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눈으로 본 흑산도 집단 성폭행 사건
교육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 온 국민을 경악의 도가니에 빠뜨린 흑산도 집단 성폭행 사건이 솔직히 내겐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섬마을은 아니지만, 시골 오지의 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았던 교사로서, 또 이 지독한 가부장 사회의 남성으로서 나는 그러한 불상사가 빚어진 인과관계라든가 그 야만적 행위의 전모가 어제 본 영화처럼 내 머릿속에서 생생한 그림으로 그려진다.
성폭행 ‘학습’시키는 사회
가해 남성들이 그 여선생님을 술자리로 끌어들인 심리적 배경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고백하건대, 동시대를 살아가는 중년 남성인 내게 그 야만적인 남성 지배적 문화는 사실 익숙한 풍경이다. 그리고 교사이기에 나는 그 여선생님이 그 술자리에 합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안다.
폐쇄적인 지역 특성상 사회적 관계망에서 고립된 이방인으로서, 오지에 근무하는 교사가 식당에서 만난 학부모가 술을 권할 때 반응할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없다. 그가 20대의 여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남성 동물들은 바로 이러한 존재 조건상의 역학관계를 악용하여 그 극악무도한 폭력을 저지른 것으로 본다.
건강한 사람이면 누구나 성적 욕망을 품지만, 강간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성욕의 본질은 철저히 관계 지향적이다. 나의 욕구 충족은 상대의 욕구 충족을 전제로만 이루어진다. 파트너가 희열을 느낄 때 나도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데, 그걸 보며 쾌감을 느낀다면 이는 정신병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 남성에게 이 정신병은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 사회는 강간공화국이라 하겠다.
이 사회가 강간공화국인 증거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도처에 널린 룸살롱이나 마사지 시설, 그리고 노래방 보도로 상징되듯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퇴폐향락 문화가 우리 일상 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널려 있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강간과 이게 무슨 상관있냐 할 것이다. 밀접하게 관련 있다. 이 막장 메커니즘 속에서 강간이 ‘학습’되기 때문이다.
순박함의 이면, 폭력의 일상성
흑산도에서 일어난 불상사를 보면서 내 초임 시절에 겪은 일이 떠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30분을 걸어가야 닿을 수 있는 시골 학교였는데, 여느 농촌 주민들이 그러하듯 학부모들은 대체로 순박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순박함의 이면에 가부장적 폭력성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표출되고 했다. 그런 풍경이 때때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들의 일상은 농사일과 술판으로 점철된다. 하루의 힘겨운 노동을 알코올로 보상 받아 연명해 가는 이들의 소외된 삶은 에밀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에 나오는 딱 그 풍속도이다. 그리고 술판에는 반드시 ‘여자’가 동반되었다.
목로주점과 달리 이 촌락에선 ‘여자’가 너무 쉽게 공수된다. 야간업소에선 물론이고 벌건 대낮에 식당에서 술 마시다가도 전화 한 통이면 짧은 치마 입은 아가씨들이 커피를 들고 나타난다. 이른바 ‘다방 레지’다. 커피배달이지만 커피는 후진 욕망의 배설을 위한 매개체일 뿐, 고객의 관심은 온통 ‘여자’의 치마 속에 모인다. 거기서 빚어지는 행위나 서사구조에 대해 사실적 문체로 그려내기는 너무 불편하다. 그 속성에 대해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성폭력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폭력의 집단성, ‘동참’을 권하는 사람들
여성의 수치는 다중에게 노출된 점에서 일대일로 벌어지는 강간보다 어쩌면 더욱 치욕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폭력의 성격은 담합에 의한 집단 괴롭힘이었고, 나를 포함해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남성은 공동의 가해자였다.
그들은 내게 동참을 권했고 나는 얼굴을 붉히며 거부했다. 그런 나를 숫기가 없니 어쩌니 했지만, 그 시점에서 내 얼굴이 붉어진 까닭을 그들은 모른다. 타오른 의협심에 술판을 확 엎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 내가 그들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자리만 벗어나면 그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엔 선량한 이웃이 룸살롱 같은 곳에서 크고 작은 성폭력을 버젓이 일삼는 페르소나는 ‘학습의 산물’이라는 논리로만 설명이 된다. 강간공화국의 남성들에게 비싼 돈 주고 술을 먹는 것은 성폭력을 저지를 권한을 구매한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의 설명방식을 빌리면, 성폭력은 비싼 술값의 등가물인 것이다.
