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삼성 장충기 문자’ 전문을 공개합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혐의를 입증할 증거로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 김종 전 문체부 차관의 진술,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의 휴대전화가 꼽힌다. 여기에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의 문자 메시지가 더해졌다.

주진우 기자 ace@sisain.co.kr  2017년 08월 09일 수요일 제517호




국정농단 사건은 최순실씨의 국정 개입과 정경유착이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 핵심은 삼성의 뇌물 의혹 사건. 여기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운명이 달려 있다. 최순실씨의 요청을 받은 박 전 대통령이 삼성에 정유라씨 승마 지원을 요청했고, 삼성 측은 300억원대의 비용을 지불했다. 그 대가로 삼성이 정권으로부터 경영권 승계에 관련된 도움을 받았다고 특검은 주장한다. 특히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는 과정에 정부가 개입한 의혹이 있다. 결국 뇌물 혐의로 이재용 부회장은 구속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된 가장 큰 사유도 뇌물 공여 혐의자(이재용)가 구속된 것이었다. 하지만 삼성은 혐의 일체를 부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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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뇌물죄 재판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모르쇠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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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은 왼발 네 번째 발가락이 아프다며 재판을 미루고 병원에서 MRI를 찍었다.

‘세기의 재판’이라는 삼성 뇌물 재판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선고는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기한 만료일인 8월27일 직전에 이뤄지리라 보인다.


주요 언론은 연일 삼성 재판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 많은 증거는 어디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스모킹 건 없는 재판” 같은 제목을 달았다. 제목을 보면 거의 모든 언론이 삼성 편에 섰다. 특검이 이재용을 무리하게 구속했다는 논조를 담은 기사도 많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삼성이 지난 2분기에 최대 실적을 올렸는데 ‘오너가 안 보인다’며 안타까워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투자의 최종 결정자는 이 부회장이다. 37조원 투자를 발표한 날도 그는 재판정에 섰다. 앞으로 회사가 오너 리더십 부재라는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불안감이 작지 않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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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31일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이 재판에 출석했다.

언론이 일방적으로 삼성을 응원하고 있으나 재판의 승부 자체는 상당히 기울어진 상태다. 뇌물 혐의에 대한 증거가 꽤 많다.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 김종 전 문체부 차관의 진술,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의 휴대전화, 그리고 <시사IN>이 단독 입수한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의 문자 메시지 등이 있다. 

특히 안종범 업무수첩에는 2016년 2월15일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독대에서 오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요구와 삼성 측의 청탁 내용도 그대로 기재되어 있다. 한 수도권 현직 판사는 “이번 삼성 뇌물 사건처럼 ‘스모킹 건’이 많은 재판도 드물다. 풀리지 않는 의혹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구속영장은 아예 발부되지 않았을 것이다. 피고인이 심지어 삼성의 오너와 대통령 아니었는가”라고 말했다.

“돈이 오고 간 사실에는 다툼이 없다” 

뇌물죄의 핵심은 ‘돈을 주고받았는가’이다. 돈 거래 자체가 있었느냐는 팩트가 뇌물 사건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삼성도 인정한다. “승마 유망주를 해외 전지훈련도 보내고 좋은 말도 사줘야 하는데 삼성이 그걸 안 하고 있다”라고 박 전 대통령은 독대 자리에서 이재용 부회장을 질책했다. 삼성의 정유라씨 지원 후에는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에게 “정유라를 잘 지원해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계속 지원해달라”고 말했다고 특검은 주장한다. 박영수 특별검사는 “돈이 오고 간 사실에는 다툼이 없다는 게 재판의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쟁점은 ‘돈을 주고받은 이유가 무엇인가’밖에 없다. 이를 두고 법적인 다툼이 벌어진다.

더욱이 재판 과정에서도 삼성에 불리한 정황이 쏟아졌다. 지난 6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국민연금공단에 부당한 압력을 가한 혐의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합병 찬성을 지시한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도 징역 2년6개월에 처해졌다. 법원이 합병 찬성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한 셈이다. 특검은 국민연금관리공단이 합병에 찬성한 것이 ‘뇌물의 대가’라고 주장한다. 재판부는 국민의 노후를 책임질 돈으로 대기업 총수를 도운 혐의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에게는 매우 아픈 소식이다.

지난 7월에는 정유라씨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면서 이재용 부회장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정유라씨는 승마 관련 뇌물의 핵심 증인이자 증거 그 자체였다. 정씨는 재판에서 말이 교환되는 과정을 몰랐다는 삼성 쪽 주장을 뒤엎었다. 당시 특검의 한 고위 관계자는 “Game is Over(게임 끝). 구속영장이 떨어지고 4월 증거조사에서 재판은 실제로 다 끝났다. 그런데 정유라가 몸소 뇌물죄를 증명해주었다”라고 말했다. 

또 청와대 민정수석실 캐비닛에서 ‘삼성 경영권 승계 지원’ 자필 메모가 나왔다. 청와대가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려 했음을 입증하는 문건이다. “삼성 경영권 승계 국면→기회로 활용. 경영권 승계 국면에서 삼성이 뭘 필요로 하는지 파악. 도와줄 것은 도와주면서 삼성이 국가경제에 더 기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모색. 삼성의 당면 과제 해결에는 정부도 상당한 영향력 행사 가능.” 메모 작성자인 이영상 부장검사는 재판에 출석해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메모의 내용과 기조를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이 메모는 특검이 재판에 제출한 ‘2015년 7월 박근혜-이재용 독대 말씀자료’와 관련이 있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만든 이 ‘말씀자료’에는 ‘삼성 지배구조가 조속히 안정화돼 삼성이 미래를 위해 매진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이 정부 임기 내에 승계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한다’ 따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 측은 태도를 계속 바꾸고 있다. 처음에는 박 전 대통령의 강요로 정유라씨를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관련자 대부분이 재판에 나오지 않거나 ‘모르는 일’이라고 입을 닫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최순실씨의 강요였다’로 입장을 선회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발가락이 아프다며 재판에 나오지 않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발가락을 진단한 병원의 한 관계자는 “네 번째 발가락이 아프다고 MRI를 찍는 경우는 처음이다.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본인은 계속 아프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재용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마담? 


재판 막바지에 이르자 삼성은 ‘이재용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마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8월3일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실장(부회장)은 재판에 출석해 “삼성의 최종 결정권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이재용 부회장도 답변하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서…. 아마 얼굴로 나와서 거들고 하긴 했지만…. 이 부회장이 경험이 부족하다. 처음에 대통령한테 이 부회장이 질책받은 것은… 이 부회장이 평소에 곱게 자라서 어디 가서 야단맞거나 싫은 소리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진술은 특검에서 다르고, 검찰에서 다르고, 재판에서 또 다르다. 8월3일 재판에서 이 부회장은 “승마 지원과 관련한 모든 검사의 질문에 상세한 내용은 모른다는 등 천편일률적인 답을 했는데 검사와 일문일답을 한 것은 맞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안 했다”라고 대답했다. 자신이 특검에서 진술한 내용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다. 평범한 피고인 같았으면 재판장에게 크게 꾸중을 들었을 일이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이재용 부회장이 의도적으로 바보인 척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삼성의 최종 결정권자가 이재용 부회장이 아니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단독 면담한 것, 메르스 사태로 대국민 사과한 것,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과 면담한 것, 전경련에서 탈퇴하겠다고 한 것,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겠다고 한 것, 옥중에서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것 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난해 12월 국회 청문회에서 이 부회장은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경영권을 넘길 수 있다. 저보다 우수한 분들이 계시면 다 넘기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삼성의 ‘신(新) 재판 동력’인 모르쇠 전략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것도 삼성 조직 내부 자료에 의해서다. <시사IN>이 단독 입수한 장충기 전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는 이번 뇌물 혐의 재판을 넘어 삼성과 정부, 나아가 언론이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장 전 차장은 삼성에서 정보 및 대관업무(정부를 상대하는 업무)를 총괄해온 사람이다. 

삼성 측은 ‘대통령 말씀자료’와 관련해 청와대에 요청하거나 협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장 전 차장의 휴대전화 메시지에 따르면, 삼성은 대통령과 그룹 오너의 독대를 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청와대 인사로 추정되는 성명불상자는 장 전 차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장 선배님 불쑥 죄송합니다. 오늘 11시 BH(청와대) 회동 관련 참고하세요. 월마트, 마이크로소프트, 스타벅스 등 미국 대기업 17곳 10만 개 청년 일자리 창출.” “아무래도 지금 VIP(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게 노동 개혁인데 그에 대한 협조의 뜻을 밝히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 재판에서 박주성 검사는 “문자 내용과 대통령 말씀자료 각주 내용이 정확히 일치한다. 삼성과 청와대가 말씀자료 내용을 사전에 교감한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삼성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관해서 정부 측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장 전 차장은 국정원 이헌수 전 기획조정실장을 통해 지속적으로 합병에 대한 정보 보고를 문자로 받았다. 장 전 차장이 이 전 실장에게 정보를 준 정황도 있다. 이 전 실장은 장 전 차장에게 “사장님 지원으로 우리나라가 안정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자료는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장충기 전 차장의 휴대전화를 보면 ‘삼성공화국’의 권력 지도가 그대로 그려진다. 일개 삼성 임원에게 청와대와 국정원 최고위급 인사들이 정보 보고를 하고 있다. 덕분에 장 전 차장은 청와대 인사 기류까지 환히 파악할 수 있었다. 청와대의 누군가가 장 전 차장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극비-보안 유지 요망. 민정수석 후보자로 박상옥에 대해서 세평 정리 등 특감반에서 진행 중임.” “BH 기류(일부)입니다. 신세돈 교수는 과거 오랫동안 공부 모임을 해 인연은 있으나, 김광두 교수 계열로 최근 청와대 비판을 많이 해 주변에선 글쎄라는 반응입니다.”

검찰과 법원에서도 삼성 측에 인사 청탁을 했다. 한 대법관 후보자는 장 전 차장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하창우 대한변협 회장이 거품을 물고 저를 비토하여 두 시간 이상 격론을 벌이다가 저와 진보 측 김선수 변호사를 패키지로 같이 낙마시키는 걸로 봉합되었다 하니….” 대법관이 되려는 사람이 삼성의 눈치를 보고 있다. ‘고위직 판검사 인사는 삼성이 한다’는 말이 결코 허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민망할 정도로 아부를 해대는 언론인도 있다. “존경하는 실차장님! 어제 감사했습니다. 면세점 관련해  과 상의해보니, 매경이 어떻게 해야 삼성의 면세점 사업을 도와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기자) 올림.” 

“대통령은 이재용, 비서실장은 장충기”

국정농단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사는 “삼성공화국의 대통령은 이재용이었고, 비서실장은 장충기였다. 박근혜와 김기춘은 들러리처럼 보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은 모른다. 삼성에 관해서는 상식을 초월하는 판결들이 속출하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아버지에게 61억원을 증여받아 16억원의 세금을 냈다. 남은 돈 45억원으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를 헐값에 넘겨받았다. 이어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도 헐값에 넘겨받았다. 덕분에 수조원 규모의 재산상 이익을 얻었다. 삼성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겨우 십수억원 규모의 세금을 냈을 뿐이지만, 여기엔 실정법이 미치지 않았다. 2008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및 삼성SDS 신주인수권 저가 인수에 관한 재판이 있었다. 삼성은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삼성 수뇌부는 “이재용의 인수 사실을 이건희 회장은 몰랐다”라고 진술했다. 삼척동자도 못 믿을 삼성의 주장을 법원은 거의 그대로 받아주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뇌물 재판은 이미 끝났다. 변수가 있다면 ‘삼성이라는 것’과 양승태 대법원장이 삼성에 관해서는 유독 이상한 잣대를 댄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검에 출석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삼성은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을 회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곳이고, 그 힘을 오남용하는 삼성 개혁이 우리 사회의 핵심 개혁이다”라고 말했다. 박영수 특검은 “상대가 삼성이니만큼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재판에 성실히 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출처: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9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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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 올리면 나라 망한다? 그들이 절대 말하지 않는 것들
[기자의 눈] 최저임금 인상 우려를 우려한다  / 이대희 기자


지난 15일 밤 내년도 시간당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확정됐다. 곧바로 자영업자와 중소기업계의 극한 반발이 보수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재계가 후폭풍을 우려한다는 이야기와 고용 위축을 부르리라는 전망, 자영업자 삶이 더 힘들어지리라는 주장이 포털을 도배했다. 타깃은 명확히 현 정부다. 

