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문제는 미국 핵이다!
['전쟁 국가' 미국] 북핵 해결을 원한다면 미국 핵의 실체를 보라





2015년 11월 이후 중단됐던 ''전쟁국가' 미국' 연재를 재개합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핵무기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볼 계획입니다. 핵은 인류의 생존에 대한 최대 위협이며, 북한 핵은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4일 북한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발사 성공을 발표했습니다. 2006년 이후 다섯 번의 핵 실험과 이번 ICBM 성공으로 북한은 사실상 세계에서 9번째로 핵보유국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이는 북한에 대한 미국 핵 외교의 명백한 파탄을 의미합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북핵 불용'을 수없이 외쳐왔지만 그 결과는 북한의 핵 보유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1994년 제네바 기본 합의와 2005년 9.19성명 등 북한 비핵화를 위한 숱한 노력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근본 원인을 도외시 했기 때문입니다. 즉 북한의 체제 안전입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이며, 우리식으로 하면 한반도 평화체제의 확립입니다. 

미국과 북한의 역사적 적대 상황이 해소되지 않는 한, 즉 북한의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 한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군사력으로 북한 핵을 무력화 하려는 시도는 공멸을 불러올 뿐입니다. 

지난 70여 년간 미국은 자신의 핵무기는 평화를 지키는 좋은 것이고 다른 나라들의 핵무기는 평화를 위협하는 위험한 것이라는 이중기준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자들이 증언하듯이 '모든 핵무기는 절대 악'이며 '핵무기와 인류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양식 있는 세계 시민들의 보편적 결론입니다. 

특히 미국 핵무기는 세계적 불안정의 근원입니다. 미국이 핵무기를, 핵에 의한 위협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다른 나라로의 핵무기 확산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핵 보유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북핵의 뿌리는 미국 핵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며 핵무기를 초석으로 한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적으로 직시하지 않는 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비판을 바랍니다. 편집자. (☞ <'전쟁 국가' 미국> 지난 연재 보러 가기)

▲ 2010년 림팩 훈련에 참가한 미군 함정들. ⓒnavy.mil


핵무기와 함께 시작된 전후

2차 대전은 핵무기라는 유산을 인류에 남겼다. 핵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당초 원자폭탄의 개발은 나치 독일의 세계 정복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대해 사용됐다. 

미국의 원폭 투하는 군사적 필요 때문이 아니었다.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군사적 패배는 명약관화 했다. 게다가 미국의 무차별 공중폭격으로 이미 도쿄 등 64개 도시가 초토화됐다. 이런 상태에서 단 두 방의 원폭으로 수십만 민간인을 무차별 살해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진정한 속내는 또 다른 승전국 소련에 대한 무력 과시였다. 핵무기를 독점한 미국이 앞으로 만들어 나갈 세계 질서를 따르라는 엄포였다. 이후 핵무기는 미 대외정책의 핵심 초석이 된다. 

가장 강력한 재래식 폭탄보다 무려 1500배 이상 파괴력이 큰 원폭을 손에 넣은 미국은 완전히 새로운 자신감을 갖게 된다. 트루먼 등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원폭은 포커판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같은 존재였다. 어떤 패도 누를 수 있는 절대 반지, 만능의 보검이었다. 원폭은 세계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목표는 세계를 미국 주도의 단일한 경제권으로 묶어내는 것이었다.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 복원, 즉 세계 전체를 미국의 투자 및 수출시장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이 각각 유럽대륙, 중국과 동남아 지역을 자신의 배타적 경제권으로 만들려 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전체를 자신의 생활권(Lebenslaum)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전쟁 직후 미국 경제는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거대했고, 여기에 절대무기인 핵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두 핵심 지역인 독일과 일본은 물론 소련까지도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통합시키겠다는 것이 미국의 목표였다. 

소련이 지향한 것은 세계 공산혁명이 아니라 일국사회주의 건설이었다. 주로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치른 소련의 경제는 완전히 망가졌다. 게다가 핵무기를 독점한 미국을 상대로 세계 공산혁명을 시도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에서 소련은 미국을 따라갈 수 없었다. 

소련의 재건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안전보장과 경제 재건이 그것이다. 안보를 위해서는 독일을 중립화하고 폴란드 등 동유럽을 소련의 통제권 아래 두어야 했다. 독일은 1,2차 대전에서 소련을 침공한 최대 안보 위협이었으며 폴란드 등 동유럽은 역사적으로 독일 등 외부세력의 침공 경로였기 때문이다.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을 받아낼 심산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 때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의 전후 목표는 충돌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 회담에서 독일의 전쟁 배상 규모를 200억 달러로 하며 그 중 절반을 소련에 할당할 것에 합의했고,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통제권을 사실상 인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의 대일본 참전을 절실히 원했던 미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양보였다. 

미 대외정책의 핵심 초석이 된 핵무기

그러나 미국이 원폭을 가지면서 미소 협력은 없던 일이 돼버렸다.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으로 미국의 의지를 소련은 물론 세계에 관철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동아시아에서는 소련을 배제한 채 일본을 단독 점령했고, 유럽에서도 독일의 대소련 전쟁 배상을 일방적으로 중단하고 독일의 분단을 밀어붙였다. 냉전의 시작이다. 미국의 군사적 일방주의는 2003년 부시의 이라크 침공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시작된 것이다. 

▲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유일하게 남겨진 건물이다. ⓒ위키피디아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도 원폭 덕택이었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은 일본과 함께 자본주의 복원이라는 미국 전후 구상의 핵심지역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었다.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래식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었던 소련으로부터 서유럽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설령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한다 하더라도 핵무기로 격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은 지상군을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냉전이 핵무기경쟁 등 극단적 군사 대결 상황으로 치닫는(냉전의 군사화) 결정적 계기였다. 1950년 4월 미 국가안보회의는 NSC-68을 통해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의 대대적인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두 달 후 발생한 북한의 남침은 소련의 세계 정복 야욕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고, 미국의 국방비는 단숨에 3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전쟁으로 본격화된 미국의 대대적 군비 확장 및 군사적 일방주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패전국 일본과 서독의 재무장도 추진됐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의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증강됐고 소련에 대한 압도적 우위를 확보했다. 미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는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초래했다. 소련의 개입과 반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베트남 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규정한 제네바 합의(1954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군사개입에 나선 것이다. 

소련은 미국과의 피 말리는 군비 경쟁 끝에 1991년 스스로 무너졌다. 군비 경쟁의 핵심은 핵무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 학자 유르겐 브룬은 냉전에 대해 "소련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한 고의적 군비경쟁"이라고 말했다.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핵무기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례로 부시 행정부는 2002년 핵태세보고서(NPR)를 통해 러시아, 중국,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북한 등 7개 국가에 대해서는 핵 선제공격(First Strike)을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들 나라는 미국의 잠재적 적국(러시아, 중국)이거나 미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이른바 '불량국가(rogue state)'들이다. 

