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길 전 장관을 만나다 (1/2)
2011. 5. 23. 월요일
정치부장 물뚝심송
mb의 터무니없는 실정과 가속화 되는 양극화의 결과로 민심이 이탈하여 다음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과반점유 실패가 당연하게 예상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차기 대선에 대한 전망은 아직도 암울하기만하다.
여전히 독보적인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박근혜와 언제 부상할지 모르는 친이계 대표주자간의 차기 대선 후보자격 쟁탈전을 망연자실해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현재 드러나 있는 야권의 대선주자라 해 봐야,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결정적인 흠결을 지닌 손학규와 열광적인 지지자 그룹 못지 않은 강력한 안티세력이 존재한다는 약점을 지닌 유시민 뿐이다. 정동영, 정세균은? 또 민노당 이정희나 노회찬, 심상정은? 잠시 먼산을 바라본 뒤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휴.. 한숨 한번 쉬어 주고...
물론 광범위한 친노 세력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부산의 문재인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현재까지는 직접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거부감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인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중의 하나인 권력의지가 결여되었다는 차원에서도 그렇고, 이렇다 할 정치적 경력이 없는 문재인이 지지도만 가지고 대선 레이스에 참여할 경우 예상되는 다양한 부작용도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행정 부문의 최고 수준인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장관이나 광역단체장급의 실무 경험은 필수적인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노무현 전대통령도 기업인 출신의 문국현 후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직접적으로 지적한 적도 있다.
이에 근본적으로 판을 재조명해 볼 때가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땅에서, 소수일 수 밖에 없는 야권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갖춰야 할 정치적 조건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역사를 돌이켜 보는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 야당사에 우뚝 서 있는 김대중이라는 거인 말고는 야당출신으로 대권을 움켜쥔 유일한 인물은 노무현 뿐이다. 과연 노무현은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이 그를 청와대로 보내준 것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노무현 본인의 인간적인 면모가 수많은 중도계층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객관적인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무현 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정치적 상품성을 지닌 캐릭터는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만큼 그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한가지는 가능하다.
바로 일관성이다.
수십년간 어떤 길을 올곧게 걸어온 사람이 풍기는 아우라는 수십년의 공력을 바탕으로 깔고서야 만들어 지는 희귀한 것이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차기 대선후보의 첫째 덕목은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한길을 걸어 왔는가를 살펴봐야 된다는 얘기이다. 물론 그 일관성이 악으로 점철된 일관성이라면 우리는 또 한명의 가카를 갖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는 있다.
스스로 말 해놓고도 잠시 섬뜩했다. 또 한명의 가카라니... 젠장..
그 다음으로는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그게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가 하는 것을 같이 살펴봐야 한다. 수십년간 일관되게 주장해온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가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가 역시 동일한 수준으로 무게감 있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치있는 주장을 실현하기 위하여 긴 시간을 외길 인생으로 걸어왔다면, 그 후보의 도덕성은 어느정도 검증되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 다음으로는 보다 냉정한 관점에서 살펴봐야 하는 선거 공학적 가치이다. 이 선거 공학적 가치는 바로 당선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훌륭한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당선되지 않는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또한 아무리 훌륭한 정치인이라도 지지그룹이 없으면 당선될 수가 없다. 똑같은 얘기로, 아무리 지지율이 높아도 강력한 안티그룹이 존재한다면 당선은 불가능해진다. 심지어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의 한 가운데에 서있는 거인이었던 김대중조차 이 안티세력의 존재가 매번 걸림돌로 작용을 해왔고, 결국 당선을 위해서는 DJP연합이라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정치적 술수를 구사하고서야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는 역사를 상기해보자.
전국적 규모로 치러지는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초 요건은 수도권에서의 과반 득표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물론 수도권은 최상류층부터 최하층민이 뒤섞여 있고, 영남출신과 호남출신이 뒤섞여 있으며 극단적인 진보와 옹고집쟁이 보수가 혼재한 용광로 같은 곳이다. 따라서 수도권을 제외한 곳에서의 지지도 흐름이 그대로 반영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역에서의 지지는 어떨까?
최우선 과제는 호남의 절대적인 지지이다. 이 호남의 절대적인 지지는 야권출신 대통령으로써는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중요한 고지가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호남의 절대적인 지지만으로는 절대 전국규모의 선거에서 승리할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한다면, 당장에 영패주의네 뭐네 하는 얘기가 나올 수가 있겠지만 현실은 이렇다. 영남의 비토가 존재한다면 대선에서의 승리는 물 건너 간다. 그게 현실의 무서움이다. DJ는 DJP 연합으로 영남의 비토를 잠재웠던 것이고, 노무현은 스스로 부산 출신이어서 영남의 비토를 무마했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자기 지역의 맹주였던 한화갑을 버리고 부산출신인 노무현을 선택했던 광주의 유권자들이야 말로 이런 괴로운 현실의 문제를 꿰뚫어 볼 능력이 있었던 선도적 그룹이라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리하자면, 호남의 지지를 받고 있으면서도 영남에서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덕목이 된다. 이 덕목을 보유한 후보가 있다면 당연한 귀결로 수도권에서의 승리도 보장되기 때문에 이 덕목은 더욱 중요해진다.
세 번째로는 행정 조직과 관련된 전문적인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바로 유능함으로 이어지며, 무능한 진보 보다 부패하더라도 유능한 보수가 낫다는 개소리를 잠재울 수 있는 덕목이 된다.
지난 대선에서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의 리더였던 문국현 후보의 등장은 나름 돌풍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였다. 비정한 무법천지, 맹수들이 드글거리는 정글같은 한국 기업계에서 유일하게 기업다운 기업이라는 찬사를 받는 유한양행(설립자 조차 유일한박사이다. 진짜 유일한 기업인가 보다.)을 이끌던 문국현은 이러다가는 진짜로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기업을 이끌 CEO로 선택되는게 아닌가 할 정도로 돌풍을 일으켰지만 막상 결과는 터무니없이 저조한 지지율에 그치면서, 이명박이라는 회사도 말아먹고 나라도 말아먹은(아직 안 말아먹었다고 주장하지 말자. 거의 다 말아먹어 가고 있지 않은가?) 엉터리 CEO출신에게 참패를 하고 말았다.
첫 번째 이유는 대한민국은 기업이 아니라는 점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정치적 행정적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는 판단이 가장 객관적인것 아닐까? 아무 생각없어 보이는 유권자라 할 지라도 문국현 후보의 경험부족에 대해 우려섞인 판단을 한 것이라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정치라는 것에 대한 아무런 교육훈련을 받지 못한 시장판의 장삼이사들 조차도, 어떤 그룹의 리더라는 자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이 필요한 자리인지는 모두가 안다. 그것도 전국적인 규모의 행정조직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책무를 맡게 되는 대통령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지, 방대한 조직의 인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임명한 각 담당자들에 대한 사후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부의 조직간 갈등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은 배워서 될 일들이 아니다. 실제로 부딪히고 비난과 찬사 속에 파묻혀 보기도 하고 실패와 성공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시간의 힘으로 누적되어야 하는 덕목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것도 돈이라는 단일 가치로 모여 있는 기업과는 달리 도덕성과 가치가 겸비되어야 하고 입 달린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마디씩 거드는 정치조직, 권력조직 이라면 더 말할 이유도 없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대단히 단순화 되었지만 우리는 이렇게 세 가지 필터를 가지게 되었다.
1. 도덕성 : 일관되게 추구해온 가치가 있으며, 그 가치가 훌륭한 것인가?
2. 당선 가능성 : 호남의 지지가 있고, 영남의 비토를 무마할 수 있는가?
3. 능력 : 정치행정에 대한 전문적인 경험이 있는가?
차기 대선에 대한 전망이 암울하고 뚜렷하게 이 사람이다 싶은 후보가 없는 혼미한 상황에서 이 세 가지 필터를 들고 바닥에서부터 탈탈 털어본 결과 우리는 뜻밖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발견된 것이 이 이름 하나는 아니다. 단지 가장 처음 등장한 이름이라서, 제일 처음 얘기가 시작된 것이다.