직관적으로 이들의 우려를 이해할 수 있다. 일단 고용 취약계층이 피해를 입을 공산을 배제하기 어렵다. 정부가 고용 안전망 확충에 그만큼 주의를 더 기울여야 할 까닭이 있다. 당장 한 푼이 아쉬운 자영업자의 우려도 나쁜 의도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상당수 자영업자가 적자에 시달려 빚의 늪에 빠지는 와중에 16%가 넘는 최저임금 인상안은 실질적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상당수 언론의 보도 태도에서 일종의 마타도어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따져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우선, 최저임금은 노사정이 합심해 결정했다. 이번 최저임금 인상안의 사회적 의미 중 하나는 오랜만에 3자 합의 결정이었다는 점이다. 논리적으로 정부가 결정한 인상액이 아니다. 굳이 비판의 화살이 향해야 한다면, 이는 노사정 위원 전원에게 향해야 한다. 

역으로 정부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인을 지원하는 사실상의 공적자금 투입 방안을 곧바로 냈다. 최저임금 인상안이 확정된 바로 다음날인 지난 16일,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피해를 보전하기 위해 4조 원대 이상 규모의 재정 지원안을 포함한 종합 대책을 발표했다. 

그간 공적자금이 대기업에만 투입된다고 비판한 주체가 바로 중소기업중앙회다. 그간 자영업자 측은 여러 통로를 통해 소상공인을 일방적으로 내쫓는 부당한 상가임대차 제도 등을 개선하고 프랜차이즈 업주의 갑질을 막아야 함을 강조했다. 이번 정부 대책에 이 같은 요구가 적잖이 담겼다. 사업주들은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순간이다. 사용자 측의 요구는 최저임금 인상 수준에 대한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 정부에 더 많은 재정 지원 혹은 더 강한 자영업자 보호 대책 요청으로 이어지는 게 맞다. 

정부의 지원액 덕분에 시간당 최저임금 인상액 1060원 중 업주가 자비로 부담해야 할 금액은 491원이다. 하루 8시간 기준 3928원, 한 달(월 209시간 기준) 10만2619원 수준이다. 최저임금 노동자 1인에게 사업주가 이만큼 더 부담하면, 정부 지원금을 포함해 이전보다 22만1540원을 더 번 노동자가 소비 시장에 접근한다. 이번 최저임금 인상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 수는 약 462만 명이다. 곧바로 내년부터 효과를 보는 소비 가능액 증가분이 1조235억 원에 달한다. 

이만큼 늘어난 소비 여력이 결과적으로 다시 자영업자의 소득을 늘려준다. 저소득층의 소비성향은 고소득층보다 더 높다. 당장 소비해야 할 자금이 절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저소득층 소득을 보전하면 고소득층 감세보다 더 큰 소비 진작 효과를 얻는다는 결과가 나온 이유다. 경제 선순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간 특정 기업을 살리는데 투입된 공적자금과 이번 재정 지원 방안을 따져보면 형평성 차원에서도 이치에 어긋난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1997년 이후 올해 1분기까지 부실 기업에 투입된 공적자금 규모는 총 168조7000억 원에 달한다. 

외환위기 당시 부실화한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에 3조5000억 원이 넘는 돈이 투입됐고, 파산위기에 내몰린 서울보증보험에는 10조2000억 원이 들어갔다. 대우조선해양에만 두 차례에 걸쳐 7조 원이 넘는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2010년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금호타이어에 9조 원가량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공적자금은 자칫 경제적 형평성을 해칠 수 있는데다, 기업이 사실상 먹고 튀는 일도 일어나는 위험을 가진 자금이라는 점에서 투입에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 1997년 이후 투입된 공적자금 중 회수된 금액은 114조5000억 원이다. 아직 정부는 50조 원이 넘는 돈을 되찾지 못했다. 일부 금융기업에 투입된 공적자금의 경우, 사실상 회수 불가능 판정을 받았다. 

이번 정부 지원안과 최저임금 인상안은 공적자금보다 더 깨끗한 집행 과정을 거쳐 더 큰 효과를 얻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결코 사용자 측에도 나쁜 일이 아니다. 

▲15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에서 열린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내년도 최저임금이 확정됐다.ⓒ연합뉴스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3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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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사태에서 진정으로 놀라운 대목

국민의당은 문준용씨에 대한 제보 조작 사건이 이유미씨 개인 일탈이며 당의 조직적 개입이 없었다고 강조한다. 제보에 대해 정상적인 검증을 하지 않은 책임은 회피한다.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2017년 07월 11일 화요일 제512호



문준용씨에 대한 국민의당의 제보 조작 사건은 어느 모로 보나 구태 정치다. 역설적으로 그 터무니없는 시대착오가, 오늘날의 한국 정치에 흥미진진한 질문을 던진다. 제보 조작 사건의 궤적을 되짚으면 이 역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대선 나흘 전인 지난 5월5일, 국민의당 공명선거추진단 김인원 부단장이 중대한 의혹을 제기한다.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의 아들 문준용씨가, 아버지인 문 후보의 권유를 받고 2006년 고용정보원에 원서를 냈다는 제보자 증언을 공개한 것이다. 준용씨의 고용정보원 취업 과정은 대선 내내 ‘특혜성 취업’ 여부로 공방이 오가던 쟁점이었다.

5월5일 의혹 제기가 중대했던 이유는, 준용씨의 취업 과정에 문 후보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 기자회견 이전까지 ‘특혜성 취업’ 주장은 물증보다는 여러 불확실한 정황에 기대고 있었다. 문 후보가 고용정보원을 지목해 원서를 쓰라고 했다는 증언은, 이전까지 나온 정황들을 하나로 꿰어 ‘권력형 취업 알선 사건’을 만들어주는 정보였다.

ⓒ연합뉴스
6월29일 이유미 전 국민의당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이 제보 조작 사건과 관련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남부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이 제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보자의 음성 녹음이라며 안철수 캠프에 건네진 파일은, 사실 국민의당 관계자가 자신의 가족과 짜고 녹음한 역할극이었다. 이 조작 파일을 만든 이유미씨는 2012년 대선에서 안철수 캠프 자원봉사자로 일했고,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66일, 안철수와 함께한 희망의 기록>이라는 책을 냈다. 2016년 총선에서는 전남 여수갑 지역구에 국민의당 예비 후보로 등록했지만 당내 경선에서 패했다. 그녀는 공직선거법상 허위 사실 공표 혐의로 6월29일 구속됐다.


대선 막바지로 갈수록 지지율이 빠지던 안철수 캠프는 준용씨의 특혜성 취업 의혹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유미씨는 이준서 전 국민의당 최고위원과 메신저 등으로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대선 선거운동을 했다. 두 사람은 사석에서, 이유미씨의 지인 중에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준용씨도 이 학교를 다녔다) 출신이 있다는 대화를 나눴다.

4월 말쯤, 이준서 전 최고위원은 이유미씨에게 그 지인을 제보자로 확보하자고 요청한다. 이유미씨는 그 지인으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를 요약해서 메신저로 보냈다. 문재인 후보가 준용씨를 고용정보원에 ‘꽂아넣었고’, 그 사실을 준용씨가 파슨스 디자인스쿨 재학 시절 자랑 삼아 말하고 다녔다는 내용이다. 이 전 최고위원은 녹취 등 근거 자료를 요구했다. 5월1일 이유미씨는 지인들과의 대화 캡처라면서 메신저 창 이미지를 보내며 ‘제보’의 수위를 높인다.

5월3일, 이유미씨가 이준서 전 최고위원에게 한 남성과 통화하는 녹음 파일을 보낸다. 내용은 앞서 보낸 메모와 유사하다. 훗날 이유미씨가 기획한 역할극으로 확인된 그 녹음 파일이다. 이 전 최고위원은 이유미씨로부터 받은 자료들을 대선 캠프 공명선거추진단으로 넘긴다. 공명선거추진단 김인원 부단장이 이틀 뒤인 5월5일 이 내용을 발표한다. 문재인 캠프는 해당 사안이 허위 사실이라며 검찰에 고발한다.

안철수 후보·박지원 위원장, 어디까지 알았나?

5월7일, 김인원 부단장이 다시 반박 기자회견을 연다. 김 부단장은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다. “국민의당이 한 사람의 증언자를 조작해 가짜 인터뷰를 했다는 주장은 사실관계조차 틀렸다. 민주당은 평소에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있지도 않은 가공인물을 내세워 가짜 인터뷰를 조작하는지 모르겠지만, 국민의당은 애초부터 그런 기술이 없다. 국민의당은 한 사람만의 제보를 가지고 기자회견을 할 정도로 무모하지도 않다.” 이날 김 부단장이 정확히 표현한 대로, 5월5일 이후의 공방전은 ‘있지도 않은 가공인물을 내세워 가짜 인터뷰를 조작’한 사건으로 결론 났다. 다만 더불어민주당이 아니라 국민의당이 ‘그런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김 부단장의 브리핑과 다르다.

검찰은 제보 조작 과정에 국민의당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는지를 집중 수사하고 있다. 이 대목이 지금 여론의 핵심 관심사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말하면, 안철수 대선 후보와 박지원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이 언제부터, 어느 수준까지 사실을 알고 있었나에 관심이 쏠린다. 언론도 당·캠프 지도부의 개입 여부에 취재를 집중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국민의당은 검찰과 언론에 조직적 개입 여부를 추궁당하는 이 구도에서 당의 활로를 발견하려 한다.

ⓒ안철수 전 의원 트위터 갈무리
2016년 1월15일 국민의당 창당을 준비하던 안철수 의원은 벤처사업가인 이준서씨(오른쪽)를 1호로 영입하고 사진을 찍어 트위터에 올렸다.

“당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면 이 당은 해체해야 한다.” 6월28일 국민의당 박주선 비대위원장이 한 말이다. 당 해체까지 각오하는 단호한 결의처럼 보이지만, 미묘한 맥락이 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을 ‘개인 일탈이냐, 조직 차원의 조작이냐’ 구도로 재구성한다. 후자라면 당이 해체해야 한다는 말을 뒤집어보면, 전자로 결론 날 경우 당과 안철수 대선 후보의 책임은 도의적 차원으로 그친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이 경로, 핵심 전선을 조직적 개입 여부로 재구성한 후에 이유미씨의 개인 일탈로 마무리하는 경로가, 국민의당으로서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다. 가장 버틸 만한 전장까지 최대한 후퇴해 최후 방어선을 친 것이다.


