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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9.18 박근혜와 이멜다 마르코스, 소름 끼치는 비틀즈 코드

[이슈추적] 독재자 아버지 잘못 반성은커녕 옹호하는 한국 박정희, 필리핀 마르코스, 칠레 피노체트의 딸들… 인혁당 재건위 발언 통해 재확인된 박근혜 후보의 보수적 역사인식, 무지한 사법 이해 


»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위)의 딸과 박근혜 후보(아래)는 모두 보수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다. 가수들의 우연한 공통점을 다룬 케이블TV 프로그램 <비틀즈 코드>를 연상시킬 정도다. 사진 위는 한겨레 자료, 한겨레 강창광.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서, 두 나라는 닮았다.

대통령은 1972년 9월22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1965년 민주적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돼 임기를 마쳤다. 1969년 재선에 성공했다. 대통령은 재임을 위해 돈을 뿌리고 사람을 샀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단순히 부정선거 때문은 아니었다.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은 1965년 당선 직후 경제발전을 약속했다. 기간산업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방법이 특이했다. 군인을 건설사업에 동원하고 장교를 중용했다. 미국의 지원을 얻으려고 베트남전쟁에 젊은이들을 파병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선거로 재임한 것이다.

1972년 계엄령 선포한 아버지들

학생과 시민이 시위를 벌이고, 야당 정치인들이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은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며 “전통적인 민주적 절차를 허락하기에 우리 시대는 너무나 심각하고 위험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심각한 위험으로 공산주의와 이슬람의 저항을 꼽았다. ‘1972년 계엄령’이라는 단어만 듣고 ‘10월 유신’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계엄령이 ‘바공 리푸난’(Bagong Lipunan)을 만들기 위한 초석이라고 주장했다. 타갈로그어 ‘바공 리푸난’은 ‘뉴 소사이어티’(New Society)란 뜻이다. ‘신사회’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정지시켰다. 새로운 헌법을 1973년 통과시켰다. 대통령령이 헌법과 법률을 대신했다. 그 시절 한국의 대통령과 놀랍게 닮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2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을 의결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일신하겠다는 뜻이었다. ‘바공 리푸난’의 한국판이었다.


딸들의 인생도 닮았다. 필리핀 <야후>는 지난 9월9일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던 9월은 필리핀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암흑기로 기억된다”며 “동시에 9월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생일(9월11일)을 늘 기념해온 일로코스노르테주 주민들에게 중요한 달이기도 하다”고 보도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고향인 일로코스노르테주는 올해에도 성대한 기념행사를 열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첫째딸 이멜다 마르코스가 현재 주지사다.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는 일로코스노르테 지역구 상원의원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대구를 떠올리게 한다.

‘이미’(Imee)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이멜다 마르코스 주지사는 열렬한 아버지 옹호자다. 1955년생으로 1952년생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보다 세살 어리다. 박근혜 후보와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같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보면, 이멜다 마르코스는 아버지의 독재에 대해 “가장 훌륭한 길과 다리들이 계엄령 시절 건설됐다. 심지어 영화조차 그 시절 작품들이 더 낫다”고 말했다.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딸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피노체트의 딸 루시아 피노체트(69)는 2006년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는 자유의 불꽃을 태우셨다”고 찬양했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려다 탈세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포기했다. 산티아고시 비타쿠라구의 구의원을 지냈다.

박근혜 후보, 이멜다 마르코스, 루시아 피노체트의 역사관은 서로 닮았다. 논쟁을 부른다는 점마저 동일하다. 박근혜 후보가 지난 9월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한 발언이 역사관 논쟁에 불을 지켰다. 진행자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가 유신시절을 언급하며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서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박 후보는 “그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어떤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 박 후보는 재차 “왜냐하면 다른 판단이 나왔기 때문에, 똑같은 대법원에서”라고 답했다.