약력
- 부산대 총학생회장
- 제12대 국회의원
- 제13대 국회의원
- 민주당 원내 수석부총무
- 민주당 원내총무
- 민주당 최고위원
- 민주당 부총재
-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
-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
-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 열린우리당 상임고문
- 경희대 행정대 객원교수
- 대한체육회 회장
-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 제5회 지방선거 부산시장 범야권 단일후보
위키백과에서 긁어온 이 경력을 대략 훑어 보기만 해도 상당히 화려한 이력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력에는 정치인 김정길의 고난의 행군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부산에서만 총 8번의 낙선. 그 중에서 여섯 번은 김영삼의 3당 야합에 합류하지 않고 반대한 죄목으로 이십년이 넘도록 진행되어온 보복성 낙선이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자신이 살아온 도시 부산에서 차가운 냉대를 받아 왔던 것일까.
이름이 떠오르고 그에 대한 질문까지 마련이 되자,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김정길 전 장관을 만나러 갔다.
인터뷰는 여의도에 있는 길벗 산악회 사무실에서 있었다. 길벗 산악회는 일종의 정치인 김정길에 대한 지자자 그룹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김영삼도 그렇고 정치인들은 웬 산악회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굳이 정치인 지지자 그룹이 노사모처럼 무슨무슨 사모 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약간 구태스럽다는 느낌은 있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자칭 딴지스 최고의 미남(실제로는 아무리 봐도 내가 조금 더 낫다.) 죽지않는 돌고래 기자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가던 중 문앞의 복도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는 김 전 장관을 만날 수 있었다.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딴지에서 오셨어요? 하고 먼저 아는 체를 한다.
우연하게도 인터뷰가 행해진 그 날은 5월 18일이었고, 광주에서는 5.18 기념식 행사가 있던 날이다. 김 전 장관은 그 행사에 참여하고 인터뷰 시간에 맞춰 서둘러 올라오는 길이었다.
60을 한참 넘어가는 젊지 않은 정치인 김정길은 노타이 차림에 콤비 자켓, 그리고 청바지 차림이었다. 이런 저런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회의실로 자리를 잡은 뒤, 바로 인터뷰에 돌입했다. 부산 시장 선거에서부터 김정길 전 장관 최측근으로 활동해온 전 청와대 비서관 노혜경씨가 배석한 상태에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물 :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 힘든 대통령을 왜 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한마디로 짧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 : 누가 한다고 합디까? (웃음) 내가 직접적으로 한다고 한 적은 없어요. 대안이 없으면 나도 고민해 보겠다 이런 정도로 했었죠.
<오리발을 내미는 모습에 장난끼가 그득하다.>
물 : 저희는 그런 정치적인 답변은 취급안합니다. 그냥 답변해 주시죠. (웃음)
김 : 지금 대통령 하는거 보니까 저런사람에게 맡겨 놔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우리쪽에도 보니까 지금 보이는 그 사람들에게 맡겨 놓으면 우리가 바라는 정치는 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거에요.
물 : 할만한 사람이 없는 거 같다?
김 : 내 눈에 잘 안들어오네요. (웃음)
(인터뷰의 시작은 이런 질문으로 했다. 아주 단도직입적이고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답변하기 힘든 질문일 수도 있었으나 별 어려움없이 너털 웃음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 딴지일보 인터뷰의 관습헌법에 따른 질문들
물 : 딴지와 인터뷰를 하시면 보통 저희가 하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그런 질문들을 몇 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딴지일보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김 : 있습니다.
물 : 어떤 기사가 기억나시나요?
김 : 근래에는 별로 본 적이 없고..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인터뷰 기사 같은거..
물 : 내용이 보시기에 어떠셨나요?
김 : 딴지 답더군요.
물 : 이번 인터뷰도 그런 분위기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김정길 전 장관님만의 특색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 : 그런데 안티 딴지도 있나요?
물 : 몇 개 있었는데 뭐 별로 보잘것이 없지요.
돌고래 : 다 망했어요.
김 : 망했나요?
물 : 딴지도 망할지경인데요 뭐. (웃음)
김 : 안티딴지들이 먼저 망한거구만.
물 : 다음 질문입니다. 지난번 지방선거 당시 경기도지사 후보분들을 모아 놓고 했던 질문이 한 개 있습니다.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질문이었는데, 저도 해 보겠습니다. 지금 지갑을 꺼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김 : 내 지갑을?
물 : 네. 보여주세요.
<주섬주섬 꺼내서 펼쳐 보이는 지갑에는 2불짜리 지폐 두장,
그리고 꽤 많은 카드들이 들어 있었다. >
김 : 이거는.. 2불짜리 지폐인데..
물 : 2불짜리 지폐가 행운을 가져온다는 얘기는 저도 들어 봤습니다만, 특이하게 두장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김 : 사실은 더 많아요. 한 장은 셋째 딸아이가 준거고, 누가 또 한 장을 주더라구요. 사실은 더 많은데, 그냥 가지고 있는 거 뿐입니다.
물 : 지폐는 그거 밖에 없네요?
김 : 지폐는 또 있어요. 그건 다른 지갑에..
물 : 지폐용 지갑을 따로 쓰시는군요. 얼마 들었는지 궁금하긴 한데.. 다른 카드들은 다 무슨 카드인가요?
김 : 평소에 쓰는 것도 있고, 이건 백화점 카드입니다. 사실 쓰는건 한두개 밖에 없어요. 이거는.. 제가 영화를 좋아하니까 극장 카드입니다. 이건 코레일 카드고, 자주 돌아다니니까.. 그 다음에는.. 아, 이건 집 열쇠입니다.
물 : 집열쇠를 가지고 다니시는군요.
김 : 요즘엔 이거 없으면 아파트에 들어가지도 못해요.
물 : 또 다른건 없으신가요?
김 : 내도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렇습니다.
물 : 별로 특이한건 안 가지고 계시는군요.
(지갑의 내용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를 좋아한다~ 라는 것 정도였다. C*V 카드를 직접 가지고 다닐 정도면 정기적으로 영화를 본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 듯. 영화를 즐겨 보는 정치인이라.. )
물 : 술, 담배는 어느 정도 하십니까?
김 : 원래 아버님이 술을 잘 못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체질적으로 술을 잘 못 먹는데, 자꾸 먹다보니 좀 늘더라구요. 요즘은 맥주 한 세병정도? 양주 1/3 병 정도는 먹습니다. 많이 먹으면 반병 정도는 먹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먹으면 필름이 끊길 수도..
물 : 담배는..
김 : 담배는 못 배웠어요. 대학 때 그러니까 6-70년대인데, 옛날에 영화를 보면 담배 피는게 무지 멋있게 나오잖아요. 그래서 한번 피워 봤더니 기침만 나오고 머리 아프고 이거 폼만 좋지 별로 안 좋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못 배웠어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행운이냐면, 제가 미시건 대학에 객원교수로 있었고 샌디에고 있었고 그러는데 보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엄청 괄시 받더라고. 그거 보면서 이거 참 안 배우길 천만 다행이다 싶었어요.
물 : 운동은 얼마나 하십니까?
김 : 헬스크럽에 아침에 가서 런닝머신 같은거 좀 타고.. 수영도 좀 하고..
물 : 수영은 잘 하십니까?
김 : 내가 거제도 섬사람이잖아요. 딱 그 정도 합니다.
물 : 이제 다른 질문입니다. 딴지일보에 보면 아주 유명한 필진이신 파토라는 분이 쓴 외계인에 대한 연재물이 있었습니다. 아주 유명했죠. 외계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외계인이야 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물 : 다른 사람이야 그렇고,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그건 좀 애매한데, 글쎄.. 있을 것도 같고 없을 것도 같고.. 사실 우리가 생각할 때 태양이 참 크지만 더 넓은 우주에 보면 저런게 수도 없이 있잖아요. 그렇게 보면 외계인이 있을 수도 있고.. 이건 하느님이 있느냐 하는 질문과도 비슷한 거 같아요. 있다고 보면 있는 거고, 없다고 보면 없는 거고..
