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
2011. 5. 23. 수요일
시월
정신적으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면 사실 눈물은 잘 나오지 않는다. 눈물도 한숨도 내 안에 갇힌 채 그저 멍해진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라는 시쳇말이 되살아나던 그 때,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그날이다.
평화로운 오월 어느 토요일 아침, 그렇게 찾아온 날벼락 앞에 넋을 놓고 있을 무렵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특집방송이 잡혔으니 당장 출근하라는 국장의 음성.
각 언론사는 유명인사들의 서거를 대비해 미리 연보나 자료화면을 만들어둔다. 기자들은 그날도 그렇게 자료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방송을 어떻게 마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앵커가 묻는 데 답하고,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면 알리고, 그렇게 한참이 흐른 뒤에야 회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릇처럼 라디오 뉴스를 틀었다. 쉴새 없이 쏟아지는 소식은 단 하나. ‘그가 떠났다.’
그제야 실감이 난다. 내 안에 갇혀 있던 멍은 뒤늦게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기자는 어느 누구보다 빨리 사건을 접하지만 부끄럽게도 가장 늦게 사건을 느낀다.
그 뒤로 얼마 동안 더 울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건 그날 이후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방문을 꼭 잠그고 잠이 들 때까지 울었다는 것. 그렇게 며칠이나 흘렀을까. 어느 날 흐르던 눈물은 멈췄고 나는 기자를 그만 두었다.
신문 얘기를 꺼내려고 한다. 갑자기 좀 생경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그날은 각 신문의 일면으로 각인돼 있다. 그분이 마지막 길을 가시는 그날까지도 몇몇 신문은 천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게 마치 자신은 아니라는 듯.
먼저 신문에 대한 간단한 상식 얘기를 몇 자 적어본다. 신문을 두고 흔히 편집의 미학이라고 한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종이신문을 보는 독자들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하지만 신문이 가진 편집 권한은 아직 유효하다. 방송도 마찬가지. 어떤 기사를 톱으로 올리고 어떤 기사를 단신으로 처리하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칠 때마다 제일 먼저 확인하는 건 바로 기사의 배치. 그 편집의 미학 속에는 신문의 큰 뜻이 담겨 있다. 물론 신문사에 따라 큰 뜻이 없는 경우도 있고 지나치게 뜻을 불어넣는 경우도 있다.
특별한 기사가 없는 경우 신문마다 일면 톱기사는 다르다. 이때 신문사들은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사를 톱으로 올리는 자유를 누린다. 하지만 전국을 뒤흔들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특별한 기사가 있는 경우, 신문사는 그 자유를 잃는다. 최근에는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됐다는 뉴스가 모든 신문에 톱기사로 오른 적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그분이 국민장을 치르고 한 줌의 재로 떠나간 그 다음 날. 모든 신문의 톱기사는 예상대로 그분의 국민장이었다. 신문들은 저마다 서울시청 앞에 모인 수많은 인파와 그 속의 운구행렬을 담은 사진을 톱기사와 함께 내보냈다. 그 동안 아무리 그분을 모욕했다 해도 그날만큼은 어떤 신문사도 그 기사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날의 기사는 신문사마다 큰 차이가 있다. 어쩔 수 없이 같은 기사를 내보내지만, 편집을 다르게 해 부여하는 의미를 달리 한 것.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년을 맞아 그날의 신문을 다시 펼쳐봤다.
먼저 동아일보.
가장 염치없이 편집한 경우다. 말짱해 보이지만 톱기사에 실린 사진을 보면 얼마나 염치 없는지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그날 시청앞에 모인 인파의 극히 일부만을 담고 있다. 톱기사의 제목은 “다 내려놓고 편히 쉬소서” 부제목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서울광장 노제 18만명<경찰 추산> 애도” 이 사진에 보이는 사람의 수만 센 게 분명하다.
세컨기사는 “北, ICBM 발사 준비”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북한 관련 기사. 더구나 제목을 오른쪽 위에 둬 오히려 톱기사의 제목보다 눈에 띄게 편집했다.
