 줘야 되고. 이게 제일 급한 일이지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리고 아이들 가르쳐야 되고. 이렇게 우선순위에 입각해서 일을 해야 되는 거에요.
물 : 배고프면 밥 멕이고, 아프면 치료해 주고.
김 : 그렇지. 그거 말고 더 중요한 우선순위가 어디 있어요? 거기다가 아기를 낳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맞벌이 하느라 아이를 못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낳기만 해라, 국가가 기르는 것은 책임져 준다, 이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보육 문제죠. 이게 국가의 의무이자, 보편적 복지라는 겁니다.
그걸 만들고 나서 4대강을 하든지 5대강을 하든지 뭘 하든지 해야 되는거죠. 이명박 정부가 그런 서민들에게 갈 예산을 다 끌어다가 4대강부터 하겠다는 얘기는, 마치 집에 의식주 할 돈까지 다 끌어다가 차부터 바꾸자는 얘기나 마찬가지에요. 거꾸로 가는 거죠.
이렇게 서민들에게 당신들에게 갈 돈을 끌어다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알아듣게 설명을 해 줘야죠.
그나마 그넘의 자동차는 이제 다 고장나고 망가져서 아무 짝에 쓸모 없게 된 거 아닙니까.
물 : 완전 사기 당했어~
김 : (웃음).. 그러게 말입니다.
물 : 보통 그런 얘기에는 이런 반론이 나옵니다. 4대강을 하는 것은 그걸 함으로써 돈을 더 벌 수 있는 거다, 이렇게 봐야 한다..
김 : 그건 아니고요. 23조가 넘는다고 하죠. 실제로는 더 들어가는데, 같은 돈이라면 그 돈을 첨단 기업이나 문화적 기업, 그리고 사회적 기업등에 투자하면, 그건 일자리도 몇배 더 생기고, 미래지향적인 산업이 되는 거에요. 몇배나 더 효율적인 거죠. 왜 토목에 투자를 해요.
- FTA와 파병
물 : 알겠습니다. FTA에 대한 입장은 어떠신가요?
김 : 우리가 요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는데, 그 자체가 나쁜거냐 하는 생각도 좀 해 봅니다. 그것과는 별도로 FTA의 경우는 또 달라요. 이 문제의 핵심은 도대체 FTA를 누가 원해서 하는거냐 라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원해서 하는게 아니고 강대국이 원해서 하는 겁니다. 미국은 미국이 원해서 하자고 그러는 거고, 유럽도 마찬가지로 그 쪽의 강대국들이 원해서 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 국가의 지도자들은 저 쪽이 원해서 하는 일을 우리가 안달이 나서 빨리 할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우리가 할 만해지면 하고, 우리가 원하는 조건이 갖춰 지면 그 때 하면 되는거에요.
안 갖춰지면 안하면 되는거죠. 우리가 손해 볼 거 같으면 안하면 되고. 그거 안하면 죽습니까? 안해도 되는 거에요. 그런데 뭐가 급해서 그렇게 준비도 안되고 하냐는 겁니다.
물 : 그런 관점이라면, 참여정부 때 무척 빠른 속도로 FTA가 추진되었다는 현실과는 좀 배치되는 것 같습니다.
김 : 제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치적 동지고 친구이지만, 같은 건 같고 다른 건 다른 겁니다. 똑같을 수야 없죠. 저는 결국 이 한미 FTA를 참여정부에서 그렇게 서둘러서 했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 : 파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파병도 우리가 정말로 미국이 원해서 굴욕적으로 파병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하면 파병할 수도 있죠.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파병이 꼭 필요하다면, 비전투요원에 한해서는 가능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호적인 우방의 경우 의료나 공병 이런 거는 파병이 가능하겠죠. 그것도 명분을 생각해서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어요. 미국이 원해서 하는 거라면, 안달나게 만들어야죠. 미국이 서두르면 그 때서야 마지못해 생색 내면서 해야지 서두를 일이 아니죠. 이게 바로 협상입니다.
