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마을 투표함이 ‘손을 탔다’고 보는 까닭 | |
[심층분석] 물증으로 추적해본 구룡마을 투표함의 갖가지 ‘의혹‘들 | |
정운현 기자 | 등록:2012-04-19 08:19:40 | 최종수정:2012-04-19 11:18:23 |
금강산 관광은 흔히 두 코스로 나뉩니다. 신계사를 지나 만물상(萬物相)을 거쳐 천선대에 오르는 코스와 연주담을 거쳐 ‘나뭇꾼과 선녀’의 전설이 깃든 상팔담(上八潭)에 오르는 코스가 그것입니다. 상팔담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동북쪽으로 힘차게 내리꽂는 폭포가 하나 보이는데 바로 ‘구룡(九龍)폭포’입니다. 폭포 밑에 돌절구 모양으로 깊이 패인 구룡연(九龍淵)은 그 깊이가 13m 가량 되는데 이곳에는 금강산을 지키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구룡’이 들어가는 지명이 더러 있는데 서울 강남구 서초동 구룡산과 대모산 아래 자리잡은 ‘구룡마을’도 그중 하나입니다. 머지않은 곳에 부자동네의 상징인 타워팰리스가 바라다 보이는 이 마을은 강남이면서도 강남 같지 않은 곳입니다. 흔히 ‘강남의 오지’로 불리는 이 마을엔 아직도 허름한 집들이 즐비하며 조그만 골목길과 주변의 밭들은 70, 80년대 도시 변두리의 허름한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영화 ‘세븐데이즈’와 ‘아버지와 마리와 나’의 촬영지이기도 했죠.
▲ 강남의 극과 극. 판잣집이 즐비한 구룡마을 뒷편으로 빌딩숲을 이룬 타워팰리스가 보인다. |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철거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개포동 구룡마을의 주민들은 사유지에 지은 무허가 주택인 탓에 대부분의 가구는 전입신고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선거 때마다 떠나온 지 한참 된 이전 주소지로 가서 투표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20여년 만인 지난 4.11 총선에서는 앉은 자리에서 투표를 하였습니다. 작년 5월 강남구청이 주민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줬기 때문입니다.
현재 구룡마을에는 주민 2천3백명이 살고 있는데 강남구선관위에 따르면,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는 총 1965명이었습니다. 컨테이너로 만든 구룡마을 상황실에 차려진 투표소에는 이른 아침부터 주민들이 모여 축제마당을 방불케 했다고 현장을 취재했던 언론들은 전했습니다. 일용직 근로자들이 대부분인 주민들은 출근 전에 투표를 했다는데, 강남구선관위에 확인한 결과 총투표율은 75.9%(1491명 투표)로 전국 평균투표율(54.3%)보다 무려 21.6%포인트나 높습니다.
▲ 구룡마을 투표소는 구룡마을 상황실에 마련된 '개포1동 제5투표소'이다. ⓒ 프레시안 |
구룡마을 주민들은 20년 만에 주민들이 내손으로 대표자를 뽑는다는 기쁨에 새벽같이 줄을 서서 투표를 했고 또 투표율도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구룡마을의 투표함이 세간에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강남을’의 경우 총 55개 투표소에서 투표가 진행됐는데, 구룡마을에는 ‘개포1동 제5투표소’가 설치됐습니다. 이 한적한 구룡마을에 설치된 투표함에는 투표일 당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구룡마을은 이번 총선에서 주목을 받은 동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민주통합당 정동영 후보가 정치적 고향인 전주를 버리고 ‘적진’이랄 수 있는 ‘강남을’에 도전장을 냈는데 이 구룡마을이 바로 강남을에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정 후보의 상대는 새누리당 김종훈 후보로 두 사람은 선거기간 내내 한미 FTA 문제를 놓고 각을 세웠습니다. 타워팰리스 등 부자동네 유권자들이 김 후보 지지자들이라면 이곳 구룡마을은 상대적으로 정 후보 지지자랄 수 있습니다.
▲ 문제의 구룡마을 투표함. 투표소 이름을 적는 자리가 빈칸(붉은색 원내)으로 남아 있다. ⓒ 뉴스1 |
그래서 투표 당일에도 몇몇 언론들은 이곳 오지 구룡마을까지 찾아가 현장취재를 벌였는데 그 매체들 가운데 하나가 통신사인 <뉴스1>입니다. <뉴스1>은 당일 기사 외에 투표소 현장사진도 여러 장을 보도했는데 그 사진들 가운데 한 장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주목 정도가 아니라 ‘문제의 투표함’을 아주 결정적으로 카메라에 담았더군요. 위 사진은 당일 오후 3시 23분 <뉴스1>의 오대일 기자가 찍은 것입니다.
