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1948년 대통령이 되어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을 거쳐 종신집권의 가도를 달리다, 4·19 혁명으로 하야했다. 집권 중에 ‘고마우신 우리 대통령’ 노래를 학교마다 부르게 했고, 그의 탄생일은 나라의 공식 행사가 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민족의 태양’이란 칭호는 4·19 이후 그의 동상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현행 헌법하에서, 이승만이 ‘국부’란 주장이 전파되고 있다. 그가 나라를 건국하고, 6·25 동란 때는 자유 대한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여기선 6·25 때 그의 행적을 살펴본다.

침략전쟁의 예측과 대비는 대통령의 으뜸가는 필수 임무다. 북한의 남침 준비는 몇년에 걸쳐 치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승만 정권은 입으로만 ‘북진통일’을 외치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로 호언장담했을 뿐 실질적 대비를 하지 못했다.

6·25 새벽에 기습남침을 당했다고 곧바로 도망갈 이유도 없다. 전면 전투가 벌어졌고, 휴가 간 군인도 재빨리 복귀했다. 춘천의 6사단처럼 침착하게 방어하여 침략속도를 지연시킨 사례도 있다. 그런데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국민에겐 안심하라고 방송하면서 몰래 도주했다. 대통령이 사실상 유고된 가운데 전쟁지휘체계는 붕괴되었고, 국민의 목숨은 각자도생에 맡겨졌다. 질서있는 퇴각의 노력은 아예 없었다. “문서 한 장 도장 하나 아니 가지고 도망한 것이 무슨 정부요 관청인가.”(함석헌)

정부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는 무고한 인명을 무분별하게 학살했다. 보도연맹의 이름으로 무수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고, 수만명의 국민방위군들이 부정부패로 인한 보급품 부족으로 아사했다. 양민들을 공비로 몰아 처형하여 유족들의 한이 오늘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적 치하에 신음했던 서울시민들은 9·28 수복 후 대통령의 진심 어린 사과를 기대했건만, 돌아온 건 가혹한 부역자 처벌이었다. 그 처벌의 폐해가 극심하여 국회가 법개정을 하고 헌법위원회가 위헌판결을 내릴 정도였다.

이승만의 대통령 임기는 1952년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이승만은 헌병과 깡패들을 동원하여 의원들을 겁박하여 소위 발췌개헌을 단행했다. 전선에서 국군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후방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쿠데타”(김성수 부통령의 말)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1953년 휴전을 맞아 남북한 집권층들은 각기 통렬한 자기반성을 할 만도 했다. 그러나 전쟁을 야기한 김일성은 반미전쟁에 승리했다고 스스로를 ‘경애하는 수령’으로 격상시켰다. 이승만은 스스로를 공산당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전쟁 이후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면서 김일성과 이승만의 권력기반은 되레 공고해졌다. 수백만 국민들의 희생 위에 엉뚱하게 우상화 놀음을 한 게 남북 집권자의 모습이었다.

북한의 침략전쟁에 대해서는 예측도, 대응도, 주도적 해결도 못한 채, 오직 정권 연장에만 유능했던 인물에게 국부란 호칭은 당치 않다. 그는 이순신이나 처칠처럼 나라를 지켜낸 인물이 아니다. 다만 위기 시기에 대통령이었을 뿐이다.

이승만을 ‘한국의 조지 워싱턴’으로 일컫는 사람들도 있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웠고 이겼으면서, 종신 대통령의 유혹을 뿌리치고 민주주의의 모델을 만들어냈다. 전쟁과 정치 모두에서 이승만과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둘의 공통점은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뿐이다.

사실 오늘날 ‘국부’란 말 자체가 ‘국정교과서’ 부활론처럼 낡아빠진 개념이다.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국가에서 한명의 독재 대통령에게 국부 칭호를 헌정하겠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이승만과 같은 시대에 대통령을 했던 트루먼은 말했다. “민주국가에서 ‘꼭 있어야 할 인물’ 따위는 없다. 어떤 사람이 바로 그런 필수적 인물로 간주되는 순간, 그 나라는 황제국이 되고 만다”고.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2768.html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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