지금 북한사람들이 세계에서 협상을 제일 잘하잖아요. 그 강대국인 미국도 끌고 다니지 않습니까? 안달나게 만들어서..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냐는 겁니다.
- 개헌과 행정구역 개편
물 :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문제가 다 포함되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참여정부에서도 꾸준히 나왔던 얘기지만 개헌 문제입니다.
김 : 개헌은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87년도에 전두환 정권에서 5년 단임제 개헌을 할 때 말입니다. 사실 그 때 개헌 특위에 제가 초선의원 중에서 유일하게 들어갔었습니다. 5년 단임이 사실 우리가 원해서 한거였어요. 저쪽에서는 4년 중임을 얘기했었거든요. 양김씨 때문에 5년 단임으로 간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양김씨가 5년씩 늦게 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해 놓고, 양 김씨가 합의해서 5년씩 했으면 노태우 정권은 아예 출범하지도 못하게 막을 수 있었는데, 결국 두 김씨가 반목 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겁니다. 그렇게 된 내막이 있는 거고, 이제 와서는 저는 대통령 중심제에 4년 중임제가 더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고, 헌법에 독소 조항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런거 조금씩 다 손을 봐야 되고, 국민의 기본권 신장 같은 부분은 시대에 맞게 고쳐야 됩니다.
필요없는 조항들도 있어요. 평통(평화통일 자문위원회) 같은거 말입니다. 이거 아주 불필요한 헌법기관입니다. 개헌을 해서라도 없앨 필요가 있죠. 그거 지역에서 보면 완전히 보수세력들 잔치하는 기관입니다. 불필요한 조직이에요. 근데 사실 그게 헌법기관이긴 하지만 안해도 됩니다. (웃음)..
물 : 그렇다면, 김장관님께서는 사실상 87년 체제를 만드는 데 참여하셨던 거군요. 그러나 그 87년 체제가 이제와서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거고, 상당 부분 고칠 부분이 있다, 그래서 개헌의 필요성은 인정하시고,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고 부분적인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라는 거군요.
김 : 맞습니다. 거기다가 21세기에 맞춰서 정보통신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개념들이 적용되어야 하고, 기본권 신장 부분에 있어 보완이 필요하고, 또 삼권분립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산 편성권이 행정부에 모두 있는 것을 상당부분 국회로 옮겨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국회에도 문제가 있어요. 전부가 다 자기 지역구에 예산을 가져가는 데에만 신경을 쓰니까 막상 예산 편성권을 또 넘겨 줘 버리면, 엉망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거 역시 아주 심각한 문제가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 되겠죠.
물 : 개헌에 대한 의견은 제가 참 공감이 많이 가는군요.
김 : 그런데 막상 개헌을 또 하려면, 이게 아주 맘먹고 해야 됩니다. 대통령 후보가 아예 공약으로 못 박아두고, 당선 되자마자 착수해서 개헌을 해야 될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추진을 할 수가 없어요.
물 : 행정구역 개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이 행정구역 개편은 워낙 복잡한 문제라서 여러 가지 사항을 검토해야 합니다. 사실 효율을 생각하자면 작은거 좀 합치고 일제때부터 내려오던 세단계를 두단계로 줄이는 것에 대해서는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겁니다.
- 노무현과 김정길, 정서적 유대관계
물 :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슬슬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정서적인 유대관계에 대한 얘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초에 언제 만나신 거죠?
김 : 재야 변호사 하실 때부터 알았습니다. 80년대 초였을 겁니다. 부림사건 뭐 그 때였던 거 같아요. 근데 노무현 대통령은 저를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10대 국회의원 출마했을 때 78년, 그 다음에 81년도에 출마해서 강도 높은 연설을 하고 그럴 때, 김정길 연설 대단하다 그래서 자기도 들으러 오고 그랬었답니다. 저는 몰랐죠.