물 : 그러면 아틀란티스 대륙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그건 전설이잖아요. 전설은 전설이지 그걸 가지고 뭐 있으면 어떻게 되나,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물 :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김 : 전설은 전설일 뿐이죠.
(이 밖에도 무당이 작두 타는 얘기, 삼각팬티냐 사각 팬티냐 이런 것도 다 물어 보려고 했는데, 이런 추세라면 다 똑같은 답변이 나올 것 같아서 통과.)
물 : 이제 시사적인 아주 중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아이돌 그룹 중에 카라 라고 있는데, 다른 언론 같으면 이런 아이돌 그룹을 아십니까~ 뭐 이런 질문을 드리겠지만 저희는 좀 다릅니다. 카라가 직면해 있는 문제와 그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글쎄요, 그 문제는 카라와 자기들이 속한 기획사간의 문제겠죠. 그게 사실은 체육계에서도 있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유명하기 전에 장기계약을 했던 것이 나중에 뜬 뒤에도 원래 계약서 내용대로 끌고 가려니까 문제가 생기는 건데, 처음에 계약을 했을 때와 나중에 유명해 진 다음에는 상황이 다르니까 계약서 내용을 바꾸는게 옳겠죠.
물론 기획사 입장에서는 초기에 계약한대로 법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억울한 문제겠죠. 결국 이 문제는 흔히 말하는 소통의 문제입니다. 처음에 예상한대로 가면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이상으로 유명하게 된다거나 하면 변화된 상황에 대해 서로 소통을 해서 타협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느 한쪽도 자기주장만 해서는 곤란하겠죠.
물 : 예상밖으로 너무 심도있는 답변을 해 주셔서 당황했습니다. 그냥 카라 멤버 이름을 전부 아시는가, 뭐 이런 질문을 할 걸 그랬습니다.
김 : 아, 멤버 이름은 몰라요. (웃음) 그냥 카라가 유명한 아이돌 그룹이다, 라는 정도만 아는 거에요.
(대한 체육회장 출신이라는 경력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대형 기획사와 아이돌 그룹간의 불공정한 계약 관행 등에 대해 어지간히 윤곽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괜히 물어봤다. )
물 : 딴지일보와 관련해서 남로당이라는 거 아십니까?
김 : 그게 무슨 성 해방 이런 거랑 관련 있는 거 아닌가요? 난 그게 무슨 남조선 노동당 얘기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물 : 아시는군요. 딴지의 남로당은 남녀불꽃 노동당입니다. 딴지에 꽤 유명했던 서비스였죠.
김 : 아 근데, 그거 좀 물어봅시다. 그거 왜 없어졌어요?
물 : 돈을 못 벌어서 그런가보죠. (남로당이 왜 없어졌는지는 오히려 내가 모른다. 어쩌라구..)
김 : 그거 고객이 있으면 돈이 되는 건데 왜 그랬을까요?
물 : 웹 비즈니스에서 꼭 고객이 있다고 해서 돈이 되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하여간 그건 그렇고, 이 질문은 다음 질문을 위한 준비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자녀분께서 동성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동성이란 박씨끼리 결혼하거나 이런게 아니고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을 한다는 뜻입니다.
김 : 천만다행인게 아직 우리 애들은 그러지는 않고 있고요. 나는 가톨릭신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성은 하느님이 준대로 해야지, 인간의 임의대로 성을 바꾸고 하는 건 좋진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서로 좋아서 동성애를 한다거나 하는 걸 금기시 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거야 뭐 서로 좋으면 하는 거지만, 그걸 굳이 내가 권장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기존의 틀을 깨거나 하는 파격적인 입장을 발견하길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서로의 의지에 따라 행하는 일에 대해 각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정도만 되어도 현대 사회에 필요한 정도로는 충분한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최소한도의 개방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
물 : 다음은 요즘 아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나가수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김 : 뭐요?
물 :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 말입니다.
김 : 아 그거, MBC에서 하는 프로그램 말하는 거죠? 일요일 저녁에 하는 거 간혹 봤습니다.
물 : 거기 등장한 임재범이라는 가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임재범이라는 가수에 대해서 아십니까?
김 : 이름은 들어 봤어요. 내 그 양반 노래 부르는 것은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가창력이 뛰어나다고들 하고 롹 가수였다가 트로트(남진의 빈잔)를 불러서 떴다 그러던데 뭐를 물어보는 거죠?
물 :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사건들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가를 여쭤 본 것입니다.
김 : 아, 관심이 좀 있죠. 다음 주에 출연을 해야 되는데 맹장염이 걸려서 문제다 뭐 이런 얘기까지 들었어요. 빨리 나아서 출연을 했으면 좋겠네요.
물 : 맹장염 걸린 거 까지도 알고 계시는군요. (웃음) 이제 이런 종류의 질문은 대략 마무리 하고, 살아오신 얘기를 좀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김정길 전 장관의 개인사
물 : 시간 순으로 아주 어렸을 때 얘기는 넘어가기로 하고 바로 대학시절로 가겠습니다. 부산 대학교에서 총학생회장을 하셨잖습니까? 제가 알아본 바로는 이런 소문이 있더군요. 부산대에서 총학생회장을 하고 싶어서 일년을 꿇었다~ 이거 사실입니까?
김 : 그건 사실입니다. 사실인데, 어떻게 된 얘기냐면, 제가 대학을 가는데 일지망을 의예과를 했었어요. 그런데 이지망으로 생물학과에 들어간 겁니다. 그 때 부산대는 지방대라서, 시국 사건에 대해서는 늘 앞장서지 못하고 다들 파장이 되면 뒤늦게 뛰어들어 뭐라 하고 그런 실정이었고 그게 난 아주, 이 촌놈들이 불만이었어요. 그래서 3학년때, 총학생회장 선거에 도전했는데 떨어진거죠. 떨어진 다음에 다음해에 내 친한 친구를 학생회장을 시켰어요. 그리고 나서 졸업을 한겁니다.
그 때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성적도 최고로 좋은 수준이었고, 그냥 대학원에 가서 생물학 공부를 계속 할까, 그랬다면 지금 내가 실험 가운 입고 연구실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겠죠. 그런데 또 한쪽으로는 시국사안에 대한 관심도 많았어요.
그래서 생물학과를 졸업한 뒤에 학사 편입을 하게 된 겁니다. 꼭 학생회장이 하고 싶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시국이나 정치에 대한 관심, 또 학문적인 관심도 겹치면서 정외과에 학사편입을 하게 된거에요. 정외과 3학년으로 학사편입이 되니까, 다시 총학생회장 출마 자격이 생긴거죠. 그래서 기왕에 정외과에 온 김에 또 한번 도전을 한거죠.
당시에는 학생회장 선거가 요즘보다는 훨씬 더 치열했고, 주로 고등학교 동문간의 대결의 성격이 강했어요.
물 : 그럼 동아고 정도 되면 꽤 우월한 지위 아니었나요?
(김 전 장관은 부산 동아고 출신이다.)
김 : 부산고나 경남고가 있잖아요. 동아고야 그 다음이었던거죠. 거기다가 단과대도 문제가 되는거에요. 문리대나 상대가 인원이 많잖아요. 정외과는 법대 소속인데 숫자가 무척 적죠. 거기다가 문제가 또 생긴게, 내가 학사편입을 한 정외과에서 또 한명의 후보가 출마를 했어요. 같은 단과대에 같은 정외과에, 거기다가 같은 동아고 출신의 후배였어요. 이렇게 되면 선거 하기 무척 힘들어지죠. 거의 불가능한 선거가 되어 버린 거에요.
