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2012. 9. 27. 선고한 곽노현 외 2인에 대한 공직선거법위반 사건의 판결은 법리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1. 원심의 중대한 법률위반이 있음에도 왜 파기환송하지 않았나?

대법원 판결의 첫 번째 문제점은, 원심판결에 중대한 법률위반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원심을 파기하여 다시 판결하도록 하지 않은 점이다.

제1심과 제2심에서 피고인들은 '사후매수죄를 규정한 공직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는 단순 고의범이 아니라 목적범'이라고 주장했다. 즉, 재산상의 이익 등의 제공자가 후보자를 사퇴한 사람에게 이를 제공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지급할' 목적이 없으면 사후매수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1심과 제2심은 피고인들의 이러한 주장을 배척하고, 사후매수죄는 목적범이 아니라 단순 고의범으로 판단하여, 피고인들이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지급할 목적'이 있었는지에 대해 심리도 하지 않고, 판결문에 그에 대한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원심이 목적범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중대한 법리오해'임을 상고이유로 삼았고, 대법원은 피고인들의 이 상고이유를 받아들였다. 즉, "공직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의 죄는 그 범죄성립을 위한 초과주관적 위법요소로서 고의 외에 별도로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지급할 목적' 또는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받을 목적'을 요구하는 이른바 목적범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항소심의 판결에 중대한 법리오해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법원은 당연히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매우 이례적으로 파기환송을 하지 않고, '피고인들에게 위와 같은 목적이 있었는지'를 직접 판단했다. 통상적으로 대법원은 원심판단에 법리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는 99% 파기환송을 하고, 원심에서 심리를 다시 할 필요가 없는 것이 확실한 경우에만 극히 예외적으로 스스로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경우 대법원은 파기환송하여 원심이 다시 심리해서 각각의 피고인들이 위와 같은 목적으로 갖고 있었는지를 판단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비록 원심이 피고인들이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판단하지 아니하였지만 원심의 판단은 피고인 박명기, 곽노현에게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판단한 후, 스스로 각 피고인들이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판단했다.

피고인들의 목적 유무는 고의 유무와 마찬가지로 범죄구성요건의 중요한 요소이고, 이에 대해 판단하지 아니한 것 자체로 위법하다. 사람을 죽인 행위가 모두가 살인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과실로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원심이 피고인들이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 것은 살인죄 여부를 판단하면서 고의가 인정되는지를 판단하지 아니한 것과 같다. 이 사건의 경우 행위자가 대가관계를 인식하고 있더라도 다른 목적, 예컨대 순수한 부조나 종교적인 이유로 행위를 하였다면 사후매수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피고인들이 어떤 목적으로 갖고 돈을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 판단하지 아니한 원심이 위법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통상적인 사건에서 볼 수 없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더구나 대법원은 피고인들의 목적 유무를 직접 심리도 하지 아니한 채 기록만으로 직접 판단했다. 이는 사실판단의 전권을 갖고 있는 원심의 판단권한을 침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공판중심주의에도 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법원이 무리하게 파기환송하지 않고 스스로 피고인들의 목적 유무를 판단하였을까? 이러한 현상을 법률적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대법원이 정치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조기에 종결하여 이번 대통령 선거 때 서울시 교육감 재선거를 동시에 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을 한 것으로 밖에 볼 수가 없다.

▲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지난 4월 17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1년 징역형을 선고 받은 뒤 법원을 나서기 위해 차량에 오르고 있다. ⓒ뉴시스

2. '목적'이 없는 강경선의 권유를 받아들인 곽노현은 왜 '목적'이 있는가?

대법원 판결의 두 번째 문제점은, 금전 제공을 제안한 강경선 교수는 목적이 없는데 그 제안을 받아 실천한 사람은 목적이 있다는 모순된 결론을 내린 점이다.

대법원은 곽교육감에게 곽 교육감에게 금전 제공을 제안한 강경선 교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지급할 목적'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강경선은 2010. 5. 19. 금전지급 합의(양 후보자의 실무자 사이의 합의)에 대하여 곽노현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인식하였고, 이에 따라 곽노현이 부탁하는 대로 박명기의 오해와 원망을 풀어주고 이를 통하여 곽노현의 원활한 교육감직 수행에 도움을 주고자 박명기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알린다는 취지에서, 곽노현에게 금전 제공을 제안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위와 같은 강경선과 다른 피고인들의 관계, 강경선의 사건 관여 동기, 경위 및 역할의 정도와 내용, 특히 강경선은 박명기의 후보자 사퇴과정이나 곽노현의 선거운동에 관여한 바 없는 점 등의 여러 사정을 비추어 보면, 원심이 제시한 사정만으로는 강경선에게 곽노현이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지급할 목적으로 박명기에게 2억 원을 제공한다는 점에 관한 인식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대법원은 곽 교육감에게 '박 교수에게 2억 원을 주자'고 제안한 강 교수의 목적은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내지 순수한 부조 차원에서 한 것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후보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지급할 목적'이 없는 강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박 교수에게 2억 원을 제공한 곽 교육감에 대해서는 목적이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곽 교육감이 실무자들 사이의 금전지급 합의에 관한 사실을 선거일로부터 4개월 후인 2010. 10.경에 알았다는 점, 본인이 그러한 합의를 하라고 지시하거나 그러한 합의를 승인한 바가 없기 때문에 박 교수에게 금전을 지급하여야 할 도의적·법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 점, 강 교수가 박 교수를 여러 차례 만난 후 곽 교육감에게 '순수하게 박 교수를 도와주자'는 거듭된 제안을 한 사실, 곽 교육감은 이러한 강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박 교수에게 2억 원을 지급한 사실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곽 교육감은 '사퇴에 대한 대가를 지급할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목적이 없는 강 교수의 권유와 설득에 따라 박 교수에게 돈을 지급한 곽 교육감이 당연히 목적이 없는 것이다. 강 교수와 곽 교육감은 '일심동체'로 박 교수를 돕자고 결의하고 그 결의를 실천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이 목적이 없으면 다른 사람도 목적이 없는 것이다. '동전의 앞면은 진짜인데 동전의 뒷면만 가짜'일 수가 없는 것이다. 대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논리법칙에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3. 사전 약속 없는 사후매수가 가능하다?

대법원 판결의 세 번째 문제는 후보자가 사퇴하기 전에 사전 약속이 없이도 사후매수죄가 성립한다고 불가능한 가설을 전제로 한 점이다.

대법원은 "사후매수죄는 후보자 사퇴가 있기 전에 제공자와 수수자 사이에 재산상의 이익 제공에 관한 사전합의가 이루어지거나 위와 같은 이익제공 등의 행위가 당해 선거의 투표 종료 이전에 행해져야만 범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고 판단했다.

'대가'는 '주고 받는 '것이고, '매수'란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후보자가 자진해서 사퇴한 후에는 살 물건이 없어 매수란 논리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공직선거법은 '선거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선거와 관련된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법이다. 후보자가 스스로 사퇴를 하는 경우는 이 두 가지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다. 반면, 금전지급 약속에 의해 사퇴를 한 경우는 국민의 자유로운 선거권과 후보자의 피선거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이를 금지하고 있다. 후보자가 자진하여 사퇴를 한 후 사퇴한 자와 단일후보자가 된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이는 국민의 선거권과 선거부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위법하지 아니한 행위를 금지할 필요가 없다. 다만, 후보자가 사퇴 이전에 사퇴 후에 금전 제공이나 이익 제공의 약속을 한 후 일방이 사퇴한 후에 다른 일방이 사퇴한 후보자에게 금전 등을 제공하는 경우에는 국민의 선거권과 후보자의 피선거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금지할 필요가 있다. 사후매수죄는 후자의 경우에만 해당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대법원처럼 제공자와 수수자 사이에 재산상의 이익 제공에 관한 사전합의가 없이 한 후보자가 사퇴하고 다른 후보자가 선거 후에 재산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도 사후매수죄에 해당한다고 해석하면, 선거의 공정성과 피선거권의 불가매수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행위를 처벌하는 셈이서 부당하다. 선거에 영향이 없는 영역에 법적 규제를 하는 것이 되어 과잉금지원칙에 반하게 된다.

대법원 판결의 논리라면 판사나 검사가 사전에 특정 로펌이나 기업체 임원으로 가기로 한 약속 없이 재량권을 행사하여 특정 로펌이 맡은 사건을 무혐의나 무죄를 선고하였는데, 우연히 퇴직 후 특정 로펌이나 기업체 임원으로 가게 된 경우에도 모두 뇌물죄로 처벌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우 검사나 판사의 자의가 개입될 위험성이 너무가 클 뿐만 아니라 형사책임의 원칙에도 반하게 된다.

대법원은 이 사건의 경우 곽 교육감과 박 교수 사이에 박 교수가 사퇴하기 전에 어떠한 금전지급에 관한 약속이 없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사후적인 관점에서 '박 교수의 사퇴로 곽 교육감의 당선이 되었고, 곽 교육감은 그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돈을 준 것이다'라고 추측하여 곽 교육감과 박 교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곽 교육감과 박 교수가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만난 관계이니 곽 교육감은 박 교수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곤궁함에 처해 있더라도 외면하여야 하고, 절대로 도와줘서는 안 되고, 가사 경제적인 도움을 주더라도 많은 금액을 도와줘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이 대법원 판결의 논리라면 단일후보로 된 사람은 사퇴한 사람과 원수로 지내야 하고, 사퇴한 사람이 어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호의를 베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법이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하라'고 강요하는 꼴이다. 참으로 해괴한 논리라고 아니할 수 없다.

4. 헌재의 위헌결정 사전 '김빼기' 아닌가?

대법원 판결의 네 번째 문제점은 헌법재판소의 '사후매수죄'의 위헌여부에 대한 결정 전에 서둘러 선고한 점이다.

이 사건의 처벌조항인 공직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 사후매수죄 규정은 일본과 우리나라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선거 이후에 있는 행위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금지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경우 사후매수죄 규정은 약 90년 전에 천왕제적 절대주의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으나 그 후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54년 전에 입법되었으나 그동안 단 한 차례도 적용되지 아니하다가 이 사건에 최초로 적용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계에서는 사후매수죄에 대한 위헌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피고인들은 이 규정에 대해 한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헌법재판소에서는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기 전에 이미 위헌여부에 관해 심도 있게 논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법원은 전격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선고를 했다.

이러한 대법원은 왜 이러도 조급하게 판결을 선고하였는지는 판결문에 여실히 드러난다. 대법원은 법률조항이 위헌이라는 판단은 할 수 없지만 합헌이라는 판단은 할 수 있다. 대법원이 처벌근거조항에 대해 합헌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라고 소극적으로 판단하고 당해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대법원은 이례적으로 판결문 27쪽 가운데 12쪽 분량으로 적극적인 법률조항의 위헌여부를 자세하게 판단했다. 즉, ①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의 원칙 위배 여부, ② 과잉금지원칙 위배 여부, ③ 책임과 형벌의 비례원칙 위배 여부, ④ 공소시효와 관련한 헌법상 평등원칙 위배 여부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사후매수죄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이 이 규정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자체로 위법하지는 않지만 위와 같이 이례적으로 적극적으로 위헌여부를 판단한 것은 다분히 헌법재판소를 의식한 행동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법률의 위헌성에 관한 최종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대한 사전 '김빼기'를 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동일한 사안에 대해 대법원과 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사전에 자신들의 입장을 자세히 밝힌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헌법재판소의 고유권한인 위헌결정권을 사실상 침해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5. 후보단일화 못하게 하는 법리 마련하려는 것인가?

대법원 판결의 다섯 번째 문제점은 야권에서 후보단일화에 대한 제동을 걸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검찰은 선거 후 박 교수가 무보수·명예직에 불과한 서울교육발전자문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것을 문제삼아, 곽 교육감이 박 교수를 서울교육발전자문위원회 부위원장을 제공한 것은 사퇴에 대한 대가라며 이를 사후매수죄로 기소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이 규정의 '공사의 직'에는 무보수·명예직은 포함되지 아니한다"라고 판단하지 아니하고, "곽 교육감이 박 교수를 서울교육발전자문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후보단일화를 하면서 당선자가 사퇴한 후보자에게 정무직이나 무보수·명예직을 제공할 경우 처벌할 가능성이 열어 놓은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선거에서 후보단일화는 하나의 보편적인 정치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후보단일화를 통해 정책연합을 하기도 하고, 공동정부를 구성하기도 한다. 정책연합이나 공동정부 구성을 할 경우, 단일후보가 당선되면 사퇴한 후보에게 공직을 배분한다. 예컨대, 대통령선거의 경우 단일후보자가 된 후보자가 사퇴한 후보자나 그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에게 국무총리 또는 장관으로 임명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사후매수죄가 존속하고 사후매수죄를 대법원처럼 해석하는 한, 이러한 행위는 모두 불법이고, 단일후보자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더라도 그들의 지위는 검찰이나 법원의 손에 의해 좌우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더라도 사후매수죄의 규정은 헌법상 민주주의의 원리에도 반하는 위헌적인 조항으로 폐지되어야 하고, 만약 폐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사건 대법원 판결과 같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 대법원 판결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법리적 판단에 오류를 범한 위법한 것이다. 앞으로 헌법재판소가 사후매수죄 규정에 대해 위헌결정을 하여 이러한 모순된 법해석을 근원적으로 차단해야 할 것이다.



이재화 변호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1002114758&section=03

Posted by skidpara
,

[교양]묵자를 알려주마(5) – 묵자의 天과 하느님

2012. 09. 27. 목요일
백골프

 

묵자의 天과 하느님 1

앞서 묵자의 인성론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자로 天. 앞으로 이것을 하늘, 하느님 두 단어로 섞어서 이야기할 것인데요. 인간 마음 밖에서 어떤 기준을 찾고 그 기준으로 인간을 만들고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성악설을 지지하는 사상가 중 하나인 묵자. 그 묵자는 하늘 내지 하느님의 뜻을 기준으로 삼아 인간과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묵자만 하늘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한자로 天은 근래까지도 동아시아 사상과 사회를 이해하고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이고 개념이고요, 하나의 큰 열쇠란 말이죠. 천과 관련된 아이디와 패스워드 없이 동아시아 사상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상제를 가지고 자신들의 지배와 권력의 정당성을 말하던 은나라, 그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나서 주나라는 자신들의 지배 권력의 정당성을 , 천명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천명을 받아서 다스리는 것이다, 우리 뒤에 천명, 천명을 내린 천이 있다고 그들은 말했죠. 그 뒤로 쭉 천은 동아시아 사회를 이끌어가고 설명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관념과 사상의 뿌리였는데 당연히 묵자만 천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묵자 이외에도 많은 사상가들이 자신의 사상과 이념의 근거, 정당성을 말하는데 있어서 천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묵자의 천은 다른 사상가들의 천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또 다른 맥락으로 사용되었으며 또 사상체계 내에서 천이 차지하는 비중이 달랐습니다. 그 차이는 무척이나 컸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다른 학파, 사상가들에 비해 天에 관한 진입장벽이 아주 낮았다는 점. 하지만 天이 묵자 사상에서 차지한 비중이 아주 컸다. 그리고 天이 그냥 당장 주어진 현실과 현실의 지배질서를 단순히 설명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이념, 제도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뭔가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천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묵자의 천은 단순 하늘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도 번역이 가능하죠, 다른 사상가, 학파의 천과 달리요. 다른 학파의 천은 하느님으로 번역이 잘되질 않고 그리 번역하면 상당히 어색합니다.

 

하느님이라……. 하느님하면 기독교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텐데 묵자의 하느님이 뭐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하느님과 닮은 구석이 있고 그런 신학들의 하느님을 생각하셔도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굳이 무리해서 연결짓는 건 제 능력밖의 일인 거 같고. 우선 묵자에 국한시켜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묵자가 말하는 천이 뭐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 학파의 천과 구분되고 또 그 천은 누구의 의지와 목소리를 대변하는 지를요.

 

일단 이점을 말씀 드릴께요.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어떻게 천을 바라보는지 모두 언급을 하면서 충실히 설명을 드릴텐데요, 지루해질 수도 있지만 묵자 사상의 천만이 지닌 개성과 특징을 제대로 보여드리기 위함이니, 잘 좀 따라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열다섯이 되어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 주관이 바르게 섰으며 마흔이 되어 현혹되지 않았고 쉰이 되어서 천명을 알게 되었고 예순이 되어서 귀가 순하게 되어서 일흔이 되어서……. -논어 위정편-

 

-공자가 광지방에서 위기에 처하자 말하길 “문왕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文은 여기에 남지 않았느냐 하늘이 장차 이 文을 없애고자 한다면 후에 죽은 자들은 이 文과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도 이 문을 없애지 못한다면 광의 사람들이 나를 죽인들 무엇하겠느냐?” -논어 자한편-

 

-공자가 말하길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렸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느냐?” -논어 술이편-

 

-자기의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性을 안다. 자기의 性을 알면 天을 알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보존하고 자기의 성을 배양하여 天을 섬긴다. -맹자 진심-

 

-천의 운행에는 일정한 항상됨이 있다. 이는 성군인 요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폭군인 걸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응하여 잘 다스리면 길하고 그에 응해서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흉하다. 농사일에 힘쓰고 절약한다면 하늘도 가난하게 할 수 없고 의식을 충분히 갖추고 부지런히 일한다면 하늘도 병들게 할 수 없다. 도를 따라서 어기지 않는다면 하늘도 화를 내릴 수 없다. – 순자 천론-

 

소와 말에게 각기 네 개의 발이 있는 것 이것을 천이라 한다. -장자 추수편-

 

군자다운 사람이 되어라. 정치 일선에 나서기 전에 수양으로 완성된 인간이 되어라, 인을 하라, 의를 행해야 한다, 예로 공동체를 다스려보자라고 하는 유가, 구체적으로 공자와 맹자. 그들이 도덕적, 윤리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항상은 아니어도 종종 천을 언급하곤 했습니다. 공자보단 맹자가 더 많이 천을 언급했고 또 그것을 더 비중 있게 다루며 자신의 사상 중심부에 더 가까이 위치시켰는데요. 둘의 사상에서 천은 어떤 도덕적 사명을 부여하는 것으로서 도덕과 윤리의 맥락에서 이야기 되어진다는 점 그리고 어떤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맥락에서 이야기 되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 말고 다른 유가사상의 목소리를 좀 들어볼까요. 중용이라고 있습니다, 유가 경전이고 이른바 사서중의 하나인 중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주 멋들어지고 또 현학적으로요.