처음 만난 것은 대우 조선 사건 전후해서 직접 만났습니다.
물 : 만나셨을 때 처음 느낌은 어떠셨습니까?
김 : 음, 촌놈 같이 생겼지 뭐. (웃음).. 털털하고.. 그런데 고집은 되게 세게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인상이 참 좋더라고요.
그런데 내 선거구는 중구, 동구, 영도구 이렇게 했었는데, 내가 영도로 가고 중구를 김광일의원이 하고 동구를 노무현 의원이 하게 된 겁니다. 그 때 친해졌어요.
국회의원 된 후에도 우리가 먼저 서울에 올라왔다고, 권여사께서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 집사람에게 전화해서 의논하고 같이 다녀 주시고 그랬었습니다. 그 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밀가루 알러지가 있다고 그랬어요. 그 때 권여사가 우리 집사람하고 같이 노무현 의원이 국회의원 선거 한다고 몸 약해졌다고 보약을 지은거에요. 근데 돈이 없으니까, 한의사에게 못 짓고 경동시장 가서 약재를 사다가 약을 지어 먹은거에요. 근데 이 약을 먹을 때 밀가루 음식을 먹지 말라고 그랬는데 노 대통령이 그냥 워낙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니까, 약 먹으면서 밀가루 음식을 막 먹어 버린거야. 그래서 밀가루 알러지가 생겼다고 얘길 한 거에요. 가렵고 그런거죠.
그 얘길 청와대에서 기자 간담회를 하면서, 기자들한테 김정길 장관 사모님이 소개를 해줘서 지은 한약을 먹고 알러지가 생겼다고 얘길 해버린거야. 그 내용을 우리 집사람이 신문에서 보더니 그렇게 미안해 하더라고요.
아니, 한약 먹으면서 먹지 말라는 밀가루 음식을 먹은건 노무현 그 사람인데 왜 우리 집사람이 그걸 미안해 하나. (웃음).. 그런 일이 있었던 거에요. 그 때 많이 어울려 다녔었죠.
민주연구모임 같은 것도 같이 일주일에 한번씩 하고..
그러다가 결정적인 것은 3당 야합할 때 다 따라가고 둘이서만 남아서 완전 왕따가 된거죠. 그래서 둘이서 부산에서 포장마차 가서 술도 많이 먹고.. 우리가 실업자 신세가 된건데..
물 : 그 얘기좀 자세하게 해 주시죠.
김 : 뭐 자세하게 할 것도 없어요.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가지고 백수되고, 오갈데 없어진거죠. 그러니 둘이서 만나 서로 위로하고, 맨날 신세타령 하고. (웃음)하..
(별거 없었다고 손사래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웃음 속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슬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나란히 국회에 입성해서 같이 활동하던 두 패기 넘치는 젊은 정치인들이 단지 한가지 이유, 3당 야합이라는 거대한 협잡에 반대해서 양심을 지켰다는 그 이유만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에 버림받고 싸구려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그 모습.
솔직히 말해서 그 모습은 그리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울분이 있었고, 비뚤어진 이 사회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소수의 열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문득 그 자리에 내가 함께 했더라면~ 하는 부러움이 샘솟아났다.
그러나 이제 그 두 젊은 정치인중의 하나는 이미 이 거대한 국가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자신을 둘러싼 불의를 감당하지 못해 우리 곁을 떠나 버렸고, 또 다른 하나는 정치계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먼저 간 친구가 완수하지 못한 과업을 다시금 완수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하다못해 희망의 작은 불씨라도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김 : 그 3당 야합에 대해 노 전 대통령하고 공유했던 생각을 좀더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이 3당 야합이라는 것은 비호남의 정치세력이 하나로 뭉쳐서 호남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왕따 시키고자 하는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호남은 맨날 야당이나 하고 다른 지역이 마르고 닳도록 해 먹자는 얘기잖아요. 그리고 3당야합은 김영삼이 비호남 야당의 씨앗을 완전히 말려 버린 것입니다. 정통 야도 부산에서 야당 세력이 사라진 이유가 뭡니까?