그래서 요새말로 단일화 과정이 있었죠. 서로 승복하기로 약속하고 단일화를 시도한거에요. 당시 정외과 학생수가 한 스무명 되었는데 휴학하고 군대가고 뭐하고 해서 열댓명 있었어요. 그래서 학교앞 막걸리집에 몰려 가서 두사람이 합의해서 승복하기로 얘길 한거죠. 그래서 열두명이 모였는데, 그 중에 그 후배가 3표를 얻고 내가 9표를 얻은거에요. 내가 이긴거죠.
근데 이 친구가 자기는 3년이나 같이 생활을 했고, 저 사람은 겨우 이제 학사편입해서 몇 개월 같이 다녔는데 이럴 수가 있냐고 그러면서 기분이 상해가지고 술잔을 집어 던지고 나가 버리더라구요. 따라가서 설득을 해도 설득이 안돼. 결국 같은 단과대에서 둘이 나가게 된거죠.
물 : 단일화에서 이기셨는데 상대가 불복한거네요.
김 : 이겼는데 결국 둘이 나가게 된거죠. 부산고 출신 상대에서 단일후보가 나오고 문리대에서도 단일후보가 나오고, 굉장히 어려운 선거를 한거죠. 우리는 같은 단과대에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 둘이나 나온거에요.
(예나 지금이나 단일화는 어렵다. 조낸 어렵다. 같은 얘기로, 단일화에 패배하고 흔쾌히 승복하는 후보를 발견하는 것 역시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인간들이 다 그런거지 뭐. )
그런데 9월 9일 9시에 투표를 해 가지고, 9표 차이로 이긴 겁니다. 나인 포카입니다. (웃음) 겨우 신승을 한거죠. 그래서 71년도에 부산대 총학생회장을 하게 된겁니다. 거기서 나온게 무슨 칠일동지회(71년도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의 모임) 같은 것도 하게 되고..
물 : 정말 어렵게 당선되셨군요. 그런데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당선된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공약이 좋았나요?
김 : 그 때, 부산대가 하도 시국사건에 대해 뒷북이나 치고 그랬으니까, 내가 그 얘길 했어요. 지금 시국 사건들에 관련된 현안이 무척 많은데, 난 졸업장이 하나 있지 않냐, 그러니까 난 졸업장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좀더 소신대로 싸울 수 있잖냐, 이런 얘기가 먹힌 거 같습니다.
거기다가 상대후보가 저를 공격하기를, 아까 그 얘기같이 김정길이 저 놈은 학생회장 해 먹으려고 졸업까지 해 놓고 또 편입해서 들어온 놈이다, 욕심쟁이다, 뭐 이런 얘기였어요. 그래서 단과대학별 합동 연설회를 하는데 그 얘길 한겁니다.
내 보고 학생회장 한번 떨어진 넘이 또 해 먹으려고 욕심부린다고 하는데, 당시가 박정희가 3선 해 먹던 시절 아닙니까, 어떤 놈은 대통령 두 번 당선시켜줘도 헌법까지 바꿔가며 대통령을 또 해먹겠다고 하는 지독한 욕심쟁이도 있는데 내가 무슨 욕심을 부렸다고 그러느냐, 하면서 사람들이 다 웃고 난리가 났었어요.
그렇게 박정희 욕한번 하고 학생회장에 당선된 거죠.
- 지역주의 철폐를 위한 싸움의 시작
물 : 그 때 선거공약으로 지역주의 철폐를 주장 하셨었다는데, 당시는 정치권이 지역감정을 이용해 먹던 거의 초창기 아니었나요?
김 : 맞아요. 사실 그 전에는 지역감정 같은 게 거의 없었어요. 뭐 말로는 옛날에 고려시대 훈요십조 같은 얘기까지 하고 그러는데 그건 의미가 별로 없다고 봅니다. 그 때만 해도 호남 사람이 영남 와서 국회의원도 되고, 반대로도 하고 그러던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박정희-김대중 선거도 하고 그러면서 영남표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서 공화당에서 지역감정을 조장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 때 당시 국회의장 하던 이효상씨가 하와이론, 신라 대통령론 뭐 이런 소리 하면서 지역감정이 시작된 걸로 봐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남북도 갈린 마당에 동서까지 분열되는 지역주의는 안된다 하면서 언론에 인터뷰도 하고, 지방 5개 국립대학을 다 초청해서 친선 체육대회도 하고, 지방 대학들 막 돌아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지역감정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아보기 위해 실제로 한 달 여를 호남 지방을 혼자서 여행도 다녀 봤어요. 택시도 타보고, 여관방에 가서 일하는 분들하고 얘기도 해보고, 그렇게 알아 봤더니 실제로 지역감정 같은 건 별로 없더라구요. 정치권이 이용을 해 먹은 거 뿐이죠.
물 : 실질적인 지역주의는 없었다?
김 : 그렇죠. 하지만 그 때부터 이 지역주의에 불이 붙은 겁니다. 그래서 대학들이 하계 봉사를 가는 것도, 자기 지역에 가는 관례가 있었는데, 부산대 하계 봉사를 가면서 전남 광양으로 갔습니다. 한 80명 정도 해서 의료봉사까지 해서 도계를 넘어 전남 광양 골약면(현 골약동)으로 간 겁니다.
한 열흘 봉사활동을 하면서 아이들도 가르치고, 길도 쓸어주고, 우물에 덮는 것도 없어서 우물 지붕도 만들어주고, 의료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한 열흘 만에 정이 들어서 나중에 배타고 돌아 오는데 주민들도 울면서 환송해주고, 우리도 막 울고 그랬었어요.
아, 이렇게 서로 소통하고 그러면 아무 문제 없는 건데, 괜히 정치권에서 이런 걸 이렇게 악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절감하게 된 겁니다. 사실 그 때부터 저는 지역주의와 맞서 싸우기 시작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3당 합당 때부터 안 따라가고 지역주의와 싸운 걸로 알고 계시는데, 저는 이 때부터 지역주의와의 싸움을시작한 겁니다. 이 손바닥 만한 땅덩어리에서 남북으로 갈리고 동서로 갈리고..
- 최초의 구속과 제적
물 : 그래서 그 때부터 지역주의와 싸움을 시작하신 거군요. 근데 그러다가 결국 유신정권에 의해 구속까지 당하게 되시는 거군요.
김 : 유신 전에 구속이 되었습니다. 유신 직전에 준비하는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죠.
그게 또 어떻게 된거냐면, 제가 부산대 총학생회장 하는 동안 모든 시국 사건에서 부산대가 선두였어요. 그 때 지방국립대학 육성법 뭐 이런 문제로 부산대에서 데모도 하고, 대구 경북대에 총학생회장을 만나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경북대 학생처장이 저한테 하는 얘기가, 예년에는 주로 북풍이 몰아쳤는데 올해는 왜 이렇게 남풍이 세냐고.. 이런 재미있는 얘길 한 적도 있죠.
그 때 서울에서 71년도 가을에 전국체전이 있었죠. 그래서 제가 그 때에 맞춰서 전국 총학생회장들에게 개인적으로도 친분도 있으니까, 다들 서울에서 한번 모이자고 제안을 했었죠. 임기도 한참 되었고, 다들 모여서 얼굴도 보고 막걸리도 한잔씩 먹고 그러자는 모임이었어요. 별거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세종문화회관에서 모였는데, 그 때 이 사람들은 유신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에요. 우린 전혀 몰랐죠. 우린 그런거 모르고 전에 불타 버렸던 세종문화회관 앞에 커피숍에서 모여 있었는데, 불시에 종로 경찰서에서 거기를 덮친 겁니다. 정보과 형사들이 총 출동해서 거기 모였던 전국 총학생회장들이 몽땅 잡혀갔어요. 몸수색 다 당하고 하룻밤 동안 잡혀 있었죠.
물 : 사실 그 모임은 정치적인 모임은 아니었던 거죠?
김 : 전혀 아니었죠. 아마 그냥 총학생회장들이 다 모인다니까 예방 차원에서 그랬던 거 같아요. 사실 내가 그 모임을 주도했다는 것 정도는 알았겠죠. 그래서 우리가 막 항의를 한거에요. 뒤져봐야 아무것도 안나오고 그러니까.. 그래서 항의한 끝에 담날 새벽에 풀려나서 고속버스 타고 내려가고 있는데 그 때 위수령이 떨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고대에 군이 진주하고 뭐 5개 대학에 군대가 들어간거죠.