향후 검찰 수사에서 지도부의 조직적 개입 사실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국민의당의 이런 기대가 터무니없지도 않다. 이 경우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물론, 여론이 사태를 침소봉대했다며 반전을 꾀할 수도 있다. 국민의당은 2016년 총선 직후 터진 ‘리베이트 사건’으로 휘청했지만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며 기사회생했던 선례도 있다. 조직적 개입 여부에 최후 방어선을 치는 전략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최후 방어선은 정치인이 감당할 기본적인 직업윤리를 무시해야만 성립한다. 반드시 던져져야 하지만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국민의당은 조작된 제보를 검증도 하지 않고 대선 한복판에 던져놓을 수 있었을까. 정당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선거 수행 능력으로, 정당이 띄우는 대선 캠프는 일종의 ‘선거 머신’이다. 진위가 의심스러운 제보를 걸러내는 작업은 선거 머신의 가장 기초적인 기능에 속한다. 이번 제보 조작 사태만큼 선거 머신이 고장 난 사례를 찾기도 쉽지 않다.

여러 대선 캠프가 ‘공명선거추진단’ 등으로 불리는 조직을 둔다. 정치권에서 더 익숙하게 부르는 비공식 명칭은 ‘네거티브팀’이다. 상대 후보의 개인 이력을 공격하고, 상대 캠프가 우리 후보에게 펴는 네거티브 공세를 대응·방어하는 팀이다.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태는, 네거티브팀의 과속을 제어할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시스템 사고였다.

“대책 없이 당한 캠프의 무능이 진정 놀라워”

네거티브팀 업무는 보통 이렇게 작동한다. 대선 캠프에는 상대 후보에 대한 숱한 제보가 들어온다. 소위 ‘깜이 안 되는’ 제보는 접수 단계에서 버려진다. 가능성이 보이는 제보를 중심으로 실체를 맞춰가다보면,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 만한 ‘물건’이 만들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진짜 관건이다.

ⓒ연합뉴스
6월26일 박주선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국회 정론관에서 문준용씨 취업 관련 제보가 조작된 것이었다고 발표했다.

네거티브팀 책임자는 ‘물건’을 캠프 내부의 다른 팀 책임자들 앞에 놓고 검증을 받아야 한다. 전략·공보·법률 등 여러 단위가 모여앉아 각자의 관점에서 판단을 내놓는다. 유효타를 먹일 수 있다고 해도, 법률지원단이 보기에 사실 검증이 부실해 뒷감당이 안 될 수 있다. 공보 라인이 보기에 언론사들이 기사로 쓰기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 전략 단위에서 네거티브 공세의 효과를 부정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네거티브팀이 만든 ‘물건’을 실제로 사용할지는 이처럼 여러 단위의 교차 검증을 거친다.


네거티브팀은 상대 후보 공격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지만 법률지원단은 캠프 방어를, 공보는 확산을, 전략은 유리한 선거 구도 만들기를 목표로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관점과 관심사를 가진 단위들의 교차 검증을 거치면 아이템의 생존율은 뚝 떨어진다. 대선이라는 ‘이기고 보는 싸움’에서도 가혹한 내부 검증 시스템을 설계하는 이유는, 대선이야말로 한 발만 잘못 디뎠다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위태로운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네거티브팀은 상대의 도덕성에 치명적 공세를 펼치는 단위인 만큼, 네거티브가 되치기 당했을 때의 피해 역시 치명적이다. 문재인 캠프에서 일종의 별동대로 검증 업무를 했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공명심에 취했든 판단력이 흐려졌든, 부실하고 위험한 폭로거리를 들고 오는 ‘또라이’의 등장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건 대선에서 흔한 일이다. 오히려 또라이에 대책 없이 당한 캠프의 무능이야말로 이번 사태에서 진정 놀라운 대목이다.”

이번 제보 조작은 고도의 속임수를 부린 것도 아니었으며, 본인 확인을 요구하는 간단한 절차만으로도 검증이 가능했다. 정황을 종합해보면, 이준서 전 최고위원이 가져온 제보를 공식 발표하는 과정에서 실효성 있는 검증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네거티브팀이 과속을 할 때 캠프 차원의 제어도 작동하지 않았다. 

조직적 개입을 부인하려면 제보 조작 사건을 온전히 네거티브팀 안에서 일어난 일로, 거기서 다시 이유미씨 개인이 저지른 일로 끊임없이 고립시켜야 한다. 사태 발생 이후 국민의당 주요 정치인들이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이 고립이야말로 시스템 설계 실패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국민의당이 “조직적 개입은 없었다”라는 최후 방어선을 지켜내려 하면 할수록, ‘선거 머신’으로서 터무니없는 무능을 고백해야만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모든 선거는 결국 후보의 선거다. 국민의당 대선 캠프의 최종 결정권자는 안철수 전 후보다. 제보 조작이 확인되고 5일째인 6월30일까지 안 전 후보는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쟁점이 ‘조직적 개입이냐 개인 일탈이냐’로 형성될 경우, 안 전 후보는 자신이 직접 개입하지 않은 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 구도에서는, 검찰 수사로 사실관계가 확인될 때까지 침묵을 지키는 태도도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시스템 에러를 조장하는 캠프의 무능이 문제가 될 때, 안 전 후보는 지금 확인된 사실만으로도 입장 표명을 피할 수 없는 최종 책임자다.

‘구태 정치’는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고 한국 사회가 믿던 시절이 있었다. 2012년 안철수 현상은 그 결과물이었다. 안 전 후보는 2012년 정치에 뛰어들 때부터 ‘비생산적이고 전문성 없는 여의도 정치’와 ‘생산적·합리적인 민간 전문가’를 대립시키는 화법을 즐겨 구사했다. 하지만 정치라는 직업이 요구하는 특유의 전문성은 분명 존재한다. 대선을 수행하는 초대형 선거 머신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가는 그중에서도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과제다. 이렇게 해서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태는 흥미로운 역설을 드러낸다.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는 지도자야말로, 본의와 무관하게 결국 터무니없는 구태 정치에 최적의 그늘을 제공한다.


출처: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9620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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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문제는 미국 핵이다!
['전쟁 국가' 미국] 북핵 해결을 원한다면 미국 핵의 실체를 보라





2015년 11월 이후 중단됐던 ''전쟁국가' 미국' 연재를 재개합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핵무기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볼 계획입니다. 핵은 인류의 생존에 대한 최대 위협이며, 북한 핵은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4일 북한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발사 성공을 발표했습니다. 2006년 이후 다섯 번의 핵 실험과 이번 ICBM 성공으로 북한은 사실상 세계에서 9번째로 핵보유국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이는 북한에 대한 미국 핵 외교의 명백한 파탄을 의미합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북핵 불용'을 수없이 외쳐왔지만 그 결과는 북한의 핵 보유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1994년 제네바 기본 합의와 2005년 9.19성명 등 북한 비핵화를 위한 숱한 노력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근본 원인을 도외시 했기 때문입니다. 즉 북한의 체제 안전입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이며, 우리식으로 하면 한반도 평화체제의 확립입니다. 

미국과 북한의 역사적 적대 상황이 해소되지 않는 한, 즉 북한의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 한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군사력으로 북한 핵을 무력화 하려는 시도는 공멸을 불러올 뿐입니다. 

지난 70여 년간 미국은 자신의 핵무기는 평화를 지키는 좋은 것이고 다른 나라들의 핵무기는 평화를 위협하는 위험한 것이라는 이중기준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자들이 증언하듯이 '모든 핵무기는 절대 악'이며 '핵무기와 인류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양식 있는 세계 시민들의 보편적 결론입니다. 

특히 미국 핵무기는 세계적 불안정의 근원입니다. 미국이 핵무기를, 핵에 의한 위협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다른 나라로의 핵무기 확산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핵 보유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북핵의 뿌리는 미국 핵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며 핵무기를 초석으로 한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적으로 직시하지 않는 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비판을 바랍니다. 편집자. (☞ <'전쟁 국가' 미국> 지난 연재 보러 가기)

▲ 2010년 림팩 훈련에 참가한 미군 함정들. ⓒnavy.mil


핵무기와 함께 시작된 전후

2차 대전은 핵무기라는 유산을 인류에 남겼다. 핵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당초 원자폭탄의 개발은 나치 독일의 세계 정복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대해 사용됐다. 

미국의 원폭 투하는 군사적 필요 때문이 아니었다.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군사적 패배는 명약관화 했다. 게다가 미국의 무차별 공중폭격으로 이미 도쿄 등 64개 도시가 초토화됐다. 이런 상태에서 단 두 방의 원폭으로 수십만 민간인을 무차별 살해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진정한 속내는 또 다른 승전국 소련에 대한 무력 과시였다. 핵무기를 독점한 미국이 앞으로 만들어 나갈 세계 질서를 따르라는 엄포였다. 이후 핵무기는 미 대외정책의 핵심 초석이 된다. 

가장 강력한 재래식 폭탄보다 무려 1500배 이상 파괴력이 큰 원폭을 손에 넣은 미국은 완전히 새로운 자신감을 갖게 된다. 트루먼 등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원폭은 포커판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같은 존재였다. 어떤 패도 누를 수 있는 절대 반지, 만능의 보검이었다. 원폭은 세계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목표는 세계를 미국 주도의 단일한 경제권으로 묶어내는 것이었다.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 복원, 즉 세계 전체를 미국의 투자 및 수출시장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이 각각 유럽대륙, 중국과 동남아 지역을 자신의 배타적 경제권으로 만들려 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전체를 자신의 생활권(Lebenslaum)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전쟁 직후 미국 경제는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거대했고, 여기에 절대무기인 핵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두 핵심 지역인 독일과 일본은 물론 소련까지도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통합시키겠다는 것이 미국의 목표였다. 

소련이 지향한 것은 세계 공산혁명이 아니라 일국사회주의 건설이었다. 주로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치른 소련의 경제는 완전히 망가졌다. 게다가 핵무기를 독점한 미국을 상대로 세계 공산혁명을 시도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에서 소련은 미국을 따라갈 수 없었다. 

소련의 재건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안전보장과 경제 재건이 그것이다. 안보를 위해서는 독일을 중립화하고 폴란드 등 동유럽을 소련의 통제권 아래 두어야 했다. 독일은 1,2차 대전에서 소련을 침공한 최대 안보 위협이었으며 폴란드 등 동유럽은 역사적으로 독일 등 외부세력의 침공 경로였기 때문이다.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을 받아낼 심산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 때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의 전후 목표는 충돌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 회담에서 독일의 전쟁 배상 규모를 200억 달러로 하며 그 중 절반을 소련에 할당할 것에 합의했고,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통제권을 사실상 인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의 대일본 참전을 절실히 원했던 미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양보였다. 

미 대외정책의 핵심 초석이 된 핵무기

그러나 미국이 원폭을 가지면서 미소 협력은 없던 일이 돼버렸다.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으로 미국의 의지를 소련은 물론 세계에 관철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동아시아에서는 소련을 배제한 채 일본을 단독 점령했고, 유럽에서도 독일의 대소련 전쟁 배상을 일방적으로 중단하고 독일의 분단을 밀어붙였다. 냉전의 시작이다. 미국의 군사적 일방주의는 2003년 부시의 이라크 침공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시작된 것이다. 

▲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유일하게 남겨진 건물이다. ⓒ위키피디아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도 원폭 덕택이었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은 일본과 함께 자본주의 복원이라는 미국 전후 구상의 핵심지역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었다.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래식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었던 소련으로부터 서유럽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설령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한다 하더라도 핵무기로 격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은 지상군을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냉전이 핵무기경쟁 등 극단적 군사 대결 상황으로 치닫는(냉전의 군사화) 결정적 계기였다. 1950년 4월 미 국가안보회의는 NSC-68을 통해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의 대대적인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두 달 후 발생한 북한의 남침은 소련의 세계 정복 야욕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고, 미국의 국방비는 단숨에 3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전쟁으로 본격화된 미국의 대대적 군비 확장 및 군사적 일방주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패전국 일본과 서독의 재무장도 추진됐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의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증강됐고 소련에 대한 압도적 우위를 확보했다. 미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는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초래했다. 소련의 개입과 반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베트남 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규정한 제네바 합의(1954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군사개입에 나선 것이다. 

