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모든 걸 통제하고 개입할 필요는 없다. 상대성이론은 국가 개입 없이 발견되었고 아
이폰은 국가 지원 없이 잘 만들어졌다.

사법부가 모든 말의 진위 여부를 결정할 필요도 없다. 안기부 엑스(X)파일 검사가 실제로

떡값을 받았는지, <조선일보> 사장이 장자연의 성상납을 받았는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

병 감염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등등 어떤 명제들은 과학적으로, 현실적으로 확인이 불가

능하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인 ‘신은 존재하는가?’도 그 진위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수천년을 잘 살아왔다.

국가가 국민이 한 말이 허위라고 해서 잡아 가두거나 국가가 독점하는 기타 강제력을 행사

하려면 우선 그 말이 허위임이 입증되어야 한다.

이번 정봉주 전 의원의 유죄 판결은 이 당연한 원리를 송두리째 무시한 판결이다. ‘비비케이

(BBK)가 이명박 소유가 아니다’라는 입증이 없는 상황에서 정봉주 의원에게 ‘네 말이 진실

이라고 입증하지 못했으니 유죄’라고 하는 판결은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적

으로도 유례가 없는 판결이다.

대륙법과 영미법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도 진실인지 입증하지 못한 명제의 책임을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지우는 나라는 없다. 그런 논리라면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야훼의 존재

를 입증하지 못한 죄로 모두 감옥에 가야 할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입을 다물라’는

것인데 이런 규범 아래서 문명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상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안기부 엑

스파일 사건에서는 다행히도 우리 대법원이 정확하게 말했다. “안강민·홍석현·이학수가 법

정에 출두해서 ‘우린 떡값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증언이라도 하지 않는 한 이를 입증하

지 못한 책임을 노회찬에게 지울 수 없다”고. 이 대법원 판결의 원리를 완전히 뒤집은 이번

판결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깊게 우리 속살을 도려내야 하는지 보여준 판결이다.

이상훈 대법관은 ‘비비케이가 이명박 소유이다’라는 명제가 허위인지를 판시하지 않고 정봉

주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틀림없이 죄목은 ‘허위사실 공표’인데 허위인지를 판시하기 전

에 정봉주에게 자신이 한 말의 근거가 없다고 유죄를 때렸다.

이렇게 하게 된 이유는 착시현상 때문이다. 형법 307조 1항이 진실인 경우에도 명예훼손의

성립을 인정하기 때문에, 진실이든 허위이든 어차피 유죄이니 기소 죄목에서는 ‘허위’가 위

법성 요건임에도 불구하고 진위를 판정하기도 전에 말한 사람이 얼마나 근거를 가지고 있

었는지를 따진다. 피고인이 한 말의 진위를 밝힐 생각은 안 하고 ‘피고인 너 그런 말 할 자격

있느냐’를 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권력비리는 캘 수가 없다. 권력비리는 침묵과 어둠의 장막 속에서만 이

루어진다. 이들은 이런 장막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막을 뚫고 간신히 올라오

는 단서들은 당연히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단서들을 제시할 수조

차 없다면 비리의 고발은 불가능하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1619.html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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