결국 다른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이 사건에 대해 아무 소리도 못했는데, 제가 내려가면서 생각을 해 보니까 이 쉐끼들 참 웃기는 놈들이다 싶어서 박정희 대통령, 그러니까 대통령이 내린 위수령에 대해 항의성명을 준비하게 된겁니다. 위수령 반대 이런거죠.
그래서 성명서를 준비해서 월요일 아침에 발표하려고 전날 밤 열시쯤에 부산 광복동에 왕다방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학생회 간부들하고 모여서 의논을 하려고 했던 거에요. 근데 전국적으로 위수령 떨어지고 그러니까 간부들도 무서워서 안 나오는거에요. 두명인가 나왔어요. 아마 불이익을 당할까봐 두려웠겠죠.
그렇게 모여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요. 내가 거기 있는 걸 아무도 모르는데 전화가 온거죠. 카운터에서 전화를 받아서 여보세요, 하니까 부산대 총학생회장 김정길씨냐고 확인을 하더라구요. 맞다고 하니까 바로 전화를 탁 끊어요.
물 : 있는가 확인한 거네요.
김 : 그렇죠. 끊자마자 바로 사복형사들이 달려 들어서 양팔을 딱 붙잡아요. 그러더니 신분증 보여주면서 형사라고, 바로 옆에 창천 파출소로 가자는 거에요.
근데 내가 그 때 성명서하고 자퇴서를 가지고 있었어요. 어차피 성명서 내면 짜르겠다고 할 거니까, 내 먼저 스스로 자퇴하겠다 이런 심정이었죠. 그래서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이 성명서가 문제가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이걸 없애야 겠다 싶어진거죠.
그래서 시간을 끌면서 실랑이를 한거죠. 난 못간다, 뭐 이러면서 시간을 끌다 보니 주변에 손님들이 다 가버리고 우리만 남았죠. 그래서 내가 이 성명서를 없애려고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하니까 보내 주더라구요.
화장실 가서 이 성명서를 갈기갈기 찢어서 변기에 버리려고 보니까, 그 예전에 쓰던 쪼그리고 앉는 변기 있잖아요. 근데 또 줄을 잡아 당겨도 물이 안나와. 고장인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갈기갈기 찢어서 손으로 변기 구멍속으로 쑤셔 넣고 나왔죠. 그리고는 나와서 날 데려가려면 내 발로는 못 가니까 구속영장을 가져오거나, 강제로 끌고 가려면 내가 힘이 딸리면 끌려 가겠지, 뭐 이런거죠. 그러고 강제로 끌려 갔어요. 창천 파출소로 갔더니 몸수색을 하더라고요.
<공익광고 : 변기에 이물질을 넣지 맙시다. 막히면 치울 것도 아니면서..>
물 : 그 시점이 그러니까 일요일 밤인거죠?
김 : 그렇죠. 그렇게 끌려 갔다가 다시 지프차가 오더니 싣고 가요. 가보니까 동래경찰서더라고요. 잡힌 곳은 중부경찰서인데, 부산대가 동래경찰서 관할이니까 거기로 데려간거겠죠. 가서 또 몸수색을 해요. 근데 뭐 나오는게 있어야지. 자퇴서 밖에 없는데. 그래서 내가 뭐 때문에 잡아왔냐, 죄명을 대라, 뭐 이렇게 항의를 한 겁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또 난감하죠. 뭐 증거가 없으니까.
그렇게 잡혀 있었는데 새벽 두시쯤 되니까 형사가 이만한 몽뎅이를 가지고 들어와요. 오자마자 바로 이 새끼 하면서 막 후려치는거에요. 나도 뭐 맞아 죽으나 이래 죽으나 하면서 이 새끼 왜 때려~ 하면서 막 붙었죠. 그렇게 막 싸움을 하면서 나를 죽이라~ 하면서 덤벼 드니까, 형사가 이거 네가 썼지! 하면서 뭘 들이대는데 보니까 화장실에 버린 그 성명서를 하나하나 다 모아서 테이프로 붙여서 가지고 온거에요. 그걸 또 볼펜으로 쓰는 바람에 하나도 안 번지고..
물 : 그게 물이 안내려가서.. (웃음)
김 : 그런거죠. 그래도 그게 내가 성명서를 발표한 것도 아니고 그냥 써서 가지고 있던 걸로는 죄가 성립이 안되죠. 그런데 이걸 가지고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거에요. 그 때는 대통령의 권위가 대단하니까, 대통령에게 도전했다 뭐 이런거죠. 그러면서도 이걸로는 죄가 안되니까 한 오월달에 데모한걸 가지고 집시법,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뭐 이런걸로 영장을 청구한거에요. 한 육개월 지나서.
그러려면 잡혀갈 사람이 한둘이 아니죠. 근데 아무도 안 잡혀가고, 전국에서 위수령 관련으로 제가 딱 혼자 구속이 된 겁니다. 그 때 부산일보 사회면 탑 기사 부산대 총학생회장 전국에서 첫 구속 뭐 이렇게 나오고 동아일보에도 3단으로 부산대 총학생회장 김정길 전국에서 첫 구속. 뭐 이렇게 나오고 그런 겁니다.
물 : 그 시점이 71년인가요?
김 : 71년이죠. 71년 10월 15일인가 17일인가에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때 각 대학별로 또 제적학생 명단이 통보가 됩니다. 부산대에서는 70여명 정도 명단이 왔을 겁니다. 여기서 또 노혜경 교수하고 내 인연이 나오는데, 그 때 노교수 아버님이 부산대 학생처에 교수로 보직학생과장이셨지요. 그 때 제적학생 명단이 내려와서 학생처장하고 그 학생과장님이 고민을 하시더라구요. 그 때는 문교부에서 학교로 명단을 내려 보내면 제적을 시켜야 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제가 담판을 한 겁니다.
부산대가 내가 총학생회장 하기 전까지만 해도 조용한 대학 아니었냐, 내가 학생회장 하면서 시끄러워진건데, 문교부하고 타협을 해서 내만 짜르십쇼, 김정길이 이넘만 아니면 부산대 학생들은 다 얌전한거 아니냐, 그러니까 김정길만 자르기로 하고 나머지는 살려주시라 이거죠.
실제로도 그 때 명단에 있던 학생들이 대부분 내 따라서 학생회 일하던 간부들이었고 그러니까요. 주동자는 나였고 그런거죠.
결국 그래서 문교부와 타협을 해서 나 혼자만 짤리고 말았어요.
물 : 그러면 요즘말로 자원해서 독박을 쓰신거네요.
김 : 그런거죠. 하여간 그렇게 되어서 다른 대학은 여러명씩 제적당했는데, 부산대는 나 혼자만 제적당하게 되는거죠. 제적 당하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구속도 당하고..
물 : 그 상황에서 교수님들도 좀 난감하셨겠습니다. 학생이 나서서 스스로를 자르라고 그러고..
김 : 그렇게 안하면 70여명이 제적될 판이니까.
물 : 그래도 교수님들은 학생을 보호해야 되는 입장이었을 텐데..
김 : 할수 없었던 거죠. 안 그러면 다른 학생들이 우르르 짤릴 판이니까. 다른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거죠.
물 : 그 때만 해도 제적 당한 다는 것은 매우 큰 불이익이었죠.
김 : 그렇죠. 한번 찍히면 취직도 안되고, 반대로 또 그 때도 어용 학생회장 하면 저 쪽에서 알아서 취직도 막 시켜주고 그랬어요. (웃음)
- 결혼생활
물 :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학생회 시절 얘기는 이걸로 넘어가기로 하고, 결혼과 가족 문제를 좀 여쭤보겠습니다. 사모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김 : 좋은 사람이죠. (웃음)
물 : 정치인들의 경우 장인어른 직업이 참 중요하죠.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도 그랬고.
