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사설

[시론]‘한국식 산업화’ 모델의 종언

skidpara 2016. 1. 15. 08:20

최배근 | 건국대 교수·경제학

소비절벽, 고용절벽, 인구절벽, 부채절벽, 수출절벽, (기업)성장절벽 등 온갖 절벽에 갇힌 한국경제가 생매장되기 직전이다. 절벽이 갈수록 늘어가는 이유는 정부 대책이 절벽을 부수기보다 새로운 절벽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절벽에서 벗어나려면 반세기 이상 지속되는 ‘한국식 산업화’ 모델의 수명이 다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대기업의 성장성과 수익성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대기업의 위기는 대외경제 환경 악화보다 제품경쟁력 약화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사업들로 구성된 대기업에 제품경쟁력 약화는 수출과 매출 부진이 수익성 악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공격적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도 불구하고 수출주도 성장 방식이 박근혜 정권이 탄생한 2012년부터 막을 내린 배경이다. 2000년 이후 연평균 10%에 달했던 수출증가율은 2011년 지나면서 연평균 1%로 곤두박질쳤고, GDP에서 수출액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2년 56.3%를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수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박근혜 정권이 선택한 것이 부채주도 성장 방식이다. 그러나 부채주도 성장 방식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전에 이미 파산한 상태였다. 노무현 정권에서 (가계+정부) 부채 1단위 증가당 GDP가 0.62단위 증가하였으나, 이명박 정권에서 0.48단위로 크게 하락했고, 박근혜 정권 첫 2년간은 0.46단위로 추가 하락했고, 지난해 3분기까지 1년간은 0.41단위까지 하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출주도 성장에 따른 내수 부족을 부채(자산)로 보완했으나 2008년 이후 부채로 수요 부족을 대체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가계부채 문제는 ‘한국식 산업화’ 모델의 생명력이 소진된 결과이다.

한국경제가 절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산업체계의 전면 개편이 불가피하다. 기존 사업의 고부가가치화나 새로운 수익 사업 창출이 한국 기업의 명운을 좌우할 최대 과제라는 사실은 기업 스스로도 인정할 것이다. 문제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산업체계의 개편 문제가 재벌체제와 박근혜 정권의 경제철학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기업)성장절벽’ 앞에서 골목상권 침탈, 목숨 걸고 다른 재벌의 면세점 뺏기, ‘학교 앞 호텔’ 짓기 등 ‘당장 살아남기’ 방식으로 대응하는 재벌에게, 그리고 ‘소비절벽’ 앞에서 기업의 ‘노동비용 절감’ 지원하기를 노동개혁으로 포장하고, ‘고용절벽’ 앞에서 공공서비스(일자리)를 시장(자본)에 넘겨주면 일자리가 증가하고 경제활성화가 된다는 정부에 무슨 기대가 가능할까. 무엇보다 박근혜 정권과 재벌이 산업경쟁력 악화 및 고용 위기에 무능한 이유는 이들이 집착하는 ‘한국식 산업화’ 모델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과는 상극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산업화 모델은 자본 중심, 자본의 보조물로서 표준화된 노동력, 위계적 질서, 경쟁 등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21세기 사업 모델의 키워드들은 아이디어(사람), 차이(다양성, 개성), 협력, 공유 등이다. 애플의 앱스토어 사업, 우버, 에어비앤비 등은 제조업이나 서비스업도 아닌 아이디어 업종으로, 이들 21세기형 사업 및 기업들은 ‘협력의 경제’ 원리에서 작동한다. 차이와 다양성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개성을 죽이는 사회, 협력을 배척하고 무한경쟁만 요구하는 사회, 통제와 획일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는 기대하기 어렵고 사회적 기술 개발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간판기업인 삼성전자가 제조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노동자의 희생과 검증된 선진기술의 빠른 학습에 익숙한 재벌 대기업의 신수종 사업 찾기가 성과를 내기 어려운 이유이다. 일본이 뒤늦게 장기불황의 해법을 산업체계의 전면 개편에서 찾고 90년대 후반부터 창조산업 육성을 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는데, 그 이유가 창조산업의 육성을 제조업식 사고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일본의 ‘산업활력법’을 수입해 만든 이른바 ‘원샷법’으로 재벌 대기업의 사업체계 재편을 하겠다고 한다.

일본의 수출이 2007년 이후 하락한 이유가 강한 엔화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일본 제품의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외신의 조롱(?)을 이들은 외면한다. ‘박근혜표’ 창조경제의 결과가 명약관화한 이유이다. 이처럼 절벽에 둘러싸인 한국경제는 노동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무한경쟁만을 강요하는 ‘한국식 산업화’ 모델과 그 압축판인 재벌체제의 시효 만료를 의미한다. 청년들이 한국에서 못 살겠다고 떠나고 “붕괴 후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고 절규하는 배경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142024285&code=99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