위 사진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투표함의 정면입니다. ‘투표함’이라고 쓴 굵은 글씨 아래에 괄호가 있는데 그곳에는 투표소의 고유명칭을 쓰는 곳입니다. 제대로 쓰였다면 ‘개포1동 제5투표구’라고 빈칸에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선관위 규칙에 따르면, ‘투표함에는 그 앞면에 해당 투표구의 명칭을 표시한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규정 여부를 떠나 각 투표함에는 투표구(투표소)의 명칭을 기재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실지로 그런지 안그런지 아래의 사진 몇을 보시죠.
▲ 정상적인 투표함에는 '투표함'이라고 쓴 괄호 안에 해당 지역 투표구의 명칭이 적혀 있다. 왼쪽부터 이명박 대통령, 한명숙 민주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내외가 투표하는 모습 |
보시다시피 위 사진속 투표함에는 투표구 명칭이 모두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구룡마을 투표함은 이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습니다. 마치 이름도 안 적힌 명찰을 단 학생 꼴이며, 번호판 없는 차량과 같습니다. 대체 왜 이럴까요? 이게 그냥 단순한 실수일까요? 선관위 직원(혹은 투표소 관리자)이 투표소 문을 열면서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투표함을 점검하는 일일진대 이곳에 투표구 명칭을 기재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닐까요? 이 사진이 개인블로그가 아니라 공신력 있는 언론사의 보도사진이라는 게 천만 다행입니다.
그러면 제대로 된 명찰도 달지 않고 있던 이 문제의 구룡마을 투표함은 그 후 어찌 됐을까요? 투표구를 써넣는 자리가 빈칸인 채로 개표장에 나타났을까요? 아닙니다. 놀랍게도 개표장에 등장한 구룡마을 투표함에는 희미한 글씨로 ‘개포1동 제5투표구’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처음엔 빈칸이던 자리에 언제, 누가 ‘개포1동 제5투표구’라고 써넣었을까요? 그리고 그는 대체 누구일까요? 조만간 검찰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이 글씨를 쓴 사람을 찾아내 그 경위를 반드시 밝혀내야만 합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예상외로 심각한 일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 개표장에 나타난 구룡마을 투표함. 당초 빈칸으로 자리에 <'개포1'동 제'5'투표구>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 이 투표함은 봉인도 안된 상태로 개표장에 이송돼 왔다. ⓒ 황유정 비서 |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룡마을 투표함은 ‘봉인’조차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았습니다. 투표소 명칭 표기와 투표함 봉인 같은 건 투표관리 업무의 기본이랄 수 있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투표함 상단의 뚜껑에는 선관위가 작성한 ‘봉인요령 매뉴얼’이 보란 듯이 붙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투표함 봉인을 하지 않은 것은 이번에도 선관위의 단골멘트인 ‘단순한 실수’였을까요? 개표장에서 문제의 이 투표함을 접한 선관위 직원은 야당측 개표 참관인에게 ‘바빠서 그랬다’고 말했다는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겠습니까?
이상에서 보듯이 구룡마을 투표함은 두 가지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룡마을 투표함은 당일 개표장에서 야당측 개표참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표가 강행됐습니다. 강남구선관위는 대체 왜 이같은 무리수를 던졌을까요? 혹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걸까요? 개표후 정동영 후보측은 구룡마을 투표함 등 문제있는 투표함에 대해 증거보전 신청을 했고, 엊그제 17일 법원은 21개 투표함을 법원으로 옮겼습니다.
한편, 이번 4.11 총선에서는 나타난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계급투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사회의 극한 대립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강남의 대표적인 부자동네인 타워팰리스 지역은 여당후보(심윤조) 지지율이 ‘88.5%’라는 몰표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룡마을에서는 정동영 후보에게 몰표가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정 후보에게 몰표가 예상됐던 구룡마을 투표함에 문제가 생겼을까요? 혹 ‘오비이락’일까요?
▲ 개표가 끝난 후 당선이 확정되자 엄지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지어보이는 김종훈 후보. ⓒ 김종훈 후보 홈페이지 |
강남구 선관위에 구룡마을 투표율을 문의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구룡마을 전체 유권자 1965명 가운데 투표자는 1491명, 투표율은 75.9%로 집계됐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두 후보들의 득표율은 얼마나 될까요? 김종훈 새누리당 후보는 496표를 얻어 득표율 33.3%, 정동영 후보는 957표를 얻어 득표율 64.2%를 기록했습니다. 정 후보의 득표율이 김 후보보다는 높습니다. 그러나 구룡마을과 대비되는 타워팰리스에서 나타난 ‘몰표’(88.5%)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인 셈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구룡마을 투표함이 누군가의 '손을 탔다'고 추정하는 까닭입니다.
4.11 총선은 끝났습니다.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한명숙 대표가 사퇴하면서 민주당은 후임 지도부 구성을 놓고 내부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민주당은 아직 선거부정 문제를 살필 여유가 없었지만 조만간 이 문제를 다뤄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또 몇몇 뜻있는 유권자들은 부정선거대책위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으며 검찰, 법원도 곧 진상조사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작업이 진행될 경우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할 것이 구룡마을 투표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머잖아 구룡마을 투표함을 둘러싼 의혹들이 하나 둘씩 풀릴 것으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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