김 : 우리 장인어른 장모님은 결혼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도 못 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게 정치인 입장에서는 핸디캡이라면 핸디캡인데, 저는 재혼입니다. 국회의원도 되기 전에, 한참 힘들 때, 그 때 한번 결혼에 실패하고 그리고 나서 지금의 집사람을 만났죠.
첫 결혼한 때가 30대 초반이었는데 결혼해서 3년 정도 되었나 해서, 여러 가지로 성격도 안 맞고 잘 안맞더라고요. 선거 두 번 떨어지고 사글세 방도 없는 시절이었는데 어려웠죠. 그 사람은 부산에서 집이 좀 살기가 괜찮은 부유한 집 출신이었는데, 시골 집에 애들 셋 데려다 주고 가버리더군요. 딸이 연년생으로 셋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원도 못하고 셋방도 없고 혹은 셋이나 딸리고 그런 남자한테 처녀의 몸으로 시집을 온 거에요. 참 대단한 결단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렇게 결혼해서 아들이 둘이 생겼죠. 원래 아들 하나 낳고, 나중에 하나는.. 그게 좀 챙피하기도 한 얘긴데, 원내총무 하던 시절에 나이가 48이나 되어가지고 늦동이를 하나 낳은 거에요.
물 : 48세에 늦동이라니, 그런 것도 유행의 첨단을 달리시는 건가요?
김 : 그런 것도 첨단인지는 모르겠는데, 하긴 그 때 또 늦동이가 유행하기도 했었죠. 유행따라 한건 아니고. 집사람은 나랑 열살 차이가 나서 서른 여덟이었죠. 하루는 집에 왔는데...
노혜경 : 그런 건 너무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웃음)
김 : 아.. 이런 건 기사로 쓰지 마시고 그냥 참고로 얘기해 드릴께요. 하루는 집에 왔는데, 집사람이 몸이 좀 이상하다 이러는 거에요. 그래서 몸이 이상하면 병원에 가야지 하니까 그게 아니라 임신인 거 같다는 거에요.
아, 십이년 동안에, 그 위에 형하고 열두살 차이거든. 피임도 안해도 임신도 안되고 그러니까 우린 다 끝난줄 알았지.
(우린 이런 얘기는 또 악날하게 쓴다. 우리네 인생에서 이런 얘기가 안 중요하다면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독자 제위께서는 항상 조심하시라. 우리들 중 누구에게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물 : 그러면 재혼하신게 언제쯤이신거죠?
김 : 그러니까 85년에 내가 처음 국회의원 된거니까.. 83년에 결혼한 겁니다. 굉장히 어려웠던 시절이죠. 어려웠는데 동생한테 돈도 좀 빌리고, 그래도 국회의원도 출마하고 그러니까 신용금고, 저축은행 같은데서 신용으로 대출도 좀 해주고 해서 조그마난 수퍼마켓 같은 걸 했어요. 그래서 살았던 건데..
하여간 그래서 이렇게 아이가 생기니까 솔직히 고민을 좀 했어요. 지금이야 가톨릭이지만, 당시에는 개신교였는데 내가 장로고 집사람이 집사였어요. 기독교에서는 낙태를 금지하잖아요. 그래서 하느님이 주신 선물인데 하면서 조금 챙피하긴 하지만 그대로 낳았어요. 그 다음에 14대 국회의원 선거 나가서 떨어지잖아요. 제1야당 원내총무면서도..
아, 하느님이 떨어질 거 미리 알고 집에 가서 애나 봐라 하면서 주신 선물 같아. 그런데 처음에는 좀 창피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낳고 나니까 막상 시간이 많이 나서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보니까, 전에는 애를 낳아도 막상 들여다 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애를 보게 되니까 그렇게 예쁠수가 없어.
물 : 5남매 중에서 막내만 사랑을 듬뿍 주셨군요.
김 : 아 듬뿍 받았지. 그런데 이 넘이 머슴앤데 완전히 나를 똑 닮았어. 완전히 카본 카피야. (전체 웃음)
아, 이런건 좀 구체적으로 쓰진 마시오. 그냥 여담으로 재미있으라고 한 얘기니까..
(전체 인터뷰 중에서 이 부분에서 제일 목소리가 밝고 톤이 높아진 거 같다. 정치인이고 대통령이고, 이 땅의 아부지들은 다 똑같은 거. 이거 부인할 도리가 있겠나 싶다. 이 부분, 너무 구체적으로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 부탁은 죄송하지만 못 들어드리게 되었다. 오히려 김정길 전 장관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측면일 것 같아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적었다. )
물 : 정치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사모님들한테 많이 미안해하지 않으십니까?
김 : 많이 미안하죠.
물 : 그런 표현은 어떻게 하십니까?
김 : 여보 미안해.. 이 말 밖에 없지.
물 : 많이 듣던 표현이군요.
김 : 사실 집사람이.. 이런 거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말라 그러는데 자꾸 구체적으로 나오네. 재혼 해가지고 첫 선거를 치르는데, 지역구에서 다들 재혼한 거 알잖아요. 그 때는 진짜 어려워가지고 공탁금도 마련하기가 어려웠어요.
두 번 째 선거니까 81년이에요. 광주가 80년이고..
(이 인터뷰가 있던 시점이 공교롭게도 바로 5월 18일이었다. )
- 낙선의 경험
김 : 그 때야 뭐 정치하던 사람은 다 규제로 묶이고, 아무도 없었죠. 그래도 저는 무소속으로 했었기에 안 묶였어요. 그래서 출마를 했는데, 야당 후보들이 유세랍시고 하는 게 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이러면서 하더라구요.
물 : 야당 국회의원들이요?
김 : 그 때야 뭐 다 통일주체 국민회의 하던 사람들이 그냥 출마하고, 민한당이라고 가짜 야당이 있었고, 안기부에서 오더 공천 뭐 이런거 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난 그런 정당에 공천을 받을 수 없다하면서 무소속으로 또 출마한거죠.
그 때 연설하러 올라가서, 합동유세 하면서 모이기도 많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광주사태의 원흉이 누구냐~ 전두환씨~ 막 이러면서 분단된 조국의 비극을 악용하는 자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뭐 이런 연설을 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연설을 듣는 사람들이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고 하데요.
물 : 그렇겠네요. 당시가 어떤 시절인데..
김 : 다들 전두환 대통령 각하 찾는데 전두환씨 라고 하고.. 제가 직접적으로 전두환이 광주의 원흉이라고 한건 아니지만 듣는 사람들은 다 전두환 얘기라고 알아듣게 연설을 한거죠. 그렇게 연설을 하고 나면 사람들이 없어요. 내가 연설 마치고 나면 다들 나를 따라 나와서 그런 거에요.
그러고 났더니 바로 보안사에서 전화가 와요. 만나자고. 그래서 사무실 옆에 커피숍에서 만났더니 바로 당신, 쓰는 용어가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 오늘, 청학국민학교에서 합동 연설회 하면서 전두환 대통령 각하를 광주사태의 원흉이라고 그랬지? 하고 정색하고 묻는 거에요.
근데 내가 그렇게 무식하게 광주사태의 원흉은 전두환이라고 안했다고. 듣는 사람들이야 그렇게 듣게 말하긴 했지만.
그래서 정색하고 답을 했죠. 여보, 당신 진짜 큰일 날 사람이네. 내가 언제 그런 얘길 했지? 녹음 다 했으니까 가서 들어보자. 이런거에요. 그러니까 말문이 딱 막혀서 말을 못해. 그러더니 다음날부터 언론에 김정길이 구속~ 뭐 이런 얘기가 막 나오기 시작하더라구요.
전국에서 내 연설이 발언 수위가 가장 쎘다고 그러더라구요. 그 험한 시절에..
그렇게 계속 선거 과정에서 구속한다는 얘기가 계속 나오면서도 막상 구속은 안시키더군요. 왜? 구속 시키면 옥중당선 된다고. 낙선하고 나니까 선거법 위반으로 딱 걸더군요.