이 가운데 이라크 후세인과 리비아 가다피는 이미 미국에 의해 제거됐고, 시리아에서는 2011년 이후 내전이 진행 중이다. 이란과는 핵 협상이 타결됐으나 트럼프 이후 합의가 이행될지는 미지수다. 북한은 2006년 이후 다섯 차례 핵실험을 했으며 2012년 헌법 개정을 통해 핵보유국임을 선언했다. 

2002년 부시 행정부는 요격미사일금지협정(ABM)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후 (이란과 북한의 핵위협을 이유로) 동유럽과 동아시아에 미사일 방어망 건설을 밀어붙였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와 북한의 미사일 개발이 겹치면서 러시아, 중국과의 군사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구축이 자국의 핵 군사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4월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했다는 이유로 그해 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2014년 9월 향후 30년간 무려 1조 달러를 미국 핵무기 성능을 개선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그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다. 

북한 등 불량국가와 테러 세력에 의한 핵위협에 대비한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다. 그러나 진정한 속내는 러시아, 중국 등 잠재적 적국에 대한 핵 군사력의 우위 유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핵무기는 미 대외 정책의 핵심 초석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 핵은 나쁘고 미국 핵은 좋다?

최근 들어 북한의 핵 개발이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과연 그런가? 미국 핵은 평화를 지키는 좋은 것이고, 북한 핵은 평화를 해치는 나쁜 것인가? 핵무기는 미국에게 무엇인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핵무기가 있음으로 해서 세계는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인류 절멸의 위기에 처했는가?

미국의 주류 정치인과 제도권 학자들은 미국의 핵무기는 평화를 지키는 좋은 것이며 북한, 이란과 같은 무책임하고 무모한 세력이 핵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핵무기로 인해 2차 대전 이후 세계가 안정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의 많은 시민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반면 비판적 지식인과 시민들, 평화운동가들은 미국에게 핵무기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망치(hammer)이며, 세계적 불안정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핵무기를 개발했고, 유일하게 핵무기를 사용한 국가로서 이후 핵무기를 앞세운 압도적 군사력으로 세계에 대해 미국의 의지를 강요하고 관철시켜 왔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핵무기 보유를 고집하고 핵무기를 앞세운 군사주의를 계속하는 한, 이에 저항하려는 국가와 세력들의 핵무기 보유 시도는 결코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미국이야말로 세계 최대의 핵 위협 세력이라는 말이다. 

북한 핵이 국제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지금, 북한의 핵 위협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주체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미국의 주류 정치인, 제도권 학자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 북한 핵문제가 제기된 후 4반세기가 지난 지금 미국의 대(對)북핵 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국은 1990년대 초 이후 30년 가까이 '북핵 불용'을 외쳐왔지만 그 결과는 북핵 보유였다. 2006년 10월 북한의 첫 핵실험에 대한 미국 언론의 반응은 지난 60여 년간 미국의 핵정책이 불러온 결과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미국의 핵위협을 받아온 국가다.

'북핵 불용'이라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을 보유하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미국의 말과 행동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때문은 아닌가? 이런 의문들에 대해 우리 나름의 독자적인 생각과 판단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 70여 년간 핵의 역사를 통해 미국이 핵무기를 어떻게 활용해 왔고 다른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를 알아야 한다.

▲ 지난 4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오른쪽 아래 검은색 옷)이 '화성 14형'(오른쪽 위)을 시험 발사에 성공한 뒤 관계자들과 기뻐하고 있다. ⓒ노동신문


핵 억제인가, 핵 테러인가

'핵무기'는 2차 대전 후 미국 대외 정책의 핵심 초석이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게 말해오고 있다.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1953년 국무장관 취임 직후 "유사 이래 우월한 문명은 언제나 보다 효과적인 무기를 개발해냄으로써 저급한 문명에 대한 우위를 유지해 왔다"고 말했다. 

또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63년 발간된 회고록()에서 "원자탄, 그리고 이를 사용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현재 전 세계에 걸친 미국의 군사 공약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지난 2005년 채택된 미국의 합동핵작전교리(doctrine for joint nuclear operation)는 "분명히 말하건대 핵무기는 앞으로 50년간 미 군사력의 초석으로 건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의 정치가, 군인, 외교관들은 핵무기가 미 대외정책의 초석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평화'를 내세운다. 지난 70여 년간 핵무기가 세계 평화를 유지해온 근간이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억제 이론(deterrence theory)'이다. 

한마디로 말해 핵무기가 강대국 간의 (핵)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핵전쟁이 초래할 무시무시한 인명 피해를 감당할 수 없기에 강대국은 전쟁을 피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유식한 말을 쓰자면 '상호 확증 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에 의한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 때문에 전쟁을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20세기 전반 전쟁에 의한 사망자가 1억 명이었던 데 비해 (핵시대가 도래한) 20세기 후반의 전사자는 2000만 명에 불과(?)했다는 통계 수치를 제시한다. 핵무기가 평화를 가져 왔다는 것이다. 나아가 핵무기가 냉전 시대의 '긴 평화(long peace)'를 가져왔다며 이를 국제정치에서의 '핵혁명(nuclear revolu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핵이 국제정치를 안정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미국 정부와 전략가, 국제정치학자 등에 의해 널리 유포돼 왔다. 대다수 미국인은 물론 세계의 많은 시민들이 이를 신봉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스티븐 월트는 "억제 이론의 핵심적 측면은 이제 (현실로) 잘 정립돼 있다. 어떤 종류의 '핵전쟁'도 불가능하다는 점(infeasibility)이 매우 잘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최소한 그렇다고 기대해 보자)."고 말할 정도다. 

케네스 월츠라는 또 다른 저명 학자는 이란의 핵무장이 중동 정세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스라엘 핵무기에 대한 억제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70여 년간 핵의 역사는 억제 이론이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는 점을, 그리하여 전체적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핵공격 이후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때까지, 즉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을 동안 핵무기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있지도 않은 소련의 핵 공격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이 전쟁 종결을 앞당기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위 군 장성들이 핵공격에 반대했다는 사실, 전쟁 조기 종결을 위한 다른 대안들이 있었다는 사실, 일본 핵 공격의 1차적 목적은 소련 등에 대한 무력 과시를 통해 미국의 세계 패권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 등이 이미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다. 

냉전 시대가 '긴 평화'였다는 허구

냉전 시대의 '긴 평화'라는 것도 지극히 서방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냉전의 주요 무대였던 유럽에서 미국/서유럽 대 소련/동유럽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종의 평화 상태를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30년에 걸친 국제전이 벌어졌다. 