거기에 맞서 비호남 지역에 야당의 씨앗을 뿌리자, 라는게 노무현과 나의 공통된 열망이었던 겁니다.
- 꼬마 민주당
물 : 그 중에 특히 영남?
김 : 아니, 영남 뿐 아니라 강원 충청 다 마찬가지에요. 비호남 모든 지역에 새로운 야당의 맥을 이어갈려고 노력을 한 거에요. 그래서 꼬마 민주당이 만들어집니다. 사실 민주당이죠. 언론에서만 꼬마 민주당이라고 그런거죠. 무소속으로 있던 박찬종, 이철, 국회의원 떨어져 있던 조순형, 홍사덕, 3당 합당 따라갔던 이기택도 꼬셔가지고 꼬마 민주당을 만듭니다. 그 때 노 대통령하고 나하고 꼬마 민주당을 만들던 의도는 제2야당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평민당하고 합당을 하려고 처음부터 작정을 했던 겁니다. 그런 전제하에 당을 건설했어요. 지구당 창당을 하는데에도 그렇기 때문에 평민당 지역구 의원이 없는 곳에만 창당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꽤 성과를 보였었습니다. 초기에는. 인기가 좋아서 의원 여덟 아홉명이 있었어요. 인기가 좋았어요. 허탁 의원 같은 경우에는 보궐선거 당선도 되고, 대구에 백승홍 의원 같은 경우는 정호용씨하고 붙어서 거의 근접한 득표를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결국 당이 의견이 모이질 않고 8인 8색이 되었다가 결국 몰락하게 된거죠.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저는 노무현을 겪은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보고 다 노무현하고 친구라고 얘길 하지만, 저는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이 잘 나갈 때에는 저는 거리를 두고 있었어요. 그런 때에는 보통 말하는 노무현의 사람들이 함께 한거죠. 문재인 김두관 유시민 뭐 이런 사람들이요. 오히려 저는 밖에서 도우려고 일부러 거리를 둔 측면도 있죠. 도와줄 때 제대로 돕지도 못한 측면도 있고..
그런데 지금 와서 제가 아직도 노무현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눈시울 뜨거워 지는게...
정치인으로 가장 극단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같이 했던 사림인거에요. 친구였고 동지였어요. 아까도 얘기가 나왔지만, 실제로 모든 것을 저와 상의했던 사람이에요. 부산 시장 나갈때도 그랬고, 내가 원내총무 하면 자기는 대변인하고, 공천심사위원장 할 때 심사위원하고 장관도 나란히 이어서 하고, 제가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에게 장관 천거도 했었어요.
그 때 국회의원 떨어지고 부산서 오갈데 없어서 둘이 만나게 되면, 동병상련인거죠.
(요부분 즈음해서 김 전장관은 조금 잦은 빈도로 코를 훌쩍이곤 했다. 단순히 알러지 문제로 인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물 : 사람이 원래 잘나갈 때 겪은 거는 가짜고, 어려울 때 만난 사람들이 진실되게 만나는 거 아닙니까.
김 : 우리 쪽에 정당 행사 있으면 노무현이 와서 참석해 주고, 또 그 쪽에 뭐 있으면 내가 가서 구라도 좀 쳐주고, 뭐 이런거지. 내는 영도에서 다 당선되도록 준비해 놨는데, 여기서도 노무현 당선시켜 줍니까! 뭐 이런것도 외쳐보고. 그래 놓고는 둘다 떨어지고. 이러고 다닌 겁니다.
그러면서 포장마차 가서 소주한잔 따라 놓고 노무현은 담배 피니까 담배도 한가치 피고, 서로 어깨를 기대고 서로 위로하면서 그렇게 버텨낸 겁니다. 노래방도 많이 갔어요. 노래방 가서 하루 죙일 부산 갈매기도 부르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물 : 노래방도 같이 가셨어요?