 

“하늘이 명하여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성(性)이라 하며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하며 도(道)를 따르고 받아들이려 공부하는 것을 敎라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중용이란 책을 흔히 이렇게 설명들 합니다. 유가 사상의 관념적, 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여 유가의 우주론과 인간관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라고. 그런 중용의 첫 머리는 이렇게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네요. 하늘이 명하여 사람에게 부여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성, 사람은 날 때부터 그러한 하늘이 준 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그래서 모든 가치를 실현할 능력과 책임을 지닌 존재이고 그런 성을 따라 확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道, 즉, 사람의 길이라고 천명한 중용의 이 첫머리, 이 구절은 유학의 천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순자의 천관념을 담아내지 못하고 주로 성리학적 맥락에서 해석되어왔지만 명쾌하게 유학의 천관념을 제대로 보여주는데 저 구절을 깊이 있게 보지 않아도 우리는 유가의 천이 어떤 도덕 내지 인간이 해야할 당위와 연관되는 것임을 잘 알 수 있죠. 사람은 도덕적인 하늘에게서 부여 받은 성을 지닌 존재고 그 성을 잘 키워 항상 도덕적, 윤리적으로 살아야하는 존재, 그런 존재로 이해하시면 무난합니다.

 

이런 천관념과 그 천관념 하에서 이해되는 인간관의 뿌리를 살펴 볼려면 유가의 시조인 공자까지 소급해야야하는데 앞서 말씀 드린대로 공자의 천은 어떤 도덕과 연관되고 도덕적으로 살라는 사명을 내리는 존재로서 어떤 종교적인 냄새까지 풍깁니다. 그런 천에 대해서 공자는 종종 위의 예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맹자만큼 비중 있게 또 자주 말하진 않았어도 도덕과 연관되는 천을 인정하고 그런 천은 자신에게 어떤 사명을 부여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천으로. 위에서 인용한 발언 말고도 술이편에서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는데 환퇴가 어쩌겠느냐, 라고 했고 팔일편에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로가 위나라의 실세인 요부 南子와 스승이 만나려고 할 때 볼멘 소리로 따지자 자신의 결백을 하늘에 맹세하며 내가 거짓되면 하늘이 날 싫어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유랑 중 죽을 고비에 몰려서도 하늘이 文(바람직한 도덕문화겠죠)를 없애지 않고자 하는 이상,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말했는데요. 이런 장면들에서 天은 도덕적 사명을 내리는 존재일 뿐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살고 윤리적으로 살려는 공자를 뒤에서 지켜주는 존재로 이야기 되어지는 것 같네요. 이렇게 논어에서 공자의 천은 도덕적으로 독해가 되고 또 경외의 대상으로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공자는 천에 대해 이런 태도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거리 두기도 같이 하면서 천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하려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거늘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등 주술적 태도나 비합리적인 사고를 멀리하는 공자는 천에 대해 마냥 종교적 태도로 접근하지는 않고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제자 자공이 “스승에게서 천도와 성에 대해서 듣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공자가 제자에게 말하길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철이 운행하고 만물이 자랄 뿐이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합니다.

 

이런 공자의 모습은 천에서 신비적이고 종교적 색채가 갈수록 엷어지고 인간과 교감하는 천의 의미 역시 쇠퇴하는 등, 합리적으로 천을 이해하려는 당시 시대 상황의 반영일 것입니다. 그리고 천에게서 신비적이고 종교적 색채를 완전히 지우고 인간과 교감하는 천을 부정하는 흐름들과 추세는 순자와 법가, 노자로 이어지면서 잘 가다듬어진 이론틀과 형식을 가지게 되지요. 그렇지만 어쨌든 공자는 천과 인간 사이의 끈 자체는 버리지 않았고 공자는 그 천을 최대한 도덕과 연관 지어 해석하고 도덕을 투영해 하늘을 읽었습니다.

 

맹자는 공자보다 천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또 비중 있게 말을 합니다. 성선 인간의 마음과 감정에서 선한 경향성 내지 가능성을 말하는 맹자는 그것이 천이 부여한 것이고 그런 마음과 감정을 잘 키울 수 있는 지식인은 선각자이자 진리의 담지자로서 왕과 백성의 스승이 되어 세상을 이끌고 구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말을 하죠. 그리고 왕에게 자신의 仁義와 仁政에 대해서 유세할 때마다 이랬는데요, 천이 부여한 도덕적 성을 아주 잘 키워서 정치를 하고 그로인해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고 대권을 잡은 과거의 군주들에 대해 환기를 아주 많이 시킵니다. 그러니 내 말 잘 들어보라는 것이죠. 내 말처럼 하면, 즉 하늘이 부여해서 지니고 있는 선한 마음의 싹을 잘 키워 정치하면 당신도 천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말하는 빈도와 그것이 차지하는 사상에서의 비중은 공자와 맹자가 좀 차이가 날지라도 어쨌든 도덕, 윤리와 연관 또는 직결되는 하늘이고 인간에게 도덕적 사명을 부여하고 선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 능력을 주는 하늘인데요. 또 그들은 천을요 어떤 운명으로서도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공자와 맹자 모두 운명으로서의 천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도덕적) 사명으로서의 천과 다른 천의 또 다른 모습이자 얼굴이죠.

 

이상적인 질서인 도가 행해지는 것도 하늘의 명이요. 행해지지 않는 것도 하늘의 명이라고 말하고, 공자는 아끼는 제자가 중병에 걸렸는데 그것 역시 하늘의 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천명(天命) 그것은 인간에게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라라고 말하는 사명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도덕주체가 어찌할 수 없는 결과 내지 운명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인간에 도덕적으로 살고 행위하라, 사명을 부여하고 가능성을 주는 존재이지만 현실에서 그 도덕 주체에게 어떤 결과를 보증해주지 못하며 잔인한 결과와 운명을 주기도 하는 하늘. 이렇게 이중적인 맥락으로 공자와 맹자에게 천은 이해되고 이야기 되어집니다. 이렇게 사명과 운명, 공맹의 천은 두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말고도 또 공맹의 천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천은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천명 역시 아무나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

 

 

위에 예문 중 첫 번째 오십이 되어서야 천명을 알 수 있었다, 즉 천명에 대해 깨달았다는 공자의 말 보이시죠? 지천명이라고 유명한 말인데 학문에 뜻을 둔 지 35년만에 알았답니다. 서른이 되어서 뚜렷한 지향점과 자기 주관이 섰고 그 후로 10년 후 마흔이 되어서 자신의 길과 지향점에 대해 어떤 의혹도 일지 않게 될 정도로 수양되고 공부된 사람이 다시 그 후로부터 10년 후에나 알게 된 천명. 뭐 이렇게 천명에 대해 알기 어렵나요? 공자 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고생, 고생해서야 겨우 천명에 접근하고 알게 되었는데 보통 사람들은 어디 엄두나 나겠습니까? 맹자도 이야기를 하죠,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또 그러고 난 다음에 자신 안에 어떤 내재된 성을 다 발휘하게 되는데 그리고 나서야 천과 만난다는. 이렇게 천에 접근하는 문턱이 참 높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공자와 맹자뿐만이 아닙니다. 순자와 도가, 법가 사상가 모두 마찬가지죠, 유가처럼 도덕적인 천, 윤리를 투영해서 읽는 천을 부정하고 하나의 객관적인 자연 질서내지 법칙으로서 이해를 하고 거기서 그들 각자가 예, 법, 도등 자신들이 말하는 가치 내지 기준의 정당성을 뽑아내는데 그들 역시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아무나 이해하고 꿰뚫어보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질 않았죠.

 

교육의 수혜자 중에서도 일부가, 아니면 도통한 사람, 아니면 아주 극소수의 이상적인 군주가 가진 어떤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지혜 내지 통찰력에서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도덕적인 맥락으로 해석되어지는 천이든 아니면 도덕과 상관 없는 맥락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천이든 굉장히 신비화 되어 있고 소수의 사람만이 접근해서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위에 순자의 말을 보십시오, 하늘엔 항상된 질서가 있다고 하는데 벌써 범상치 않고 꽤나 어려운 말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응해서 세상을 잘 다스리면 길하고 다스리지 못하면 불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뭔지 알아 응할 수 있고 또 응해서 어쩌고 저쩌고 해볼 수 있는 건 누구의 몫일까요? 철저히 그것은 인간사회의 스승이자 질서의 담지자가 되는 이상적 군주의 몫이라고 순자는 못박습니다. 요라는 성군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며 공자 , 맹자와 달리 도덕과 거리를 둔 채 천을 읽지만 순자 텍스트를 보면 천에 대한 진입장벽을 너무도 높게 설정해놓았습니다.

 

우리 仁을 행해보자, 아니다 禮로 다스려보자. 법대로 하자, 아니 도에 순응해서 살자고 주장들을 하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왜 仁을 행해야지? 예나 법, 도는 대체 어디서 정당성을 얻는 것이고 타당성을 얻지? 라고 물어보면 어, 천이란게 있는데 말이야, 그 천과 연관되고 거기에 근거와 정당성이 있어. 그럼 천이란게 뭐에요? 라고 물으면, 어, 그런게 있어라고 답하는 상황. 묵자 이외에 모든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든 헌법을 들춰보면 대한민국 사회의 정체성 그리고 대한민국 주권의 정당성과 근거, 또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청사진과 국가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국가가 보장하는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든 헌법에 접근해 읽어보고 그것들에 대해 알 수 있죠.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에 나라를, 또 천하를 다스리고 질서를 부여해보자는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자신들 사상에 근거가 되거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천에 대해서 보통사람이 알 수 없게 너무 크게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쳐놓은 울타리는 너무 높고 또 울타리 안에 그 천이 뭔지 명확히 말도 해주질 않고.

 

<도대체 천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문어체의 말이 아니라 구어체로, 살아 있는 현장의 언어로 기술된 논어, 그리고 그 논어에서 제자들을 자상하게 이끌어주는 공자조차도 자공에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느냐고 했고 또 자공 본인이 스승께 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했지요. 그리고 공자 자신부터가 굉장히 장시간 공부하고 수양해서 겨우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어렵게 깨달았다고 해도 자신의 사상과 직결되는 것이라면 좀 이런 것이다라고 말을 좀 해줬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해주고 않고. 참 답답한 노릇.

 

그런데 묵자는 다릅니다. 천에 대해서 분명히 말을 해줍니다. 천이 뭘 싫어하고 좋아하고,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태를 보이기를 원하고 또 무엇을 하면 벌을 주고 또 상을 준다고 지루할 정도로까지 묵자는 천에 대해서 명쾌하게 이야기합니다. 신비화된 무엇, 소수만이 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란 말이죠, 묵자의 천은 이렇습니다.

 

일단 공자와 맹자는 천 관련해서 天命이라고 말을 많이 합니다, 도덕적 사명의 맥락이든 아니면 도덕주체 내지 윤리적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맥락이든 그렇게 말을 합니다. 실제 命이라는 한자가 원래 명령 내지 사명, 거기에 운명. 이렇게 두가지 뜻 모두를 가지고 있죠. 자 공맹은 천에다가 命을 붙여서 천명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묵자는 천을 天志라고 많이 이야기 합니다, 텍스트에 아주 따로 천지편이라고 있는데요. 命 VS 志, 명령 내지 운명 VS 뜻. 의미나 뉘앙스가 많이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 사명과 운명과 달리 뜻은 좀 덜 무겁게 느껴지고 위압적인 냄새가 나지 않으며 쉽게 알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이렇게 묵자가 구체적으로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라고 자세히 밝혀 말해주는 천과 천의 뜻(천지). 그것을 묵자는 어떻게 알아내서 말해주는 것일까요? 어떤 종교적 체험을 통해 절대자와 만났을까요? 묵자 텍스트를 보면 천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히 표현된 말들이 많지만 어떤 신앙고백 내지 절대자 앞에서의 묵상과 명상, 기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굴뚝이 검어질 틈새도 없이 또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여지도 없이 구세를 위해 돌아다녔다고 많은 당대 문헌에서 묵자를 종교적 열정을 가진 행동가, 구세가로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종교적 체험에 기반해서 천, 천지에 접근했다는 흔적은 묵자 텍스트를 비롯해서 다른 춘추전국시대 문헌 어디에서든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 묵자는 거짓말을 말하거나 하늘의 이름을 빌려 아니 더 직설적으로 말해 하늘을 팔아먹으면서 약을 파는 사람이었을까요?? 혹시 사이비교주??

 

 

지금까지 많이도 말씀 드렸습니다. 묵자와 묵자 사상을 말하면서 묵자는 어떤 대등한 지분 내지 몫을 가진 인간들을 전제한다, 그 인간들이 모여서 합의내지 의견수렴을 통해 뭔가 만들어내고 그것이 기준이 된다, 묵자 사상 자체가 한 개인이 자신의 창의력과 통찰력으로 뚝딱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특히 하층민들의 의견 하나 하나가 모아져서 만들어진 거 같다라는……

 

묵자가 말하는 天志는 墨志이고, 또 民志입니다. 묵자 집단의 자의식, 하층민들의 염원과 희망 등이 투영되고 또 모아져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천지의 핵심이 겸애이고 겸애가 구현되는 세상을 묵자집단이 만들려고 했던 것이죠.

 

사실 그렇습니다. 절대자, 천,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그 하느님, 그 절대자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 내지 그 사람이 대표하는 집단의 목소리와 의지, 소망이 투영된 것일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예수와 주님을 말해도 모두 같은 예수와 주님을 말하는 것일까요? 정확히 말해 모두가 예수니 주님을 말해도 예수와 주님을 말하는 사람들 하나 하나에게 예수와 주님을 보는 시각이 같을까요? 아니면 예수와 주님을 말하는 사람들이 속한 집단 각자에게 역시 예수와 주님을 보는 시각, 그리고 그 절대자들에게 기도하는 내용이 같을까요?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과 주식이 올랐다고 권사나 집사 등. 다른 교인에게 자랑하듯 말할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권사나 집사는 주님께서 역사하셨다고 그럽니다, 그런 교회가 있지요, 분명히.

 

그런데 다른 교회에서는 같은 주님을 말해도 사람들의 물질적, 세속적 욕망에 부응하는 주님을 부정하기도 하는데 같은 교인이고 똑같이 주님과 예수를 말해도 그들이 보는 주님과 예수님은 다른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면 아예 다른 범주의 종교와 그 종교의 절대자라면 말할 나위도 없겠죠. 그저 각자가, 각자의 집단이, 자신이 처한 위치, 자신이 가진 소망, 욕심, 욕망, 자신의 교양 수준에 따라 다른 신과 절대자를 만들어내고 또 믿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선 말엽에 등장한 동학, 후에 천도교가 되는 그 동학이 말하는 절대자 한얼님에겐 누구의 소망과 염원이 투영된 것일까요?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말하는 상제는 또 어떤 집단의 염원과 소원이 담긴 것일 것이구요? 그런 운동을 일으킨 집단, 그들만의 소원과 염원이 담긴 절대자이고 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동학에선 모두가 한얼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면서 시천주를 말하고, 사람들은 각자 모두 천주를 모시고 있기에 평등한 존재라고 하는데 당시 양반들은 그런 한얼님을 이해하고 그 한얼님에 동의할 수 있었겠습니까?

 

묵자, 그리고 묵자 집단이 대변하는 묵자의 하늘과 하느님의 뜻은 그들 집단의 하느님이고 천지라는 하느님의 뜻은 그들 집단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뜻이었죠. 더구나 묵자가 말하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보면 모두가 하느님의 신하고 모든 국가, 도시와 지역이 하느님의 지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하느님은 당시에 사람들을 묶고 있는 질서의 칸막이와 틀을 괄호치며 보류하는(지우는 게 아닙니다. 보류입니다. 이건 상동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는데, 묵자는 신분질서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실제 공동체에 기여한 정도와 기여하는 능력에 따라, 즉,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신분이동과 상승, 하강을 하자는 거죠.) 하느님이고 또 하층민들을 동정하고 그들을 공격하고 착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명백히 묵자는 천지, 하느님의 뜻으로 다스려야한다고 말하면서 그 하느님이 뜻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구성되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데 그것을 보면 그들의 하느님 뜻인 천지가 묵지이고 민지임을 알 수 있죠.

 

상동편에서 사람들의 이익주장으로 읽혀지는 義를 어떤 과정과 시스템을 거쳐 통일해야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통일 후에 나온 公義가 바로 천지이고요. 또 비명편에서 삼표를 말하면서 세가지 틀로 통치의 기준 내지 규범,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3가지 틀 중에 두가지를 말해보자면 첫째가 전체 백성들의 이익에 합치해야 한다는 것이고 , 둘째가 전체 백성들의 여론과 합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민들의 의견과 이해관계를 종합하자는 것이죠. 이것도 다분히 하층민들의 의사를 염두해두고 한 이야기고 그것들 사이에서 통치의 기준을 끌어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치 기준을 만들어내는 세가지 방식에서 나머지 하나가 과거의 이상적인 군주인 성왕의 지도이념과 그들이 실제 행했던 전적인데요. 삼표법은 그냥 간단히 말해서 앞서 말한 두가지 방법에 성왕의 지도이념과 실제 행적을 더해 이것들로 기준삼아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공의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왕이 말입니다. 그 성왕의 지도이념과 정치적 업적 역시 묵자 무리의 의사와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왕, 성왕, 성왕……. 과거에 존재했던 성인군주라는 것, 참 고대 동양사상에서 많이도 여럿이 우려먹는 것인데 일단 묵자가 말하는 성왕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요? 사실 그 묵자가 말했던 성왕과 성왕의 전적이라는 것은 존재의 진실여부를 가릴 수도 없고 가리는 것이 무의미한 존재인데, 왜 그러냐면요. 묵자집단의 이상과 가치기준에 맞게 만들어내고 재구성한 역사의 성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런 기준의 이상적인 정치를 해보자. 과거에 이상적인 성인군주가 이렇게 했거든 이렇게 전개되는 이야기로 묵자는 자주 설득을 하고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실제로 과거의 성인군주가 묵자들의 이념과 기준으로 정치를 했고 묵자가 그것을 계승해 현재의 대안으로 삼자는 것일까요? 아닌 거 같습니다.

