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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대통령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skidpara 2016. 11. 22. 08:09

그날 대통령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청와대·국회·사법부 등 자료로 재구성한 2014년 4월16일 ‘대통령의 7시간’

2년째 허공을 떠돌던 풍문이 진실의 문 앞을 서성이고 있다. ‘대통령의 7시간’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공백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서 박 대통령에게 세월호 침몰 상황을 문서로 보고한 시각(오전 10시)부터 박 대통령이 서울정부종합청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에 모습을 드러낸 시각(오후 5시15분)까지를 이른다.

7시간 동안 박 대통령을 대면한 청와대 참모는 아무도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시간 동안 박 대통령은 사적 공간인 ‘관저’에 머물러 있었다고 다수의 청와대 관계자들은 <한겨레21>에 말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구조 상황을 관저에서 보고받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7시간 가운데 약 4시간 동안 박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관련 지시사항은 없었다. 박 대통령이 제대로 보고를 받았는지도 의문이다. 박 대통령이 7시간 만에 중대본에 방문해 던진 “학생들을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는 질문은, 그가 당시 세월호 참사 현장 상황 보고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정황으로 읽힌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그간 대통령 국정 수행 전반이 왜곡됐다는 의혹이 우후죽순 솟아나는 가운데 ‘대통령의 7시간’은 대통령 국정 공백·왜곡의 극단적 상징이 됐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명확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국회·사법부 등이 ‘7시간’과 관련해 내놓은 자료에 근거해, 그 시간 동안 청와대 안팎에서 벌어진 일들을 톺아봤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가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소송(이하 정보공개 소송) 재판기록,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가토 다쓰야 정보통신망법 명예훼손 사건(이하 가토 다쓰야 사건) 2015년 12월17일자 판결문, 국회 운영위원회 2014년 7월7일자 회의록, 세월호 참사 관련 수사·재판기록 등을 분석·정리한 책 <세월호, 그날의 기록> 등을 참고했다. _편집자

2014년 4월16일 박 대통령의 예정된 공식 일정은 없었다. 국가안보실(이하 안보실)은 그날 오전 9시19분 ‘세월호 침몰 사고’를 처음 인지했다. 안보실은 오전 10시 박 대통령에게 문서로 상황 보고를 했다. 그 뒤 30분 만에 박 대통령의 지시는 3차례 내려왔다. 모두 전화 통화 지시였다.

▶오전 10시15분(안보실 전화)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 “여객선 내 객실 등을 철저히 확인하여 누락 인원이 없도록 할 것.”

▶오전 10시22분(안보실 전화)

“샅샅이 뒤져 철저히 구조할 것.”

▶오전 10시30분(김석균 해경청장에게 전화)

“해경 특공대를 투입해서라도 인원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

*‘정보공개 소송’ 대통령비서실장 등 피고 대리인의 2015년 6월30일자 준비서면

① 3시간40분 동안 대통령의 지시가 사라졌다

7~8분 간격으로 지시를 내렸던 박 대통령은 오전 10시30분 이후 오후 2시11분까지 약 3시간41분 동안 전혀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 사이 대통령비서실(이하 비서실)과 안보실은 박 대통령에게 10차례 문서·전화 보고를 올렸다.

비서실 서면보고(10시36분), 안보실 서면보고(10시40분), 비서실 서면보고(10시57분), 안보실 서면보고(11시20분), 안보실 전화보고(11시23분), 비서실 서면보고(11시28분), 비서실 서면보고(12시5분), 비서실 서면보고(12시33분), 비서실 서면보고(13시7분), 안보실 전화보고(13시13분)가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이런 보고들을 모두 관저에 머물면서 받았다.

‘서면보고’가 관저의 팩스로 전달된 것인지, 관저에 있는 컴퓨터의 개인 전자우편함으로 보내진 것인지, 비서진 가운데 누군가가 직접 대면해 전달한 것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② 청와대 핫라인으로 사태 심각성 보고했다

11월16일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의문을 제기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그 시간 해경의 세월호 승객 구조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세월호는 완전 침몰했고(오전 10시30분), 승객 대부분은 배 안에 남아 있는 상황(오전 10시52분 해경→청와대 보고)이었다. 언론사들은 ‘안산 단원고 학생·교사 전원 구조’라는 오보(오전 11시1~26분)를 냈다. 그런데 당시 해경의 상황 파악은 조금 달랐다.

▶오전 10시52분 해경 본청의 청와대 핫라인 음성 보고

(청와대) “거기 인원들 혹시 물에 떠 있는 인원들이 있습니까?”

(해경본청) “전부 학생들이다보니까 선실에 있어서 못 나온 것 같습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구조 작업을 벌이는 해경 업무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시시각각 현장 상황을 구두와 영상으로 직접 보고받은 청와대는 이미 오전 11시께 학생들이 세월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인지했던 것이다.

오전 11시30분, 중대본이 구조 인원 161명(전체 승객 476명)이라고 발표하는 등 혼선이 있었지만, 침몰 뒤 한 시간이 지나도록 학생들이 구출되지 못한 상황이라면, 청와대 참모진은 물론 대통령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후 해경은 청와대에 구조 인원이 370명이라고 잘못 보고했다가(오후 1시4분) 164명으로 정정보고(오후 2시24분)했다. 그제야 박 대통령은 오후 2시11분부터 2시57분까지 46분간 2차례 지시를 내렸다.

▶오후 2시11분(안보실 전화)

“구조 진행 상황 점검 및 현장 상황 파악.”

▶오후 2시57분(안보실 전화)

“구조 인원 통계 혼선 관련 재차 확인.”