소련은 미국과의 피 말리는 군비 경쟁 끝에 1991년 스스로 무너졌다. 군비 경쟁의 핵심은 핵무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 학자 유르겐 브룬은 냉전에 대해 "소련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한 고의적 군비경쟁"이라고 말했다.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핵무기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례로 부시 행정부는 2002년 핵태세보고서(NPR)를 통해 러시아, 중국,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북한 등 7개 국가에 대해서는 핵 선제공격(First Strike)을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들 나라는 미국의 잠재적 적국(러시아, 중국)이거나 미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이른바 '불량국가(rogue state)'들이다. 

이 가운데 이라크 후세인과 리비아 가다피는 이미 미국에 의해 제거됐고, 시리아에서는 2011년 이후 내전이 진행 중이다. 이란과는 핵 협상이 타결됐으나 트럼프 이후 합의가 이행될지는 미지수다. 북한은 2006년 이후 다섯 차례 핵실험을 했으며 2012년 헌법 개정을 통해 핵보유국임을 선언했다. 

2002년 부시 행정부는 요격미사일금지협정(ABM)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후 (이란과 북한의 핵위협을 이유로) 동유럽과 동아시아에 미사일 방어망 건설을 밀어붙였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와 북한의 미사일 개발이 겹치면서 러시아, 중국과의 군사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구축이 자국의 핵 군사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4월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했다는 이유로 그해 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2014년 9월 향후 30년간 무려 1조 달러를 미국 핵무기 성능을 개선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그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다. 

북한 등 불량국가와 테러 세력에 의한 핵위협에 대비한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다. 그러나 진정한 속내는 러시아, 중국 등 잠재적 적국에 대한 핵 군사력의 우위 유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핵무기는 미 대외 정책의 핵심 초석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 핵은 나쁘고 미국 핵은 좋다?

최근 들어 북한의 핵 개발이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과연 그런가? 미국 핵은 평화를 지키는 좋은 것이고, 북한 핵은 평화를 해치는 나쁜 것인가? 핵무기는 미국에게 무엇인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핵무기가 있음으로 해서 세계는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인류 절멸의 위기에 처했는가?

미국의 주류 정치인과 제도권 학자들은 미국의 핵무기는 평화를 지키는 좋은 것이며 북한, 이란과 같은 무책임하고 무모한 세력이 핵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핵무기로 인해 2차 대전 이후 세계가 안정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의 많은 시민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반면 비판적 지식인과 시민들, 평화운동가들은 미국에게 핵무기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망치(hammer)이며, 세계적 불안정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핵무기를 개발했고, 유일하게 핵무기를 사용한 국가로서 이후 핵무기를 앞세운 압도적 군사력으로 세계에 대해 미국의 의지를 강요하고 관철시켜 왔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핵무기 보유를 고집하고 핵무기를 앞세운 군사주의를 계속하는 한, 이에 저항하려는 국가와 세력들의 핵무기 보유 시도는 결코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미국이야말로 세계 최대의 핵 위협 세력이라는 말이다. 

북한 핵이 국제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지금, 북한의 핵 위협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주체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미국의 주류 정치인, 제도권 학자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 북한 핵문제가 제기된 후 4반세기가 지난 지금 미국의 대(對)북핵 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국은 1990년대 초 이후 30년 가까이 '북핵 불용'을 외쳐왔지만 그 결과는 북핵 보유였다. 2006년 10월 북한의 첫 핵실험에 대한 미국 언론의 반응은 지난 60여 년간 미국의 핵정책이 불러온 결과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미국의 핵위협을 받아온 국가다.

'북핵 불용'이라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을 보유하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미국의 말과 행동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때문은 아닌가? 이런 의문들에 대해 우리 나름의 독자적인 생각과 판단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 70여 년간 핵의 역사를 통해 미국이 핵무기를 어떻게 활용해 왔고 다른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를 알아야 한다.

▲ 지난 4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오른쪽 아래 검은색 옷)이 '화성 14형'(오른쪽 위)을 시험 발사에 성공한 뒤 관계자들과 기뻐하고 있다. ⓒ노동신문


핵 억제인가, 핵 테러인가

'핵무기'는 2차 대전 후 미국 대외 정책의 핵심 초석이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게 말해오고 있다.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1953년 국무장관 취임 직후 "유사 이래 우월한 문명은 언제나 보다 효과적인 무기를 개발해냄으로써 저급한 문명에 대한 우위를 유지해 왔다"고 말했다. 

또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63년 발간된 회고록()에서 "원자탄, 그리고 이를 사용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현재 전 세계에 걸친 미국의 군사 공약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지난 2005년 채택된 미국의 합동핵작전교리(doctrine for joint nuclear operation)는 "분명히 말하건대 핵무기는 앞으로 50년간 미 군사력의 초석으로 건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의 정치가, 군인, 외교관들은 핵무기가 미 대외정책의 초석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평화'를 내세운다. 지난 70여 년간 핵무기가 세계 평화를 유지해온 근간이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억제 이론(deterrence theory)'이다. 

한마디로 말해 핵무기가 강대국 간의 (핵)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핵전쟁이 초래할 무시무시한 인명 피해를 감당할 수 없기에 강대국은 전쟁을 피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유식한 말을 쓰자면 '상호 확증 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에 의한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 때문에 전쟁을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20세기 전반 전쟁에 의한 사망자가 1억 명이었던 데 비해 (핵시대가 도래한) 20세기 후반의 전사자는 2000만 명에 불과(?)했다는 통계 수치를 제시한다. 핵무기가 평화를 가져 왔다는 것이다. 나아가 핵무기가 냉전 시대의 '긴 평화(long peace)'를 가져왔다며 이를 국제정치에서의 '핵혁명(nuclear revolu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핵이 국제정치를 안정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미국 정부와 전략가, 국제정치학자 등에 의해 널리 유포돼 왔다. 대다수 미국인은 물론 세계의 많은 시민들이 이를 신봉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스티븐 월트는 "억제 이론의 핵심적 측면은 이제 (현실로) 잘 정립돼 있다. 어떤 종류의 '핵전쟁'도 불가능하다는 점(infeasibility)이 매우 잘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최소한 그렇다고 기대해 보자)."고 말할 정도다. 

케네스 월츠라는 또 다른 저명 학자는 이란의 핵무장이 중동 정세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스라엘 핵무기에 대한 억제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70여 년간 핵의 역사는 억제 이론이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는 점을, 그리하여 전체적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핵공격 이후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때까지, 즉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을 동안 핵무기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있지도 않은 소련의 핵 공격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이 전쟁 종결을 앞당기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위 군 장성들이 핵공격에 반대했다는 사실, 전쟁 조기 종결을 위한 다른 대안들이 있었다는 사실, 일본 핵 공격의 1차적 목적은 소련 등에 대한 무력 과시를 통해 미국의 세계 패권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 등이 이미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다. 

냉전 시대가 '긴 평화'였다는 허구

냉전 시대의 '긴 평화'라는 것도 지극히 서방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냉전의 주요 무대였던 유럽에서 미국/서유럽 대 소련/동유럽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종의 평화 상태를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30년에 걸친 국제전이 벌어졌다. 

앞에서 말했듯이 미국은 핵무기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었기에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베트남전쟁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무수한 핵 위협과 핵 공갈을 했다. 6.25 발발 직후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 공격 계획을 세웠으며, 1950년 11월 중공군에 패퇴했을 때는 실제 핵 공격을 하려 했고,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핵 위협을 했다. 

1954년 프랑스군이 베트남군에 패배했을 당시 미국은 프랑스에 전술 핵무기 공격을 제안했다가 프랑스의 거부로 무산됐다. 1969년 닉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해 조기 휴전 협상을 강요하기 위해 핵무기를 탑재한 B-52 폭격기 등을 출격시키기도 했다. 이른바 '광인 이론(madman theory)'에 따른 핵 공갈이다. '나는 실제 핵 공격을 강행할 수도 있는 미친놈이니까 알아서 기어라'는 협박이다.

▲ 1965년 미군 헬기가 남베트남의 베트공 기지를 공격하고 있다.ⓒAP=연합뉴스


뿐만 아니다. 1946년 이란 북부에 주둔해 있던 소련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핵 위협을 시작으로 1956년 수에즈운하 위기, 1958년 이라크의 사회주의 정권 수립,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등 중동지역에서도 미국은 수시로 핵 위협을 동원했다. 석유자원의 보고인 중동지역에 대한 소련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냉전 시대의 긴 평화란 미국, 유럽, 소련에만 해당되는 지극히 국지적인 현상이었다.

그 긴 평화가 과연 진정한 평화였는가. 아니다. 우선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다. 당시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 정책 당국자들은 실제 핵 전쟁이 일어날 확률을 30~50%로 봤다고 한다.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40여년 뒤 "케네디 대통령이 (핵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사태 당시에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면 핵 전쟁이 벌어질 뻔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우선 베를린 위기가 한창이던 1961년, 미국은 소련에 대한 전면 핵 공격 계획을 세웠다. 소련의 핵무력을 일거에 무력화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백악관에서 핵 전쟁 분석가로 일했던 다니엘 엘스버그에 따르면 실제 핵공격이 단행됐을 경우 사망자는 6억 명으로 추산됐다. 엘스버그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다는 미국이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보다 100배나 되는 참극을 계획했다고 개탄했다. 당시 미 군부는 소련에 대한 전면 핵 공격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를 말린 것은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1983년 11월에도 미.소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그해 3월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매도했다. 또한 '별들의 전쟁', 즉 전략방위구상(SDI)이라는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천명하는 등 대대적인 핵전력 증강에 나섰다. 

그해 10월에는 소련 영공에서 대한항공(KAL) 007편이 소련에 의해 격추돼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등 미소 대립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 미국은 유럽에서 나토 회원국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에이블 아처(Able Archer, 유능한 궁수)'라는, 소련에 대한 모의 핵 공격 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호전적 태도에 극도로 긴장했던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미국에 대한 선제 핵 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고 한다. 미국에 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소련 레이더에는 미국의 핵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으로 비쳐졌고 핵 전쟁 매뉴얼에 따르면 소련은 대응 공격을 해야 했다. 다행히도 당시 레이더 책임을 맡았던 소련 관리가 매뉴얼을 무시함으로써 핵 전쟁을 회피할 수 있었다. 훗날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80년대 전반이야말로 미소 핵 대결에서 가장 위험했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이것이 평화인가. 인류 전체를 몇 번이고 몰살할 수 있는 핵 전력으로 무장한 채 대치하고 있는 불안한 휴전 상태일 뿐이다. 결코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미국은 언제나 핵 우위를 추구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냉전 시대를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이 대등한 핵 전력으로 무장한 채 팽팽하게 대립했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두 핵 강국의 대치'라는 사실은 부분적 진실일 뿐이다. 왜냐하면 1970년대 전반까지 미국의 핵전력이 소련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중반까지 소련은 미국의 핵 공격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1961년 미 군부가 소련에 대한 전면 핵 공격을 주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소련의 핵 전력이 미국과 대등해지기 전에 싹을 잘라내자는 것이었다.

미국의 독립연구자 가레스 포터에 따르면 1955년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 격차는 45대 1이었다. 1965년에는 9대 1로 그 격차가 좁혀졌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의 압도적 우위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근대 국가간 체제가 성립된 이후 최대 군사 강국과 2위 군사 강국 간의 군사력 격차가 이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1954년 프랑스의 패배로 사실상 끝이 난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쟁에 미국이 개입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압도적 군사적 우위 때문이라는 게 포터의 주장이다. 미 핵전력의 압도적 우위에 기가 질린 소련과 중국이 계속 미국에 양보를 했고, 이에 따른 행동의 자유에 도취된 미국은 남베트남에 반공 친미 정권을 세울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 후 20년에 걸친 야만의 전쟁이었고 미국의 치욕적 패배였다. 