 

사실 역사란 게 좀 그런 거 같아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에 관여하거나 발 담구고 있는 집단의 가치관과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역사적 기억을 말하고 그 기억을 가지고 또 역사를 재구성하고 사회구성원들을 재교육하려고 하죠.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갈등과 헤게모니 싸움, 우리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구약만해도 그것이 정말 역사적 진실이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과거의 기억 다시 만들기에서 자유로운 것일까요?(최동훈선생님의 구약의 하느님은 신약의 하느님일까를 한번 읽어보세요)

 

불과 대한민국은 한세기도 지나지 않은 근현대사의 기억을 가지고 싸웁니다. 각자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르고 부여잡고 있는 가치와 기준이 다르기에 그렇죠. 누구에게는 건국의 아버지, 조국 근대화의 국부지만 누구에겐 무수한 국민을 죽인 살인마, 권력욕에 눈 먼 독재자, 그렇지 않습니까.

 

묵자가 말하는 성왕, 성왕의 이념과 행적은 묵자의 가치관과 이념에 따라 만들어내고 재구성한 것이겠죠. 그리고 사실 묵자, 아닌 유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가는 수시로 자신들의 이념과 이상을 말하고 과거 우리 이상대로 한 요와 순, 문왕 모두 성공했고 천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과거 성인군주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정말 요와 순, 문왕, 무왕이 유가에서 칭찬하는 군주의 모습 그대로였을까요?

 

단적으로 유가는 그들이 무력이 아닌 평화와 덕을 가지고 정치를 해 천하를 평정했다고 하는데 어디든 정치권력의 기원을 따라가보면 무시무시한 폭력이 있습니다, 근데 저들이 정말 평화와 덕으로 권력을 잡고 세상을 다스렸다??그냥 현재 유가가 고집하는 이상과 이념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일 뿐이고 유가는 어쩌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역사를 왜곡한 사람들일 겁니다. 그것의 결과물이 서경이라는 3경 중의 하나인 텍스트이고요. 실제 유가가 말하는 평화를 일군 과거 성인군주에 대해서 중국의 다른 문헌에서는 반대로 폭력과 무력에 능한 그들의 모습이 서술되기도 했고요.

 

 

자, 이야기가 많이 돈 거 같은데 정치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기준을 만들어 내는 세가지 방법으로서 삼표법이란 게 있다, 세가지 틀과 수단으로 기준을 만들어보자는 것인데 하나가 인민들의 이익에 합치 여부 두 번째가 인민들의 여론 세 번째가 성인들의 이념과 행적. 그리고 이 세가지가 모두 하층민들을 대변하는 묵자의 생각과 의견에 직결되는 것이고 묵자가 말하는 천지가 되는 것이라는 것.

 

이제 좀 정리해볼까요.

 

묵자가 말하는 천지(天志) 하느님의 뜻은 결국 하층민들의 의지가 투영된 것이고 그들의 의견과 목소리를 수렴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천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게 쳐놓아 소수의 특권적 세력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해놓았고 천을 신비의 장막에 둘러놓았는데 묵자는 애초에 하층민들의 여론을 토대로 천지를 만들어놓았으니 진입장벽이나 신비의 장막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묵자가 말하는 천의 뜻과 의지는 누구든 알 수 있고 또 그 천지를 만드는데 있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천지의 핵심은 겸애이다. 통치권력이 분배해주는 기본적인 물질적 혜택의 범위를 늘려보자는 겸애가 하느님의 뜻이니 그 겸애를 실현하는 통치시스템을 만들어보자, 즉 국가과 국가시스템을 천의 대행자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묵자의 주장이고 이상… 입니다.

 

 

묵자의 天과 하느님 2

묵자의 천, 하늘, 하느님에 대해서 장황하게 떠들었습니다. 어떤 의지를 가진 것이기에 하느님이라고 독해해도 되고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의 천에 비해 문턱이 낮고 또 그들이 말하는 천의 뜻, 의지는 하층민들의 뜻이고 하층민들의 바람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묵자 텍스트에서 공동체를 이끌 공의를 만들 방법과 수단들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든 민들의 의지를 합하고 합의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통해 나온 것이 곧 천지, 하느님의 뜻과 동의어다. 그리고 그 뜻을 대행할 철저한 정치시스템, 통치시스템, 행정망을 만들어보자. 뭐 이렇게 이야기한 거 같은데

 

묵자의 천에 대해서 좀 부연설명 더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아주 길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면 여기서 너무 많이 이야기하면 묵자 텍스트를 여러분들과 본격적으로 읽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뒤에 천지편이라고 아주 중요한 편이 있는데 그 때 가서 해야 할 이야기를 여기서 말하면 다 김이 세 버리니까요. 여기선 그냥 예습 좀 하신다고 생각하시고 들어주세요. 그리고 뒤에 다룰 천지편이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여기서 살짝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서 뒤에 천지편 읽으시면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그러니 예습차원에서 좀 보신다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또 다른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꺼내야겠는데요. 묵자 아닌 제자 백가 사상가들이 말하는 천은 묵자와 비교해서 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고 말씀 드린대로 아무나 접근하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묵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천은 현실과 연속된 존재라는 것. 그런데 묵자는 역으로 현실과 단절된 것입니다. 아리송하시죠? 연속된 것은 뭐고 단절된 것은 또 뭔지? 잘 이해가 안가실겁니다. 그리고 연속과 불연속 그것이 왜 중요할까 하는 의문도 드실 수 있습니다.

 

 

음….. 순자가 말하는 예, 공자가 말하는 인, 맹자가 말하는 인의, 그리고 한비자와 상앙이 말하는 법. 노자가 말하는 도. 이것은 어디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상가들이 생각하고 있는 천 위에 서 있습니다. 바로 전 시간에 예를 좀 든 것처럼 공자와 맹자만 해도 인의 길을 가자, 의의 길을 가자. 왜냐면 하늘이 인의 길을, 의의 길을 가라고 했단다. 뭐 이렇게 말하고 있는거 같은데 공자와 맹자 둘다 자신들 사상의 근거내지 토대로 천을 자주는 말하지 않고 어떻게 연관 되고 연결되는지 성의껏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건 한비자나, 상앙이나 노자나 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건 그들 모두 천이란게 자신들 사상의 핵심과 따로 떨어진 것도 아니지만 현실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것.

 

묵자가 말하는 천도 그들 사상과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묵자만의 의로움, 공의, 겸애 역시 묵자의 천은 하늘에서 뽑아낸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묵자는 그것들이 천과 어떻게 연관되고 그것들을 천에서 어떻게 뽑아낸 건지 더 충실히 설명해주고 천을 여러 가지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또 현실에 적용시키려 했는데 묵자의 천과 그들 사상의 핵심이 단절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과 단절여부입니다. 공맹과 순자, 상앙과 한비자, 노자 모두 천이 그들 사상과 연속되어 있고 또 현실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묵자의 천은 현실과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다루고자하는 문제는 현실과 단절된 천이라는 것입니다.

 

유가의 인의 등은 예 아니면 전통관습과 현실의 도덕규범으로 현실에 존재하고 있고 상앙과 한비자가 말하는 법, 노자가 말한 자연과 인간의 질서로의 도 모두 어쨋거나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구성원들이 잘 안따르기도 하고 왕이나 지배층이 그것을 체계화 시키고 제대로 적용하고 하고 아니고 문제가 있을 수 있어도 어쨋거나 저것들은 현실에서 무시할 수 없거나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의 기초가 되는 천은 현실과 끊어진 게 아니라 현실과 이어져 있거나 현실 안에 있는 것이죠. 다만 천은 현실에서 확실히 눈에 보이진 않고 잠겨져 있습니다.

 

예로 돌아가자, 법를 지켜라, 도를 따르라 말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해야하는데? 라고 물으면 슬그머니 천을 이야기합니다. 천의 명령 내지 원리에서 뽑아낸 것이거든 하면서요. 그럼 다시 묻습니다. 대체 무슨 천인데 그 천이 어떤 것인데? 라고 물으면 성실히 대답은 안해주고 응 그런게 있어, 니들이 그것까지 알 건 없는 거 같아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들의 불성실한 설명태도는 차치하고 법과 도, 예는 현실에서 부재하는게 아니고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며 사회구성원들이 인지하고 있는 것이거나 현실에서 질서로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들과 연관되는 천은 현실과 역시 연속되어 있는 것이겠죠. 공자가 말 한대로 인하게 살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현실의 전통관습과 문화(통쳐서 文, 때론 사문斯文이라고 합니다)를 준수하고 살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천과 연관되었고 위에서 말씀 드린대로 전통적인 관습이고 문화니 어쨋거나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죠. 그걸 잘 안 따르는 사람이 있을 지라도. 이렇게 현실과 천은 연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도 연속되어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가 아닌 순자와 법가, 도가쪽 진영이야기인데.

 

순자의 천 이야기 해볼까요. 순자의 천은 단순히 하늘이 아니라 인간 앞에 놓여진 삶의 조건으로서 적극적으로 바꿔가야할 것이고 천의 원리는 그런 바꿔야할 모든 대상들의 원리, 그 안의 법칙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무를 펼 수 있고 저렇게 하면 돌을 제대로 깍을 수 있고 …. 그런 객관적인 자연사물과 물질의 원리, 내재된 법칙과 습성이 천이자 천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또 그것만이 아니라 천은 인간까지 포괄하는데 인간은 이런 습성이 있어 뭘 싫어하고 좋아하고 그런 것을 가지고 유인 내지 재교육, 재사회화할 수 있다. 또 그러다보니 순자철학 안에서는 인간도 역시 가공해야할 것으로, 마치 하나의 던져진 사물과도 같은 것으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순자가 보기엔 인간도 천이죠. 순자는 물질적인 천만을 생각하고 의지와 도덕을 투영해서 보는 천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애초에 도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것입니다.

 

그러니 장자와 노자는 말할 것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도덕을 투영해 천을 읽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역시나 물질적인 천, 객관적인 질서로서 천을 파악하는 한비자와 상앙도 마찬가지. 인간을 마치 물건이나 부속품처럼 보기도 하는 법가 사상가들에게 인간도 천의 범주에 속합니다. 어떤 객관적인 법칙과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 속성과 법칙이 파악되고 장악되면 조종하고 바꿀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천인데 인간도 그런 천의 하나로 보는것이죠, 그러니 천은 현실과 연속된 정도가 아니라 아주 현실 그 자체일 수도 있지요. 법가 사상가들에게 현실과 눈 앞의 물질세계가 그냥 천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 여기서 묵자로 화제를 돌려봅시다. 묵자가 말하는 천,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다분히 하층민들의 뜻이 투영되어 만들어졌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들의 의지와 소망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것일 뿐이지, 그 하느님의 뜻이 관철된 세상 내지 하느님의 뜻으로 빚어진 윤리, 도덕, 규범이 현실을 지배하거나 현실에서 존재한 적이 있었나요? 없었죠. 다만 그런 것이 만들어졌고 그것의 핵심이 겸애이니 겸애를 공동체에서 실현되도록 해보자며 그렇게 뛰어다니고 움직인거죠. 천과 하느님, 하느님의 뜻은 현실과 단절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죽도록 전력투구한 것이겠고요.

 

그리고 현실과 단절된 하늘,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는데 현실은 인간도 포괄합니다. 그러니 묵자의 하늘은 인간과도 단절된 것입니다. 인간들의 중지를 모아 만들어낸 하늘과 하느님의 뜻은 독립된 것일 뿐이며 그것이 인간이나 인간들 자체는 아니겠죠. 그것을 따르고 말고 구현하고 말고는 또 현실 인간들의 몫일 뿐이고 천, 천지와 현실의 인간 사이에 이런 간극과 불일치가 있습니다.(더 정확히 말해 하느님의 뜻이 하층민들의 의지가 투영되어 만들어졌으니 이런 불일치가 있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현실의 인간과도 묵자의 천은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법가와 도가, 순자는 인간 자체가 그냥 천이라고도 했지요. 객관적인 속성과 법칙으로 파악되고 어떤 물질적 단위로서 파악되고 가공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을 보기도 하기에요. 그런데 공자와 맹자는 인간자체가 천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인간 안에 천이 부여한 속성이 있다고 하죠. 그래서 공부 많이 하고 수양해서 안으로 잘 파고 들어가면 하늘을 만들 수 있어 하늘의 명대로 살 수 있다고 하죠.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즉 내 마음이 수양되어 하늘과 만난 상태가 되니 내 마음대로 해도 전통문화와 전통도덕을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공자는 말하는데 역시나 맹자와 공자도 인간을 천과 단절된 것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천인합일을 말하죠, 천과 같이 기능하고 천의 덕을 베푸는 존재가 되자고요.

 

순자와 법가, 도가 모두 현실과 현실의 인간은 천과 연결되어 있는데 묵자가 보기에 천은 인간과도 현실과도 모두 단절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잘 따라오셨고 말씀 드린게 좀 이해가셨나요? 이해하기도 힘든데 이해했다고 쳐도 제가 이장에서 말한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으실 수 있을 겁니다. 네, 중요합니다. 단절의 문제, 중요합니다.

 

 

단절되었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해 현실에서 실현된 적이 없고 하층민 의사를 대변하는 집단 사람들의 머릿 속에 합의된 채로만 있기 때문에 그것을 더 따라야하고 천의 뜻을 현실에 구현시키려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현실에서 실현된 적이 없고 단절되어 있기에 열심히 분주하게 사방으로 다니며 홍보하고 설득해야했고 또 천의 뜻을 구현할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청사진이 필요하기도 했겠지요.

 

즉, 묵자 집단이 왜 그렇게 설득의 기술과 언어에 주력했고 또 열성적으로 헌신적으로 활동을 했으며 여러 가지 국정관련 주제들에 자기 생각을 명쾌하게 각론의 형태로 말했는지 이해를 하려면 여태껏 말씀드린 단절을 좀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더 이해가 쉬워지죠. 그리고 거기에다가 단절과 연속에 대한 이야기가 그만큼 그들의 계급적 속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기에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그들이 하층민이 아니면 그들이 말하는 겸애의 보증자, 천이 그렇게 현실과 단절되었을까요?

 

자, 하층민들의 이상은 이렇게 현실과 단절되어 멀리 있는 것이고 그것을 구현하려면 뼈 빠질 정도로 열성적이며 또 조직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런 거 같긴 한데요. 그것뿐만이 아니라 국정을 구성하는 여러 분야, 또 사회의 여러 병리현상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각각의 구체적인 대안마련과 제시, 그것을 포함한 자신들의 이상과 주장을 홍보, 납득 시키기 위한 세련된 설명, 설득장치가 있어야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을 정녕 바꿀려면 투쟁도 좋고 조직적인 활동도 좋지만, 일단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홍보하고 설명하고 설득을 할 것인지 수단과 방법에 고민을 아주 많이해야하고, 또 자신들이 말하는 이상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상에 그치지 않게 하고 현실화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대안과 프로그램, 매뉴얼 개발 등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합니다. 최소한 묵자무리만큼은 노력을 해봐야지 않겠습니까. 묵자처럼 착취 없는 민들을 위한 공의의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요.

 

그들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언담이라고 언어와 설득관련 과목을 하나 만들어 제자들을 교육 시켰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겠죠. 그만큼 자신들의 대안과 이상을 설명하고 설득할 기술과 수단, 방법들에 대한 필요가 절실했던 겁니다. 그리고 참, 그들은 상동, 상현, 절장, 절용, 사과, 칠환, 삼변, 비명, 비공등 여러 가지 주제별 이야기와 대안 등을 마련해 역설하고 실현하려 노력했는데요.

 

그러다보니 제자백가 시대에 첫 번째로 주제별 글쓰기란게 이루어졌죠. 천지편은 말그대로 하늘의 뜻에 대한 이야기 사과 편은 말그대로 4가지 국정낭비에 대한 이야기. 후에 순자가 묵자의 주제별글쓰기를 발전시켜 32편의 주제별 논문이라는 엄청난 학술적 성과도 이루어 내는데 이런 주제별 글쓰기와 주장에 대해 단순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묵자 무리가 여러 가지 주제에 접근해서 주장과 이론들을 펴낼 수밖에 없었는지 일단 헤아리는 것이 우선이겠죠.

 

묵자가 보여준 설득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 다양한 주제별 글쓰기, 이상과 대안 실현을 위한 헌신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뭔가 생각할 거리를 주는거 같은데 참 묵자 무리는 신기하고 재밌고 대단한 집단이었던거 같습니다. 여러 가지로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도 많고요.

 

말 잘하기 , 설명 잘하기 , 홍보 잘하기, 설득 잘하기. 자신들이 내세우는 천지가 현실과 단절된 채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하층민 출신이니 당장에 가지고 있는 기득권과 권위, 권력도 없고 뭐 애초에 그러니까 천지가 현실과 단절되어 저 멀리 위에 있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출발을 했으니 묵자는 언어와 설득을 중시하는데 그래서 제자들에게 언어관련 과목을 독립시켜 가르쳤고 위정자들에게도 설득과 커뮤니케이션등 말 잘하고 듣는 덕목을 요구했고 또 텍스트내에서 언어와 설득에 관한 말들이 아주 많습니다. 어떻게 개념을 정의하고 논쟁에서 시비를 가리고 타당성을 따지고에 대한.

 

 

자, 현실과 또 인간과 단절된 천, 천지, 하느님의 뜻, 좀 이해가 가셨나요? 그리고 이번시간에 말씀 드린 것을 포함해 묵자가 말하는 천, 묵자가 바라보는 천이 잘 좀 들어오시나요? 그런데 묵자의 천에 대해서 아직 모든 것을 말씀 드리진 않았습니다. 왜냐면 뒤에 천지편에서 더 설명할 것들이 남아 있어서요. 지금껏 묵자의 천에 대해 말씀 드린 것만 해도 분량이나 그 중요성이 적지 않은데 뒤에서 더 살펴봐야합니다. 그만큼 천, 하느님은 묵자에게 중요합니다. 괜히 고대 동아시아의 해방신학, 민중신학이라고 하는게 아니죠.

 

자 이번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백골프

Posted by skidpara
,

[논 평]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유죄를 확정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

 

2010년 교육감 선거에서 사퇴한 후보를 사후에 매수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에 대하여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오늘 선고되었다.