김 : 그 때 많이 생겼었어요. 노무현이 참 부산 갈매기 잘 불렀는데, 서울에 올라와서도 김원기 선배하고 셋이서 노래방 가서 부산 갈매기 부르고 밤새 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노무현이 부산 광복동 와서 대통령 후보 되어 가지고 그 부산 갈매기를 부르는 데 그걸 들으니까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 훌찌럭. (웃음)
그 참 어려울 때 친구였고 동지였기 때문에..
나중에 내가 추도사를 썼었죠. 거기다가 제가 못다한 얘기를 다 썼습니다.
(이 추도사는 이 기사의 말미에 전재해 놓았다.)
언젠가 아마 해수부 장관 하기 전에 같은데, 한번은 저를 찾아 왔어요. 마포에 대교라고 하는 식당이 있는데, 장관님, 밥이나 한번 같이 드십시다 해서 거기가서 밥을 같이 먹었죠. 그 때는 제가 피선거권 박탈 당하고 억울하고 기분이 굉장히 나빴었죠. 정치에 아주 정내미가 떨어진 상태였어요. 전 원래 선거에서 한번 떨어지면 당분간 정치권 근처에 안가요.
왜냐면 선배들을 봐 왔으니까, 선거 떨어지고 정당 주변에서 얼쩡 거리면 무척 초라해 보이고 싫더라고. 그래서 난 내가 떨어지면 정치권에 얼씬거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중소기업 하고 돈 벌고, 일종의 결벽증 같은 건데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요. 정치권 밖에 사람들이나 만나러 다니고 그랬었죠. 그럴 때 였는데, 찾아와서 점심 먹고 나서 그러더라구요.
장관님, 이번에 내가 민주당 대선 후보 나갈려고 그러는데 좀 도와주소, 하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첫마디로 뭐라 했냐면 나도 참... "보소, 우리가 국회의원도 떨어진 주제에 누가 대통령 시켜 주겠소." 한거에요. 부산에서 국회의원이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국회의원도 못 되면서 대통령을 어떻게 하냐는 거지. 거기다가 당시에는 이인제가 되는 걸로 다들 알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이러는 거에요.
김 장관님이 도와주면 전 됩니다. 이러는 거에요. (웃음)
(이런 터무니 없는 기개, 노무현 다운 발언이다. 비록 허풍스럽게 들리지만, 그 사람은 이 허풍을 현실로 만들어낸 남자였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남자.)
그래서 말을 더 못하고, 제가 도와 드려서 된다면 제가 도와드려야죠~ 이러고 말았습니다. 속으로는 이 사람 참 웃긴다~ 이러면서 말이에요. (웃음)
그러면서 부산에서 후원회를 하는데 와서 축사를 좀 해달라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전에도 김원기 의장이 63빌딩에서 행사를 하는데에도 안 갔어요. 일체의 정치행사에를 안갔었으니까. 그러면서 다른 사람 행사에 아무데도 안 가면서 여기만 갈 수가 있나. 거기다가 그 때 쯤에는 난 정치 안하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고. 그래서 결국 거길 안 갔는데, 그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서운할 수도 있었겠다 싶어서 참 마음이 아파요.
그러고 나서 당의 공식 대선후보가 되고 나니 안 도와줄 수가 있나, 그래서 돕기 시작한거죠. 더더구나 저는 당시에 정치권 표면에서 활동을 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비공식적으로 가서 당원들 고생하니까 밥이라도 좀 사주고, 후원회 같은데에서는 참석할 수가 있었죠. 그 때 낙동강 오리알 얘기도 하고 그런거에요.
그렇게 관계가 이어지는데, 지금도 노무현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 지는게, 진짜 어려웠을 때 함께한 동지라는 거 때문이에요. 오히려 대통령 된 후에는 내가 아무것도 신세를 안 졌지.