억제 이론에 따르면 핵 보유국 간의 전쟁은 불가능하다. 핵 전쟁의 아무리 작은 피해라도 한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인명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이다. 핵의 역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0년대까지 미국은 압도적 핵 우위를 바탕으로 핵을 사용하지 않고도 소련을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켜 왔다. 어느 한 쪽이 압도적 핵 우위를 누리고 있고 이러한 객관적 현실을 상대방도 알고 있다면 굴복과 양보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것이 1945년 이후 20여 년간 미소 관계의 진실이다. 

1962년 흐루쇼프가 미국의 턱밑, 쿠바에 비밀리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압도적 핵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필사적 몸부림이었다. 미국은 핵 전력의 압도적 우위 외에도 독일과 이탈리아, 터키 등 소련의 주변에 핵무기를 배치해놓은 반면 소련은 자국 영토 외에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해외 기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흐루쇼프의 시도는 실패했고 2년 후 권좌에서 밀려났다. 이후 소련은 대대적인 핵 군비 증강에 나섰고 1970년대 중반에 비로소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미‧소의 핵탄두는 한때 무려 7만 개 가까이에 이르렀다. 

핵무기가 단지 상대방의 핵공격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인류 전체를 몇 십 번 죽이고도 남을 핵탄두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핵 우위를 통해 상대방을 굴복시키겠다는 야망', 이것 외에는 핵 군비경쟁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 또한 핵 군비경쟁의 주도자는 언제나 미국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핵군비 경쟁은 지구촌의 안전을 위협한 것만이 아니었다. 시민들의 생활과 복지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자원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1961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이임사에서 고백한 군산복합체가 바로 그것이다. 끝없는 군비 경쟁 끝에 소련은 제풀에 쓰러졌고 미국은 군산복합체가 지배하는 군사국가로 변모했다. 막대한 자원을 군사력 증강에 쏟아 부은 결과 미국의 민생은 피폐해졌고, 민주주의마저 위협당하기에 이르렀다.

미 내무장관을 역임한 스튜어트 우달은 현재 미국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핵무기 경쟁, 그리고 그 실상의 은폐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핵무기 경쟁과 그 실상의 은폐는 미국 정부가 거짓 현실을 근거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이는 정의를 왜곡했다. 또한 미국의 도덕성을 망가뜨렸다" 

출처: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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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렇게 변함없이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해주셔서,
무어라고 감사 말씀 드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대선 때 했던 약속, 
오늘 이 추도식에 대통령으로 참석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노무현 대통령님도 오늘만큼은,
여기 어디에선가 우리들 가운데 숨어서,
모든 분들께 고마워하면서,
“야, 기분 좋다!” 하실 것 같습니다.

애틋한 추모의 마음이 많이 가실만큼 세월이 흘러도, 
더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이름을 부릅니다. 
노무현이란 이름은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세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아파했던 노무현의 죽음은
수많은 깨어있는 시민들로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끝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요즘 국민들의 과분한 칭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뭔가 특별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정상적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노력, 
정상적인 대통령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이 
특별한 일처럼 되었습니다. 
정상을 위한 노력이 특별한 일이 될만큼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심각하게 비정상이었다는 뜻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과 복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나라, 
지역주의와 이념갈등, 
차별의 비정상이 없는 나라가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대통령부터 초법적인 권력과 권위를 내려놓고,
서민들의 언어로 국민과 소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상은 높았고, 힘은 부족했습니다.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노무현의 좌절 이후 우리 사회, 
특히 우리의 정치는
더욱 비정상을 향해 거꾸로 흘러갔고,
국민의 희망과 갈수록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노무현의 꿈은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부활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꾼 꿈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정부까지,
지난 20년 전체를 성찰하며
성공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꿈을, 
참여정부를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 나라다운 나라로 확장해야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이제 가슴에 묻고,
다 함께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봅시다. 
우리가 안보도, 경제도, 국정 전반에서 
훨씬 유능함을 다시 한 번 보여줍시다. 

저의 꿈은 국민 모두의 정부, 
모든 국민의 대통령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손을 놓지 않고
국민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개혁도, 저 문재인의 신념이기 때문에,
또는 옳은 길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눈을 맞추면서,
국민이 원하고 
국민에게 이익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나가겠습니다. 
국민이 앞서가면 더 속도를 내고,
국민이 늦추면 소통하면서 설득하겠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못다한 일은 
다음 민주정부가 이어나갈 수 있도록 
단단하게 개혁해나가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이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임기동안 
대통령님을 가슴에만 간직하겠습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입니다. 
이제 당신을 온전히 국민께 돌려드립니다.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임무를 다한 다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다시 한 번,
당신이 했던 그 말,
“야, 기분 좋다!”
이렇게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십시오. 

다시 한 번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꿋꿋하게 견뎌주신 권양숙 여사님과 유족들께도
위로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5월 23일
대통령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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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벼라 문빠” “좌표 찍고 달려드는 개떼”

진보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이 시민 혹은 독자에게 던진 말들이다. 호기롭게 맞서봤지만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고 결국 본인도, 그들이 속한 언론사도 사과를 했다. 그러나 문재인 지지자들의 진보언론에 대한 분노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일부는 사과의 진정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문재인 지지자 아니 시민들이 진보언론에 분노한 이유는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진보언론 전부가 긴장하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한경오 프레임이라는 말 자체가 마치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가 조중동처럼 보도한다는 선입견을 준다”면서 “그 말 자체가 부적절하다며 앞으로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한 “언론개혁은 내 편만 들어주는 언론을 만드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또한 현재 한경오에 분노하는 시민들에 대해서 상당부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시민 아니 문빠 누구도 문재인 편을 들어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애초에 문빠들이 분노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대선 국면에서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경오까지 가세한 편파보도에 있다고 한다. 더 파고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까지 이어진다. 

4월 13일 경향신문 모바일 화면 갈무리, 안수찬 기자 페이스북

대표적으로 ‘팔사오입’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치고 올라오던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주춤하던 시기였다. 또한 문재인 후보로서도 줄곧 1강을 유지하다가 견제를 받는 민감한 때였다. 경향신문은 여론조사 결과 문재인 후보 44.8%, 안철수 후보 36.5%를 헤드라인에 44%, 37%로 표기했다. 당시 누리꾼들은 기적의 반올림법이라며 냉소했고, 심한 경우 오보가 아닌 선거개입이라고 비난했다. 과연 팔사오입을 실수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 진보언론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정확히 알고 싶다면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실수도 상식선에서 해야 변명거리가 생기는 법이다. 이를테면 SBS의 세월호 인양지연에 대한 오보가 그런 경우다. 애매하게 데스킹 과정에서의 허술함이라고 변명을 했으나 믿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잘못을 했으면 사과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나 그도 하지 않았다. 워낙 대선국면 속에 이슈가 쏟아져 그냥 지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로 인해 누적된 부정적 인상은 치명적이었다. 

대선이라는 환경이 주는 감정의 증폭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편파와 왜곡이 누적되면서 시민들은 진보언론들이 조중동과 무엇이 다른지 분간할 수 없다는 자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진영논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오래 작동했던 진보의 보호막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민심의 변화를 진보언론이 보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빠 운운하며 빈정거리는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없는 문재인 패권을 몇 년간 우려먹은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알아서 물러설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가 1일 오후 경기 의정부 젊음의 거리에서 열린 집중 유세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문빠라고 부르는 그들은 문재인 지지자이기 전에 촛불시민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을 사서 일부러 사람 많은 곳에 슬그머니 놓고 왔던 사람들이기도 하며, 없는 돈 털어서 한겨레 국민주에 쏟아 부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을 촛불시민들과 분리시킨다면, 그 모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진보언론의 위기는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 바른정당에서는 문빠, 문팬클럽에게 자진해산하라는 주장을 했다. 이 역시 헛다리짚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내 어지간한 커뮤니티 어디든 문빠가 있지만, 반대로 어디에도 문빠 커뮤니티는 없다. 문빠는 과거 노사모처럼 조직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과거 노사모를 보는 시각으로 문빠를 본다면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다. 조직된 바 없는, 형체는 없는데 대단한 위력을 보이는 것. 그것을 달리 말하면 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의 현상이 오마이뉴스의 김정숙 여사 호칭 문제, 한겨레21의 표지 문제로 인한 기자의 도발 등등으로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떻게든 불거질 일들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문빠 아니 시민들은 이 싸움을 문재인 정부의 향후 5년 동안 잠시도 멈추지도, 방심하지 않을 것도 말이다.

21세기 뉴스 소비자들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정보를 수집, 분석, 공유를 해내고 있다. 그것을 달리 집단지성이라고 부른다. 그런 시민들의 실체를 보지 않고 끝까지 문빠라는 프레임 속에서 사태를 조정하려 든다면 진보언론은 분명 더 큰 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 이들이 진보언론에 일단 요구하는 것은 진정한 고백이며 반성이다. 또한 공정한 역할 수행의 다짐이다. 너무 단순해서 아닐 것 같지만 그것이 본질이다.  


출처: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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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18민주화운동 37주년을 맞아, 5·18묘역에 서니 감회가 매우 깊습니다.

37년 전 그날의 광주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80년 오월의 광주시민들을 떠올립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광주 영령들 앞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월 광주가 남긴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오늘을 살고 계시는 유가족과 부상자 여러분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1980년 오월 광주는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 비극의 역사를 딛고 섰습니다.

광주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버티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월 광주의 정신으로 민주주의를 지켜주신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께 각별한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5·18은 불의한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맞선 시민들의 항쟁이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진실은 오랜 시간 은폐되고, 왜곡되고, 탄압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슬 퍼런 독재의 어둠 속에서도 국민들은 광주의 불빛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 민주화운동이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도 5·18때 구속된 일이 있었지만 제가 겪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광주의 진실은 저에게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고,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크나큰 부채감이었습니다.

그 부채감이 민주화운동에 나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것이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성장시켜준 힘이 됐습니다.

마침내 오월 광주는 지난 겨울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부활했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분노와 정의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임을 확인하는 함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치열한 열정과 하나 된 마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습니다.

1987년 6월항쟁과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다짐합니다.

새 정부는 5·18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의 정신을 받들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복원할 것입니다.

광주 영령들이 마음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성숙한 민주주의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오월 광주를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룩된 이 땅의 민주주의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새 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헬기사격까지 포함하여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5·18 관련 자료의 폐기와 역사왜곡을 막겠습니다.

전남도청 복원 문제는 광주시와 협의하고 협력하겠습니다.

완전한 진상규명은 결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식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가꾸어야할 민주주의의 가치를 보존하는 일입니다.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담겠다는 저의 공약도 지키겠습니다.

광주정신을 헌법으로 계승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 시대를 열겠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비로소 온 국민이 기억하고 배우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개헌을 완료할 수 있도록 이 자리를 빌어서 국회의 협력과 국민여러분의 동의를 정중히 요청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님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오월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그 자체입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님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은 그동안 상처받은 광주정신을 다시 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제창으로 불필요한 논란이 끝나기를 희망합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2년 전, 진도 팽목항에 5·18의 엄마가 4·16의 엄마에게 보낸 펼침막이 있었습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짓밟은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국가를 통렬히 꾸짖는 외침이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원통함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사람의 존엄함을 하늘처럼 존중하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국가의 존재가치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오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습니다.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광주진상규명을 위해 40일 간의 단식으로 옥사한 스물아홉 살, 전남대생 박관현.

1987년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노동자 표정두.