 

이번 재판의 주요 쟁점은 공직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의 ‘사후매수죄’에 관한 법리해석이었다. 같은 조 제1호가 ‘후보를 사퇴하게 할 목적으로’의 사전매수죄를 규정한 것이라면, 곽 교육감에게 적용된 제2호는 ‘후보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 후보자였던 자에게 이익이나 자리를 제공하거나 약속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사후매수죄에 관한 것이다. 이 조항에는 법리해석의 원칙상 문언 그대로 목적범으로 해석하여야 함에도 1심과 원심은 목적범으로 판단하지 않고 단순한 고의범으로 해석하였고, 대법원은 오늘 이러한 법리해석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리해석과 달리 1심과 원심이 인정한 사실관계는 1)곽 교육감이 사전 금전 지급 합의에 관여하지 않았고, 2)사전 금전 지급 합의의 이행으로서 2억 원을 주고받았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며, 3)채무초과상태에 빠진 박명기 교수를 도와주고, 곽 교육감이 금전 지급 합의에 관여하였다고 오인한 박명기 교수가 법률적․정치적 위험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후 교육감직 보전의 대가로 금전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 법조항은 ‘후보자 사후매수죄’이다. 원심의 판단은 후보자 사후매수죄가 사전에 금전 등을 제공하기로 하는 약속 없이 이미 후보자가 사퇴한 후에 사후적으로 그 대가로서 금전 등을 제공하거나 제공받는 경우에도 해당한다고 해석하여 문리해석상 논란이 있었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대가성이 인정되고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의 원칙, 헌법상 과잉금지 원칙 등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형사처벌 조항에서 ‘목적’이라는 문구를 둔 이상 그 범죄는 목적범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또한 형벌법규의 해석에 있어서는 명확한 규정을 전제로 엄격하게 해석하여 예측가능성을 담보해야 하며, 법 규정 문언의 가능한 의미를 벗어나는 경우에는 유추해석으로서 죄형법정주의에 위반하게 된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이러한 법리 문제 외에 공소시효의 기산점 등 많은 쟁점이 있어 헌법재판소에서 곽 교육감이 제기한 공직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의 '사후매수죄'에 대한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인 상태이다.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지고 남용되어지는 공직선거법 규정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면서,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단이 내려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대법원이 서둘러 판결을 선고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한다.

 

 

 

2012년 9월 27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장주영



http://minbyun.org/?mid=voice_02&document_srl=1046179

Posted by skidpara
,

박정희는 진짜로 경제를 발전시켰을까

2012/9/25 by 

박정희는 진짜로 경제를 발전시켰을까

 

얼마전 어느 자료에서 박정희 정권 당시의 경제 성장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아서 나름대로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세계 은행 자료를 발견했다.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각종 경제 지표들이 총 망라되어 있었다. 이 자료를 받아서 들춰보다가 급한 일로 잊고 있었는데, 오늘 한 커뮤니티에서 비슷한 내용의 논쟁이 불붙는 것을 보고 이것을 좀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GNI와 GDP, 1인당 GDP와 1인당 GNI를 보기 쉽게 그래프로 만든 것이다. 알다시피 GDP는 국내 총생산, 즉, 한해 동안 한 국가에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시장가치의 총 합이며, GNI는 한 국가의 국민이 국내와 국외에서 생산 활동을 통해 획득한 소득의 총 합이다. GDP는 한 국가 안에서 생산된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며, GNI는 실질 구매력을 반영하는 기준이 된다.

 

참고로 아래에 있는 모든 그래프는 누르면 크게 볼 수 있다.

 

 

위의 자료는 박정희 재임 기간 중의 1인당 GDP의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다. 이 그래프만 놓고 보면 유신 이후 획기적으로 상승한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개발 독재와 유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자주 사용하는 그래프로, 유신을 전후해 수치가 비약적으로 치솟으며, 마지막에 비해 초기의 수치가 매우 낮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굶주리던 국민을 먹고 살게 해줬다”는 논리가 먹히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 그래프의 범위를 좀 더 넓혀 보면 이것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변화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유신 이후 1인당 GDP의 변화가 다소 있기는 하지만 88 올림픽을 전후에 있었던 1인당 GDP의 성장, 그리고 IMF 이후 10년간의 민주 정부에서 있었던 성장세에 비하면 별로 주목할만한 성장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아무 것도 없는 시절이었으니 그만큼도 대단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 그래프를 보자.

 

 

이 그래프는 이 1인당 GDP를 세계 각국의 1인당 GDP와 비교한 “순위”를 그래프로 표시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다른 주변 국가에 비해 비약적인 성장을 한 것은 확실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그래프 아래쪽의 연두색 선이 바로 대한민국의 1인당 GDP 순위다. 가장 왼쪽은 1960년, 즉 4.19가 있었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던 해다. 그런데 바로 다음 해, 즉 5.16으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해는 그 수치가 떨어진다. 이 수치는 장면 정부 당시의 책임이라던가 혼란기이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반론을 재기한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 한 번 더 순위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의 성장세는 그렇게 박정희에 의해 떨어진 수준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를 다시 박정희 재임 기간만으로 좁혀 보자. 5.16 쿠데타 전 해인 1960년에 71위이던 것이 1965년에는 102위까지 떨어진다. 그리고 10.26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에는 다시 64위가 된다. 고작 7단계 상승에 그친 것이다. 순위만 놓고 보면 대략 10% 정도의 성장을 한 셈이다. 그것도 자기가 30위 정도를 떨어뜨려 놓은 다음에야 다시 원래 있던 자리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먼저 경제를 죽여버렸다는 비아냥을 듣는 이명박 대통령과 닮은 꼴이다.

 

 

 

다음은 대한민국의 1인당 GNI다. 앞서 본 그래프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별로 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88올림픽 직전부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를 거치며 급격히 성장하다가 IMF로 한번 꺾인 후, 다시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급격히 성장한다. 성장세만 놓고 보면 박정희 정부는 IMF를 일으킨 김영삼 정부를 제외하고는 꼴찌 수준이다. 그것도 20년간 정권을 잡으며 해 놓은 결과가 그렇다.

 

 

좀 더 보기 쉬운 그래프로 바꾸어 보았다. 정권별로 표시도 해 놓았다. 각 정권 마지막 해와 이전 정권의 마지막 해의 수치를 직선으로 함께 표시해서 해당 정부 동안의 변화도 알 수 있게 해 놓았다. 김대중 정부가 IMF를 이겨내야 했고 이명박 정부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이겨내야 했던 것을 고려하면 박정희 정부의 수치는 역시 꼴찌다. 물론 1, 2차 오일 쇼크가 있었고, 전두환 정부 시절 3저 호황 및 88 올림픽 특수가 있었던 것, 그리고 노무현 정부 시절에 세계 경제의 거품 성장이 있었던 것을 고려하더라도, 박정희 정부시절의 발전은 크게 주목할만한 것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를 절대 수치가 아닌 순위로 바꾸어 보았다. 위의 초록색 원 부분은 5.16 직후, 그리고 유신 직후의 변화다. 절대 수치에서는 그런대로 유지가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세계 경제의 성장에서 뒤쳐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에는 IMF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성장하거나 현상 유지를 한 것에 비하면 오히려 낙제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번에는 세계 GDP 대비 대한민국 GDP의 변화를 표시해 보았다. 대한민국 혼자만 보면 아주 잘 성장하거나 성장을 못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세계 경제의 변화와 비교를 해 보면 그게 세계 경제의 호황이나 불황 덕인지, 아니면 대한민국이 잘해서 그리 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 GDP와 대한민국의 GDP는 거의 비슷한 형태로 움직이고 있다. 다만 세 곳에서 세계 경제의 흐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86년부터의 88올림픽 특수, IMF로 인한 골짜기, 그리고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세계 경제의 위축보다 더 큰 규모의 위축이다. 특히 이 서브프라임 사태 부분을 보면, 이명박 정부가 서브프라임 사태를 잘 방어했다고 광고하는 것과는 달리, 세계 경제의 흐름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있었던 강만수와 미네르바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아무튼 이 그래프에서도 박정희 정권이 세계 경제 발전보다 더 가파른 성장을 한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조금 낮은 성장세에 가깝다. 세계 경제보다 가파르게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전두환 정권 말기, 바로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그래프에서도 우리는 박정희가 경제 성장의 주역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번에는 세계 GNI 대비 대한민국 GNI 그래프다. 앞서 살펴보았던 GDP 대비 그래프와 마찬가지로 세 곳의 주요 변화 포인트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으며,박정희 정권에서의 성장율은 당시 세계 경제의 성장율보다 오히려 낮은 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수치가 경제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국민의 삶의 질은 이러한 GDP나 GNI보다도 지니 계수와 같은 지표들을 함께 분석 비교해 주어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을 옹호하는 이들이 그렇게도 읊어대는 GDP, GNI와 같은 수치들에서도 실제로는 박정희가 해 놓은 일이 그렇게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배 고프고 가진 게 없던 시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걸 이룩해 놓은 것이 박정희의 업적일 수는 있다. 일부의 주장대로 그런 상황에서는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보다 독재자가 밀어붙이는게 더 효율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늘상 이야기하는 이 수치들에서도, 그렇게 혼란스럽다던 장면 정부 시절 1960도의 수치보다, 오히려 박정희 정부의 시절 수치가 더 낮았다는 점은 이러한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박정희 정권 당시 경제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박정희의 개발 독재가 이룩한 독보적인 업적으로 추앙받을 수 있을만큼 인상적인 수치냐는 점에 있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마지막으로 박정희 정부 이후의 Net Trade of Goods and Service 그래프다. 개발 주의자, 성장 주의자들이 늘 이야기하는 바로 수출, 무역 수치를 볼 수 있다. 파란 색은 흑자가 난 해이고, 빨간 색은 적자가 난 해다. 이 자료는 1976년부터 존재하기 때문에 그 자료 그대로 표시했다.

 

 

그래프를 보면, 박정희, 전두환 시절을 거치며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88올림픽 특수가 시작되며 노태우 중반 시절까지 잠깐 흑자가 나고, 다시 적자로 돌아서서 김영삼 정부가 끝날 때 까지 한 번을 제외하면 계속 적자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 이후 흑자가 나기 시작해서 강만수 경제 부총리 시절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흑자를 유지한다. 이 그래프 하나만으로도,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지는 현 여당 세력이 수출로 나라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이미지가 얼마나 허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관련 자료는 이 세계 은행 웹사이트에서 언제나 찾아볼 수 있다.

 

세계 은행 링크 : http://databank.worldbank.org/ddp/home.do?Step=12&id=4&CNO=2



http://barryspost.net/post/4379

Posted by skidpara
,

박정희 정부 경제 성장률의 진실 (박정희는 진짜로 경제를 발전시켰을까 후속편)

2012/9/26 by 

박정희 정부 경제 성장률의 진실 (박정희는 진짜로 경제를 발전시켰을까 후속편)

 

앞서 이 글의 전편인 “박정희는 진짜로 경제를 발전시켰을까” 라는 글을 올린 후 트위터와 커뮤니티 등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멘션과 댓글을 받았다. 5.16 쿠데타가 벌어졌을 때 미국의 원조가 줄어든 부분을 고려해야 하지 않느냐거나, 이 수치만 보면 이명박도 잘한 것 처럼 오해할 수 있느냐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고성장을 하기는 했지만, 그 기간 동안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지나친 개방으로 자본이 유입되어서 고성장을 하고 빈부 격차가 커진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앞의 글에서 예로 든 그래프만 가지고 모든 경제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해당 세계 은행 자료 웹사이트에만 가봐도 수 많은 수치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빈부격차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지니 계수의 경우 해당 자료에는 누락되어 있다. 또한, 한국과 가장 비슷한 비교 대상인 대만의 경우 해당 자료에서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이런 자료를 찾고 모든 것을 분석한다면, 그건 더 이상 블로그가 아니라 경제 관련 논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반론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전년도 대비 성장률이 누락되어 있어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해당 세계 은행 자료를 뒤져보면 바로 나오는 자료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장률 자료를 토대로 추가 분석을 해 보았다. 참고로 성장률은 GDP와 GNI 둘 다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자료를 모두 정리, 분석했다. 이 자료를 볼 때 참고할 것은, 성장률이란 일정 기간 동안의 GDP와 GNI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아무래도 가난할 때의 성장률이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후 보다는 높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석에 사용한 엑셀 파일은 여기를 클릭하면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구글 링크를 첨부하였다. 또한, 모든 그래프 자료는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먼저 연간 GDP 성장률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그래프가 훨씬 높아 보이지만 중간 중간 별로 높지 않은 구간이 존재한다. 두 번의 마이너스 성장은 2차 오일 쇼크 이후의 전세계적 불황기, 그리고 IMF 시기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에도 기록적인 저성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이것을 세계 GDP 성장률과 비교해 보자. 우리만 잘하거나 못한 것인지, 아니면 세계 경제의 여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프를 보면 거의 모든 수치가 세계 경제 변화를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살아나면 우리 경제도 살아나지만, 세계 경제가 무너지면 우리 경제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그나마 이명박 정권의 주장대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에만 세계 경제보다 다소 타격이 적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구간에서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 놓고 보면 도대체 누가 얼마나 잘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를 정권별로 해당 정부의 집권 기간 동안 평균 성장률로 표시해 보았다. 원래대로면 첫 해와 그 이전 해의 GDP와 마지막 해의 GDP를 가지고 계산해야 하지만, 시간도 없고 귀차니즘 때문에 그냥 해당 기간 연평균 선장률을 집권 기간으로 평균해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평균을 내다보니 좀 억울해 보이는 정부가 바로 김대중 정부다. 바로 집권 전 해에 김영삼 정부가 IMF로 경제를 죽여 놓다시피 한 상황에서 맞이한 첫 해는 그야말로 쓰러졌다가 일어나 앉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성장률이 낮다고 탓하기는 좀 미안해 보였다. 그래서 집권 기간에 +1년을 한 성장률, 즉 집권한 해의 경제 여파가 다음 해에도 미칠 수 있다는 관점의 그래프를 옆에 빨간 색으로 표시해 보았다. 김영삼/김대중 정부를 제외하고는 아주 큰 차이는 벌어지지 않았으니 이 부분만을 위한 자료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차이 변화는 88올림픽이 있었던 해(3저 호황을 포함한)의 경제 성장이 누구에게 속하느냐의 차이다.

 

보이는 바와 같이 박정희 정부의 집권 기간 중 GDP 성장률은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비교해서도 그다지 높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차이가 상당히 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는 좀 의외의 결과였다.

 

 

이번에는 GNI 성장률이다. 앞서의 GDP 그래프와 비슷한 양상을 그리고 있어 이것만 봐서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기가 좀 어렵다.

 

 

이번에는 재임 기간 중의 평균 GNI 성장률이다. 의외로 박정희 정부보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가 더 높게 나옴을 알 수 있다. 심지어 IMF 책임이 어느쪽에 속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김영삼 정부 혹은 김대중 정부도 이에 크게 떨어지지 않는 GNI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1인당 GDP 성장률이다. 이 그래프도 마찬가지로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는다. 다만 박정희 집권 초기의 마이너스 성장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1961-1962년에 걸쳐 있었던 상주 인구 조사로 인한 인구 변동이 원인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번에는 1인당 GDP 성장률의 재임기간 평균 그래프다. 놀랍게도 박정희 정부보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성장률이 더 높으며, 앞서 이야기했듯이 IMF 책임 여부에 따라 다르지만 김영삼, 김대중 정부와도 큰 차이가 없다.

 

 

1인당 GNI 성장률이다. GNI에 있어서는 GDP보다 좀 더 극명하게 차이가 드러난다. 마이너스 성장 부분이나 저성장 부분도 뚜렷하다.

 

 

마지막으로 재임기간 중 1인당 GNI 평균 성장률 비교다. 박정희 추종자에게는 미안하게도 파란색과 빨간색 양쪽 모두 박정희 정부는 4위를 기록했다. 파란색 그래프의 경우 노태우 – 전두환 – 김영삼 – 박정희 – 노무현 – 김대중 - 이명박 순이고, 빨간색 그래프의 경우 전두환 – 노태우 – 김대중 – 박정희 – 노무현 – 김영삼 – 이명박 순이다.

 

이 분석의 신뢰성이 얼마나 높은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지 경제학도도 아니고 관련 전문가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 언급된 자료는 앞서 이야기한 세계 은행 웹사이트에서 언제든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명확한 수치이다. 따라서, 이 수치와 그래프를 가지고 하는 판단은 이 글을 읽은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 판단 결과와 박정희를 미화하는 세력 및 언론이 주장하는 “이야기”를 비교해 보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을 할 때에는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여러 수치들도 함께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 전혀 다루지 않은, 박정희 정부 시절의 고성장 뒤에 숨겨진 아픔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 것이다. 이러한 기사를 통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갖추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 글의 목적은 무조건적으로 박정희 정부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조중동 등 언론이나 정치인들, 그리고 주변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아무 생각없이 믿어버리지 말자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손으로 찾아보고, 공부하고, 이해해서 정치인을 평가할 수 있어야 올바른 투표로 나와 국가를 윤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 글 : 박정희는 진짜로 경제를 발전시켰을까?

 

Barry Lee



http://barryspost.net/post/4420

Posted by skidpara
,

[주장] 안-문 단일화를 위한 선결조건 ①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에서 최대 과제는 '시대정신'과 '정당개혁'에 대한 양 캠프의 이해에 달려있다고 본다. 안철수 캠프는 '정당 혁신'과 '국민의 요구'라는 단일화의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공을 정당으로 던졌다. 나는 이를 좋은 제안이라 생각하며 이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그런데 안 캠프의 김민전 교수는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민주당의 신패권주의 청산이 과제"라며 친노를 겨냥한 발언을 해 단일화가 쉽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이어 지난 21일 SBS 시사토론에서 김민전 교수 등 패널들은 한결같이 "문재인의 가장 큰 약점은 친노 이미지"라고 입을 모았다. 문재인이 2인자 혹은 비서실장 이미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해가 된다. 그에겐 아직도 노무현의 카리스마나 안철수의 영감이 부족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에서 '친노'란 무엇인가

▲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3주기 부산추모문화제가 지난 5월 20일 저녁 부산대 넉넉한터에서 열렸다. 사진은 '노래를찾는사람들' 공연 모습.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선거에서 친노 이미지가 문제가 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당당하게 '나는 친노다'를 외치던 문재인이 '반노' 노선을 걸었던 손학규와 '탈노'를 시도했던 김두관을 이기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기 때문이다. <혁신과 통합>과의 통합 이후 민주통합당의 당 대표 선거에서도 친노라고 분류되는 인사가 지속적으로 당선되고 있다. 친노가 당내 조직이나 세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다. 모두 국민의 참여에 의해서 얻은 결과이다.