내 아내가 아닌 묘령의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품는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그것은 부적절한 상상력이 아니라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중요한 것은 그 상상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이고, 내 아내도 똑같은 상상력을 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적 욕망의 자기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여성을 상대로 내 욕망을 강제로 실현하는 것은 엄연한 ‘강간’이다. 더구나 그 여성은 사회적 약자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말 못할 사연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을 여성에게 성적 학대를 일삼는 행위는 사디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 야만적인 사디즘으로 여성뿐만 아니라 자신도 망가져 간다. 강간의 정신병리는 이렇게 학습된다.
소년 시절, 우린 모두 ‘일베’였다
돌이켜보건대, 강간의 학습은 우리 어릴 때부터 이루어져 왔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성욕이 한창인 사춘기 시절 우리는 ‘성행위’를 ‘여자 따먹기’의 의미로 학습했다. 영어로 표현하면, ‘making love’도 ‘sleeping with’도 아닌 ‘fucking’이 성에 대한 우리 통념의 전부였다. 이런 학습이 이루어진 소년에게 여성은 오직 ‘따먹음’의 대상이었다.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품는 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성욕을 금기시하지 말고 성에 대한 담론을 공론화시켜 건강한 성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성 문제를 금기시하니까 음지에서 그릇된 정보와 인식을 공유하며 왜곡된 성 의식을 학습한다.
성교육을 고리타분하게 정절이니 순결이니 하는 정신교육으로 가지 말고, 이를테면 미래에 성인이 되어 섹스할 때, 여성을 ‘따먹음’의 대상이 아닌 상호존중과 배려에 기반을 둔 의기투합의 상대로 인식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다행히 나보다 젊은 이삼십대의 청년이나 청소년은 우리 때와 같은 왜곡된 마초이즘이나 가학적 성 의식으로부터 덜 오염되어 있는 듯하다. ‘일베’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사실 우리 때는 성적 감수성에 관한 한 거의 대부분이 일베였다. 지금 청년들 사이에서 일베가 찌질이 취급 받는 자체가 젊은이들의 성 의식이 진일보했음을 말해준다.
선생님의 용기에 박수를
나는 섬마을 남성들이 특별히 악한 자들이어서 그런 야만적인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중 한 인물은 과거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경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우리에게 충격을 더해주고 있지만, 이 사실로 인해 이 사건 자체의 심각성이 퇴색될까봐 우려한다. 룸살롱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여성학대와 성폭력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성폭행 범죄의 발발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든 상존해 있다.
성범죄를 줄이기 위해 왜곡된 성 산업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이번 사건의 가해 남성들이 보여준다. 강간 전력이 있는 자를 포함해서 세 명의 가해자들이 멀쩡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평범한 성인 남성들이다. 강간이 성욕 배설 기회의 결핍이 아니라 왜곡된 섹스 체험학습의 결과라는 것은 문제의 섬마을이 성 산업과 관련하여 어떤 곳인지를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 ‘업소 아가씨’는 그저 ‘상품’ 일 뿐이다. 이들의 상품가치는 중고차 시세가 매겨지는 원리와 똑같다. 나이가 들어 상품가치가 하락하면서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그리고 촌락으로 갔다가 맨 마지막에 섬으로 팔려 간다. 그리고 갈수록 이들의 노동강도는 세지고, 달리 표현하면, 성폭력의 수위도 높아 간다.
인생의 막장에 처한 가련한 여성들에게 일부 짐승 같은 마초들이 어떤 가학적 폭력을 저지를 것인지 뻔하다. 성폭력에 만성이 된 자들에겐 자기 애 가르치러 온 초임 여교사도 성적 대상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 짐승들에게 가공할 피해를 입고도 용기 있게 대처한 선생님의 영웅적인 행위에 갈채와 존경을 보낸다. 그 자체로 그분은 이 땅의 어떠한 교사보다 훌륭한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부디 내상을 빨리 회복하고 교단에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으로 우뚝 서시길 바란다.
경북 칠곡군 다부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에서 교육철학을 전공하였으며 브라질의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교사는 무엇보다 지성인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역에서 뜻을 같이 선생님들과 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교사가 교사에게(우리교육, 2015)]가 있습니다. → 블로그
출처 : http://slownews.kr/55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