1988년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한 스물네 살, 서울대생 조성만.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

수많은 젊음들이 5월 영령의 넋을 위로하며 자신을 던졌습니다.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을 때, 마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진실을 밝히려던 많은 언론인과 지식인들도 강제해직되고 투옥 당했습니다.

저는 오월의 영령들과 함께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헛되이 하지 않고 더 이상 서러운 죽음과 고난이 없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참이 거짓을 이기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광주시민들께도 부탁드립니다.

광주정신으로 희생하며 평생을 살아온 전국의 5.18들을 함께 기억해주십시오.

이제 차별과 배제, 총칼의 상흔이 남긴 아픔을 딛고 광주가 먼저 정의로운 국민통합에 앞장서 주십시오.

광주의 아픔이 아픔으로 머무르지 않고 국민 모두의 상처와 갈등을 품어 안을 때, 광주가 내민 손은 가장 질기고 강한 희망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나눈 ‘주먹밥과 헌혈’이야말로 우리의 자존의 역사입니다.

민주주의의 참 모습입니다.

목숨이 오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절제력을 잃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주정신은 그대로 촛불광장에서 부활했습니다.

촛불은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위에서 국민주권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정부가 될 것임을 광주 영령들 앞에 천명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대한민국이 새로운 대한민국입니다.

상식과 정의 앞에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숭고한 5·18정신은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가치로 완성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삼가 5·18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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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지난 3월 23일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1073일만이다. 인양 작업 중이던 3월 22일에는 원주에서 노란 리본 모양의 권운이 발견돼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하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이 달았고, 아직도 달고 있는 '노란 리본'의 의미는 '잊지 않겠습니다.'이다. 그런데 이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과연 돌아가신 희생자들의 이름과 얼굴, 안타까운 사정에만 국한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기엔 그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숱한 이들의 잘못, 그 잘못에 대한 책임까지 기억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여전히 똑바로 묻지 못해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누군가의 잘못과 책임. 그래서 더욱 기억해야 하는 '세월호 침몰 당시'를 둘러싼 사실 5가지를 책을 통해 간추려 정리해보았다. 아직 우리는, 잊지 않았다.

sewol

*모든 인용문, 사실관계는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에서 발췌 및 참조

1. 선원

sewol

세월호는 08시 49분 처음 좌현으로 기울어졌다. 조타실에는 3등 항해사 박한결과 조타수 조준기가 있었다. 좌현으로 배가 기울어졌을 때 선장 이준석이 처음 안내데스크 선원들에게 내린 승객들에 대한 지시는 '선내 대기하라'였다. 안내데스크에 있던 여객부 선원 강혜성은 그 지시를 받아 08:52분 처음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을 한다. 조타실에선 안내데스크 방송을 직접 들을 수 없었지만 옆 외부 갑판에서 흘러나오는 선내 방송을 들을 수 있었고, 1등 항해사 강원식은 '선내 대기하라'는 방송을 조타실에서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조타실에 모인 갑판부 선원들과 선장 이준석은 승객들에 대해 이후 후속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여객부 선원 박지영 씨가 조타실에 여러 차례 무전을 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09:04분, 세월호 근처에 있던 유조선 둘라에이스호가 진도VTS를 통해 구조 협조 요청을 받았다. 둘라에이스호 선장 문예식은 자신의 배가 길이 105미터, 폭 15미터로 세월호 승객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판단, 09:22분에 세월호, 진도VTS와 교신을 통해 '탈출을 시키십시오, 빨리!'라는 의견을 전한다. 하지만 선장 이준석과 조타실에 모인 갑판부 선원들은 09:45분 해경 123정에 의해 구조되기까지 선내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한편, 여객부 선원 강혜성 또한 최승필 씨를 포함한 승객들이 "배가 많이 기울었으니까 지금이라도 구명보트 내리고 승객들을 탈출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방송을 해라"며 재촉했지만 안내 방송 내용을 끝까지 바꾸지 않았다. 엔진컨트롤룸에서 근무하던 기관장 박기호를 비롯한 기관실 선원들은 운항관리규정에 의거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선 구명 뗏목과 구명슈터(미끄럼틀)를 바다에 내릴 의무가 있었으나 3층 기관실 객실 복도에 모여 가만히 앉아있다 구조받았다. 기관장 박기호는 1등 기관사 손지태, 3등 기관사 이수진과 함께 캔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2. 청해진해운

sewol

청해진해운은 세월호에 승객 443명, 선원 33명, 화물 2142톤, 승용차 124대, 화물차 57대, 중장비 4대, 컨테이너 145개를 실었다. 화물량만으로도 운항관리규정에서 정한 최대 화물 적재량 1077톤을 배 이상 초과했다. 3등 항해사 박한결은 출항 후 통신으로 인천VTS 전정윤을 호출, 인원 수와 화물 적재량을 알려주었다. 모두 엉터리였다. 운항관리실 선박운항관리자였던 전정윤이 모든 걸 직접 확인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관행'은 원칙과 달랐다.

08:49분 세월호가 좌현으로 기울고 2분 뒤인 09:01분, 여객부 선원 강혜성이 청해진해운 해무팀 대리 홍영기에게 '배가 기울었다'는 전화를 한다. 홍영기는 이후 세월호 조타실 선원들과 전화 연결했으나 별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청해진해운 인천본사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TV만 지켜보고 있었다. 선내 승객들에 대한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거래처 전화 문의에 응대했다. 09:21분, 청해진해운 제주지역본부 박기훈과 물류팀 과장 김정수는 화물량이 지나치게 많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물류팀장 남호만과 물류팀 과장 김정수는 그래서 우련통운에 연락해 세월호에 실린 화물량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09:30분이었다. 세월호가 좌현으로 기운지 41분이 지났을 때였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3. 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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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VTS

세월호가 좌현으로 기운 08:49분, 진도VTS 관제실에는 관제사 8명 등 총 10명의 직원이 있었다. 아무도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했다. 9시 4분 목포해경 상황실이 경비전화로 "세월호가 침몰 중"이라고 알려줄 때까지 15분간이었다. 관제실은 4명이 한팀으로 24시간 일하고 48시간 일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그들은 CCTV를 창가 쪽으로 돌려놓고 교신일지를 허위로 적으며 밤에는 1명이 모든 관제 업무를 보고 나머지 3명은 쉬는 변칙 근무를 '관행적으로' 하고 있었다. 2014년 4월 당시 그들은 초과근무수당을 94-140만원 수령했다. 8시 49분 진도VTS가 사고 사실을 인지했다면 구조 세력 출동 등 초기 대응 시각을 5분 앞당길 수 있었다. 사고 당시 관제대상 선박은 18척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대형 해상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주요 추적 관찰 대상인 여객선과 위험화물운반선은 4척뿐이었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123정

123정은 사고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세월호와 단 한 차례도 교신하지 않았다. 현장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123정이 보낸 구명보트는 세월호 좌현 갑판 가까이 배를 붙였다. 123정 경사 이형래가 3층 로비 갑판으로 올라갔다. 로비와 연결된 출입문이 있었고, 열려 있었다. 안에는 방송 장비가 있는 안내데스크와 25명의 승객이 있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123정은 09:45분 조타실 선원들을 구조했다. 123정에는 방송장비가 있었다. 조타실에도 안내방송 장비가 있었다. 선원과 123정 해경 둘 다 퇴선 방송을 하지 않았다. 09:59분, 목포해경서장 김문홍이 뒤늦게 "배에서 뛰어내리라고 고함치거나 마이크로 뛰어내리라고 하면 안 되나"라는 지시를 123정에 전달한다.

하지만 123정은 세월호 선수와 50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해경 중 누구도 선내 진입하지 않았다. 10:13분, 선미 출입문에 있다 123정 해경의 "한두 명씩 나와라!"는 소리에 나와 구명보트에 탄 장00 학생은 왜 해경들이 "충분히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데 "들어오질 않는"지 의아해했다. 4층 좌현 갑판에 물이 덮치기 직전 바다에 뛰어내려 허우적대던 구00 학생은 십자인대가 파열된 상태로 123정 구명보트에 끌어올려졌는데, 해경으로부터 "존나 늦게 올라오네, 씨발. 이 새끼 존나 무거워"라는 폭언을 들었다. 김00 학생은 바다에 다시 빠지는 게 무서워 노란색 펜더가 달린 로프를 몸에 감았다 해경으로부터 "그거 빨리 놔라, 개새끼야"라는 폭언을 들었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목포해경, 서해해경, 해경본청

09시 04분 여객부 선원 강혜성은 목포해경 상황실에 전화했다. 받은 사람은 문명일이었다. 강혜성은 자신이 "선내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안내방송 중"이란 사실을 알렸다. 문명일은 "예예, 그렇게 해주세요, 예예"라고 얘기했다. 목포해경서장 김문홍은 인명 구조 경험이 있는 자로서 현장 지휘를 고민했으나 통신 장비가 있는 3009함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감사원은 김문홍이 09:59분까지 3009함에서 아무런 지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서해해경 상황실은 9시 18분에서 23분 사이 진도VTS와 세월호가 서로 교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에 구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또 서해해경 상황실은 9시 28분 헬기 511호로부터 배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인"다는 보고를 받았다. 퇴선 방송 등의 구조 지시는 내려지지 않았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해경본청 상황실 김남진은 09:36분 123정 정장 김경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경비과장 여인태는 통화를 바꿔 자세하게 보고를 받았지만 "계속 실시간으로 보고하라"는 지시 외, 구조에 대한 지휘는 하지 않았다. 해경본청장 김석균은 09:33분에도 "아직 명확한 사고 전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은 사고 현장 지휘가 아닌 청와대 보고라고 주장했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09:59분 목포해경서장 김문홍이 처음 퇴선 명령을 내렸으나, 너무 늦은 뒤였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4.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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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는 09시 19분 YTN 보도를 통해 처음 사고를 인지했다. 그때까지 해경 본청 상황실은 세월호 사고를 외부로 전파하지도, 보고하지도 않았다. 그 뒤 2-3분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청와대-해경청 핫라인(직통전화)을 연결해 영상과 구조 인원수 보고를 요구했다. 모든 요구는 123정에 그대로 전해졌다. 청와대는 123정에 영상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엔 핸드폰을 통해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제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23정은 순전히 보고하기 위해 구조 업무에 더해 사진을 찍고 사람 수를 세었다. 구조 인원 수와 구조된 인원을 옮기는 장소를 실시간으로 보고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의 지시는 모두 지휘용이 아닌 대통령 보고용이었다. 그리고 10시 25분, 세월호가 침몰하기 5분 전, 123정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진다. "단 한 명도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5분 후 세월호는 침몰했다. 청와대는 오후 3:30분에야 첫 회의를 연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오후 05:15분에야 중대본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는 상황파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질문을 한다.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5. 퇴선명령자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책 '세월호, 그 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출처:http://www.huffingtonpost.kr/2017/04/04/story_n_156490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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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기철 세월호 참사 당시 해군참모총장.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게 상황을 브리핑하는 동안에도 군령을 어겨가면서까지 노란리본을 달고 있었다. (사진=해군 제공)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가 3년 만에 처참한 모습으로 수면 위에 다시 떠올랐다. 3년 전 침몰하는 배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국민들의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분노로 바뀌었다. 참사의 원인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당시 초기 대응이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면 희생자를 좀 더 줄일 수 있었던 정황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분노한 국민들은 노란색 리본을 달고 촛불을 들었다. 사고 진상규명과 초기 대응에 실패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는 거세어졌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물어 해양경찰을 해체하고 관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법처리에 나섰다. 이 같은 불똥은 참사 당시 사고 해역에서 해경을 보조해 구조작전에 나섰던 해군에게도 튀었다.