'친노'는 당내 선거에서만 통하나? 그렇지 않다. 2012 지방선거에서 안희정·이광재·김두관은 친노를 내세워 당선됐고, 비록 아쉽게 분루를 삼켰지만 수도권의 유시민과 한명숙도 친노였기에 선전했다. 지난 4·11총선에서도 영남이나 분당 같은 새누리당 우세지역을 제외하고 친노후보는 대부분 당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이미 국민들에 의해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참여정부 실패 프레임도 조중동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깨달았다. 그런데도 언론과 논평가는 여전히 '친노'에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다. 논리적으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다. 결국 문재인 후보도 이런 주문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문 캠프는 의도적으로 친노를 배제하고 노무현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친노가 좋든 나쁘든 통합캠프를 꾸리는 건 문재인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대중선거에서는 '친노'가 정치적 자산으로 승리에 기여하는 데 반해, 언론과 엘리트 사이에선 친노가 '동네북'이 되는 이 현상은 여전히 설명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이것이 '친노 왕따' 현상이며 요즘 학교폭력으로 주목받고 있는 아이들의 왕따와 똑같은 원리로 행해진다고 생각한다. 

'친노'는 분열 프레임

'친노'의 어원을 추적해보니 2002년 12월 28일 치 <조선일보>의 '말말말'에 "민주당내 세력을 노후보에 대한 선호를 중심으로 친노, 반노, 비노로 구분하기도 한다"고 보도한 게 시초였다. 즉, '친노'는 2002년 대선과정에서 후단협에 의해 노무현후보가 흔들리면서 벌어진 민주당 내 분열을 보여주는 상징적 용어였다.

이후 수구언론은 민주당 내 정치인뿐만 아니라 친노 언론, 친노 조직, 친노 네티즌, 친노 인사, 친노 논객 등 노무현 후보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기관·조직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해왔다. 정치권에서 정치조직이 아닌 언론·논객·네티즌까지 '친노'란 명칭을 붙이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만큼 친노는 '친이'나 '친박' '동교동' '상도동' 등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고 본다. 

우리사회에서 '친노'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일부에겐 긍정적 의미도 있겠지만 친노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게 사실이다. 친노의 선거 승리가 결속력이 강한 데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인지 친노가 아닌 사람에게는 소외감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친노에 대한 세간의 이해는 맞는 말이며, 실체가 있는 것일까?

'친노' 포괄적이며 확장성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3주기를 맞은 지난 5월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참석한 문성근 민주통합당 전 대표 대행과 유시민 통합진보당 전 공동대표가 노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찾아 헌화를 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노무현의 정신에 공감하고 계승하려는 사람이라면 사실 누구든 친노가 될 수 있고 노무현재단의 문은 언제든 열려있다. 4·11총선에서 노무현정책학교를 수료한 모든 후보에게 노무현재단은 '정책위원' 타이틀을 주었다. 친노가 공천을 50% 정도 차지했다는 언론의 보도는 그래서 사실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아무나 원하면 친노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친노가 배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나의 자의적 구분에 따른 친노는 당선 가능성이 낮았던 영남을 제외하면 공천 받은 이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언론의 분류는 친노를 공격하기 위해 가공된 숫자였던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 국민은 엄밀히 말해 친노가 아니다" "민주당의 권력을 잡고 있는 친노 패권주의가 문제다" 등등. 친노의 부활이 문제라는 신율 교수에게 '친노'의 정의가 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답을 하지 못했다.

흔히 참여정부에서 한 자리 한 사람들이 친노라고 말한다. 그렇게 치면 정동영·김근태·천정배·정세균·김두관은 물론이고 이헌재·한덕수 등 경제관료들도 친노가 된다. 이들은 언론에서 친노라 불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무현과 오래된 정치적 동지를 '친노'라고 정의하면 될까? 참여정부에서 무관으로 있었던 안희정이나 유시춘도 친노라 불리니 이 정의가 앞의 것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이용섭이나 정연주처럼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인연을 맺게 된 전문가는 포괄하지 못한다.

친노의 가장 정확한 정의는 참여정부에서 한자리를 했든 안 했든 노 대통령 임기 후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노무현의 가치를 인정하고 의리를 지킨 사람들을 일컫는 게 아닐까. 이들의 공통점은 '이'보다는 '의'를 좇았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외곽에서 온갖 고생에 불이익을 받은 명계남·문성근을 골수 친노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언론에서 친노라고 공격받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이들이 선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건 노무현의 가치를 계승하고자 하는 수많은 친노 시민들 덕분이다.

노사모는 21세기 참여민주주의의 맹아였다. 참여민주주의 정신이 성숙 발전돼 나타난 것이 촛불집회였다.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이 촛불의 배후라는 확신으로 수사를 시작했던 건 촛불시민의 가치지향이 노무현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촛불정신은 진화하고 또 다변화하고 있지만 큰 흐름에서는 소통을 중시하는 안철수 현상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들은 이슈와 사람에 따라 흩어지기도 하고 모이기도 한다. 대체적 흐름은 감지할 수 있어도 실체는 잡히지 않는다. 이들은 집단주의와 거리가 먼 개인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친노는 가치공동체다. 이들이 신념과 가치를 중심으로 하나가 됐기 때문에, 어떤 언론의 이간질이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친노가 자주 모여 정치를 계획하고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실상은 각자 움직인다. 유시민은 다른 정당으로 가기도 했다.

친노 시민을 '노빠'니 '광신도'니 하면서 종교집단으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친노 시민은 정치의식이 높고 정치학 교수보다 정치적 식견이나 지식이 높다고 생각한다. 친노시민들은 근거 없는 노무현 때리기, 왕따 현상에는 단호하게 화를 내며 흔들리지 않지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증거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유연하게 생각을 바꾸는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친노, 의리와 신념 때문에 불온세력으로 낙인

이처럼 다수 깨어있는 친노 시민의 사랑을 받는 친노 엘리트들이 정치권에서는 왜 왕따를 당하는 것일까. 이들은 노무현의 신념을 그대로 빼닮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노무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는 비주류에게는 금단이었던 대통령의 자리를 감히 넘봤을 뿐만 아니라 주류의 공격에 타협도 굴복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줌으로써 제2, 제3의 노무현이 나오는 길을 시스템으로 만들려고 했다. 수백 년간 권력을 독점해왔던 기득권의 입장에서 보면 이같은 불온사상이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노무현은 빨갱이로 매도당했던 김대중보다 더 불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 땅의 주류세력은 노무현의 모든 것을 비난하고 공격하며 왕따 만들기에 돌입했다. 교실에서도 왕따의 피해자는 대개 남과 다른 경우가 많다. 가령, 너무 예쁘거나,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잘난 척을 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공부를 너무 잘하거나, 너무 못 하거나... 기존질서에 대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도전하고 대통령스럽지 않았던 노무현은 왕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노무현은 이 사회 주류에게만 찍힌 것이 아니라 진보진영 내 운동권 주류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마치 공부 열심히 안하던 아이가 운이 좋아 전교 일 등을 한 것 같으니 공부를 성실히 해왔다고 생각하는 운동권 주류에게는 미운털이 박힐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들이 왕따를 정당화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왕따는 부도덕하고 나쁜 것이다.

왕따는 단지 가해자가 피해자를 핍박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왕따가 성립하기 위해선 피해자를 중심으로 가해자, 조력자, 강화자, 방관자의 역할분담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가해자가 지속적으로 피해자를 핍박하기 위해선 이를 격려하고 환호하는 조력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가해자는 조력자들로부터 용기를 얻고 쾌감을 느낀다. 조력자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가해자보다 한 술 더 뜨는 강화자이다. 강화자는 평소엔 피해자처럼 약자로서 설움을 받다가 자신보다 더 약자가 왕따의 타겟이 되면 가해자보다 한 술 더 떠서 피해자를 괴롭히는 사람이다. 강화자의 '오버'는 강자로부터 당하지 않으려는 피해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받았던 설움을 자신보다 약자인 피해자에게 화풀이하는 보상심리 때문이기도 하다. 강화자는 피해자가 왕따를 당할만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런 핍박이 정당하다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가령, 흑인이 백인으로부터 받은 차별을 백인이 아닌 한인에게 화풀이하는 현상 같은 것이다.

노무현 왕따 현상

하지만 이것만으로 왕따는 완성되지 않는다. 왕따의 종결자는 부당한 왕따를 외면하고 방관하는 다수의 방관자들이다. 관중 중 한 명이라도 용기 있게 가해자의 부도덕성을 지적하고 나선다면 그리고 다른 방관자들의 관심과 동조를 얻어낸다면 왕따는 발생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참여정부 시절 우리 사회는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 결과 돌부리에 채어 넘어져도, 비가 와도 "노무현 때문"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노무현은 그야말로 동네북이었다.

결국 노무현 왕따 현상의 이면에는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집요한 가해가 있었다. 그들의 이런 심리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한창일 때 까불었으니 손을 봐줘야 한다는 <조선일보>의 칼럼에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가해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이나 권력을 빼앗기고 멘붕에 빠진 보수진영 지지자들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무현을 결정적으로 아프게 했던 건 수구언론보다 노무현에게 더 가혹했던 진보진영의 언론과 정치인들의 강화자 역할이었다.

그들은 노무현이 권력자인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비판이 정당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노무현은 대통령 권력만 달랑 쥐고 수구기득권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존재임을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진보 언론이나 시민단체, 정치인들이 노무현 왕따에 동참했던 이유는 물론 정책적 지향이 달라서였다. 하지만 가해자들이 친노언론, 친노시민단체, 친노인터넷 매체라며 싸잡아 공격하자 의도적으로 더 가혹하게 노무현을 때림으로써 차별화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들이 만일 강자였다면 우리는 친노 언론이 아니라며 당당하게 대응했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이들이 의도하지 않게 강화자의 역할을 하게 된 건 늘 강자에게 당하고만 살아온 약자로서의 피해의식이 작동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대개는 수구언론을 정치집단이 아니라 중립적인 언론으로 인지했기에 오해가 쌓였을 수도 있다고 본다.

참여정부 시절 논객은 노무현만 때리면 언론의 1면을 장식하며 유명세를 누렸다. 보수든 진보든 반 노무현 논객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이런 분위기에선 친노 조차도 주눅이 들어 정당한 방어를 하지 못했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노무현을 지지했으면서도 진보 언론까지 노무현을 비판하자 "나만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닌가"라며 감히 나서지 못했던 다수의 시민은 방관자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부도덕한 왕따가 브레이크 없이 지속되었던 건 노무현이 대통령이었기에 모든 비판이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왕따는 보통 피해자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난다. 노무현은 자신을 바위 아래로 던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감금되어 있던 강금원회장과 이광재 전지사, 그리고 수많은 측근을 왕따의 굴레에서 벗겨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노무현이 가장 바랐던 것은 자신의 왕따에 강화자로 참여했던 진보진영이 기회주의와 불의를 청산하고 정의가 세워지는 것 아니었을까.

노무현의 죽음으로 많은 방관자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노무현이 가해자와 조력자, 그리고 강화자로부터 부당한 왕따를 견디는 동안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책감과 후회에 빠졌다. 노무현 서거 이후 깨어난 시민들은 2010년 민주당 지방선거 승리의 1등 공신이다. 이들은 SNS로 무장하고 2012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선 정체 없는 모바일세력이 되어 제2의 노무현을 지켰다.

다수의 친노시민들의 커밍아웃으로 노무현은 부활한 듯 보였다. 추모분위기에 편승했던 일부 논객들은 시간이 지나자 "추모와 평가는 다르다"는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노무현을 왕따 시켜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을 것이다. 노무현이 잘못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은 게 그들의 심리인 것 충분히 이해한다. 한 진보주간지가 제작한 서거특집에서는 현실정치를 외면한 노무현의 도덕성 강조가 그의 죽음을 불러왔다며 한 예로 오세훈이 만든 정치자금법을 노무현의 작품이라는 잘못된 해설을 곁들이기도 했다. 강화자는 노무현의 죽음마저도 노무현 때문이라는 가해를 가했다.

안-문 단일화 위해 친노 왕따 이해 필요

▲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지난 21일 오전 경기도 평택 와락센터를 방문해 쌍용차 해고자 가족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와락센터는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들의 심리치료 공간이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불행히도 노무현의 죽음이 친노 왕따를 멈추지는 못했다. 노무현의 신념을 상속한 친노는 왕따도 상속하게 됐다. 올 대선과정에서도 친노 왕따는 지속되고 있다. 언론에 의해서만 지속되는 게 아니라 통합민주당의 단일화 상대라 생각했던 안철수 캠프가 가해자인 수구언론의 논리를 가지고 신패권주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패권주의의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당내 선거에서 늘 1등만 차지하는 친노를 겨냥한 게 아닌지 의심이 든다. 정치적 이해가 부족해 일어난 일이라고 이해는 한다. 하지만 발언 전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수구언론의 친노 왕따 프레임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한 번 쯤 고민해주길 기대한다.

친노 왕따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올 대선 단일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안철수 캠프와 문재인 캠프가 아름다운 경쟁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안철수 후보가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증오와 적대적 정치의 하나의 예인 '노무현 왕따 현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기숙


덧붙이는 글 | 다음 글에서는 왜 왕따현상이 나타나는지, 왕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은 blog.daum.net/leadershipstory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1941

Posted by skidpara
,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 ②] 새마음운동 전국조직화...만약 10.26이 없었다면?

육영수 여사의 비극적인 죽음. 그 후 첫 공식 행보에 나섰던 1974년 9월부터 10.26 직전까지, 박근혜 대선 후보의 퍼스트레이디 활동 기간은 현 대통령 임기와 맞먹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인 만큼, 박 후보의 당시 행적은 중요한 검증 대상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대한 평가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과거 청와대 안주인에서 미래 청와대 새 주인을 꿈꾸는 최초의 대선 후보,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기간 모습을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말]
▲  재벌들마저 퍼스트레이디 박근혜 앞에서 '새마음'을 다짐하던 그 때는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달아오르던 시기였다. 사진은 YH 투쟁 당시 마포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다가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끌려 나오는 여공의 모습
ⓒ 1993 <한국현대사 119 대사건>

관련사진보기


'새마음운동'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학생 조직이다. 젊은 퍼스트 레이디의 '시행착오' 혹은 '잠깐의 일탈'로 보기에는 어려운, 이 운동의 지속성을 담보하고자 하는 그 의도와 치밀함이 학생 조직 구성 과정에서 읽히기 때문이다. 

새마음운동 학생 조직의 탄생은 1977년 11월 26일 열린 '대통령 영애컵 쟁탈 새마음갖기 전국 남녀학생 웅변대회'가 그 시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시상식에는 박근혜와 당시 내무부장관 또 문교부차관도 배석하는데, 문교부 역할이 단순히 '자리 보전'이 아니었음이 그 후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1978년 3월, 구국여성봉사단이 간행한 '충효례' 책자 16만5000부, 다시 8월에는 '새마음의 결의 실천'이란 책자 19만6300부가 문교부를 통해 전국 학교에 배포된다. '새마음갖기운동의 횃불'이란 박근혜의 친필 휘호가 실린 월간지 <새마음> 창간호도 그해 7월 첫 선을 보인다.

'충효예'라며... 박근혜에게 90도 인사 '연습'

▲  박근혜 후보의 친필, 새마음갖기운동의 횃불
ⓒ 2007년 박근혜 후보 자서전

관련사진보기

그와 함께 학생단위 조직이 본격 건설되기 시작한다. 

1978년 6월 시장, 시교육감, 중고등학교 교장, 교사, 학생 등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 중고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 및 중·고교생 새마음연합회 합동발대식'이 열린다. 이어 서울, 경기, 강원, 경북, 충북, 전남, 충남, 경남, 전북 등 순으로 학생 단위 조직이 차례차례 만들어진다. 박근혜의 '등판' 역시 꾸준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8년 11월 26일 '전국 새마음 중·고·대학생 총연합회 발대식'을 통해 '새마음 전국구' 학생 조직이 탄생한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목숨을 지키려는 애착만큼이나" 또는 "충효예를 실천하지 않고는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은 풍토" 등 표현으로 새마음운동에 매진할 것을 강조한다. 

그와 같은 풍토가 실제 어떠했는지는 2011년 6월 8일자 <한겨레>에 잘 나타난다. 1978년 광주 북성중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정해숙(전 전교조 위원장)씨는 기고문에서 교육청에서 참가 교사를 지명했으며, 이를 정식 공문 형태로 하달했을 뿐만 아니라 예행 연습까지 있었다며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예행연습에 갔던 직원이 언제 경례를 하고, 언제 자리에 앉는지 등등 예행연습한 내용도 알려줬다. 충효예를 내세운 행사에서 27살(박근혜 후보는 1952년생이다. 한국 나이로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의 젊은 총재가 퇴장할 때 환갑을 바라보거나 넘은 교장·교감·교사·교수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서서 90도로 절을 하도록 예행연습했다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대학생 새마음 요원 "중고등학교에서 형님 누이처럼 지도하라"

▲  새마음운동은 '새마음요원' 양성 등 학생 단위 조직에도 깊숙이 '침투했다'. 1979년 8월 21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관련사진보기


이와 같은 '이해 불가' 상황은 1979년에 이르러 더욱 심화된다. '새마음갖기운동본부'가 출범하고, 또 그해는 '새마음갖기운동 학생의 해'로 규정된다. 이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마음운동은 선도사업이나 장학사업, 그리고 문화행사로까지 확대된다. 대표적인 예가 그해 6월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제전이다.

"상오 10시 30분 예고 없이 박 총재가 식장에 들어서자 젊은 학생들은 "새마음"이란 힘찬 구호를 외쳤으며 박 총재는 손을 흔들어 이들의 환호에 답했다... (중략) ... 찌푸린 날씨에도 1천5백여명의 새마음봉사단원,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원, 연예인봉사대원 등이 참석, 젊음과 패기로 온통 새마음으로 물결 쳤다." (1979년 6월 11일자 <경향신문>)

또한 당시 <경향신문>은 서울 시내 33개 대학교 새마음봉사단원 750여 명이 참석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학교마다 20여 명 이상의 '박근혜 단원'이 존재했던 셈이다. 실제 박근혜는 대학생 조직에 특히 더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달 후 나타나는 '새마음요원'들이 그 단적인 예다.