물 : 그렇게 해서 2002년도에 기적적으로 승리를 했고, 참여정부가 있었고,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으셨을 때, 그 때 얘기를 좀 해주시죠.
김 : 그 때, 북경에서 한국에 들어와서 서울에 중소기업 하면서 가지고 있던 사무실이 있어요. 그걸 세를 놓으려고 안에 인테리어를 하러 간 거죠. 집사람하고 같이 아침 일찍 나오는 바람에 뉴스를 못 봤어요. 그렇게 그 사무실에 가 있는데, 지인이 전화를 했더라구요. 첫마디가 노무현 대통령 소식 들었습니까? 하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불길하게 들리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된건데? 하고 물어보니까, 아마 돌아가신 거 같습니다. 하더라고. 그래서 놀라서 물어 보니까 아마 투신하신 것 같습니다. 하더라구요.
놀라서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어요. 집사람한테 노무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네, 라고 얘길 하니 집사람도 놀랐죠. 그렇게 땅바닥에 주저 앉아서 한참을 집사람하고 붙들고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려서 바로 봉하로 내려간거죠.
그렇게 내려갔더니 사람들이 흥분하고 울면서 매달리며 "김장관님, 노대통령님 원수 좀 갚아 주세요, 원한 좀 풀어주세요." 하면서 부산 시장에 나가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냥 왜 문상 온 사람한테 그런 얘기 하냐고, 난 정치 안한다고 그러고 말았던 기억이 납니다.
물 : 그 때 느낌은 어떠셨어요?
김 : 에이, 그걸 말로 표현을 못하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49재인가 하러 봉하에 갔었는데, 보니까 부엉이 바위하고 사자 바위가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갑자기 무서운 충동이 막 드는거야. 나도 저기에 올라 뛰어 내리고 싶다는 충동이... 진짜 억지로 참았어요.
그 정도에요.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는 거에요.
물 : 잠깐 전에 나온 얘긴데, 제가 그런 얘길 읽었습니다. 복수해달라는 분들에게 복수는 아니고 한을 풀자, 라고 하셨다고..
(이 얘기는 노혜경씨가 쓴 글에 등장하는 것이다. 충격으로 쓰러져 입원한 노혜경씨가 위문차 방문한 김정길 전 장관에게 울면서 복수해 달라고 애원하는 얘기이다. 그 때 김 전장관의 답변이 복수는 아니고, 한을 풀자 였다는 거다. 이 글은 이곳에서 볼 수가 있다.)
김 : 아 그 얘기는 저 사람 뿐 아니라 많이 했어요. 한을 풀어준다면 그가 못 다한 정치적 꿈을 이루어 준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복수라는 건 안되는 거죠. 보복은 해서는 안되는 일인 겁니다.
결국은 지역주의에요.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 지역주의를 철폐하는 거죠.
그 지역주의도 영남의 지역주의와 호남의 지역주의는 전혀 다른 겁니다. 영남의 지역주의는 우월적 지역주의에요. 지들이 더 잘났고, 지들이 좋은 건 다 가져야 하고, 자기들이 집권 해야 되고 이런 거에요. 대단히 이기적인 겁니다. 호남의 지역주의는 다르죠. 호남의 지역주의는 저항적 지역주의인거에요. 자기들이 왜 차별 받아야 하는가, 정당한 대우를 받겠다, 이런 거에요. 호남의 지역주의는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어요. 영남의 지역주의는 내가 영남 사람이지만 정당성이 없는 겁니다.
한나라당이 호남에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거야. 어떻게 광주에서 그런 짓을 해 놓고 학살을 저지른 정당이 호남에서 당선되길 바랄 수가 있나. 그건 말이 안되요.
(이 인터뷰가 있던 날이 바로 5월 18일이었다. 그리고 김 전장관은 광주에서 5.18 기념식에 참여한 뒤 부랴부랴 상경해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영남에서 호남 사람, 민주당 사람을 떨어트리는 것도 역시 말이 안되는거야. 그럴 자격이 없는 거에요. 물론 민주당도 문제가 있죠. 민주당 내에 호남 사람들 비율이 너무 높은 거야. 지역 정당을 탈피해야 되는거죠. 그래서 비호남 지역이 좀더 많이 참여를 해야 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아직 안되니까 그런거죠.