최신형 구조함인 통영함이 방산비리 때문에 구조작전에 투입되지 못했다는 발표가 난 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수의 전·현직 장교들이 무더기로 입건됐다. 그렇게 대한민국 해군은 방산비리의 온상으로 낙인찍히며 현직 참모총장이 강제 전역 및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끝없는 추락이 시작된 것이다.

구조 총력전…통영함은 왜 안왔나?

참사 당일 서서히 침몰해가는 세월호를 TV 생중계로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굴렀던 많은 국민들은 도대체 그 많은 해군과 해경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기에 아이들이 산 채로 수장되고 있는데도 속수무책 보고만 있었냐며 분개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해군과 해경이 가라앉아 가는 배 안에 들어가 아이들을 구조해 나오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현장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 해군의 최신형 구조함 통영함.(사진=해군 제공)



일각에서는 해군과 해경이 적극적인 구조 의지가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정치적 이유 때문에 고의로 구조작업을 게을리 했다는 주장도 나오기 시작했다.

해군이 통영함과 같은 최신 구조 자산들을 모두 투입하지 않았고, 인근 해역에 훈련 차 들어와 있던 미 해군의 대형 강습상륙함 본 험 리처드함의 현장 투입을 해군에서 막았다는 억측 보도도 쏟아졌다. 과연 해군은 세월호 참사 때 구조작업에 손을 놓고 있었을까?

해군은 해경으로부터 세월호가 침수 중이라는 상황 전파를 받은 직후 즉각 이를 지휘 라인을 통해 전 부대에 전파했다.

보고를 받은 황기철 당시 해군참모총장은 작전사령부에 “모든 가용 전력을 동원해 구조 작전에 총력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한편, 사고 해역에서 가장 가까운 해군 함정을 수배했다. 마침 약 40마일 거리에 유도탄고속함인 ‘한문식함’이 있었고, 전속력으로 사고 해역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밖에 경계 작전에 투입되지 않고 출동 가능한 모든 함정에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한국형 구축함(DDH) 1척, 호위함(FF) 2척, 초계함(PCC) 1척, 고속정(PKM) 5개 편대, 구조함 2척, 항만지원정 등 20여 척의 함정이 즉각 사고 해역으로 출동했다. 해군 특수전전단(UDT/SEAL)과 해난구조대(SSU) 대원들도 최초 신고 접수 약 1시간 30여 분 후에 헬기 편으로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사고해역에 도착한 한문식함은 기본적으로 전투함이었기 때문에 해난사고에 대비한 구조용 장비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배가 침몰할 때에 대비해 가지고 있는 구명정과 구명조끼 50여 개를 던져 물 위로 나온 생존자들을 구조하는데 온힘을 다했다.

황 총장은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에게 “현재 인수 준비 중인 통영함이 사고 해역에 투입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 놓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사고 현장으로 날아갔다.

당시 통영함은 음파탐지기 성능 미달 문제로 인해 해군이 방사청에 문제를 제기해 놓고 있던 상태였고, 방사청은 이를 근거로 통영함 인수를 거부하고 있었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통영함의 소유권은 해군이 아닌 대우조선해양에 있었기 때문에 해군이 마음대로 배를 출항시킬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해군은 이미 3척의 구조함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보유 척수는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배에 탑승하는 승조원 숫자 역시 법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만약 통영함을 보내게 된다면 광양함이나 평택함 등 이미 출동한 구조함이 퇴역해야 한다는 법적 문제도 걸림돌이 됐다.

▲ 세월호 구조작전에 투입된 해군 구조함. (사진=해군 제공)



당시 기획관리참모부장이던 박 모 제독 등 일부 참모진은 이러한 법적 문제와 구조작전의 효율성 저하 등 여러 이유를 들어 통영함 투입을 반대했다.

하지만 황 총장은 “잠수사들을 위한 감압 챔버가 1대라도 더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즉각 투입 준비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해군은 급히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들과 만나 통영함 출동을 위한 합의각서를 체결했다. 사고 당일 밤 11시 30분의 일이었다.

그동안 통영함은 엄청난 방산비리의 종합선물세트로 알려져 있었지만, 문제가 된 것은 음파탐지기뿐이었다. 이 음파탐지기는 수중에 무엇이 있는지 그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장비인데, 세월호 구조작전의 경우에는 조난 선박의 위치를 구조당국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음파탐지기가 사용될 일이 없었다.

사고 현장에 통영함이 투입될 경우 통영함이 가진 장비 가운데 활용될만한 것은 잠수사들을 위한 감압챔버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사고 해역에는 수중 구조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잠수함 구난함 ‘청해진함’을 비롯해 평택함과 다도해함 등 감압챔버를 갖춘 함정들이 다수 출동해 있던 상태였다.

동시에 투입될 수 있는 잠수사들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었고, 이들이 필요로 하는 감압챔버의 숫자 역시 충분했기 때문에 통영함은 결국 사고 현장에 투입되지 않았다. 통영함이 아직 제대로 된 항해조차 해본 적이 없어 출동 중 고장이나 기타 사고 발생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통영함이 사고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통영함은 사고 해역에 출동했어야 했다. 이 배가 사고 현장에 투입되지 않았던 것이 빌미가 되어 해군에 ‘숙청’에 가까운 광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희생양이 된 군인

세월호 참사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황기철 제독은 군복을 입었던 40여 년 동안 상급자는 물론 부하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던 덕장(德將)으로 유명했다. 휘하에 있었던 장교와 병사들은 그를 “얇은 지갑을 탈탈 털어 부하들을 챙기는 인정 넘치는 상관”으로 기억한다.

그는 “나랏돈 함부로 쓸 수 없다”면서 업무 목적 외에는 관용차나 군 시설을 일절 쓰지 않았고, 주말에 타지에 살던 부인이 부대를 방문할 때도 버스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했다. 40여 년 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해군 최고계급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집 한 칸 겨우 마련했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평소 병사들에게 “우리 해군에 와서 바다를 지켜줘서 고맙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할 정도로 인간적인 정이 많았던 그에게 수백여 명의 어린 아이들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그는 사고 보고를 받고 즉각 사고 해역으로 날아갔다. 수난구호법에 따라 현장 통제는 해경이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해경의 수장은 바다에서 근무해 본 경험이 부족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황 총장은 해군특수전전단(UDT) 출신으로 군 내에서 구조작전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던 김판규 제독(당시 해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비롯한 구조작전 전문가 11명을 해경에 보내 해경청장을 보좌하게 했다.

현행법과 지휘체계 구조상 해군참모총장이 구조작전에 직접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없었지만, 그는 23일간 현장에서 구조요원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격려하고, 현장의 요구를 그때그때 받아들여 해군이 필요한 지원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도왔다.

사고 해역은 유속이 빠르고 시야가 대단히 나쁜 곳이었다. 지원 나온 미군 구조대원들조차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는 추가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규정상 구조작업에 나설 수 없다”며 돌아갈 정도였다.

해군 해난구조대 대원들이 아무리 베테랑이라 하더라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물속에 들어가 실종자를 건져오는 작업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작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공포를 이겨내야 하는 일이었다. 10cm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오로지 손의 감각에 의지해 선체 안에 들어가 촉각만으로 실종자를 찾아 그 시신을 안고 물 밖으로 나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구조대원들은 실종자를 발견하면 한 손으로 시신을 안고 “그동안 차가운 물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니? 형이 왔으니 형만 믿고 여기서 같이 나가자”는 말을 시신에게 걸면서 공포를 이겨야 했다. 황 총장은 사고 해역에 3주 넘게 머무르면서 구조대원들을 격려하고 보살폈다. 시신을 데리고 뭍으로 나온 뒤 넋이 나가 있는 구조대원들, 그리고 유족들을 안고 펑펑 울기도 했다.

그는 팽목항에 머무르는 동안 슬픔과 애도의 표시로 군복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군복에는 규정된 약장이나 훈장 등을 제외하면 다른 부착물을 달 수 없었지만, 군인으로서 국민을 더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그리고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애도와 슬픔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노란 리본뿐이었다.

일부 참모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 통수권자의 팽목항 방문 때도 이 노란 리본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노란 리본은 통영함 출동 문제와 더불어 어떤 위정자들에게 밉보이는 빌미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 대응과 수습 과정에서 국민들의 질타를 받던 어떤 위정자들은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돌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들은 통영함이 투입되지 못했던 것에 착안해 “해군이 천문학적인 비리를 저질러 구조함이 제때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다”는 주장을 만들어냈다.

아이들의 희생에 슬퍼하던 국민들은 격분했고, 관계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확산됐다. 그렇게 별도의 수사단이 꾸려지고 해군에 ‘숙청’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2014년 말 출범한 방위사업비리 정부합동수사단은 약 7개월여 기간의 수사를 통해 약 9809억원의 방산비리를 적발했다며 이 가운데 8402억원은 해군의 비리라고 발표했다. 해군은 28명이 구속 또는 기소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황 해군참모총장을 비롯, 2명의 참모총장과 고위 장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무리한 수사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사정당국은 해군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먼지털기’에 나섰다. 전투전단장 임무를 수행하며 최일선 지휘관으로 근무하던 대령급 장교를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수갑을 채워 연행하는가 하면, 정상적인 임무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해군의 관련 기관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영관급 장교 몇 명 잡아넣는다고 해서 국민적 분노를 쉽게 잠재울 수는 없었다. ‘거물’이 필요했고, 그 희생양은 해군의 최고수장이었던 참모총장이었다.

현역 참모총장이 검찰에 소환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 전역됐다. 그는 출국금지 조치를 당하고 얼마 뒤 구속 수감됐다. 권력자들은 대한민국 해군 최고 수장이었던 4성 장군을 잡아다가 계급장을 떼어내고 일반 ‘잡범’들과 함께 구치소에 가뒀다.

1년 반이 넘는 법정 다툼에서 그는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그의 딸 역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 퇴직금으로 아버지의 변호사 비용을 대야 했다. 한평생 나라를 위해 헌신한 노장(老將)에게 기나긴 법정 투쟁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너무도 가혹했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심과 2심, 그리고 대법원에서 그는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1~3심 재판부는 모두 황 총장에게 범행 동기도, 범행을 증명할 증거도 없다“고 판결했다.

8000억원이 넘는다는 해군의 방산비리 사건들은 그 규모가 수십 배로 부풀려졌거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것이 많았다. 황 총장이 연루된 통영함 사건의 경우 정치적 이유로 ‘거물’을 낚기 위해 중령급 장교가 저지른 비리를 해군총장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법조계와 여론의 질타가 쏟아졌다.

해군작전사령관으로 몇날 며칠 밤을 새며 ‘아덴만 여명’ 작전을 지휘해 우리 국민을 구해내고,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유가족과 구조대원들의 곁을 지키며 함께 눈물 흘렸던 한 장군과 군인들은 누군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400여 년 전, 왜적이 침입하자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던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군복을 벗기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했다. 조선수군의 수장으로 바다를 호령하며 휘하 장졸과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이순신은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 선조의 희생양이 됐던 역사가 오버랩된다.

대통령이 ‘세월호 7시간 행적 의혹’ 등으로 국민적 질타를 받으며 정치적 수세에 몰렸던 시기에 뜬금없이 통영함과 방산비리 이슈가 떠올랐고 평생을 위국헌신(爲國獻身)하며 살아온 한 장수와 장병들이 비리집단으로 몰려 명예가 짓밟혔다. 마치 400년 전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보는 듯 한 장면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군인은 명예를 먹고산다. 그리고 그 명예는 국민들이 지켜주어야 한다. 3년 만에 뭍으로 떠오른 세월호를 통해 그동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던 진실들이 하나씩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도대체 누가 한 장수와 장병들의 명예를 짓밟고 군의 사기를 바닥까지 떨어뜨렸는지 이제는 국민들이 나서서 그 진실 규명을 요구할 때이다.