앞에서 말했듯이 미국은 핵무기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었기에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베트남전쟁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무수한 핵 위협과 핵 공갈을 했다. 6.25 발발 직후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 공격 계획을 세웠으며, 1950년 11월 중공군에 패퇴했을 때는 실제 핵 공격을 하려 했고,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핵 위협을 했다. 

1954년 프랑스군이 베트남군에 패배했을 당시 미국은 프랑스에 전술 핵무기 공격을 제안했다가 프랑스의 거부로 무산됐다. 1969년 닉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해 조기 휴전 협상을 강요하기 위해 핵무기를 탑재한 B-52 폭격기 등을 출격시키기도 했다. 이른바 '광인 이론(madman theory)'에 따른 핵 공갈이다. '나는 실제 핵 공격을 강행할 수도 있는 미친놈이니까 알아서 기어라'는 협박이다.

▲ 1965년 미군 헬기가 남베트남의 베트공 기지를 공격하고 있다.ⓒAP=연합뉴스


뿐만 아니다. 1946년 이란 북부에 주둔해 있던 소련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핵 위협을 시작으로 1956년 수에즈운하 위기, 1958년 이라크의 사회주의 정권 수립,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등 중동지역에서도 미국은 수시로 핵 위협을 동원했다. 석유자원의 보고인 중동지역에 대한 소련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냉전 시대의 긴 평화란 미국, 유럽, 소련에만 해당되는 지극히 국지적인 현상이었다.

그 긴 평화가 과연 진정한 평화였는가. 아니다. 우선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다. 당시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 정책 당국자들은 실제 핵 전쟁이 일어날 확률을 30~50%로 봤다고 한다.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40여년 뒤 "케네디 대통령이 (핵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사태 당시에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면 핵 전쟁이 벌어질 뻔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우선 베를린 위기가 한창이던 1961년, 미국은 소련에 대한 전면 핵 공격 계획을 세웠다. 소련의 핵무력을 일거에 무력화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백악관에서 핵 전쟁 분석가로 일했던 다니엘 엘스버그에 따르면 실제 핵공격이 단행됐을 경우 사망자는 6억 명으로 추산됐다. 엘스버그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다는 미국이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보다 100배나 되는 참극을 계획했다고 개탄했다. 당시 미 군부는 소련에 대한 전면 핵 공격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를 말린 것은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1983년 11월에도 미.소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그해 3월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매도했다. 또한 '별들의 전쟁', 즉 전략방위구상(SDI)이라는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천명하는 등 대대적인 핵전력 증강에 나섰다. 

그해 10월에는 소련 영공에서 대한항공(KAL) 007편이 소련에 의해 격추돼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등 미소 대립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 미국은 유럽에서 나토 회원국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에이블 아처(Able Archer, 유능한 궁수)'라는, 소련에 대한 모의 핵 공격 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호전적 태도에 극도로 긴장했던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미국에 대한 선제 핵 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고 한다. 미국에 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소련 레이더에는 미국의 핵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으로 비쳐졌고 핵 전쟁 매뉴얼에 따르면 소련은 대응 공격을 해야 했다. 다행히도 당시 레이더 책임을 맡았던 소련 관리가 매뉴얼을 무시함으로써 핵 전쟁을 회피할 수 있었다. 훗날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80년대 전반이야말로 미소 핵 대결에서 가장 위험했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이것이 평화인가. 인류 전체를 몇 번이고 몰살할 수 있는 핵 전력으로 무장한 채 대치하고 있는 불안한 휴전 상태일 뿐이다. 결코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미국은 언제나 핵 우위를 추구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냉전 시대를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이 대등한 핵 전력으로 무장한 채 팽팽하게 대립했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두 핵 강국의 대치'라는 사실은 부분적 진실일 뿐이다. 왜냐하면 1970년대 전반까지 미국의 핵전력이 소련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중반까지 소련은 미국의 핵 공격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1961년 미 군부가 소련에 대한 전면 핵 공격을 주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소련의 핵 전력이 미국과 대등해지기 전에 싹을 잘라내자는 것이었다.

미국의 독립연구자 가레스 포터에 따르면 1955년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 격차는 45대 1이었다. 1965년에는 9대 1로 그 격차가 좁혀졌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의 압도적 우위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근대 국가간 체제가 성립된 이후 최대 군사 강국과 2위 군사 강국 간의 군사력 격차가 이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1954년 프랑스의 패배로 사실상 끝이 난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쟁에 미국이 개입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압도적 군사적 우위 때문이라는 게 포터의 주장이다. 미 핵전력의 압도적 우위에 기가 질린 소련과 중국이 계속 미국에 양보를 했고, 이에 따른 행동의 자유에 도취된 미국은 남베트남에 반공 친미 정권을 세울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 후 20년에 걸친 야만의 전쟁이었고 미국의 치욕적 패배였다. 

억제 이론에 따르면 핵 보유국 간의 전쟁은 불가능하다. 핵 전쟁의 아무리 작은 피해라도 한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인명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이다. 핵의 역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0년대까지 미국은 압도적 핵 우위를 바탕으로 핵을 사용하지 않고도 소련을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켜 왔다. 어느 한 쪽이 압도적 핵 우위를 누리고 있고 이러한 객관적 현실을 상대방도 알고 있다면 굴복과 양보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것이 1945년 이후 20여 년간 미소 관계의 진실이다. 

1962년 흐루쇼프가 미국의 턱밑, 쿠바에 비밀리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압도적 핵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필사적 몸부림이었다. 미국은 핵 전력의 압도적 우위 외에도 독일과 이탈리아, 터키 등 소련의 주변에 핵무기를 배치해놓은 반면 소련은 자국 영토 외에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해외 기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흐루쇼프의 시도는 실패했고 2년 후 권좌에서 밀려났다. 이후 소련은 대대적인 핵 군비 증강에 나섰고 1970년대 중반에 비로소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미‧소의 핵탄두는 한때 무려 7만 개 가까이에 이르렀다. 

핵무기가 단지 상대방의 핵공격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인류 전체를 몇 십 번 죽이고도 남을 핵탄두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핵 우위를 통해 상대방을 굴복시키겠다는 야망', 이것 외에는 핵 군비경쟁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 또한 핵 군비경쟁의 주도자는 언제나 미국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핵군비 경쟁은 지구촌의 안전을 위협한 것만이 아니었다. 시민들의 생활과 복지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자원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1961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이임사에서 고백한 군산복합체가 바로 그것이다. 끝없는 군비 경쟁 끝에 소련은 제풀에 쓰러졌고 미국은 군산복합체가 지배하는 군사국가로 변모했다. 막대한 자원을 군사력 증강에 쏟아 부은 결과 미국의 민생은 피폐해졌고, 민주주의마저 위협당하기에 이르렀다.