물 : 얘기가 결국 지역문제에서 시작해서 다시 지역문제로 돌아오게되는군요.
김 : 아 그렇습니까? (웃음)
저는 뭐 다음 정부는 영남도 호남도 다 가까워 질 수 있고, 남북도 가까워 질 수 있고, 해외에서도 다양한 국가와 함께 할 수 있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경제적인 비중도 그렇죠. 수출도 그렇고. 미국보다 중국이 우위로 올라갔지요. 이익도 그렇고. 그런데 우리가 미국만 바라보고 중국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무서운 결과가 올 수도 있어요. 안그래도 요즘 중국에서 자꾸 한국을 길들이자 뭐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이거 골치 아픕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하게 남북화해 협력이 가능해 진다면 우리가 정말로 동북아 중심국가가 될 수가 있어요. 이거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정치만 잘하면 되는 거에요. 좋은 정권만 만나면 가능 합니다. 나는 정말로 브라질의 룰라 처럼 당선 될 때보다 떠날 때 더 지지율이 높은 그런 대통령을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부자한테도 박수 받고, 빈자에게도 박수를 받는 그런 꿈을 꾸고 있어요.
물 : 굉장히 어려운 꿈을 꾸시는군요.
김 : 참 어려운 꿈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밖에 안나온 룰라도 했는데 우리는 왜 못하겠습니까?
물 : 맞는 말씀입니다. 장시간 인터뷰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끝으로 딴지일보 독자 여러분께 동영상 편지 한마디 띄워 주시기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 고맙습니다. 근데 오늘 차타고 장거리 이동하고 해서 영 사진빨이 안 받을 거 같은데 걱정입니다.
김정길 전 장관의 영상편지
- 인터뷰 후기
인터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약 두시간 사십분 정도. 그러나 김장관은 한정된 시간내에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털어놓고 싶었는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갔고, 아이폰 두 대로 녹음한 파일은 그다지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녹취된 텍스트의 양은 실로 서너시간 분량을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애시당초, 이 인터뷰를 하려고 맘을 먹게된 계기는 답답해서라고나 할까.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의 거듭된 실정에도 불구하고 이쪽 진영의 지지율은 답보상태에 빠져 있다. 저들은 자기들만의 축제를 준비하며 자기들끼리 당권 대권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우리 쪽은 이렇다 할 아젠다 설정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시간만 죽이고 있는 이 더럽고 끈적거리는 교착상태가 정말로 싫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2의 노무현은 없다. 마찬가지로 제2의 노무현을 찾는 시도는 모두 무위로 돌아갈 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2의 노무현이 아니라 포스트 노무현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무현을 닮은 사람이 아니라, 또 다른 노무현이 필요한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가치를 단순히 계승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계속 그런 것들을 요구하고 있으면서도 심지어 이 기사를 작성하는 중에도 내 마음은 계속 노무현의 발자취만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기를 서너차례.
분명히 노무현도 잘못 한 것이 있고, 실패한 일도 있다. 노무현의 뒤를 이을 그 누군가는 그 잘못과 실패조차도 온전히 받아들여 고쳐 나가야 할 임무까지 떠 안게 되는 것이다.
과연 정치인 김정길에게는 그 정도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을까?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노무현을 그리워 하며, 노무현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고, 노무현과 최악의 상황에서 같이 소줏잔을 기울이며 슬픔을 나누던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그가 포스트 노무현의 과업을 맡아 줄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할 생각이다.
단지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단 한가지는,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고, 우리는 그 작은 희망의 불씨를 찾아내어 어떻게 해서든 살려내고, 그 불길을 우리 다음 세대에 전달해 줘야 하는 임무가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김정길이 그 작은 희망의 불씨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난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무현이 우리곁을 떠난지 2년이 넘어 3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나 편안히 쉬고 계실 그 분께 단 한마디만 보내 드리고 싶다.