다음은 조선일보.
일단 보기에 동아일보보다는 톱기사 제목이 눈에 띄게 편집돼 있다. “편히 쉬시기를”…盧 前대통령 국민장. 눈에 띄는 편집과는 달리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제목. 마치 오늘은 사실만은 전달하겠다는 듯 참으로 사실만 담은 제목을 뽑았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크기는 동아일보보다 크지만 담은 내용은 참 부실하다. 동아일보의 사진보다 심지어 인파가 더 적어보인다. 역시 빠지지 않는 북한 기사는 써드로 실었다.
다음은 중앙일보.
한 면의 삼분의 일 정도를 털어 인파가 몰린 시청 앞의 풍경사진을 담았다. 하지만 제목은 아주 작게, 기사도 톱기사치고는 너무 짧게 실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스스로 원망 받는 게 두려웠던 건 아닐까.
이와 달리 세컨기사의 제목은 굵은 고딕체. 한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역시 북한 관련 기사.
같은 기사라도 신문사별로 자세히 살펴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타고난 품성은 못 버리는 건가.
한동안 조중동과 마찬가지로 그 분을 힐난하던 한겨레와 경향으로 가보자. 그 분의 서거 이후, 이들은 비로소 조금 정신을 차린다.
먼저 한겨레.
이만하면 서거 특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면의 절반을 털어 그날의 풍경사진을 담았다. 끝없는 인파가 느껴지는 사진. 그리고 제목은 “당신의 스러진 꿈 일으켜 세우렵니다” 뭔가 당찬 포부가 엿보이는 미래지향적인 문구.
세컨기사는 삼성에버랜드 CB헐값배정 무죄 판결 기사. 북한 기사는 일면에서 찾아볼 수 없다. 광고면에는 그분을 추모하는 시민광고가 배치돼 있다.
마지막으로 경향신문을 보자.
다른 신문을 보면서는 끄덕 없었는데, 경향의 첫 페이지를 보고는 그만 왈칵 눈물이 났던 기억이 있다. 경향은 일면을 사진 한 장으로 처리했다. 색을 빼 추모의 의미를 담고 한 면을 털어 비장함을 드러냈다. 제목은 “이 추모의 민심은 무엇인가” 너무 날을 세운 제목이라는 점이 좀 아쉽긴 하다. 하지만, 한 장의 사진이 열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걸 담아낼 수 있음을 증명한 과감한 편집이었다. 그 사진 아래 광고에는 그가 환히 웃고 있다.
예리한 눈을 가진 독자라면 아마 앞의 조중동이 일면에 어떤 광고를 내보냈는지 기억할 것이다. “서종면 수능리 토지매각” 셋은 나란히 같은 광고를 일면에 내보냈다. 한겨레와 경향은 시민들의 추모광고를 내보냈고.
신문에 실린 광고는 기사와 같다. 반대로 기사 또한 광고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신문 광고 중에는 기사와 같은 포맷으로 된 것들이 있다. 마치 사실을 전달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소비자들을 유혹하곤 한다.
그날의 신문 광고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중동은 참 성의없고 영혼없는 편집을 했다는 것. 시민들의 추모광고는 한겨레.경향에만 실렸다는 것. 광고는 신문 편집의 마침표와 같다.
그래서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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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속의 그날은 경향의 일면으로 기억돼 있다. 기자질 한다며 그날 그 곳에 직접 가지 못한 게 한이 됐기 때문일까. 기사 마감하고 그나마 달려간 곳은 덕수궁 앞 시민 분향소가 전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기자질 그만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에야 봉하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밥벌이는 때로 사람 된 도리마저 가로 막는다.
다시 오월이다. 두 번째 오월이다.
1주기였던 작년보다 추모열기가 덜한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시리다. 그래도 함께 눈물 흘리던 그들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깨어있는 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믿는다.
잘 지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