미 내무장관을 역임한 스튜어트 우달은 현재 미국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핵무기 경쟁, 그리고 그 실상의 은폐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핵무기 경쟁과 그 실상의 은폐는 미국 정부가 거짓 현실을 근거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이는 정의를 왜곡했다. 또한 미국의 도덕성을 망가뜨렸다" 

출처: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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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의 인터뷰

정의당 심상정 후보를 JTBC 손석희 사장이 인터뷰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중의 한 부분이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기에 그 소감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인터뷰는 그리 길지 않게 진행이 되었고, 말미에 이런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손 :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선 가능성과는 아주 현실적으로 보면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그럼에도 출마하시는 이유는 뭐라고 여쭐까요?

이에 대한 심상정 후보의 답변은 공격적이었다.

심 : 왜 그렇게 단정하십니까?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광속으로 손석희 사장의 답변이 나왔다.

손 : 죄송합니다.

심상정 의원의 말은 이어졌다.

심 : 아직 선거일정도 확정 안됐는데 선거 다 끝난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섭섭하구요,

그러자 손석희 사장은 좀 더 확실하게 질문을 철회한다.

손 : 질문 취소하겠습니다.

그 취소를 웃음으로 받아준 심상정 후보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심 : 물론 6석의 작은 정당으로 단독 집권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민주정치하에서의 선거는 당선자를 확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죠.

어떻게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질문과 답변, 멋진 그림이었다.

우리는 너무 긴 시간 동안 1등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단순하고 저열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 뒤에 숨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과 고통과 헌신을 보지 못하는 아둔함을 저질러 왔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절대 당선 가능성이 없다. 2017년 대한민국에서 그녀는 천지가 개벽해도 당선이 안된다. 그게 현실이다.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렇게 당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왜 대선에 출마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 나왔을까? 당선도 안될 것을.. 그냥 걔들은 원래 그런 거야.

여기서 사고는 멈춘다. 손석희는 이런 사람들의 질문을 대신해 준 것뿐이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무례하다. 한 사람의 의도와 행동을 비웃는 뉘앙스가 담길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흙을 한 지게씩 날라서 산을 옮기겠다고 나서는 우공을 비웃는 마을 사람들의 눈길이 담기기 때문이다.

그 질문이 무례한 질문이라는 것을 아는 손석희는 그 질문에 대해 심상정이 무슨 답변을 하건 사과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과할 일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최고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과할 것을 각오하고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이런 질문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해서는 안될 무례한 질문이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의문을 대신 나서 물어봐주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사과를 한다.

거기에 아직 선거일정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왜 결과를 단정하냐는 항변, 섭섭하다는 항의가 들어오자 질문 자체를 취소하겠다고 한다. 섭섭한 게 맞다. 비록 선거일정이 확정되건 말건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례하지 않냐는 항변에 “섭섭”이라는 어휘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모든 시청자들에게 당신들의 의문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무례한 것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심상정의 해설이 이어진다. 사실 이 인터뷰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당선 가능성도 없는데 왜 자꾸 나오냐는 질문에 대한 심상정의 답변은 민주주의 하에서의 선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가를 아주 정확하고 간명하게 보여주는 멋진 연설이었다.

선거과정에서 유권자들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가 쏟아져 나오고 뒤섞이면서 큰 방향이 결정된다. 그래서 당선자는 결국 그 선거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모든 이해와 욕구의 총합이 된다.

즉 선거의 당선자는 선거 과정에서 유권자들이 밝힌 모든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큰 방향으로 모아내고 그걸 수행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게 민주 공화국이 선거를 치르면서 일을 해 나가는 제대로 된 방식이다. 당선자는 당선되었다고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낙선자들과 그 낙선자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하며, 낙선자는 낙선했다고 무관심하게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당선자에게 설득하고,  그 요구들이 관철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당선 가능성이 없는데 왜 출마하는가? 출마하는 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의견 개진의 일환이며, 여기에 이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회적 설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심상정은 왜 출마했는가?

헌정사상 최초로 친노동 개혁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라고 답을 한다. 그것은 심상정이 당선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상정과 정의당과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뜻은 당선자가 누가 되었건 받아 안아줘야 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그 본질은 스스로 자주 깨우쳐 줘야 한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힘이고 다수결이 장땡인 제도가 아니다. 왕과 귀족이 권력을 독점하고 자신들만의 이해관계에 맞춰 국가를 운영하던 원시적인 제도에서 벗어나 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의 이해관계, 소수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모두 담아내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약자 보호의 원칙”이 대두되는 문명화된 정치제도라는 것이 본질 아니었던가.

선거는 그런 민주주의의 본질이 구현될 때에만 민주적으로 가동된다. 그저 승자 독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파시즘이 될 뿐이다.

멋진 인터뷰를 보여준 손석희 사장님과 정의당 대선 후보 심상정 의원에게 감사를 드린다.


출처:http://murutukus.kr/?p=13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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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이 대통령이 되어선 안되는 이유

요즘 들어 많은 생각을 한다. 누군가를 비판을 넘어 비난하는 글, 누군가를 욕하는 글, 누군가에게 뭘 하라는 글, 누군가에게 뭘 하지 말라고 말리는 글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 이런 걸 자꾸 쓰면 내 자신이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어서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해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한들 그 사람이 듣겠나 싶어서 이기도 하다. 다만 그 대상의 행동이나 말이 이 사회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할 경우로만 국한해서 욕을 해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다. 나같은 백수 글쟁이가 욕을 한들 그게 말려지지도 않겠지만, 사람들에게 최소한 이건 아니라고 얘기는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걸 못 지킬 때가 있다. 너무 말도 안되는 일을 봤을 때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다.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한 반기문씨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하고자 하는 모양이다. 여기에 나는 왜 그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면 안되는가를 간단히 밝히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제 그만 쉬시라는 얘기다.

반기문은 거의 천재급으로 공부를 잘했다. 충북 음성 출신으로 충주고를 나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를 패스하고 그 때부터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는데, 초딩 때부터 쟁쟁하다.

44년생이니 일제 때 태어난 사람인데 (어익후, 장인어른하고 동갑이시네.) 초딩 6학년 때 유엔 사무총장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헝가리 사태에 유엔이 개입하길 권하는 내용이었다고 하는데, 그 때부터 유엔 사무총장이 되고 싶었나 보다. 그 후 충주중 충주고를 거치면서 미국 적십자에서 주최하는 영어경시대회에 우승하며 미국을 방문하게 되기도 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충주고 수석 졸업, 외무고시 차석 합격, 외교관 연수 수석, 최소 5개국어 능통.

대단한 사람이다. 잘 알겠습니다. 알겠고요.