»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처형된 희생자 유족들이 지난 9월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인혁당 사건 발언과 관련해 역사인식 결여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려고 영정을 든 채 걸어가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새누리당 대변인도 다른 견해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지른 대표적인 사법 박해로 거론된다. 1·2차에 걸쳐 수사·기소가 이뤄졌다. 일군의 지식인과 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을 만들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반란을 꾀했다는 혐의였다. 수사·기소·재판 과정 내내 논란이 벌어졌다. 중앙정보부가 수사를 맡아 ‘고문수사’ ‘억지기소’ 논란이 벌어졌다. 1차 인혁당 사건 때 중앙정보부가 1964년 41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 등 주임검사들이 증거가 부족하다며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당시 서주연 서울지검장이 정권 고위층의 지시를 받고 야간 당직 검사를 시켜 다시 기소했다. 그러나 법원은 북한의 지령 등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해 피고인들에게 징역 1년 등 가벼운 선고를 내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 뒤 공포정치의 소재로 다시 이 사건을 꺼냈다. 인혁당 관련자들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함께 엮었다. ‘인혁당 재건위’라 이름 붙였다. 1974년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의가 유죄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1975년 4월8일 36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군사법원 판결을 확정했다. 극히 이례적으로 대법원 선고 다음날 인혁당 재건위 피고인 8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기 전인 4월8일 새벽 3시에 군법회의 검찰부에 사형선고 통지가 접수됐고, 사형을 집행한 구치소에는 집행 후인 4월9일 15시에 사형선고 통지가 왔다. 최소한의 법적 형식과 시간 순서도 지켜지지 않았다. 법조계에서 ‘사법살인’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고문수사가 인정돼 재심이 이뤄졌고 서울중앙지법은 2007년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판결을 근거로 유족들은 국가배상을 받았다.

박 후보의 발언으로 난리가 났다. 인혁당 재건위 피고인 유족, 시민단체, 야당이 모두 박 후보를 비판했다. 새누리당 안에서도 논란이 커졌다. 대변인과 당 대표가 엇박자를 냈다. 변호사 출신 조윤선 대변인은 지난 9월11일 “새누리당은 이 사건과 관련된 두 개의 판결이 존재하지만, 재심 판결이 대법원의 최종적인 견해라는 것을 존중한다”는 애매한 논평을 냈다.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9월12일 박근혜 대선 후보의 인혁당 관련 발언에 대해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어 사과한다”고 브리핑했으나 박 후보는 이를 전면 부인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새누리당 정의화 의원은 9월13일 트위터에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을 제기하며 새누리당이 과거사의 잘못을 시인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박 후보는 여당에서도 논란이 커지자 9월14일 인혁당 재건위 유족을 만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사과할 의향이나 자신의 역사관에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한다는 뉘앙스는 없었다.

여당에서조차 논란이 커진 이유가 있다. 박 후보는 그전에도 자신의 보수주의 신념을 감춘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 발언의 정치적 충격은 달랐다. 사법부에 대한 근본적 무지, 혹은 무시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정치인들의 반발은 박 후보의 이런 역사 인식이 중도 유권자 공략에 큰 장애가 되리라는 판단에 기인한다.

민자당 시절 <법원사>, 유신 비판

일단 ‘두 개의 판결’이란 표현 자체가 상식에 크게 어긋난다. 형사소송법상 재심은 이전 판결의 증거물이 위·변조된 사실이 증명된 경우 등 수사·재판 과정에 문제가 있을 때 이뤄진다. 말 그대로 재심 판결이 사건과 관련된 최종 판결이다. 이진성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지난 9월12일 박 후보의 발언과 관련한 질문에 “(박 후보가) 그렇게 말했다면 재심 구조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사법부의 최종 판결은) 언제나 하나”라고 답한 이유가 여기 있다.

유신시절의 정치적 폭압에 대한 무시도 다시금 우려를 낳는다. 박 후보는 라디오에서 “똑같은 대법원에서”라고 강조했다. 유신시절 대법원과 민주화 이후의 대법원은 사실상 별개의 대법원이었다. 유신시절의 대법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반쪽 법원’ 처지에 놓였다.

“개정헌법(유신헌법)에 그려진 사법부의 모습은 민주주의의 토착화, 국력의 조직화 등 이른바 유신 이념에 눌려 헌법상 지위가 상대적으로 격하되고 그 권한이 종전보다 대폭 축소된 상태였다. 법관추천회의가 폐지되고 대통령이 대법원장 등 모든 법관의 임명권을 갖게 됐다. 위헌법률심사권도 삭제되어 헌법위원회가 이를 행사하게 됐다. 9인의 대법관과 40여 명의 법관이 재임용에 탈락됐다. 수사의 능률이 강조된 나머지 인권 보장 측면에서는 형사 절차상의 후퇴를 가져왔다.”

민자당(현 새누리당)이 집권당이던 1995년 법원이 공식적으로 펴낸 <법원사>에서 유신시절을 평가한 기록이다. <법원사> 저술에 참여한 판사들은 진보·보수적 신념을 드러낸 적이 없는 중도·합리적 법조인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대법관을 지낸 서성 변호사(법무법인 세종)가 당시 법원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법원행정처에 있던 이종욱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가 부위원장이었고, 서울중앙지법 민사수석부장을 지낸 권광중 변호사(법무법인 광장),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지낸 윤재윤 변호사(법무법인 세종) 등이 실무위원이었다.