이일우 군사 전문 칼럼니스트(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finmil@nate.com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403601007&wlog_tag3=naver#csidx25511dd1d357eaf942f47ce29cdb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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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수색 한창때 박근혜 대통령은 미용시술 흔적. 세월호 유족 면담 3일 전 얼굴에 피멍 든 박 대통령. 세월호 실종자 수색작업이 한창이던 2014년 5월 13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자리로 향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에 피멍자국이 선명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4년 남짓한 박근혜 정부를 돌이켜 보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대선 직후 불거진 국가정보원 댓글사건은 국정원장의 구속으로 이어졌고 이듬해는 세월호 참사로 국가적 비극을 맞았으며 메르스 사태,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 등으로 민생은 고달팠다.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과 무능력, 아집에 대한 원성도 높았다. 박 대통령의 낡은 리더십은 결국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로 만천하에 드러났고 헌정사상 초유의 파면 사태를 맞았다. 박근혜 정부 4년을 파멸로 내몬 결정적 10장면은 그의 업보였던 셈이다.

① 국정원 댓글, 정권 내내 정당성 논란

박근혜정권은 태동부터 심상치 않았다. 2012년 대선 직전 터진 국정원의 댓글 공작 사건은 정권 내내 정당성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논란 끝에 정권 출범 직후 검찰이 원세훈 국정원장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고 여야는 국정조사까지 벌이며 공방을 벌였다. 이 와중에 여당인 새누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해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반격에 나서 파장이 확대됐다. 궁지에 몰린 국정원이 대화록 사본을 공개하는 극단적 카드까지 내밀었지만 끝내 전모를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사초(史草)실종’ 논란이라는 소모적 논쟁만 반복하다 대화록 정국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댓글 사건에서는 검찰이 120만여 건의 국정원 트위터 글을 밝혀내고 국군사이버사령부의 대선 개입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국가기관의 조직적 대선 개입 사건으로 증폭됐다. 원세훈 원장은 고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이 파기 환송 판결을 내려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난 2003년 사퇴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② 채동욱 찍어내기, 막무가내 인사 전형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 논란은 막가파식 불통 인사의 전형이었다. 채 총장이 사퇴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2013년 9월 6일 조선일보의 혼외자 보도였다. 하지만 당시 채 총장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 과정에서 선거법 위반 적용여부를 놓고 청와대나 법무부, 국정원과 갈등을 빚고 있던 터라,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인사를 끌어 내리려는 모종의 힘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채 총장에 대한 전격적인 감찰 지시를 내리자 채 총장은 “조직 수장으로 단 하루라도 감찰 조사를 받으면서 일선 검찰을 지휘하는 건 부적절하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개입설을 강하게 부인하던 청와대는 채 총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지 보름만에 사표를 수리하면서 사태는 일단락 지어졌다. 이후 채 총장의 혼외자로 지목된 채모군의 인적사항을 파악하는데 조오영 청와대 행정관과 조이제 서초구청 국장, 국정원 정보관 송모씨 등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을 뿐이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침몰사건. 연합뉴스

③ 세월호 참사, 골든타임 놓친 위기대응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맹골수도에서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정부 위기관리 능력의 총체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고 발생 직후 해양경찰청과 안전행정부를 비롯해 정부의 중앙재해대책시스템은 말 그대로 무용지물이었다. 사고 당일 오전 8시52분 첫 신고가 접수되고 배가 완전히 기울어 침몰할 때까지 1시간 넘는 ‘골든 타임’ 동안 국가 재난기구와 컨트롤타워는 작동되지 않았다. 295명의 소중한 목숨이 희생됐고, 실종자 9명은 아직도 수습되지 못하고 있다.

사고 발생의 정확한 원인 규명 등을 위한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돼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했지만, 정부여당의 미온적 태도 등으로 파행을 거듭하다 의미 있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마무리 됐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세월호 인양 작업에 나섰지만 사고 발생 3년이 다 되도록 결론을 못내고 있다. 박 대통령의 당일 7시간 행적 또한 여전히 미궁 속이다. 검찰과 특검의 잇단 수사에서도 명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고 헌법재판소 또한 심리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함에 따라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은 또다시 검찰의 손을 넘어가게 됐다.

④ 메르스 사태

2015년 한 해를 질병 공포에 떨게 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는 국내 방역시스템의 허술함을 그대로 노출시킨 사건이었다. 첫 감염 의심 환자가 발생한 이래 초기 대응에 실패, 연말까지 186명이 감염되고 38명이 숨졌다. 다른 국가에서도 발병한 메르스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치사율이 20.4%에 이를 정도로 문제가 된 건 허술한 방역체계 때문이었다. 메르스 사태 초기 보건당국이 환자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환자들이 거쳐간 병원을 공개하지 않다가 화를 키웠고, 이후 보건복지부와 삼성서울병원 등은 책임을 떠미는 촌극까지 연출했다. 정부는 첫 의심 환자가 확진 판정을 받은 5월 20일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가 보름쯤 지나 박 대통령이 미국 순방 일정을 연기한 채 국립중앙의료원의 국가지정 음압 격리병상을 찾는 등 부산을 떨었다. 첫 환자 발생 후 218일만인 12월 23일 공식적으로 상황종료를 선언했지만, 이미 방역 당국의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경제는 초토화된 뒤였다.

정윤회와 최순실. 한겨레신문 제공

⑤ 정윤회 문건파동, 최순실 게이트 예고편

이른바 ‘십상시’가 등장하는 문건 파동은 최순실 게이트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2013년 세계일보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이자 최순실씨의 전 남편인 정윤회씨가 국정을 농단했다는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의 문건을 입수해 보도했다. 문건에 따르면 정씨는 박 대통령 비선 실세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사퇴를 유도하고,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등 소위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는 청와대 비서관 등과 수시로 만나면서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씨가 강력 부인하고 박 대통령까지 나서 “찌라시에 나라가 흔들렸고 문건 내용은 허위”라고 단정지은 뒤 검찰은 “정윤회 문건은 증권사 정보지에 근거한 허위”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자 검찰은 문건 내용에 대한 진위 규명이 아닌 유출 경로에 초점을 맞추고 수사를 벌여 박관천 경정을 구속시켰다. 사건 이후 정씨는 최씨와 이혼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정씨 사건의 본질을 외면한 박 대통령은 인의장막 속에서 불통 정치를 계속하다 결국 국정농단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⑥ 안대희ㆍ문창극ㆍ이완구… 총리 연쇄 낙마

국정 2인자인 국무총리의 연쇄 낙마는 몰락의 예고편이었다. 4년 동안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6명 중 3명은 청문회 문턱도 넘지 못한 채 낙마하고 말았다.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인 2013년 1월 24일 첫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이 전관예우, 아들의 병역문제, 부동산 투기 논란 등이 제기되면서 지명 5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이후 정홍원 총리가 박근혜정부 초대 총리로 취임했으나 2014년 세월호 참사 부실 대응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후임자로 지명된 안대희 전 대법관은 변호사 시절 고액 수임 등 전관예우 논란으로 6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뒤이어 후보자로 지명된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도 역사인식 논란으로 2주 만에 낙마했다.

총리 후보자들의 잇단 낙마로 정 총리가 사의 표명 60일 만에 ‘도로 총리’로 유임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정 총리 후임으로 2015년 2월 임명된 이완구 총리는 갖은 의혹을 떨치고 총리에 임명됐지만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연루, 취임 63일 만에 사퇴하면서 역대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박 대통령의 수첩 불통 인사가 잇단 인사 참극의 요인이었다.

2014년 6월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사퇴 기자회견을 마치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김주성기자

⑦ 국정교과서, 여론 외면 강행하다 좌초

박근혜 정부 시간표대로라면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인 올해 새 학기부터 중고교생들이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게 돼 있었다. 새 교육과정 적용을 역사 과목만 서두른 결과였다. 그러나 박근혜표 역사교과서는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추진 동력을 잃었고 지난해 11월 공개 뒤에는 박정희 미화 등 현대사 왜곡, 사실 오류 등 함량 논란에 휩싸여 기어코 좌초했다. 내년부터 역사 국정교과서는 검정교과서와 혼용된다.

발단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였다. 2013년 8월 우편향, 완성도 부족으로 물의를 빚고도 좌편향된 역사교육을 바로잡겠다는 정부ㆍ여당의 의지 속에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서 철저히 외면 당하자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2014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정화를 시사했고 이후 당정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듬해 11월 황교안 국무총리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확정 발표했다. 정부는 집필진을 공개하지 않은 채 교과서 제작에 착수했고 비난 여론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 상실과 함께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도 좌절됐다.

⑧ 한일 위안부 합의, 졸속 타결로 후폭풍

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 양국이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타결했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가 10억엔을 출연해 위안부 지원이 목적인 재단을 설립한다는 게 합의의 골자였다. ‘불가역적이고 최종적인 합의’라고 양국은 못박았다.

숙원을 풀었다는 정부 평가와 달리 당사자들은 반발했다.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합의가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이유에서다. “돈으로 피해자를 우롱하는 사기극”(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라는 성토까지 나왔다. 10억엔이 법적 배상금은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방침도 반감을 자극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7월 10억엔으로 피해자를 지원하겠다며 ‘화해ㆍ치유재단’을 출범시켰고, 기존 합의를 무효화하고 차기 정부가 재협상해야 한다는 요구는 여전하다. 박 대통령이 파면 당하면서 위안부 무효화 요구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⑨ 사드 배치 속도전, 내우외환만 커져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의 한반도 배치 문제는 박근혜 정부 2년 차에 공론화했다. 2014년 6월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이 사드 전개를 자국 정부에 요청한 적 있다고 발언하면서다. 그러나 정부는 요청도 협의도 없었고 결정도 없다는 ‘3No’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다 지난해 초 북한의 4차 핵실험을 계기로 입장이 급반전했다. “사드 배치는 국익에 따라 검토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입장이 나온 뒤 한 달도 안 돼 국방부가 한미가 한반도 사드 배치 공식 협의에 착수했다고 밝힌 것이다.

이후 사드배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국방부는 작년 7월 한미 간에 합의가 이뤄졌다고 공식 발표했고 닷새 뒤엔 사드 배치 지역까지 경북 성주군으로 결정했다. 사드 배치 문제를 차기 정부로 넘겨야 한다는 야권의 요구에도 정부는 6일 밤 일부 장비를 기습 반입했다. 중국의 보복이 확산 일로인 가운데 사드 문제는 조기대선 국면뿐 아니라 차기 정부에서도 최대 과제가 돼 버렸다.

'정신적 충격', '강압 수사' 등의 사유로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출석 요구에 6차례나 응하지 않은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지난 1월 체포영장이 집행돼 서울 강남구 특검 사무실에 출두하며 소리치고 있다. 연합뉴스

⑩ 국정농단 하나하나 벗겨지며 국민 공분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태는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가져 온 결정적 사건이다. 언론보도를 통해 불거진 최씨의 미르ㆍK스포츠 재단 사유화 의혹에서 시작한 파문은 끝내 박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검찰과 특검 수사를 통해 미르ㆍK스포츠 재단 사유화에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고, 최씨 지인이었던 광고감독인 차은택씨와 최씨 조카 장시호씨가 각종 이권에 개입한 사실도 속속 밝혀졌다. 또 최씨의 딸인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부정 입학에 최경희 총장 등 학교 관계자들이 대거 동원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정씨의 승마 지원에 삼성 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 대통령과 최씨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구속됐다. 다시 시작된 검찰 수사의 칼끝은 탄핵된 박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김성환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권경성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

정에서 박근헤대통령탄핵심판 선고가 이정미헌재소장 권한대행 주

출처:http://www.hankookilbo.com/v/d7a13dced04247f39297c0fee215066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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