결국 외교부 소속 공무원으로 승승장구 하다가 참여정부 시절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참여정부 내에서 잡음을 꽤 일으켰다. 이 부분이 많이 보도가 되질 않았는데,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매우 심하게 반대해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하고 트러블도 있었고, 대놓고 항명에 가까운 짓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기존의 정전협정(북한과의)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를 심도있게 검토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 남한에 제안까지 했던 것을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이 씹어 먹은 적이 있다. 그냥 자기 생각에 평화협정이라는 건 북한의 전술이라고 판단했다는 소문인데, 일개 장관이 미국의 그런 중요한 제안을 대통령에게 보고도 안하고 묵살한 것은 무슨 말로 변명을 해도 해명이 안될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보수 쪽에선 북한의 정체를 잘 아는 뚝심있는 장관이었다고 칭찬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남북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자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개새끼 소리가 절로 나올 만행이기도 하다.

또 베트남에 모여 있던 탈북자 486명을 당시 참여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결정을 무시하고 공개적으로 일거에 입국시키면서 북한을 자극한 적도 있다. 마찬가지다. 조갑제 선생 같은 사람은 쾌거라고 칭송하겠지만, 일개 장관이 NSC의 결정을 무시한다는 것은 대통령을 우습게 봤다는 얘기밖에 안된다. 이거 징계성 경질 감이다.

그래서 잘 알겠는데,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될 이유가 뭘까? 보수적인 대북관을 가지고 있어서? 위계질서를 무너트리고 대통령에게 개겨서? 아니다.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보수계층에서는 환영받는다니까. 그 사람들이 노무현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잘 알지 않는가?

누구나 봐도 동의할만한,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일단, 유엔 사무총장이 문제다. 이 자리, 우리나라 노인네들이야 세계 대통령이네 하면서 제일로 높은 자리 아니냐고 우오오~~ 하는 자리이긴 하지만 반기문이 왜 이 자리에 앉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 창피한 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제3세계나 약소국에 배정하는 특혜성 취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유엔에서 역량있는 리더가 나와 세계 정세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미국 등 초강대국이 바랄까? 그렇지 않다. 다분히 상징적인 자리를 배정해 준 것 뿐이다. 일단 이 자리가 결코 대단한 자리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 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게 되면 은근히 많은 각 나라의 정보를 알게 된다. 그래서 유엔총회는 중립성과 독립성을 위해 사무총장은 퇴임 후 소속 국가의 정부직책을 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다.
이걸 정면으로 무시하게 된다. 무식한 나라 인증이지 뭐. 가뜩이나 무당 좋아하는 대통령 때문에 국격이 바닥에 처박혔는데, 이제 반기문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면 땅파고 내려가야 된다.

뭐 OECD에서도 강퇴될 지경인데 막보기로 나가자는 거라면 그래 보시등가.

하지만 나는 창피해 얼굴을 못들 지경이다.

그 와중에 그런 상징적인 자리나마 잘 했는가를 따져볼 수 있겠다. 외신의 평가에 의하면 그냥 없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건 단순한 무능의 문제가 아니다. 상징적인 자리에 앉아 스스로 세계 평화를 위해 뭔가를 찾아서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지만 국제적으로 분쟁이 발생한 지역의 평화를 위해 중재를 한다거나 뭔가 일을 했어야 되는데 “보이질 않았다”라는 거다.

이 문제는 그의 인생의 특성과 결합하면서 가장 심각한 결격사유로 작동한다.

다시 반기문의 일생으로 돌아가 보자. 암울한 시절의 대한민국의 국민학생(초등학생도 아니다.)이 유엔 사무총장에게 편지를 쓴다. 뭘 의미할까? 수퍼 범생이라는 뜻이다. 주변의 동급생들은 그를 얼마나 재수없게 봤을까? 뭐 그래도 좋다. 세계 평화가 걱정되어 잠이 안 올 정도로 조숙한 어린아이였을 수도 있겠지.

고교 수석졸업. 외무고시 차석 합격, 외교관 연수 수석. 5개국어. 이런 것들은 반기문이 어떤 인간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걸까? 주어진 시스템에 가장 잘 적응하는 사람. 머리 좋고 착실한 우수한 학생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 어떤 인간인지 잘 알지 않는가?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다. 재학중에 고시 패스한 김기춘 할배. 수석 아니면 안 한다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황태자 소리 듣다가 사라진 박철언. 대한민국 3대고시를 모두 패스하고, 그것도 사법 최연소, 외무 차석, 행정 수석 합격의 금자탑을 쌓았다가 딸에게 미안하다 외치고 사라진 고승덕. 그 밖에도 많다. 공부 잘하는 건 그저 특정한 부분의 지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뿐, 그게 사람의 훌륭함을 보장하지 못한다. 내 경험으로는 그건 오히려 오만과 외골수의 보증수표로 작용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거기다가 학교 마친 이후로 인생의 방향을 한 번도 바꿔 본 적이 없는 착실한 관료였다. 이건 뭘 의미할까?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전국의 모범생들을 몽땅 싸잡아 비하하는게 결코 아니다.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그 가치가 꽤 큰 가치고 이루기 힘든 가치라면, 그의 인생은 실패와 일탈로 범벅이 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한가지 직장에서 근속하기 힘들다.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가 없고 주어진 가치를 충실히 따라가는 인생이라면 모범생이 되고 관료가 되기 적합하다. 평생 관료직을 성실히 수행하고, 기름장어, 유만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흠잡힐 핼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 원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주어진 시스템에 가장 잘 적응하고 그 시스템이 보장하는 최고의 지위를 갖는 것 뿐이다.

지금의 반기문에게는 그 최고의 결실이 바로 대통령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통령은 관료가 아니다.

대통령은 가장 예민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정치인이다. 정치인과 관료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정치인은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고 관료는 정해진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다. 방향을 설정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추구하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관료에게는 그런거 없어도 된다. 흠 잡을 데 없는 처신과 주어진 시스템에 최대한 잘 적응하는 미끄러움만 있으면 된다.

반기문은 정치인이 못된다. 우수한 관료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것도 아주 우수한 관료는 못된다. 시키는 일만 할테니까.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분쟁 지역 등에 가서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은 이유가 뭘까? 일단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을 하지 못한다. 왜냐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없고 어떤 상관이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에게 어떻게 해야 되냐고 뒤로 물어 보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거기다가, 괜히 끼어 들어서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 한 것이다. 기름장어 처신이 필요한데 왜때문에 뭐하러 그런 골치아픈 일에 나서겠는가?

Nowhere man.. 정말로 반기문에게 딱 들어 맞는 별명이다.

자, 다시 생각해 보자.

반기문에게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맡길 수 있을까?