개표과정에서는 새벽두시까지는 내가 당선권에 있었어요. 둘 뽑는데 3등으로 떨어졌는데 8천표 차이로 떨어졌었죠. 근데 문제는 그 때는 투개표소에 참관인도 없어요. 그러니까 뭐 내 표 98장에 양쪽 겉에만 민정당 표 붙이면 민정당 표 백표, 민한당 표 붙이면 민한당 표 백표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놈은 절대 당선시켜서는 안될 놈이다 해서 떨구려고 참관인도 없으니까 맘대로 하는 거에요.
그렇게 떨어졌습니다.
(근데 집사람 얘기하다가 옆으로 새도 한참 새 버렸다. 어찌 되었거나 우리에게는 저런 시절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얘기라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
사실 이게 제가 재혼한 얘기 하다가 나온 건데, 그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있던 얘깁니다.
집사람이 몸뻬 입고 버스 타고 다니면서 명함 돌리던 얘기입니다. 그 때야 뭐 할 수 있는게 명함 돌리는 거 밖에 없었으니까. 자갈치 시장 어딘가에 있는 횟집에서 그랬다는 거에요. 들어가서 저 김정길 후보 안사람입니다. 한표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명함을 주고 나오는데, 횟집 여주인이 손님들하고 얘기하면서 저거 김정길이 세찌다, 세찌. 이러더라는 거에요.
둘째도 아니고 셋째라는 거지.
그래서 집사람이 그냥 나오려다가 그대로 가면 표가 안될 거 같아서 다시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횟집 여주인 손을 꼭 잡고, 어머니, 저 김정길이 셋째가 아니고 둘째입니다. 했다는 거에요.
그랬더니 굉장히 미안하지. 여주인이 얼굴이 빨개져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손을 잡고 아이고, 미안하다고. 손님들도 그걸 다 보고.
그렇게 그냥 나왔으면 표가 안 되는데, 그걸 다시 들어가서 손 잡고 셋째가 아니고 둘째라고 하면서 제 남편에게 떤질 돌이 있으면 제게 떤져 주시고, 한표 꼭 부탁하겠습니다, 하니까 표가 되는거죠.
이런 얘길 듣는데 눈물이 나는 거죠. 제가 집사람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하는거냐 이겁니다.
물 : 정말 가슴아픈 일이군요.
김 : 그것만 있으면 다행인데요. 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영도 산복 도로에 무슨 구멍가게를 인사하러 들어갔더라는 겁니다. 우리 집사람이 신분은 안 밝히고 가게에는 비가 오니까 나이든 분들이 몇사람이 앉아서 소주를 먹고 있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명함을 주면서 김정길 후보에게 한표 부탁드린다고 얘길 하니까, 그 분들이 묻더라는 겁니다.
아줌마, 김정길이한테 일당 얼마받고 운동합니까~ 해서 김정길후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일당을 주겠어요, 그냥 자원봉사합니다 하니까, 그러더랍니다.
아줌마, 쏙지 마세요, 김정길이가 본마누라하고 이혼하고 아주 돈많은 과부하고 결혼해서 돈 억쑤로 많으니까, 쏙지말고 일당 받으세요. 이러더라는 거죠.
그래서 집사람이 신분을 안 밝힐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똑같은 말로 제가 김정길 후보 안사람인데요, 남편에게 던질 돌이 있으시면 제게 던지시고 꼭 한표 부탁드립니다, 한거죠. 그러니까 그 분들이 얼마나 머쓱하고 미안하겠어요. 그런 상황을 참고 그렇게 하니까 표가 되는 거겠죠. 이런 것들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정치라는거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특히나 주변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족과 배우자에게 정말 인간적으로 못할 짓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선거에 돌입하면 그 고통은 현실적인 피해, 인간적인 모멸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 과정을 이 김정길이라는 사람은 최근에 치러진 부산시장 선거까지 열번을 겪어 낸다. 그 중에서 이긴 것은 겨우 두 번.
그런 과정을 겪어낸 당사자도 놀라운 인내력의 보유자이지만, 그 가족들에게는 진짜 존경의 마음이 생길 정도이다. 그런 뜻에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경험담을 계속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어 봤다.)
- 당선의 경험
김 : 제가 처음에 국회의원이 된 게 2.12 총선에서 였습니다. 그 때 주변에서 전부다 저에게 또 3등 한다고 했었어요. 두 명 뽑는데. 그 때 제 나이가 38세였습니다.
네 사람이 나왔었는데, 박찬종 의원. 인기가 하늘을 찔렀었죠. 또 하나가 민정당 실세라던 윤석순 의원. 전두환씨 친사돈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 국회의원 만들려고 전두환이 선거기간 중에 부산에 두 번이나 왔었습니다. 와서 시청에다가 부산 지역 유지들을 다 모아놓고 윤석순이 국회의원 되면 부산에 예산 많이 내려 보내준다 뭐 이러고 다닌 거죠.
그 선거에서 제가 일등을 했습니다. 이 선거에서도 재미있는 얘기가 많았어요.
그 때는 기호도 정당순이 아니라 제비뽑기 했어요. 근데 기호가 4번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죽을 사짜라고 다 싫어하는데 나야 뭐 사랑사짜 사번일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이러고 웃곤 했죠. 그 때 마지막 합동유세를 동구 성남초등학교에서 하는데, 연설 순서도 제비뽑기를 했는데 4번이 나온거야.
그 때 유세장에 이만명이 넘었어요. 우리 지역구 뿐 아니라 다른 지역구에서도 연설 들으러 온 거에요. 박찬종 의원이 인기가 좋으니까 박찬종 연설 들으러 오고, 김정길이가 연설 잘한다 그러니까 김정길이 연설 들으러 오고.
네 사람이 연설을 하는데, 당시 현역 국회의원 윤석순의원, 박찬종 의원은 서구였는데 서석재한테 밀려서 여기로 온거죠. 이만섭 의원이 하던 당에서 현역 국회의원이던 노차태라는 사람하고 나하고 있었죠.
물 : 윤석순 의원하고 박찬종 의원이 된다고 봤겠군요.
김 : 그렇지, 다들 그렇게 본거죠. 당시에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던 시점이고 인기가 좋았으니까. 그런데 난 신민당 공천을 신청했는데 안돼가지고 공탁금을 마련하기 힘들어서 민한당 공천으로 나왔었어요. 무소속으로 나오면 공탁금이 더 비싸니까 그럴 수가 없었거든요. 그 땐 민한당도 좀 바뀌어서 공천도 좀 제대로 하고 했어요.
노차태 후보가 먼저 얘길 하는데, 성남초등학교가 동구였거든요. 노차태 후보도 동구 사람이었고. 근데 연설의 내용이 뭐였냐면 나를 뽑아주면 예산을 많이 받아와서 동구를 발전시키겠다.. 이게 연설의 요지였어요.
두 번째 윤석순의원이 올라가서는 나를 뽑아주면 돈을 많이 받아와서 부산을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세 번째로 박찬종 후보가 나와서는 연설을 뭐라 하냐면, 자기를 압도적으로 뽑아 달라고, 그래야 중앙에 올라가서 큰 정치의 거목이 된다, 뭐 이런 내용이었죠.
그러고 내가 할 차례가 되었는데 청중이 아무도 안가고 다 있는거야. 내가 연설을 좀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내 연설을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올라가서 즉흥적인 연설을 했어요. 뭐라 했냐면, 여러분, 우리가 앞에 세 후보의 연설을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투표 할 때 세 후보들 한사람도 서운하지 않게 투표를 합시다~ 한거죠.
첫 번째, 동구 발전시키자는 노후보, 우리 동구청장 시킵시다. 동구 발전시키려면 동구청장을 해야지.
두 번째 윤석순 후보는 부산을 발전시키자고 하시니까 부산시장을 시켜줍시다. 맞잖아요. 부산 발전시키려면 부산 시장을 해야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전부 웃으면서 박수를 쳐요.