1979년 8월 21일자 <경향신문>은 "전국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 제10기 새마음요원 수료식이 거행됐다"면서 "새마음요원 양성은 새마음갖기운동을 더욱 심화하고 이들 요원들로 하여금 새마음정신을 각 시도에 널리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그 목적까지 자세히 전하고 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 개조'가 상당히 치밀하게 시도됐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당시 수료식에서 박근혜는 "교육원에서 교육받은 대학생 중 뛰어난 학생들이 각 중·고등학교에 나가 형님이나 누이처럼 중고등학생들에게 새마음 지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일종의 활용 방안까지 제시한다.

박근혜의 새마음... 쌍용, 두산, 현대도 '떨었다'

▲  1979년은 재벌들의 새마음운동 러시가 이뤄진 해이기도 했다.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 대회 및 직장봉사대 발대식'이란 이름의 행사에 그룹 임직원들은 대규모로 참가해 '새마음'을 다짐해야 했다. 현대그룹 대회에서 그룹 임직원들을 격려하는 박근혜(위 왼쪽), 동아그룹 대회 후 그룹 간부들과의 간담회 모습(위 오른쪽), 두산그룹 행사에서 새마음갖기에 앞장설 것을 다짐받는 박근혜(아래 왼쪽), 쌍용그룹 대회에서 '우수 대원'에게 표창장을 수여하는 박근혜(아래 오른쪽)
ⓒ <경향신문> <매일경제>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관련사진보기


이렇게 1978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새마음운동 조직 건설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다. 전국 각 지역은 물론 중·고·대학생, 교사, 불교계, 직능단체 등 부문별로 방대한 규모의 조직이 구축된 것이다. 이제 '마지막' 조직 구축 대상은 재벌, 그들의 충성도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새마음을 다짐한 곳은 태평양그룹이었다. 1978년 11월 태평양은 새마음 결의 실천대회를 열고 직장봉사대를 출범시킨다. 그 다음은 현대그룹. 1979년 2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회에는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현대그룹 14개 기업체 임직원 6100여 명이 참가했다고 전한다. 상공부 장관, 건설부 장관, 동자부 장관도 참석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의미심장한 축사를 한다. "사회의 잘못된 점, 불편한 점, 어두운 면들을 불평하고 한탄하기에 앞서 그 어두움을 환하게 하는데 한 몫의 책임을 진 내 마음의 불은 잘 들어오고 있는지 살펴보는 자세가 새마음갖기의 첫 걸음"이라고 한 것이다.

1978년 3월,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똥물을 얻어맞으며 공장 밖으로 강제로 쫓겨났다. 72명의 여성 노동자가 연행됐으며, 그 과정에서 50여 명이 졸도했다. 현대그룹이 새마음을 '다짐'한 6개월 후에는 YH 투쟁이 일어난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달아오르던 시기였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실상 '불평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은 박근혜의 '새마음'을 재벌들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새마음 러시'가 이어졌다. 1979년 5월 동아그룹이 현대그룹의 길을 따랐고, 1주일 후에는 역시 두산그룹이 새마음직장봉사대를 띄운다. 10.26 사건 직전에는 대농그룹과 쌍용그룹이 각각 새마음갖기결의실천대회를 연다. 그야말로 새마음으로 '정경유착'이었던 셈이다.

새마음운동, 만약 10.26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  1977년 육사에 재학중이던 박지만 생도를 박 대통령 가족이 면회하던 날 기념사진.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정승화 장군(오른쪽), 경호실 작전차장보였던 전두환 장군(왼쪽에서 세 번째), 차지철 경호실장(박 대통령 오른쪽) 등이 눈길을 끈다
ⓒ 1992년 <남산의 부장들>

관련사진보기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의 새마음운동은 매우 거대한 규모로, 동시에 아주 치밀하게 이뤄졌다. 1977년부터 전국에 지역 단위 조직이 만들어졌고, 새마음대회가 열릴 때마다 수만 명의 시민이 연도에서 박근혜를 맞았다. 다음해인 1978년에는 학생 단위 조직이 구축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대학생들에게는 '새마음요원'이란 '중책'을 맡겼다.

불교계도 발벗고 나섰으며, 노동자들도 '새마음봉사대'로 귀속시켰다. 구로공단, 간호원, 버스 안내원 등이 '새마음 대열'에 합류했으며, 이에 재벌들도 수천 명의 임직원을 한 자리에 모아 '화답'했다. 그 대부분 출범 과정에 박근혜는 직접 참석했으며, 그로 인해 장관이나 도지사 등 지자체장의 '개근'도 따라붙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됐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따라서 새마음운동을 '유신 공주'가 벌인 '이미지 정치' 혹은 아버지를 조력하기 위한 새마을운동의 '2단계' 정도로 바라보는 것은 오히려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를 단순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비록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10.26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새마음운동은 새마을운동에 비견될 정도로 성장했을 수도 있다. 동시에 박근혜의 정치력 또한 커졌을 것은 자명하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10.26 사건의 동기 중 하나로 '구국여성봉사단과 연관한 큰 영애의 문제'를 지목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퍼스트 레이디 시절, 정치적 핵심 자산이 의료보험 도입?

▲  2007년 7월 16일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출판기념회 당시 박근혜 후보
ⓒ 오마이뉴스 이종호

관련사진보기


새마음운동이 퍼스트 레이디 시절 박근혜 후보의 매우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었음은 분명하다. 동시에 당시 구축된 조직이 박 후보의 정치적 재기에 중요한 발판이 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989년 10월 27일자 <한겨레>는 "지난 5월 박씨가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재조직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다"며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근화봉사단은 현재 회원이 20여만명이라고 밝히면서 연말까지 50만명을 목표로 조직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시도는 물론 일부 군단위까지 지부가 설치돼 있는데 서울에만도 22개가 있다. 매달 발행하고 있는 기관지 <근화보> 발행 부수는 10여만부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새마음운동은 박 후보의 과거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키워드다. 그럼에도 그는 2007년 자서전에서 자신의 퍼스트 레이디 시절을 '관통'하는 새마음운동에 매우 박한 모습이다. 장학금 지급이나 무료 진료 등 긍정적으로 볼 만한 새마음운동 사례도 직접적인 '연결'만은 피하고 있다.

오히려 박 후보는 자서전에서 박정희 정권 시절 의료보험 도입 과정을 소개하면서 "퍼스트레이디로 있는 동안 내가 공을 들이고 열과 성을 다한 일이었으므로 내게도 큰 보람이었다"고 적고 있다. 새마음운동 대신 의료보험 도입을 정치적 자산으로 내세운 셈이다. 

하지만 역시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에 실렸던 보도를 모두 살펴봐도 의료보험과 관련한 특기할 만한 행보를 확인할 수 없다. 특히 유신 정권의 '주구' 역할을 했던 <경향신문>에서조차 '큰 영애'의 의료보험 도입과 관련한 뚜렷한 '족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나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에 대한 약속"이란 그의 친필

▲  1977년 1월 1일, 신문 1면에 등장한 박근혜 후보
ⓒ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관련사진보기


박 후보가 퍼스트 레이디로 보낸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유신 정권 18년이란 시간 탓에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지지만, 현직 대통령 임기와 맞먹는 시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이뤄진 가장 핵심적인 활동인 새마음운동이 '그의 과거'에서 거의 지워져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출신 대통령 후보 박근혜가 남긴 "이 책은 나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에 대한 약속"이란 뚜렷한 친필이 오히려 흐릿하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음은 1975년부터 1979년 10.26 사건 전까지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등이 박근혜 후보가 직접 참석한 것으로 보도한 최태민 목사 또는 새마음운동 관련 행보를 정리한 것이다. 청색 글씨는 청와대 일정.

1975년

05월 11일 기독교 초교파 구국기도대회 - 임진각
05월 24일 구국선교단 군사훈련 퇴소식 - 5019부대
06월 01일 구국선교단 구국연합기도대회 - 대구 제2교회
06월 21일 구국십자군 창군식 - 배재고등학교
06월 22일 나라의 영원한 보호와 발전을 기원하는 기도회 - 대전고교
09월 02일 구국선교단·서울의사회 자매결연식 - 야간진료센터

1976년

01월 27일 구국선교단 헌혈행사 - 헌혈운동본부
03월 24일 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 개원식
04월 29일 구국여성봉사단 발단식 - 유관순 기념관
06월 17일 구국선교단 불우노인 경로대잔치 - 유관순 기념관
09월 16일 구국여성봉사단 천안지부 창단식 - 천안 한일극장
09월 21일 구국단체결연단합대회 - 유관순 기념관
09월 22일 구국여성봉사단 수원·화성지부 창단식 - 수원시민회관
12월 10일 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 기념식
12월 12일 TBC 특별기자회견
12월 17일 KBS 송년특집대담

1977년

01월 03일 MBC 신년대담 
01월 10일 일본 오사카 야마모토 병원장 접견
02월 25일 구국여성봉사단 양부모 결연식 - 유관순 기념관
03월 16일 구국봉사단 경로병원 개원식
03월 16일 새마음갖기 범국민 궐기대회 - 시민회관 별관
03월 25일 경기·인천 새마음갖기 궐기대회 - 인천 선인체육관
04월 12일 경남 새마음갖기 궐기대회 - 마산
04월 20일 충남·대전 새마음갖기 궐기대회 - 대전 충무체육관
04월 28일 전북·전주 새마음갖기 궐기대회 - 전주 실내체육관
05월 26일 전남·광주 새마음갖기 궐기대회 - 광주 실내체육관
06월 03일 부산 새마음갖기 궐기대회 - 부산 구덕체육관
07월 06일 새마음갖기 캠페인 유공자 접견
10월 18일 강원 새마음갖기 궐기대회 - 춘천 강원체육관
10월 28일 충북 새마음갖기 궐기대회 - 청주 실내체육관
11월 26일 새마음갖기 전국 남녀학생 웅변대회 - 서울문화회관 별관
12월 29일 방송 3사 '영애 박근혜양과의 대화'

1978년

02월 22일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 전국대회 - 문화회관 별관
04월 21일 새마음학생회 발단식 - 경기여고
04월 25일 새마음갖기운동 솔선수범 낙도 노인 접견
04월 27일 새마음갖기 국민운동 불교본부 접견
06월 01일 공단 새마음갖기결의실천대회 - 구로공단 운동장
06월 09일 일본 오사카 야마모토 병원장 접견
06월 14일 전국 노인지도자 새마음갖기 결의대회 - 세종문화회관 별관
06월 19일 부산 중·고 새마음갖기 결의대회 - 부산 구덕체육관
06월 22일 서울 중·고 새마음갖기 결의대회 - 잠실 학생체육관
06월 23일 제주도민 새마음갖기 결의대회 - 제주시민회관
09월 01일 경기도민 새마음갖기 결의대회 - 인천 선인체육관
09월 06일 새마음갖기국민운동 부산경남 대법회 - 부산 구덕체육관
09월 11일 경기 초·중·고 새마음갖기 결의대회 - 인천 선인체육관
09월 21일 강원 새마음갖기 노인지도자 대회 - 춘천 강원체육관
09월 22일 한국간호원보조협회 새마음갖기 결의대회 - 어린이회관
10월 06일 경북 새마음 중·고 연합회 발대식 - 경북체육관
10월 23일 충북 새마음 중·고 연합회 발대식 - 충북 실내체육관
10월 27일 전남 새마음 중·고 연합회 발대식 - 광주 실내체육관
10월 28일 구국여성봉사단 주관 자연보호운동 - 관음사 계곡
10월 31일 충남 새마음 중·고 연합회 발대식 - 대전 충무체육관
11월 02일 경남 새마음 중·고 연합회 발대식 - 진주 공설운동장
11월 10일 전북 새마음 중·고 연합회 발대식 - 전주 실내체육관
11월 20일 자동차노조(버스 안내양) 새마음 직장봉사대 발대식 - 유관순 기념관
11월 26일 전국 새마음 중·고·대학생 연합 발대식 -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1979년

01월 09일 구국여성봉사단 운영위원 접견
01월 11일 구국여성봉사단 전국 시도단장 접견
02월 09일 새마음갖기범국민운동본부 주최 물가 안정 범국민대회 - 서울 문화체육관
02월 27일 현대그룹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 - 장충체육관
04월 06일 새마음장학결연대회 - 서울 문화체육관
05월 22일 새마음학교 수료식 - 새마음본부 강당
05월 25일 새마음갖기운동 자문위원 위촉식
05월 29일 동아그룹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 - 장충체육관
06월 05일 두산그룹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 - 세종문화회관
06월 10일 제1회 새마음제전 - 한양대 운동장
08월 20일 새마음대학생 수료식 - 새마음교육원
08월 23일 새마음종합병원 개원식
08월 24일 새마음갖기운동 자문위원 위촉식
08월 28일 서울시약사 새마음갖기 촉진대회 - 세종문화회관
09월 20일 새마음봉사단 임원반 제1기 수료식 - 새마음교육원
09월 21일 제1회 새마음봉사단 박근혜 총재컵 전국탁구대회 개회식 - 문화체육관
10월 18일 쌍용그룹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 - 세종문화회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0329

Posted by skidpara
,

[이슈추적] 독재자 아버지 잘못 반성은커녕 옹호하는 한국 박정희, 필리핀 마르코스, 칠레 피노체트의 딸들… 인혁당 재건위 발언 통해 재확인된 박근혜 후보의 보수적 역사인식, 무지한 사법 이해 


»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위)의 딸과 박근혜 후보(아래)는 모두 보수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다. 가수들의 우연한 공통점을 다룬 케이블TV 프로그램 <비틀즈 코드>를 연상시킬 정도다. 사진 위는 한겨레 자료, 한겨레 강창광.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서, 두 나라는 닮았다.

대통령은 1972년 9월22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1965년 민주적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돼 임기를 마쳤다. 1969년 재선에 성공했다. 대통령은 재임을 위해 돈을 뿌리고 사람을 샀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단순히 부정선거 때문은 아니었다.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은 1965년 당선 직후 경제발전을 약속했다. 기간산업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방법이 특이했다. 군인을 건설사업에 동원하고 장교를 중용했다. 미국의 지원을 얻으려고 베트남전쟁에 젊은이들을 파병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선거로 재임한 것이다.

1972년 계엄령 선포한 아버지들

학생과 시민이 시위를 벌이고, 야당 정치인들이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은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며 “전통적인 민주적 절차를 허락하기에 우리 시대는 너무나 심각하고 위험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심각한 위험으로 공산주의와 이슬람의 저항을 꼽았다. ‘1972년 계엄령’이라는 단어만 듣고 ‘10월 유신’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계엄령이 ‘바공 리푸난’(Bagong Lipunan)을 만들기 위한 초석이라고 주장했다. 타갈로그어 ‘바공 리푸난’은 ‘뉴 소사이어티’(New Society)란 뜻이다. ‘신사회’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정지시켰다. 새로운 헌법을 1973년 통과시켰다. 대통령령이 헌법과 법률을 대신했다. 그 시절 한국의 대통령과 놀랍게 닮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2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을 의결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일신하겠다는 뜻이었다. ‘바공 리푸난’의 한국판이었다.


딸들의 인생도 닮았다. 필리핀 <야후>는 지난 9월9일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던 9월은 필리핀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암흑기로 기억된다”며 “동시에 9월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생일(9월11일)을 늘 기념해온 일로코스노르테주 주민들에게 중요한 달이기도 하다”고 보도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고향인 일로코스노르테주는 올해에도 성대한 기념행사를 열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첫째딸 이멜다 마르코스가 현재 주지사다.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는 일로코스노르테 지역구 상원의원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대구를 떠올리게 한다.

‘이미’(Imee)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이멜다 마르코스 주지사는 열렬한 아버지 옹호자다. 1955년생으로 1952년생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보다 세살 어리다. 박근혜 후보와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같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보면, 이멜다 마르코스는 아버지의 독재에 대해 “가장 훌륭한 길과 다리들이 계엄령 시절 건설됐다. 심지어 영화조차 그 시절 작품들이 더 낫다”고 말했다.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딸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피노체트의 딸 루시아 피노체트(69)는 2006년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는 자유의 불꽃을 태우셨다”고 찬양했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려다 탈세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포기했다. 산티아고시 비타쿠라구의 구의원을 지냈다.

박근혜 후보, 이멜다 마르코스, 루시아 피노체트의 역사관은 서로 닮았다. 논쟁을 부른다는 점마저 동일하다. 박근혜 후보가 지난 9월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한 발언이 역사관 논쟁에 불을 지켰다. 진행자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가 유신시절을 언급하며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서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박 후보는 “그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어떤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 박 후보는 재차 “왜냐하면 다른 판단이 나왔기 때문에, 똑같은 대법원에서”라고 답했다.

»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처형된 희생자 유족들이 지난 9월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인혁당 사건 발언과 관련해 역사인식 결여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려고 영정을 든 채 걸어가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새누리당 대변인도 다른 견해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지른 대표적인 사법 박해로 거론된다. 1·2차에 걸쳐 수사·기소가 이뤄졌다. 일군의 지식인과 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을 만들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반란을 꾀했다는 혐의였다. 수사·기소·재판 과정 내내 논란이 벌어졌다. 중앙정보부가 수사를 맡아 ‘고문수사’ ‘억지기소’ 논란이 벌어졌다. 1차 인혁당 사건 때 중앙정보부가 1964년 41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 등 주임검사들이 증거가 부족하다며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당시 서주연 서울지검장이 정권 고위층의 지시를 받고 야간 당직 검사를 시켜 다시 기소했다. 그러나 법원은 북한의 지령 등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해 피고인들에게 징역 1년 등 가벼운 선고를 내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 뒤 공포정치의 소재로 다시 이 사건을 꺼냈다. 인혁당 관련자들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함께 엮었다. ‘인혁당 재건위’라 이름 붙였다. 1974년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의가 유죄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1975년 4월8일 36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군사법원 판결을 확정했다. 극히 이례적으로 대법원 선고 다음날 인혁당 재건위 피고인 8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기 전인 4월8일 새벽 3시에 군법회의 검찰부에 사형선고 통지가 접수됐고, 사형을 집행한 구치소에는 집행 후인 4월9일 15시에 사형선고 통지가 왔다. 최소한의 법적 형식과 시간 순서도 지켜지지 않았다. 법조계에서 ‘사법살인’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고문수사가 인정돼 재심이 이뤄졌고 서울중앙지법은 2007년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판결을 근거로 유족들은 국가배상을 받았다.