가뜩이나 대통령이 하라는 일은 안하고 맨날 관사에 처박혀 드라마나 보다가 탄핵 당할 판인데 후임을 “아무 곳에도 없는 사람”을 뽑는다고?

반기문은 대통령이 되어선 절대 안될 사람이다. 이거, 내가 쥐꼬리 만한 글쟁이로서의 명예를 걸고 얘기한다. 반기문이 대통령이 되면 우린 탄핵 한 번 더 해야 되는 상황이 올거다. 전세계에 대한민국은 무슨 대통령을 뽑을 때마다 탄핵을 하냐고 웃음거리가 되는 상황이 온다는 얘기다.

이 명확한 얘길 글로 설명을 해야 되는 것 자체가 암담한 일이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오늘은 이 정도로 줄이고, 나중에 좀더 확실하게, 좀더 날카롭게, 좀더 칼같이 더 찔러 주기로 하자. 고령 드립만 안 쳤어도 이렇게 까진 안했을 거다.

그래도 화가 나서 그냥 올린다. 줸장..


출처: http://murutukus.kr/?p=13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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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현재 심기는 어떤 것일까. 며칠 전 한광옥 비서실장이 “상당히 침울한 상태”라고 전했지만, 그건 그 나름 ‘심기 경호’ 차원의 얘기였으리라. 그 전에 읽은 한 칼럼은 박 대통령을 어려서부터 지켜봤다는 원로 정치인의 말을 빌려 이런 관측을 내놓았다. “국민 앞에서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냥 있지 않을 거다. 골방에 들어가 혼자 울면서 보복을 다짐하고 있을 거다.”

8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세균 국회의장과 ‘최순실 정국’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 본관에 들어선 가운데 야당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포커스뉴스

그 뒤로 진행된 일들을 보면 이 원로 정치인이 상당히 잘 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지난 8일 국회의장을 전격 방문해 “여야 합의로 추천한 분을 총리로 임명해 실질적으로 내각을 통할하도록 하겠다”면서도 2선 후퇴는 언급하지 않았다. 앞서 두 차례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국민의 눈높이에 전혀 미치지 않았다. 많은 국민이 요구하는 하야·퇴진은 말할 것도 없고, 2선 후퇴도 그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같다.

이것이 사상 초유의 비선 실세 국정농단 사태를 저지른 장본인의 모습이다. 궁금해지는 건 좀 더 본질적인 문제, 즉 그가 무슨 생각을 갖고 정치를 하는 것일까이다. 만약 그런 게 있기나 하다면, 정치인으로서 그의 철학과 인생관은 무엇일까. 이 궁금증에 대해선 일찍이 시사평론가 김어준이 촌철살인 정리를 한 바 있다. “그 사람들(친박연대) 모아놓고 박근혜의 철학이 뭔지 구체적으로 쓰라고 시험 쳐봐. 전원이 한 페이지도 못 넘긴다. 쓸 게 없어.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야 하며, 국가는 번영해야 하고, 외세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딱 세 줄 쓰면 끝이야.” 사람들은 박근혜를 긴 세월 알고 살아왔지만 그가 정작 어떤 정치인인지는 아는 게 없었다. 인지도가 사실상 100%인 현역 정치인이 이렇다는 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의 정치철학이나 논리는 상당 부분 미지의 영역이었다.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이 ‘미지의 영역’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풀렸다. 박 대통령이, 이미 오래 전부터 최태민 목사와 딸 최순실의 꼭두각시나 아바타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실존적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주체적 존재가 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가 장관들의 대면보고도 받지 않고 최순실 등 비선조직에만 의존해온 까닭도 드러났다. 한마디로 그럴 깜냥이 아니었던 거다.

하늘이 공평하다 해야 할까. 그런 역량은 주지 않은 대신 권력에 대한 뜨거운 의지를 내렸다. 이것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일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큰 영향을 입었음을 스스로 여러 차례 밝혀왔다. 대통령 후보 시절 정치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역시 저희 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돼요. …결단을 내릴 때 고뇌하는 모습, 아버지가 가진 역사관, 안보관, 세계관 이런 것이 말씀 중에 나오니까 들으면서 배웠습니다.” 다른 자리에선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지난 3월14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선거, 민주주의를 키우다’ 특별전시회에서 관람객이 박정희 대통령 선거 포스터를 보고 있다. ©포커스뉴스

박 전 대통령과 그는 생물학적 부녀관계를 넘어 정치·사상적 사제관계다. 정권의 명운이라도 걸린 듯 숨 가쁘게 추진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도 열쇠는 아버지였다. 나는 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들고 나와 재미를 본 경제민주화 공약을 당선 뒤 싹 뭉개버리는 것을 보며 ‘그 스승에 그 제자’임을 통감했다. 박정희는 유신의 명분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대사기극을 벌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사상적으로도 일관성이 없었다. 일제 말에는 혈서 맹세까지 하며 관동군 중위가 된다. 해방 뒤에는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그 좌경화조차 정치적 신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다”고 국내 유일의 ‘박정희 평전’을 쓴 전인권 교수는 진단했다. 쿠데타로 집권해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다 암살당했다. 그를 평생 이끈 것은 국가·민족이란 대의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권력 확대를 위해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는 처세의 달인이었다.

지지율 5%인 대통령과 그 친부 대통령의 인생관을 살펴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 대통령이 스스로 권력욕을 꺾고 고분고분 물러날 가능성은 0%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남긴 나쁜 유산 탓이다. 그는 오늘도 골방에서 막판 뒤집기에 골몰할 것이다. 자기 인생관과 철학은 없을지언정 권모술수의 능력만큼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그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논객닷컴=김철웅]

   김철웅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국제부장,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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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kcu57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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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nongaek.com/news/articleView.html?idxno=2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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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 선포를 앞두고 이 사실을 김일성에게 두 차례나 예고하고 또 그 배경까지 친절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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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전 대통령은 김일성에게 '한민족의 동지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 마지 않는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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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은 김정일과 4시간 동안 밀담을 나눈 뒤 "김 위원장은 약속을 지키는 믿을 만한 파트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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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 대학교로 출근하던 중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답변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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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씨의 회고록 내용을 가지고 또 다시 새누리당의 '종북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병우와 최순실 게이트, 즉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우순실 게이트'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지율이 폭락하자 위기 탈출용 카드로 낡고 더러운 수법을 또 꺼내든 것입니다. 