편안히 쉬세요. 이제 남은 일은 우리들이 어떻게든 알아서 잘 해볼께요. 잘 될거에요.
터무니없이 긴 글을 여기까지 모두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마친다. 끝으로 김정길 전 장관이 2009년 5월 29일에 부산일보에 기고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 바치는 추도사를 전재한다.
[추도사] 친구 노무현을 보내며-김정길/전 대한체육회장 (클릭)
통분과 눈물로 한 주일을 보내고 보니 이제 당신을 영영 하늘로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 왔소. 내 늦둥이 놈을 위해 당신이 써 준 "기범아! 꿈이 힘이다."라는 글이 아직도 아들놈 책상 위에 놓여 있는데 정녕 당신의 꿈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부엉이 바위 밖에 없더란 말이오.
미안하고 원통하오. 당신이 힘들어 할 때, 당신과 여사님께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보고자 몇 번이나 편지를 썼다가 다시 쓰곤 했었다오. 멀리서나마 두 분을 믿고 후원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차마 그 편지를 부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무릎이 풀려 집사람과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오.
가장 위대하였던 평민
당신이 꿈꾸던 세상
사람들 가슴 속에 피어나
친구여, 당신은 참 나쁜 사람이오. 3당합당을 거부하고 김영삼 총재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향 부산에서 우리 얼마나 많은 멸시와 야유를 받았는지 기억하오? 지역주의를 넘어보겠다고 했지만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깨지고 또 깨지면서도, 같은 꿈을 꾸는 동지, 같이 행동하는 친구가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는데, 아직 그 꿈을 완전히 이루지도 못한 채 이렇게 먼저 떠나가 버리다니…, 당신은 참으로 야속하고도 나쁜 친구요.
친구여, 당신은 참 멋진 남자요. 당신은 같은 남자인 내가 보더라도 부러울 만큼 결단력이 있고 용맹스러우며 또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소. 청문회장에서의 그 포효, 3당합당이 야합이라 외치며 반칙이 허용되는 사회를 후세에 물려줄 수 없다고 끝내 정치적 타협을 불허하고 싸우던 기개를 영원히 잊지 못하오. 3당합당 거부 후 쓰린 마음을 소주잔으로 달래며 "나는 국회의원 떨어져도 변호사라도 해서 먹고살 수 있지만 당신은 뭘 믿고 안 따라 갔소?"하며 나와 나의 가족을 걱정해 주던 그 따뜻한 마음, 지친 어깨를 기대고 함께 이야기하며 울던 그 시간들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이오. 나는 당신이 겉으론 강한 것 같지만 속으론 여린 사람인줄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오.
친구여, 당신은 그래도 참 행복한 사람이오. 누군가 말하기를 "세상에 올 때는 홀로 울고 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모든 사람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는데, 당신을 위해 울어주는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당신이 참 행복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였던 평민, 거듭된 실패를 통해 가장 큰 성공을 이루었던 비주류였던 당신, 가장 높은 곳에 올랐지만 늘 가장 낮은 곳으로 눈높이를 맞추었던 친구 같은 대통령이었던 당신. 당신이 꿈꾸었던 그 꿈들이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눈물을 머금고, 환한 웃음과 함께, 촛불과 함께 피어나는 것을 요 며칠 사이 나는 지켜보았소. 그래서 비로소 나도 내 오랜 친구를 편히 보내주기로 마음먹게 되었소.
편히 가시오, 내 친구여. 이제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훌훌 털고 떠나소서, 내 평생의 동지여.
당신이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 원칙이 반칙보다 우선하는 세상,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당신의 오랜 친구들, 그리고 이제 막 당신의 새로운 친구가 되기 시작한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몫일 터이니….
노무현! 당신이란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하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