*‘정보공개 소송’ 대통령비서실장 등 피고 대리인의 2015년 6월30일자 준비서면

③ 정상 업무를 했는데도 ‘구명조끼’ 발언할 수 있었을까

11월16일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의문을 제기하는 1인시위를 하려 하자 경찰이 가로막고 있다.

결국 이날 박 대통령의 지시는 오전 10시15~30분(3차례), 오후 2시11~57분(2차례)에 몰려 있다.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2시11분까지 안보실과 비서실이 10차례 관련 보고(전화보고 2차례 포함)를 올렸지만, 박 대통령은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당일 오후 5시15분 처음 공시 석상에 나타났다. 중대본에 방문한 자리였다. 청와대 참모들도 중대본 방문 수행 과정에서 박 대통령을 이날 처음 봤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세월호’ 관련 첫 공식 발언을 했다.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7시간 만에 나타난 박 대통령의 발언은 당시 현장 상황과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비서실·안보실에서 올린 상황 보고 내용을 7시간 동안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당시 해경과 청와대는 핫라인 통화를 통해 승객들이 배 안에 갇힌 채 배가 침몰한 상황을 여러 차례 공유한 터였다. 관저에 있었다는 박 대통령은 과연 이런 보고를 제대로 살펴보긴 했던 것일까.

▶오후 2시24분 해경본청의 청와대 핫라인 음성 보고

(청와대) “그럼 지금 바다에 있을 가능성도 없고 나머지 310명은 다 배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거 아니에요?”

(해경본청) “많은 인원이 있을 가능성이 좀 있습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④ 정윤회는 왜 진술을 뒤집었나

박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의문의 행적’에 대한 의혹은 풍문을 낳았다. 박 대통령이 ‘비선 실세’ 정윤회(61)씨와 만난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정씨는 1998년부터 2007년까지 박 대통령을 보좌해온 인물이다. 풍문이 사건이 된 건, 이런 의혹을 기사로 쓴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서울지국장이 박 대통령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되면서다.

재판에선 정씨의 당일 일과가 쟁점이 됐다. 정씨는 2015년 1월19일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 11시~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무속인 이세민(59)씨의 집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이씨와 이씨의 측근 원아무개씨도 법정에서 정씨와 같은 내용의 증언을 했다.

그런데 정씨는 앞서 검찰 조사에선 이씨와 만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2014년 8월15일 검찰 조사에서 “당일 오전엔 (서울 신사동) 집에 있었고 저녁 6시께 서울 신사동 음식점 OOO에서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고 했다. 당일 저녁 일정은 시간대와 식당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말했지만 오전·오후 일정은 사실과 다르게 말한 것이다.

정씨는 추후 검찰 수사관이 당일 오후 휴대전화 발신지 위치가 서울 평창동으로 나타났다고 전화를 하자, 그 뒤에야 이씨에게 전화를 걸어 당일 만난 사실을 확인한 뒤 진술을 정정했다고 해명했다.

⑤ 정윤회의 알리바이는 완전하지 않다

이에 바탕을 두고 법원은 정씨가 당일 이씨를 만났다고 판단했다. 결정적으로 작용한 근거는 정씨와 이씨, 이씨 측근 원아무개씨의 법정 증언이다. 그 증언들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자료는 크게 두 가지가 채택됐다.

하나는 대통령 경호실의 정윤회씨 청와대 출입기록 확인요청 답변 공문이다. 경호실은 2014년 8월13일자 공문에서 “정씨의 2014년 4월16일 청와대 출입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 출입기록 시스템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음이 최근 드러났다. 지난 11월1일 <한겨레>는 “최순실씨가 검문·검색 없이 출입기록을 남기지 않고 청와대 부속실 행정관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청와대를 수시로 출입했다”고 보도했다. 이른바 ‘비선’이 출입기록 없이 청와대를 드나든 것이다.

법원이 받아들인 또 하나의 자료는 당일 정씨의 휴대전화 발신지 위치 내역이다. 그날 오후 2시20분 정씨는 서울 평창동 158-×번지 근처에서 휴대전화를 발신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부는 그 주소지가 이씨의 집에서 직선거리로 1.4km 떨어진 곳이어서 정씨와 이씨의 당일 오후 2시까지의 만남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주소지는 청와대와의 직선거리도 약 2km 떨어진 곳이다. 정씨가 이씨와 만난 시각(오전 11시~오후 2시)은 공교롭게도 박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관련 지시가 전혀 없었던 시각(오전 10시30분~오후 2시11분)과도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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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대통령은 어디에 신경 쓰고 있었을까

재판에 제출된 청와대 자료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당일 ‘7시간’ 동안 꾸준히 누군가와 연락을 취했다. 박 대통령은 관저에 머물면서 최소한 전화 통화를 9차례 했다. 안보실과 7차례, 해경청장과 1차례, 청와대 고용복지수석과 1차례 전화 통화를 했다. 1시간 안팎 간격의 통화들이다.

전화 통화는 하면서도 참모를 대면한 증거는 없다. 오전 10시30분~오후 2시11분에 비서실·안보실 보고를 10차례(전화보고 2차례 포함) 받으면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한겨레21>과 인터뷰한 청와대 관계자들의 발언을 종합하면, 관저에 머무는 대통령을 비서진이 대면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만일 대면보고를 받았다면 무엇인가 지시했을 것이라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박 대통령은 처음 공식 석상에 등장한 오후 5시15분 중대본 방문 자리에서 해경·청와대가 공유한 세월호 참사 현장 상황과 한참 동떨어진 질문을 했다.

당일 다른 공식 일정이 없었던 박 대통령은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깨어 있었다’. 반면 세월호에 대해선 아무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7시간’ 동안 세월호 참사가 아닌 다른 일에 관심을 쏟았을 것으로 의심받는 이유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출처: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26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