즉, 있지도 않는 빨간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저것이 빨갱이'라며 국민을 현혹하는 것인데 어쩌면 우리가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새누리당의 의도에 말리는 것 아닌가 싶어 주저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북한 권력과 대한민국 대통령, 그리고 주요 정치인들이 그동안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제대로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박정희는 왜 김일성에게 유신 선포를 미리 알렸나

새누리당의 뿌리와 줄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박정희와 전두환입니다.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후 지독한 독재로 권력을 연장해 온 이 두 사람은 '흔히 북한 권력과 강경하게 대치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충격적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기획한 두 번째 쿠데타인 '10월 유신체제 선포' 직전의 일입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는 이후 3번이나 더 대통령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 욕심대로 고치는 등 국헌 문란행위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종국에 벌인 일이 유신체제 선포였습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 국민이 직접 뽑던 대통령을 '박정희 지지자로만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 선거로 뽑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그 대통령 후보로 나온 이는 박정희 혼자였습니다. 

유신헌법이 무엇보다 악랄한 것은 이 잘못된 제도를 비판하거나 또는 개정하라고 요구하는 행위 자체를 탄압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민간인이라 할지라도 군사법정에 세워 최소 15년 이상 감옥에 넣겠다는 것, 전형적인 독재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신체제 선포는 박정희가 1972년 10월 17일 갑자기 텔레비전에 나와 국민에게 위협하듯 발표하기 전까지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몰랐으나 먼저 알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 북한의 김일성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 선포를 앞두고 이 사실을 북한의 김일성에게 두 차례나 예고하고 또 그 배경까지 친절하게 설명한 것으로 기록에서 확인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당시 박정희가 김일성에게 전달한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그야말로 '충격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72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을 통해 북한 김일성에게 전달된 메시지 내용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며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유신체제 선포를 미리 예고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말은 사실상 '북한의 김일성이 원하는 방식의 통일을 하겠다는 약속과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김일성에게 무엇을 약속했나?

그 증거는 박정희가 쓴 메시지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박정희는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고 썼는데, 엄밀히 이야기하면 이 당시 대한민국 국민은 통일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북한이 원하는 통일 방안과 다른 이른바 '흡수 통일'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박정희가 말하는 것처럼 '남측 다수가 반대한다는 통일은' 바로 북한이 말하고 있는 '연방제식 통일 방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둔 채 남북 총선거로 하나의 정부를 선택하자는 취지의 북한식 통일 방안, 이것을 남측 다수가 반대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질서를 먼저 구축해야 하니 유신체제의 선포가 필요하다는 설득이 담긴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이번 송민순씨 회고록 파문과 관련하여 '내통' 운운하는데 그 논리라면 1972년 박정희가 김일성에게 보낸 이 메시지야말로 진정한 내통 행위가 아닐까요? 

북한의 연방제 통일 방안을 지지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사항으로 사법처리 대상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보안법으로 무수히 많은 이들이 감옥을 갈 때 검찰의 공소장과 법원의 판결문에는 '북한의 연방제 통일 방안을 토론하고 이를 지지했다'며 유죄의 근거로 삼곤 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가 김일성에게 연방제 통일방안으로 통일할 것을 다짐하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러한 북한의 연방제 통일 방안을 박정희와 김일성이 공감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또 있는데 그중 하나는 1972년 9월 22일 북한 정준택 부수상이 김일성의 지시로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당시 대통령에게 남북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발언에서도 확인됩니다.

정준택은 차우셰스쿠에게 "우리가 잘 싸운다면 박정희가 남북연방제를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며 1972년 7. 4 남북공동성명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언급한 것은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수용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보다 더 심각한 행위를 한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이었습니다. 1985년 10월 15일,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의 김일성에게 보낸 친서 내용을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보냈다면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두환의 밀명을 받고 당시 김일성을 면담했던 박철언(노태우 정부 당시 정무장관)씨가 쓴 자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는 친전을 김일성에게 보냈습니다.

"(김일성) 주석님께서는 광복 후 오늘날까지 40년에 걸쳐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모든 충정을 바쳐 이 땅의 평화 정착을 위해 애쓰신 데 대해, 이념과 체제를 떠나 한민족의 동지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 마지 않습니다."

여기서 또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광복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0년에 걸쳐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라는 대목입니다. 새누리당 식으로 해석하면 이 문장은 '1950년 벌어진 한국전쟁마저도 김일성이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한 행위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정현 새누리당과 대표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더구나 전두환 대통령이 '한민족의 동지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 마지 않는다'며 김일성에게 바친 이 헌사에 대해 이후 김일성이 '평양에 자주 오시라'며 화답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이야기가 아닐까.

박근혜와 김정일의 4시간 밀담, 이것도 같이 조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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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의원의 2002년 방북 사진들. 이 때 박근혜 의원은 김정일 위원장이 보낸 전용기를 타고 방북하여 그를 독대했으며, 방북후 김위원장에 대해서 약속을 잘 지키는 합리적인 지도자라는 식으로 칭찬했다. 만경대와 주체사상탑에도 갔다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고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우습게도 이 사진을 근거로 중국의 어느 언론에서는 박근혜 의원을 김정일 위원장의 부인으로 소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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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저는 이러한 박정희와 전두환의 행위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독재 권력 하에서도 남북 대화를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었음을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화적 노력을 가지고 누가 한 것은 문제없고 반면 다른 권력에 대해서는 때만 되면 용공 덧칠용 물감으로 가져다 악용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님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누리당과 이정현 대표에게 충고합니다. 지금 우리가 밝혀야 할 것은 우병우와 최순실이 어떻게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지, 그리고 백남기 농민을 죽음으로 내몬 공권력의 잘못을 드러내어 국민의 분노에 화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력형 게이트를 파묻고자 일정한 시기에 있었던 남북 관계에서의 외교 통치 행위를 두고 사실과 다른 주장으로 본질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난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더구나 많은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지난 2002년 5월 당시 일개 야당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4시간 동안 독대하고 돌아온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 당시 4시간 동안 속기사 한 명만 두고 김정일과 박근혜 대통령이 밀담을 나눴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논란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새삼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김정일을 만나고 돌아온 박근혜 당시 의원이 전 국민을 상대로 말한 김정일에 대한 찬사입니다. 예를 들어 "김정일 위원장은 우리 정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며 "김 위원장은 약속을 지키는 믿을 만한 파트너"라는 등등의 칭송 발언은 지금도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런 행위 하나 하나를 따지고 보면 도대체 새누리당과 이정현 대표가 말하는 종북세력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비열한 색깔론, 이제 국민이 심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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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가 1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송민순 회고록' 관련 긴급 의원총회에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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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과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앞서 민주정부 10년은 일본 극우 권력의 도발 행위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과의 관계에서는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이 공동 번영과 평화를 지켜나가자고 설득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앞서 두 정부와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독도 문제에 대해 이명박은 "지금은 곤란하다.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로 일본에게 화답했고, 박근혜 정부 역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한을 돈 10억 엔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반면 북한과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 내몰며 국민에게 극심한 전쟁 스트레스를 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현명한 국민이 선택해야 합니다. 일본의 부도덕한 행위에 단호히 대처하면서 북한과는 평화적인 해법을 찾는 정치 세력을 지지할 것인지, 아니면 일본 극우 세력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반면 북한과는 전쟁이나 한판하자며 온 나라에 사드 배치나 강요하는 정치 세력을 선택할 것인지. 