세 번째로 박찬종 선배가 자기를 키워주려면 몰표를 줘야 된다고 하시는데, 박후보에게 여러분이 몰표를 주시면 이 김정길이 떨어집니다. 이번 선거는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선거니까 야당 후보를 뽑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박찬종 후보에게 몰표를 주시면 제가 떨어지니까 안되고 표를 나눠 찍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표 찍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아빠는 무조건 박찬종을 찍으십쇼, 엄마는 무조건 김정길을 찍으시면 됩니다. 라고 한거에요.
그렇게 했더니 전 언론에 가십란에 그 말이 다 나왔어요. 아빠는 박찬종, 엄마는 김정길, 이 말이 유행어가 된거죠.
물 : 새로운 유행어를 하나 만드셨군요.
김 : 그런 셈이죠. 그 결과 선거 개표 결과를 보니까, 제가 2위였던 박찬종 선배보다 만육천표나 더 얻어서 일등을 한 겁니다. 2등으로 당선된 박찬종 선배는 윤석순 후보를 가까스로 이겼었어요. 결국 박찬종 후보는 당선사례를 다니면서 여러분, 제가 까딱하면 떨어질 뻔 했습니다~ 하고 다니게 된거죠. (전체 웃음)
(당시 돌풍의 주역이었던 신민당의 후보인 박찬종을 상대로 과거 전두환 밑에서 가짜 야당(업계 전문용어로 사쿠라 야당이라고도 한다.) 노릇 하던 민한당의 후보인 김정길이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것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당시 신민당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영향력이 거의 균일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니 신민당을 김대중과 연결시켜 부산에서 거부감이 있었다는 해석은 옳지 않을 것 같다.
부산 시민들이 서슬이 시퍼렇던 81년도에 무소속후보로 나와 거침없이 전두환을 비판하던 젊은 투사 김정길을 기억해 준 것일까? 아니면 유행어의 영향과 함께, 바로 이어서 나오는 김정길 본인의 선거유세가 좀더 호소력이 있었던 것일까? )
김 : 그렇게 당선된 뒤로, 여러분 성원에 감사합니다~ 하면서 다니는데, 동구 수정동에 산복도로에 트럭 타고 연설을 하면서 지나가는데, 육십대 중반을 넘은 어머니가 젊은 딸아이하고 지나가다가 아는체를 합니다. 트럭에서 하루 죙일 연설을 하면 다리가 아프잖아요. 그런데 꼭 내려와서 인사를 하라고 합니다. 다리가 아프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트럭에서 내려서 인사를 했죠. 어머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러고 인사를 하니까,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내가 당신보고 여기 내려와서 인사를 하라는 이유가 있다 이거에요. 그 성남초등학교 합동 연설을 듣기 전에 가족회의를 했다는 겁니다. 가족회의 결과는 박찬종이하고 김정길이를 반씩 나눠서 찍어주자 라는 거였답니다. 그렇게 맘을 먹고서는 마지막 유세라 해서 그 연설을 들어 본 겁니다. 들어 봤더니, 전부 다 올라가 자기를 찍어달라고만 하는데, 이 김정길이만 표를 나눠 찍으라고 하더라 이겁니다.
그걸 보고 나니까, 저래 욕심이 없는 정치인이 있나 했더라는 겁니다. 그걸 보고 나서 다시 가족회의를 하는데, 전부다 김정길이를 찍어 주자는 쪽으로 바뀌었더라는 거에요. 가족 표가 모두 다섯장인데, 그렇게 해서 전부 저에게 표를 몰아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트럭에서 내려와서 인사를 해야 하는거 아니냐는 얘기였습니다. 솔직히 그런 얘길 들으니까 눈물이 핑 돌더군요.
물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많았었다는 얘기가 되는 건가요?
김 : 그런 거겠죠. 사실 집사람 얘기하다가 선거 얘기가 길어졌는데, 하여간에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일등하면서 당선되게 된 겁니다. 결국 이혼한 건 정치인에게는 약점이잖아요. 그걸 집사람이 그렇게 수모를 참아가면서 잘 대응을 해서 이긴거겠죠.
그러다가 두 번째 당선을 하는 과정에서 그런 일을 또 겪게 됩니다. 그 때는 현역 국회의원으로 영도에 가서 출마를 하게 되는데, 그 때 소선거구제로 바뀐거죠.
예춘호 의원이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어서 영도에 출마했던거죠. 당 대표였습니다. 영도에서는 국회의원도 여러번 했던 분이고 아주 유명한 분이었어요. 저는 현역국회의원 이었고, 민정당에서도 한명 나왔고, 노차태라는 사람도 나왔고. 또 네명이 나온거죠.
그 와중에 제가 현역이니까 모든 공격이 저에게 집중되고 있던 겁니다.
물 : 집중 타겟이 되셨군요.
김 : 선거를 한 일주일 남겨놓고 영도 전역에 하얗게 삐라가 깔린 겁니다. 아예 도배를 해 놓은거죠. 나에 대한 비방이 담긴 거였어요. 열가지 항목으로 비방을 하는데, 첫째가 선거 한번 이혼 한번.. 내가 재혼한 거 빗대가지고 선거 한번 할 때 마다 마누라를 갈아 치웠다 이거죠. 두 번째는 김정길이가 돈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국회의원 한번 해서 돈을 벌어가지고 집이 일곱채다, 뭐 이런 거였습니다.
참모들도 그렇고 집사람도 그렇고 완전히 낙담을 했었죠. 다 끝난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이런건 뭐 변명을 하기도 그렇고 안하기도 그렇고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아요.
물 : 변명을 하면 더 악화되기 십상이죠.
김 : 그래도 제가 그 땐 젊어서 재치가 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즉흥적으로 받아치기도 하고 했으니 말이에요. 미리 준비한 연설이 아니었거든요. 어떤 거였냐면, 합동 연설회 하는 무슨 초등학교에 가기전에 집사람한테, 내가 오늘 연설하다가 찾을 지도 모르니까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으라고 한거에요.
그래서 연단에 올라가면서 그 삐라를 한 장 들고 올라갔어요. 여러분 이런거 보셨습니까? 하니까 다들 예~ 하는 거에요. 그래서 처음 항목을 읽었죠. 선거 한번 이혼 한번.. 그리고 나선 집사람보고 나오라고 한 다음에 청중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지난번 선거할 때와 지금이랑 우리 집사람이 바뀌었습니까? 하니까 사람들이 아니오~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일단 아주 간단하게 해명이 된거죠. 청중들이 지난 선거때 우리 집사람을 다 봤으니까.
그런데 두 번째것은 진짜 까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난감하더라구요. 그래서 또 읽었어요. 김정길이가 돈이 없다는데 국회의원 한번 하면서 집이 일곱채라고 한다, 이걸 읽고 나서 한마디 했죠. 여러분, 아주 좋은 돈벌이 하나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든지 제 집으로 되어 있는거 찾아 오시면 제가 그 집을 드리겠습니다. 그게 내 이름으로 되어 있거나 내 친구나 내 친척 이름으로 되어 있거나 무조건 드리겠습니다. 거기다가 그 집이 어디 있는지 찾는 방법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삐라를 쓴 사람은 그 집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거 아닙니까? 그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시면 됩니다. 여러분, 이 돈벌이 괜찮죠? 하니까 사람들이 예~ 하면서 웃고 박수를 치고.. 이렇게 깨끗이 설명을 해 버린 결과..
그렇게 해서 그 선거에서 제가 따블로 이겼어요.
물 : 두 번째 승리에 대한 얘기군요.
인터뷰는 세시간 좀 안되게 진행이 되었지만, 김 전장관은 그 짧은 시간내에 모든 것을 담아 내려는 듯이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덕분에 도저히 한 편의 기사로는 그가 쏟아낸 자신의 얘기들을 담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읽으면서도 졸라 지치잖아.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여기서 1부를 마감하고, 나머지는 2부로 넘기고자 한다.
여기까지 따라오면서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의 끈기에 찬사를 보내며 1부를 자른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