박 후보의 발언으로 난리가 났다. 인혁당 재건위 피고인 유족, 시민단체, 야당이 모두 박 후보를 비판했다. 새누리당 안에서도 논란이 커졌다. 대변인과 당 대표가 엇박자를 냈다. 변호사 출신 조윤선 대변인은 지난 9월11일 “새누리당은 이 사건과 관련된 두 개의 판결이 존재하지만, 재심 판결이 대법원의 최종적인 견해라는 것을 존중한다”는 애매한 논평을 냈다.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9월12일 박근혜 대선 후보의 인혁당 관련 발언에 대해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어 사과한다”고 브리핑했으나 박 후보는 이를 전면 부인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새누리당 정의화 의원은 9월13일 트위터에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을 제기하며 새누리당이 과거사의 잘못을 시인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박 후보는 여당에서도 논란이 커지자 9월14일 인혁당 재건위 유족을 만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사과할 의향이나 자신의 역사관에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한다는 뉘앙스는 없었다.

여당에서조차 논란이 커진 이유가 있다. 박 후보는 그전에도 자신의 보수주의 신념을 감춘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 발언의 정치적 충격은 달랐다. 사법부에 대한 근본적 무지, 혹은 무시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정치인들의 반발은 박 후보의 이런 역사 인식이 중도 유권자 공략에 큰 장애가 되리라는 판단에 기인한다.

민자당 시절 <법원사>, 유신 비판

일단 ‘두 개의 판결’이란 표현 자체가 상식에 크게 어긋난다. 형사소송법상 재심은 이전 판결의 증거물이 위·변조된 사실이 증명된 경우 등 수사·재판 과정에 문제가 있을 때 이뤄진다. 말 그대로 재심 판결이 사건과 관련된 최종 판결이다. 이진성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지난 9월12일 박 후보의 발언과 관련한 질문에 “(박 후보가) 그렇게 말했다면 재심 구조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사법부의 최종 판결은) 언제나 하나”라고 답한 이유가 여기 있다.

유신시절의 정치적 폭압에 대한 무시도 다시금 우려를 낳는다. 박 후보는 라디오에서 “똑같은 대법원에서”라고 강조했다. 유신시절 대법원과 민주화 이후의 대법원은 사실상 별개의 대법원이었다. 유신시절의 대법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반쪽 법원’ 처지에 놓였다.

“개정헌법(유신헌법)에 그려진 사법부의 모습은 민주주의의 토착화, 국력의 조직화 등 이른바 유신 이념에 눌려 헌법상 지위가 상대적으로 격하되고 그 권한이 종전보다 대폭 축소된 상태였다. 법관추천회의가 폐지되고 대통령이 대법원장 등 모든 법관의 임명권을 갖게 됐다. 위헌법률심사권도 삭제되어 헌법위원회가 이를 행사하게 됐다. 9인의 대법관과 40여 명의 법관이 재임용에 탈락됐다. 수사의 능률이 강조된 나머지 인권 보장 측면에서는 형사 절차상의 후퇴를 가져왔다.”

민자당(현 새누리당)이 집권당이던 1995년 법원이 공식적으로 펴낸 <법원사>에서 유신시절을 평가한 기록이다. <법원사> 저술에 참여한 판사들은 진보·보수적 신념을 드러낸 적이 없는 중도·합리적 법조인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대법관을 지낸 서성 변호사(법무법인 세종)가 당시 법원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법원행정처에 있던 이종욱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가 부위원장이었고, 서울중앙지법 민사수석부장을 지낸 권광중 변호사(법무법인 광장),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지낸 윤재윤 변호사(법무법인 세종) 등이 실무위원이었다.

민자당 시절 편찬된 <법원사>가 기록하는 유신시절은 ‘법원의 암흑기’로 요약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법관의 사법부 독립 신념을 혐오했다.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대법원 감독관직을 신설해 1961년 홍필용 당시 대령을 임명했다. 양헌 판사가 1964년 5월20일 반정부 시위 학생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다음날 무장군인 13명이 서울형사지방법원 당직실에 난입했다. 대한변호사협회, 법과대학생 등이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법원은 동백림 사건에 일부 무죄를 내렸다. 정부에 유리하도록 개정된 국가배상법 개정안에 대해 위헌판결했다.

박정희 정부는 가만있지 않았다. 1971년 검찰을 동원해 일부 판사와 서기관을 횡령 혐의로 옭아매 구속영장을 청구하게 했다.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서울형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 형사부) 판사 37명이 이에 항의해 집단사표를 제출했다. 이어 서울형사·민사지법 판사 수십 명이 ‘사법권수호 건의문’을 발표했다. 여기까지였다. 유신 이후 수십 명의 법관이 재임용에 탈락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영등포지원 이영구 당시 판사는 무죄판결을 하고 두 달이 안 돼 전주지법으로 전보된 뒤 사직했다. 이후 판사들은 자존심을 버렸다. 박 후보는 아버지가 만든 ‘유신 법원’을 민주화 시대의 법원과 같은 법원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독립적 정치인 주장, 멈춰선 인식

2009년 편찬된 <법원사>도 “개정헌법(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 및 국회의원 정원의 1/3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에 대한 실질적 지명권, 법관의 임면권, 법원의 권한에 대한 긴급조치권 등을 부여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꾀하기 위한 3권분립의 원칙을 크게 후퇴시켰다”고 기록했다.

유신시절 민청학련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박형규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은 지난 9월1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박 후보의 역사관에 대해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해서 자식이 책임을 질 수는 없지만 자기 아버지가 그랬으면 아버지라도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얘기하면 국민들이 납득이 가는데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그걸 정당화하는 거거든요”라고 비판했다. 인혁당 유가족을 대변하는 ‘4·9 통일평화재단’ 이창훈 사료실장도 같은 날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무죄도 받고 배상도 받고 이제는 고통을 잊고 살려고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 사회가 잘못된 거죠. 반성 없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아직도 유족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번에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바로 그런 지점에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두 개의 판결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밝혔다.

박 후보는 지난 9월10일 라디오에서 “제가 정치를 이제 시작한 지 15년 되는데 물론 이제 그 아버지하고 저희 아버지니까 그런 걸 생각을 많이 할 수도 있겠지만 또 저는 15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제 나름대로 끊임없이 국민들의 평가를 받아왔다고 생각을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은 그저 ‘독재자의 딸’이 아니라 ‘독립적 정치인’이라는 의미다. 이번 역사관 논란은 이런 박 후보의 주장에 대해 믿음보다 의심을 준 것 같다. 박 후보의 역사관은 정치인 입문 전에 작성한 일기의 시각에 멈춰 있어 보인다. 그는 1988년 10월17일 일기에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은 국가를 자기와 동일시했으며 국가의 주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이라고 썼다(<한겨레21> 2012년 7월16일치 919호 참조). 1989년 5월19일 방송된 MBC <박경재의 시사토론>에서는 2시간 동안 유신체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박 후보는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며 “5·16이 먼저냐 공산당이 먼저 쳐들어오느냐는 시점에 다행히 5·16이 먼저 와서 파멸 직전의 국가가 구출됐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필리핀이 조금 나은 이유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흐르며 다양해졌다. 최근 한 신문은 5·16과 유신은 다르다는 글을 실었다. 5·16은 긍정적이지만, 유신은 과오라는 논리였다. 진보 진영 안에서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5년 <창작과비평>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지속 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라고 평가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그 모델이 지속할 가능성은 낮았고, 더욱이 현재 한국 경제의 롤모델도 아니라는 취지였다. 박근혜 후보의 역사관은 일방적인 옹호와 찬양에 서 있다.

필리핀과 한국 독재자의 딸은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 박근혜 후보는 유력한 대선 후보다. 반면 필리핀에서 이멜다 마르코스는 주지사지만, 이멜다 마르코스의 아버지가 죽였던 야당 정치인의 아들 베니그노 아키노가 대통령이다.

참고 문헌 <법원사>(법원행정처 펴냄·1995), <역사 속의 사법부>(사법발전재단 펴냄·2009)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2942.html?utm_source=twitterfeed&utm_medium=twitter

Posted by skidpara
,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사형집행 때 군종참모로 입회한 박정일 목사가 11일 <한겨레>에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박근혜 ‘인혁당 두개의 판결’ 발언 논란
인혁당 사형집행 입회한 박정일 목사

1975년 군종참모때 현장 차출
8명중 누구도 기도요청 안했다

나는 새누리당 지지자지만
피해자들 애국자라 생각해
박후보, 유가족에 사과해야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이 사형당한 1975년 4월9일 박정일(70) 목사는 군종참모였다. 당시 33살의 육군 대위였던 박 목사는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사형집행에 입회했다. 11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박 목사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히 회고했다.

1975년 4월8일 오후 5시 육군 제1교도소 군종실장 박 목사는 “본부로 올라오라”는 교도소장의 연락을 받았다. “내일 사형에 종교 담당으로 참관하게 됐다. 비밀 유지 때문에 육군교도소 인원이 차출됐다. 집에도 알려서는 안 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교도소장은 군용 지프차를 내줬다. 박 목사는 군의관과 함께 경기도 성남시 육군 제1교도소를 출발했다. 소장은 출발 직전에야 “인혁당 사형 집행일이니 임무수행 잘하고 오라”고 박 목사에게 귀띔했다. 저녁 7시께 박 목사는 서울 서대문에 있던 당시 서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근처 여관에 도착했다. 다음날 새벽 4시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으로 들어갔을 때는 육군본부 법무관과 검찰 수사관 등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4시30분 흰색 죄수복을 입은 첫번째 사형수가 들어왔다. 백열등이 환하게 켜진 방안으로 들어온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주위를 둘러본 그가 물었다. 법무관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형을 집행한다는 판결문을 읽고 유언을 물었다.

“난 억울해. 하지만 언젠간 모든 일이 밝혀질 거요.” 사형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행관은 사형수의 머리에 검은 복면을 씌웠다. 목에 밧줄도 감았다. 잠시 뒤 버튼을 누르자 사형수 발밑의 송판이 열렸다. 군의관이 다가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주검을 치웠다. “한 사람당 30분씩 걸렸다”고 박 목사는 회고했다.

뒤이어 들어온 사형수들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기도를 요청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도 답하는 사형수는 없었다. 박 목사 역시 사형수들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저도 너무 긴장해서…. 마음속으로만 기도했지요.”

어느 사형수는 마지막 소원이라며 “아들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법무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담배 한 개비 피우고 싶다”는 소원도 허락되지 않았다. “새장에 갇힌 새가 날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는다”, “언젠가 이 더러운 정권은 망한다.”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주지 않는 이들에게 남긴 사형수들의 마지막 말을 박 목사는 기억한다.

그 가운데서도 박 목사는 이수병씨를 잊지 못한다.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반드시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정의가 밝힐 것이다!” 그렇게 외친 이씨가 교수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박 목사는 뇌리에 새겼다.

8명의 사형집행이 끝난 아침 8시, 밖으로 나온 박 목사는 흰 봉투를 받았다. 특별근무수당으로 3만원이 들어 있었다. “죄책감이랄까…. 이런 일을 하고서 이런 걸 받아야 하는가 갈등을 느꼈죠.” 구치소 정문에서 유가족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있었다. 박 목사를 태운 지프차는 흐느끼는 유가족을 지나 구치소를 빠져나왔다. “그 뒤로 저는 사형제 반대론자가 됐지요.” 박 목사가 말했다.

15년간 군 복무한 박 목사는 1984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오랜 군 생활을 한 만큼 나는 보수층에 속해 있으며 새누리당 지지자”라고 스스로 소개했지만, 당시 형장에서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각별함을 박 목사는 간직하고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 역시 애국자입니다. 사건의 모든 책임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유신 독재는 잘못한 것입니다.”

박 목사는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고문에 의한 조작’으로 결론내리고, 2007년 서울중앙지법이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무죄를 판결한 것 등도 잘 알고 있다. “늦었지만 잘된 일이죠.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겼으니까, 유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겠어요. 그동안 숨어서 살고 소외되고 세상에서 완전히 짓밟히고 살았는데….”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인혁당 판결 관련 발언에 대해 박 목사는 한마디 했다. “일국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면 진심으로 유가족에게 사과한다고 말해서 모두를 아우르고 상처를 싸매줘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안 됩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1248.html

Posted by skidpara
,

천안함이 '암초 좌초'가 아니라 결론내린 이유
다져진 규조토와 패각, 돌, 자갈이 혼재한 모래톱에 좌초하였다


(서프라이즈 / 신상철 / 2012-07-28)


1. '좌초 = 암초' 라는 인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좌초(坐礁)'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 보면 '배가 암초에 얹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좌(坐)는 얹히는 것이고 초(礁)는 암초를 뜻하니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일 수 있지만 배가 반드시 암초에 얹혀야만 '좌초'인 것은 아닙니다. 모래에 얹혀도 좌초요, 뻘에 앉아도 좌초입니다. 따라서 좌초를 했지만 전혀 손상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박이 육지(해저지반)와 만나는 모든 경우를 좌초라고 일컫습니다. 물 속이든 물 위에 튀어 나와 있든 반드시 지반과 접촉해야 좌초라고 부릅니다. 빙산과 조우하여 침몰한 타이타닉 호의 경우 좌초라고 하지 않습니다. 빙산이 육지에 고착된 형태가 아니고 떠다니는 형태(유빙)라면 '빙산과의 충돌'이라고 말합니다.

좌초의 유형은 참으로 다양한 만큼, 그 손상의 형태 역시 대단히 광범위합니다. 전혀 손상이 없을 수도 있고, 완전히 반파되어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촤초된 선박의 선저하부 어느 지점이 지반과 어떻게 만나 어떤 손상이 발생할지는 오로지 하나님만 아시는 영역입니다. 

이제 좌초에는 어떤 유형이 있을 수 있는지, 모든 케이스를 다루자면 사고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겠지만, 천안함 사고를 분석하는 데에 참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암초의 존재 유무로 나누어 다루어 보겠습니다.  


2. 극단적인 두 가지 유형의 좌초

우선 손상이 전혀없는 좌초와 완전히 반파에 이르는 대형 좌초 두 가지 케이스에 대하여 먼저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1) 손상이 전혀(거의) 없는 '행운의' 좌초 - 암초가 없는 경우

좌측의 사진은 알래스카 글레이셔 만(Glaicer Bay)에서 물때를 놓쳐 졸지에  좌초된 경우인데, 부드러운 갯뻘에 앉았으니 선체손상이 거의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만약 저 배가 뻘 속에 있는 단단한 조개나 돌을 짓눌렀다면 선저 바닥의 페인트에 손상을 입혔을 수도 있고, 그러면 손상된 부위를 중심으로 부식이 확산되어 페인트가 원형으로 벗겨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천안함 선저하부의 동그랑땡 손상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저 크루즈선의 이름이 'Spirit of Glaicer Bay 號'라고 합니다. 그 동네를 다니는 토박이 여객선이라 밀물과 썰물의 시간체크를 생명처럼 했을 터인데 홈그라운드에서 저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는군요. (출처: 동아일보, '크루즈선의 굴욕') 

위의 사진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해안에 폭풍우로 좌초된 선박의 사례인데, 이처럼 경사가 완만하고 지질이 모래인 해안에 떠밀려와 좌초된 경우엔 선체손상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사진 속 세 남자는 케이프타운의 피자 전문점 직원들로 배고픈 선원들을 위해 피자를 배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 손상이 반파(침몰,전복)에 이르는 대형사고 - 암초에 좌초한 경우

선박이 반파에 이르는 대형사고인 경우 대부분 '황천(荒天, 거친바다)에 의한 경우가 많습니다. 선박이란 것이 태풍을 뚫고도 다니도록 설계되어 있긴 하지만 한계에 부닥치면 기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근의 저수심이 있거나 육지가 있을 경우 떠밀려와 바뒤나 암초에 부딫게 되면 반토막이 날 수 있는 거지요.

  • 좌상 : 육지를 올라타는 바람에 반토막이 난데다가 함미가 밀고 올라온 좌초
  • 우상 : 거친 파도에 밀려 우현 좌초로 인한 반파
  • 좌중 : 해저지형의 굴곡으로 인한 피로파괴로 유추되는 좌초
  • 중상 : 산호초에 좌초되어 반파된 상황
  • 좌하 : 뉴질랜드 앞바다에서 좌초된 이후 태풍에 반파된 상황
  • 우하 : 경주 감포 앞바다에서 좌초한 어선 (소형 어선도 좌초로 반파된 사례)

위에서 든 사례들과 같이 손상이 전혀 없든, 반파에 이르든 선박이 육지와 만나 사고을 당한(정상 기동에 제약을 받게 된) 모든 경우를 '좌초(坐礁)'라고 부릅니다.


3. <의도적인 좌초>가 목적인 상륙함의 예기치 않은 '좌초 사고' 사례

좌초관련 자료를 모으다가 귀한 사진 한장을 발견하여 소개합니다. 1950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끈 양동 군사작전으로 영덕 장사리에 상륙작전을 펼쳤던 문산호(LST)의 좌초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입니다.

LST(Landing Ship Tank)는 해안에 선체로 밀고 들어가 탱크와 병력을 수송하는 것이 목적인 상륙함입니다. 하지만 문산호는 태풍에 떠밀려 정상 접안하지 못하고 좌초하고 맙니다. 물론 수송하였던 학도병 772명을 성공적으로 내리고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만, 좌초된 문산호는 이후 침몰하여 1997년 물 속에서 발견됩니다. (영덕 장사상륙작전 기념관)

상륙함이 해안에 상륙할 때, 물이 높은 만조를 기다려 적정 위치에 후미 닻을 바다에 던지고 상당한 속도를 유지한 채 해안으로 돌진합니다. 더 이상 전진이 되지 않을만큼 배를 밀어 붙인 후 좌우 홋줄을 걸고 앞 램프를 열어 탱크와 병력을 풀게 됩니다. 반대로 상륙함을 뺄 때는 역시 만조 때 후미 닻을 윈치로 감으면서 배를 뒤로 빼내게 됩니다.