민자당 시절 편찬된 <법원사>가 기록하는 유신시절은 ‘법원의 암흑기’로 요약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법관의 사법부 독립 신념을 혐오했다.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대법원 감독관직을 신설해 1961년 홍필용 당시 대령을 임명했다. 양헌 판사가 1964년 5월20일 반정부 시위 학생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다음날 무장군인 13명이 서울형사지방법원 당직실에 난입했다. 대한변호사협회, 법과대학생 등이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법원은 동백림 사건에 일부 무죄를 내렸다. 정부에 유리하도록 개정된 국가배상법 개정안에 대해 위헌판결했다.

박정희 정부는 가만있지 않았다. 1971년 검찰을 동원해 일부 판사와 서기관을 횡령 혐의로 옭아매 구속영장을 청구하게 했다.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서울형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 형사부) 판사 37명이 이에 항의해 집단사표를 제출했다. 이어 서울형사·민사지법 판사 수십 명이 ‘사법권수호 건의문’을 발표했다. 여기까지였다. 유신 이후 수십 명의 법관이 재임용에 탈락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영등포지원 이영구 당시 판사는 무죄판결을 하고 두 달이 안 돼 전주지법으로 전보된 뒤 사직했다. 이후 판사들은 자존심을 버렸다. 박 후보는 아버지가 만든 ‘유신 법원’을 민주화 시대의 법원과 같은 법원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독립적 정치인 주장, 멈춰선 인식

2009년 편찬된 <법원사>도 “개정헌법(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 및 국회의원 정원의 1/3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에 대한 실질적 지명권, 법관의 임면권, 법원의 권한에 대한 긴급조치권 등을 부여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꾀하기 위한 3권분립의 원칙을 크게 후퇴시켰다”고 기록했다.

유신시절 민청학련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박형규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은 지난 9월1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박 후보의 역사관에 대해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해서 자식이 책임을 질 수는 없지만 자기 아버지가 그랬으면 아버지라도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얘기하면 국민들이 납득이 가는데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그걸 정당화하는 거거든요”라고 비판했다. 인혁당 유가족을 대변하는 ‘4·9 통일평화재단’ 이창훈 사료실장도 같은 날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무죄도 받고 배상도 받고 이제는 고통을 잊고 살려고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 사회가 잘못된 거죠. 반성 없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아직도 유족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번에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바로 그런 지점에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두 개의 판결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밝혔다.

박 후보는 지난 9월10일 라디오에서 “제가 정치를 이제 시작한 지 15년 되는데 물론 이제 그 아버지하고 저희 아버지니까 그런 걸 생각을 많이 할 수도 있겠지만 또 저는 15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제 나름대로 끊임없이 국민들의 평가를 받아왔다고 생각을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은 그저 ‘독재자의 딸’이 아니라 ‘독립적 정치인’이라는 의미다. 이번 역사관 논란은 이런 박 후보의 주장에 대해 믿음보다 의심을 준 것 같다. 박 후보의 역사관은 정치인 입문 전에 작성한 일기의 시각에 멈춰 있어 보인다. 그는 1988년 10월17일 일기에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은 국가를 자기와 동일시했으며 국가의 주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이라고 썼다(<한겨레21> 2012년 7월16일치 919호 참조). 1989년 5월19일 방송된 MBC <박경재의 시사토론>에서는 2시간 동안 유신체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박 후보는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며 “5·16이 먼저냐 공산당이 먼저 쳐들어오느냐는 시점에 다행히 5·16이 먼저 와서 파멸 직전의 국가가 구출됐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필리핀이 조금 나은 이유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흐르며 다양해졌다. 최근 한 신문은 5·16과 유신은 다르다는 글을 실었다. 5·16은 긍정적이지만, 유신은 과오라는 논리였다. 진보 진영 안에서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5년 <창작과비평>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지속 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라고 평가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그 모델이 지속할 가능성은 낮았고, 더욱이 현재 한국 경제의 롤모델도 아니라는 취지였다. 박근혜 후보의 역사관은 일방적인 옹호와 찬양에 서 있다.

필리핀과 한국 독재자의 딸은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 박근혜 후보는 유력한 대선 후보다. 반면 필리핀에서 이멜다 마르코스는 주지사지만, 이멜다 마르코스의 아버지가 죽였던 야당 정치인의 아들 베니그노 아키노가 대통령이다.

참고 문헌 <법원사>(법원행정처 펴냄·1995), <역사 속의 사법부>(사법발전재단 펴냄·2009)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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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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