상륙함은 말하자면 <의도적인 좌초>를 수없이 반복하는 특수목적함입니다. 저는 해군 중위 때 상륙함의 항해장교(겸 갑판사관, 포술장)로 근무하면서 백령도를 포함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서해 5개 도서 수송업무를 하는 동안 사구해안에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의도적인 좌초>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4. '암초 좌초'는 대부분 심각한 손상을 야기한다

<그래 알아, 암초좌초는 대부분 심각한 손상을 야기하는 것 알아. 그러니 천안함 가운데가 터지고 반토막 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는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시고 스스로 어떤 논리적 함정에 빠져있는지 돌아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암초든 모래톱이든 '좌초(坐礁)'를 주장하시는 분들은 '폭발(爆發)'을 부정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반갑고 감사한 마음입니다만, 우선 <천안함이 암초에 좌초하여 반파되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선택의 폭이 너무나 좁고 가능성이 희박한 곳에 자신의 열정 모든 것을 걸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전 편의 글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천안함이 '암초'에 좌초하여 한방에 부러졌을 개연성은 폭발 만큼이나 희박하다>고 분석하였으며 그에 대한 확고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암초'의 주장은 '폭발'의 주장 만큼이나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까다롭고 제한적인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1) 최소한 좌초지점이 획정(추정)되어야 한다

'확정'이 아니라 '획정'입니다. 최소한 가능한 몇 개의 추정된 구획이라도 범위가 좁혀져 있어야 합니다. 국방부와 해군 그리고 좌초 당사자들은 정확한 좌초지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대해 철저히 감추거나 부인하고 있습니다.

일단, 기존의 모든 정황을 무시하고, <천안함이 암초에 좌초했다>라고 가정을 하고, 암초좌초가 예상되는 지점을 추려보기로 합시다. 

① '암초좌초' 후보지 1순위 : 단연코 희생자 가족인 이용기씨가 22전대장으로부터 <천안함이 좌초되었다>는 설명을 듣고 작전관에게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좌초했느냐?>라고 묻자 손가락으로 찍어 주었다는 바로 그 <최초좌초> 지점이 1순위 후보지입니다. 

천안함이 이곳에서 '암초 좌초'하였을까요? 설사 천안함이 이곳에서 '암초'에 좌초하여 선체 중앙부가 파손되고 반토막이 났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거나 그 조건에 따른 현상이 있어야 설득력을 얻습니다. 

첫째, 이 지역에 그 정도 손상을 입힐 만한 '암초'(R: Rock)가 명기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가 오래 전에 만들어져 허접하고 갱신이 안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손상을 입힐만큼의 대형 암초는 벌써 명기되어 있었어야 합니다. 혹시 그동안 아무도 모르는 소규모 화산폭발로 없던 암초가 생겼을까요? 

둘째, 해당 지역의 지질은 S(Sand. 모래․규조토)이며, Sh(Shell. 조개무덤)이 쌓여있다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수천년 동안 서해바다로 떠내려온 고운 입자의 모래들이 백령도를 휘감아 돌면서 유속이 느려지자 가라앉아 퇴적된 지형이니다. 'S' 나 'Sh' 처럼 항해에 위험성이 낮은 것을 명기하면서 항해에 위험한 암초가 존재하는데도 'R'을 누락시켰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저 지점에 암초가 있었고, 천안함 중앙부에 구멍이 크게 뚫렸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천안함은 구멍이 뚫렸든 반토막이 났든 상관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 일대의 수심은 8~12m에 불과하기 때문에 해수가 유입되어 더 무거워진 천안함은 함수든 함미든 어디론가 떠내려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최초좌초> 지점에서 '암초좌초'되었다면 천안함은 그 지점에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천안함 함수.함미 모두 그곳에 없었으므로, 그 지점에서 천안함이 암초를 만나 반토막이 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즉 '암초 좌초'는 없다고 결론내렸던 것입니다. 

② '암초좌초' 후보지 2순위 : 두 번째로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천안함 함미가 가라앉아 있는 지점 인근의 해역입니다. 천안함 가운데가 그 정도로 터지고 결국 반파에 이를만큼 손상을 입히는 암초가 존재한다면, 천안함 함미는 그 암초와 매우 가까운 거리(불과 몇 백 미터) 이내에 가라앉아야 합니다.

설마 천안함이 백령도와 대청도 중간에 있는 어느 암초에 좌초하여 반파되었는데 침몰지점까지 반파된 채로 항해해서 거기서 가라앉았다거나, 다른 곳에서 좌초했는데 하루만에 침몰지점으로 몰래 이동시켰을 거라는 유형의 SF소설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반파될 정도의 손상은 급격한 침수와 침몰로 이어져 그리 멀리 떠내려 갈 수가 없습니다.

단, 천안함 함수는 함수제일 앞에 절대 밀폐구획이 존재하여 16시간22분이나 떠 있었기 때문에 조류에 떠내려 갈 수 있었지만, 함미는 불과 수분만에 가라앉았다는 것이 TOD 영상을 비롯 모든 정황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므로 천안함이 암초에 침몰하였다면 함미침몰지점으로부터 불과 수 분 거리 이내에 암초가 존재해야 합니다.

천안함 함미가 가라앉아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몇백미터 이내에 천안함을 반파시킬만한 암초가 존재할까요? 만약 그 암초를 찾지 못하면 '암초 좌초' 주장은 완전히 허공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암초의 존재는 확인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해도상에 암초의 존재여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고지점에 대한 국방부의 발표가 오락가락하고 이후 수정 발표되기도 하여 침몰 포인트가 다소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사고지점들 인근에 의혹을 둘만한 암초지역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해도에 기재되지 않은 특수한 암초가 있는지 이번에는 한국해양연구원에서 제공한 자료를 해도와 비교하며 살펴보겠습니다.

암초라는 것이 남산타워처럼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해저에 기반을 두고 수면가까이까지 이어져 존재하는 것이어서 한국해양연구원에서 탐사자료를 조작하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첫째, 함미침몰지점을 중심으로 수백미터 범위내 해도와 해저지형도 상에 천안함을 반파시킬만한 암초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암초 혹은 암초가 있을만한 유사한 지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둘째, 해도에 존재하지 않는 수중여(홍합여) 등이 존재 가능한가? 백령도 주민이 이야기 하는 수중여는 적어도 육지 가까이에 있는 곳을 말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해도에 모든 수중여를 다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대한민국 어촌 어느 지역이나 해도에 존재하지 않는 수중여는 산재해 있습니다. 따라서 불특정 '수중여'를 기대하고 '암초 좌초'를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오류의 폭이 클 것입니다. 

(2) 선박이 암초에 좌초하면 대부분 빠져나오지 못한다

사실 제가 천안함이 '암초 좌초'를 하지 않고 '모래톱 좌초'를 했다고 판단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소형 고속정이 전속으로 항해중 암초를 들이받고 튕겨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 중대형급 선박들이 암초를 타면 거의 대부분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소형 선박도 아니고 천 톤이 넘는 중대형 선박이 거친 바다에서 암초를 탔다면 십중팔구 그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암초를 만나는 순간 제일 먼저 발생하는 현상이 큰 파공과 크랙이고 그 다음은 급격한 침수입니다. 선내 비어있는 공간을 바닷물이 급속히 채우며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결국 밀려 들어오는 해수와 선체하중이 합쳐져 암초를 더 강하게 짓누르게 되고 암초는 선체를 더욱 파고 들게 되며, 결국 꼼짝달싹 못하고 구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선저바닥은 이리저리 찢기면서 거의 걸레가 되기때문에 선저바닥의 손상을 보면 암초에 걸렸는지, 모래를 밀었는지 뱃사람들은 구분해 냅니다.  

중대형 선박이 잔잔한 호수가 아닌 바다에서 암초에 올라 탔다가 빠져나올 수 있는 확률은, 일반인이 '표도르'와 격투기를 벌여 맨정신으로 살아 남을 확률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앞에 사진과 함께 예를 든 반파,침몰,전복을 유발하는 좌초의 경우 암초에 걸렸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손상이 더 커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최근에 남해안에 좌초한 배, 제주 앞바다에 좌초한 배, 뉴질랜드 해안에 좌초한 화물선 모두 암초에 좌초했다가 시간이 흘러 태풍이나 파도에 의해 반토막이 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암초가 무슨 몽돌해변의 너럭바위쯤 되는 걸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암초가 그렇게 무서운 존재입니다. 

좌초가 되었음에도 그곳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은 비교적 경미한 손상에 그쳤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손상이 크게 발생했다면 암초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고 물리는 필요충분조건의 딜레마이지요. 그런데 <천안함이 크게 파손되었지만 빠져나왔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논리 자체가 '모순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이 자랑하는 핵미사일 순양함 'Port Royal'호가 하와이 앞바다에서 산호초에 걸려 좌초했던 사건을 살펴보면 천안함 사고를 유추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CG-73 USS Port Royal 진주만에서 좌초

2009년 2월 5일 미해군 순양함 ‘포트로열’(CG-73 USS Port Royal)함이 정기수리를 마치고 시운전을 나갔다가 진주만으로 복귀하던 중 항로데이터 입력을 잘못하여 연안에서 불과 800미터 떨어진 저수심 산호초에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포트로열함이 좌초하자 당황한 함장은 좌초된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엔진을 써서 프로펠러를 돌리지만 배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프로펠러만 부러지고 휘어지는 손상을 입게 됩니다.

포트로열함의 인양을 위해 그 유명한 '살보함'(천안함 사고 당시 키리졸브 훈련에 참가했던 바로 그 배)이 긴급 투입되어 포트로열호를 끌어당겼지만 배가 끄덕도 않자, 발라스트와 연료, 심지어 식수와 오물들 까지 모두 퍼내고 인양을 시도합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아예 대원들을 모두 하선시키고 앵커(닻)까지 뜯어내고 나서야 겨우 배를 빼내는데 성공합니다.

좌조된 순간 해수가 침입하여 선체가 더욱 무거워지고 암초에 단단하게 박혀버려 인양이 어려웠던 겁니다. 포트로열호 역시 좌초한 함장들의 공통점인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인해 자력으로 빠져 나오려고 프로펠러를 양껏 돌리지만 그 결과 스크류 블레이드가 휘어지고 몇 개는 부러져 나가는 등 손실만 더욱 키우는 꼴이 되고 맙니다.

손상의 형태를 보시면 천안함 프로펠러 손상과 매우 유사합니다만, 천안함의 경우 모래톱에 좌초하였기에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했으며 프로펠러의 휘어진 부분을 보면 모래톱을 파면서 빠져나왔다는 사실, 그리고 스크류가 모래톱에 파묻혀 회전하는 과정에서 그라인딩되어 따개비들어 떨어져 나가고 반질반질해 진 모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 모래톱에 좌초한 경우 - 경미한 손상

천안함의 경우 최초, 조개무덤이 있는 모래톱(S, Sh)에 좌초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천안함은 첫 사고를 당하면서 선박사고 치고는 비교적 경미한 손상을 입게 됩니다. 경미하다고는 하지만, 선체 하부가 찢어지고 부분적으로 파공이 되는 현상은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선저하부에 나타난 파공과 크랙 그리고 빌지킬 모서리에 발생한 파공 등이 육안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천안함이 모래톱 정도에 좌초했던 것은 운이 좋았던 셈입니다. 그런데 운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천안함의 당직사관은 함장과 함대와 사령부에 좌초보고를 한 후 절대로 배를 빼내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어야 합니다. 마치 교통사고 환자 목과 허리 함부로 손대지 말고 가만히 눕혀 놓고 119 불러야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기다렸어야 합니다. 

아무리 Soft Grounding(부드러운 좌초)을 했다고 해도 지질이 뻘이 아닌 이상 돌, 조개껍데기, 자갈, 어구로 인해 선저바닥이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럴 경우 해수가 유입되기 때문에 배를 다시 빼내어 깊은 수심으로 가는 것은 여간 위험천만한 일이 아닙니다. 배가 다시 물로 돌아가면 선체 하중으로 인해 수압이 높아져 해수 유입이 더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좌초된 위치에 그대로 두었다면 천안함 대원들은 단 한명도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저손상부위는 모래톱이 반창고 역할을 해줘 침수 속도도 느릴 것이고, 만조가 된다 해도 해수면은 기껏 주갑판을 넘어 오르지 못할 것이니 갑판하부에 침실이 있는 대원들은 상부갑판으로 이동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고속정을 불러 평택으로 타고 나가면 되었을 일입니다.

비록 함은 좌초된 채 인양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좌초를 유발한 장교들과 책임선상에 있는 지휘관들은 징계와 문책을 피할 수 없겠지만 소중한 인명피해는 단 한명도 발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란 얘깁니다. 그런데 좌초된 배를 다시 빼 낸 것이 화근이요, 씻을 수없는 중대한 과실입니다. 배를 빼낸 과정은 선저바닥과 프로펠러에 역사처럼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나무 나이테 속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6. 커다란 충격을 동반한 제2의 사고는 '충돌'   

모래톱에 좌초하는 정도로는 선체 중앙이 터지거나, 선체가 반파되거나, 진도 1.5 규모의 지진파가 발생하는 등의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특히 지진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엄연히 과학적인 데이타임에 틀림이 없고 그것은 당일 발생한 사고의 증거요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진도 1.5의 규모는 비록 사람이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의 충격이 발생해야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암초좌초'라면 천안함이 전속으로 달려와 암초를 정면으로 들이받지 않는 한, 그 정도의 진도가 관측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천안함이 직진이 아닌 측면으로 암초를 탔다고 보는 경우엔 더더욱 지진파 부분을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지진파의 존재가 거짓이 아니라면 '암초 좌초'의 가능성을 배척하는 합리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면 지진파가 기뢰나 어뢰의 폭발만을 뜻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폭발'이 지진파 외에 산재해 있는 다른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역시 배척된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과학의 이름표를 달고 거론되면 무게있는 신뢰를 보내면서도, 상식에 근거한 판단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진파라는 데이터는 무조건 신뢰할만한 것이고, 인간의 감각 - 시각(물기둥 없었다, 물고기 떼죽음 없었다, 그을음 없었다), 청각('쿵'하는 충격음), 후각(화약냄새없었다)의 판단은 별 것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 또한 과학적인 근거로서 우리 피부에 더 와닿는 증거인 것이지요.

360kg TNT 규모의 어뢰가 인근 바다에서 폭발했다면서 그 소리를 들은 백령도 대청도 주민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그러한 '폭발의 존재 사실' 자체를 배척합니다. 이후 어뢰에 비하면 모기소리에 불과한 76mm 함포 소리에 백령도 주민들이 모두 밖으로 튀어 나왔다고 하니 상식적 논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지요. 흡착물질과 관련한 유수한 과학자 분들의 견해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1.5 진도의 지진파를 입증해 줄 수 있는 것은 '폭발'과 '강한 충돌' 밖에 존재하지 않는데 저는 폭발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해줄만한 증거가 전무하다는 점, 과학적 근거는 커녕 상식의 수준도 부합시키지 못하는 여러 합리적 분석에 의하여 '폭발의 존재'를 배척하였고, 충돌에 집중하여 근거자료를 자신있게 확보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주장하고 확신하는 바, '제2의 사고(충돌)'은 '제1의 사고(모래톱 좌초)' 이후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의 요건에 부합합니다. TOD 영상에 나타나는 물체, 제3의 부표 아래에 가라앉았던 물체, 당시의 훈련상황, UDT 대원들의 증언, KBS 기자들의 취재내용 등이 모두 그 정황을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선체 외판이 손상된 형태를 가장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충돌에 의한 손상'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판이 찌그러지고 휘어지는 매카니즘은 '희망사항'이 아니고 철저한 '과학'입니다. 철판과 알루미늄이 부식되는 원리는 '통밥'이 아닌 '환경과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 모두 과학적으로 입증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사건 초기 천안함이 무언가 '원인미상의 물체와 충돌하여 침몰하였다'는 내용의 기사가 사고후 불과 한 시간여 만에 보도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저 기자는 누구에게 취재를 했던 걸까요? 해군측 인사는 누구일까요? 그 인사는 누구에게 보고를 받았을까요? 문제는 그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침묵을 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 우리는 그에 맞서 진실을 찾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고 순간과 사고 현장에 그리고 거짓과 조작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초기 상황 속에 진실의 대부분이 들어있다는 것은 '범죄 수사'의 기본이요 원칙이라고 하지요. 사실 천안함의 진실은 2010년 3월 26일~31일 사이에 발생한 정황 속에 대부분 고스란히 다 들어 있습니다.


7. 맺으며

그리 머지않아 금속공학, 폭발공학, 화공학, 열역학, 구조역학, 조선공학, 해양학, 항해학, 전자.전기공학, 해양생물학등 다방면의 전문가 분들이 별 부담없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천안함, 그 조작과 거짓의 역사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겠지요. 

글을 맺으며 오늘글의 주제를 다시한번 요약하지면, '선박이 암초에 걸리면 어지간해서는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 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공연히 암초 찾으러 나섰다가 함미 침몰지점 부근에서 암초 찾지 못해 낭패보실까봐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해군 2함대의 작전상황도에 정답이 기재되어 있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작전도 좌상부에 적혀있는 내용은 심심해서 적은 낙서가 아닙니다.

평균수면 6.4m라 적혀 있는 것이 보이실 겁니다. 특히 별표(★) 왼쪽에 '최초좌초'라 적혀 있고, 바로 그 밑에 6.4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왼쪽에는 물결표시 세개가 나란히 있지 않습니까?

가운데 물결이 평균수면으로 6.4m란 뜻이고 위에 물결표시가 고조, 아래 물결표시가 저조를 뜻합니다. 저조에는 4m라고 적혀 있습니다. 최초좌초지점의 수심이 그렇다는 뜻으로, 이것은 누군가의 설명이나 확인을 거쳐 기록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국민들이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까봐, 무슨 유치원생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국방부들은 딴청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 다른 해석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오늘 글도 긴 글이 되었습니다만, 천안함 사건은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해답이 나오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다와 배를 잘 아시는 분들이 침묵하고 있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게 여겨지는 요즈음입니다.

[참고] 본 글과 관련이 있는 주제의 글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상철

안녕하십니까. 신상철입니다. 저의 분석 글 어떻게 보셨습니까? 저는 항해.운항.선박.조선 분야에 매우 독특한 경력과 전문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MB정권과 국방부는 걸려도 제대로 걸린 것 같지 안습니까? 

천안함의 진실 -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의 인터넷매체 운영과 천안함 소송, 모두가 제게 너무나 힘에 겨운 문제입니다. 지치고 쓰러지지 않도록 저의 소박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시겠습니까?

소박한 부탁 들어주러 가기 -> 클릭!

 


Posted by skidpa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