결국 오늘날 제기되는 이 논란의 모든 귀결점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있지도 않은 빨간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매번 반복하는 새누리당의 종북 공세에 대해 이제 유권자인 국민이 속지 않을 것을 기대합니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 새누리당에게 줄 것은 단호한 심판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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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햇볕정책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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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개발이 퍼주기 때문이라고? 그럴듯하다. 알고 보면 퍼주기론은 보수 세력이 개발한 가장 강력한 선동이다. 근거 없는 거짓말이다. 하나하나 설명해 보자.

넓은 의미의 경제협력은 세 가지로 나뉜다. 인도적 지원, 민간차원의 경제협력, 그리고 정부차원의 협력.

인도적 지원을 퍼주기라고 하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그걸 갖고 뭐라고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모든 선진국은 인도적 지원을 일반적인 경제 제재 대상에서 제외한다.

다음으로 민간의 경제협력. 마찬가지로 퍼주기라고 하지 않는다. 남북경제협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시작한 게 아니다. 노태우 정부의 1988년 7.7 선언으로 시작한 것이다. 남북경제협력 통계도 1989년부터 시작된다. 북핵문제도 그즈음부터 시작된 것이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처럼 말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것이다. 북핵문제가 불거지고, 선제폭격론이 제기되던 1994년 그때 집권당이 누구였는가. 신한국당이다. 그때 남북교역이나 남북 위탁가공을 중단했나? 아니다. 경제협력이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중단된 적은 없다.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된다.

그리고 북한에 임금 주고 우리 기업이 수백 배 돈을 벌어 오는 것이다. 그 임금이라는 것도 핵개발 자금으로 전용되고, 그런 것이 아니다. 개성공단에서 주는 임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정부차원의 경제협력. 북한에 쌀을 줬다. 그런데 강연을 다녀보면, 이 쌀을 그냥 공짜로 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아니다. 그거 차관으로 준 것이다. 10년 거치, 20년 분할상환. 우리가 제3세계 국가에 공적개발원조(ODA)할 때 차관으로 줄 경우와 똑같은 조건이다.

빌려준 것은 받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 때 10년 거치 기간이 끝나고 분할상환 기간이 돌아왔다. 그래서 나도 칼럼을 썼다. 빌려준 돈 받는 것도 정부의 능력이라고. 통일부가 그냥 독촉을 하긴 했다. 팩스 한 장 덜렁 보내서 돈 갚으라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받나? 상담을 하고, 상환능력이 있는지 알아보고, 기간을 재조정하든지, 아니면 광물로 받든지 해야지.

우리가 2007년에 경공업 원자재를 차관으로 북한에 준 적이 있는데, 그때는 광물로 2번 상환을 받았다. 북한이 준 아연괴를 시장에 팔아서, 그 대금을 국고에 납입했다. 쌀 차관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공짜가 아니란 말이다.

철도나 도로연결, 개성공단의 인프라투자. 그건 다 우리 기업들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때도 돈이 북한에 들어가지 않는다. 현물로 간다. 철도 레일, 침목, 아니면 도로포장재 같은 것을 물건이 들어가서 실제로 공사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핵개발에 쓸 수 있겠나.

지금까지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현금을 북한에 준 적이 없다. 딱 한번 예외가 있다. 이산가족들이 더 많이 상봉하기 위해 화상상봉을 하기로 했을 때 영상장비를 우리가 제공해야 하는데(이산가족상봉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이걸 전략물자로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야당인 한나라당에 양해를 구하고, 영상장비를 중국에서 구입할 수 있게 현금을 줬다. 한나라당도 당연히 동의했다. 이산가족 상봉을 못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이게 퍼주기론의 실체다.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냥 거짓말이다. 악의적인 선동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저쪽은 단순한데, 우리는 길게 설명해야 하니, 설득력에서 떨어진다고. 그래서 '퍼주기' 같은 쉬운 말을 만들어야 한다고.

난 다르게 생각한다. 선동과 이성의 대결이다. 선동이 통하는 사회는 어딘가 고장이 난 것이다. 언론이나 의회나 혹은 공론의 장에서 걸러지지 않고 선동이 반복되는 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언젠가 칼럼을 쓰면서, '어둠이 내리면 늑대가 울부짖는다'고 쓴 적이 있다. 다시 선동이 판을 친다. 병이 깊은 것이다. 치료가 필요하다.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출처:http://www.huffingtonpost.kr/yeonchul-kim/story_b_121491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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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 온 국민을 경악의 도가니에 빠뜨린 흑산도 집단 성폭행 사건이 솔직히 내겐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섬마을은 아니지만, 시골 오지의 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았던 교사로서, 또 이 지독한 가부장 사회의 남성으로서 나는 그러한 불상사가 빚어진 인과관계라든가 그 야만적 행위의 전모가 어제 본 영화처럼 내 머릿속에서 생생한 그림으로 그려진다.

성폭행 ‘학습’시키는 사회 

가해 남성들이 그 여선생님을 술자리로 끌어들인 심리적 배경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고백하건대, 동시대를 살아가는 중년 남성인 내게 그 야만적인 남성 지배적 문화는 사실 익숙한 풍경이다. 그리고 교사이기에 나는 그 여선생님이 그 술자리에 합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안다.

폐쇄적인 지역 특성상 사회적 관계망에서 고립된 이방인으로서, 오지에 근무하는 교사가 식당에서 만난 학부모가 술을 권할 때 반응할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없다. 그가 20대의 여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남성 동물들은 바로 이러한 존재 조건상의 역학관계를 악용하여 그 극악무도한 폭력을 저지른 것으로 본다.

João Carlos Magagnin, triton summer, CC BY https://flic.kr/p/72ffBE

João Carlos Magagnin, “triton summer”, CC BY

건강한 사람이면 누구나 성적 욕망을 품지만, 강간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성욕의 본질은 철저히 관계 지향적이다. 나의 욕구 충족은 상대의 욕구 충족을 전제로만 이루어진다. 파트너가 희열을 느낄 때 나도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데, 그걸 보며 쾌감을 느낀다면 이는 정신병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 남성에게 이 정신병은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 사회는 강간공화국이라 하겠다.

이 사회가 강간공화국인 증거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도처에 널린 룸살롱이나 마사지 시설, 그리고 노래방 보도로 상징되듯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퇴폐향락 문화가 우리 일상 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널려 있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강간과 이게 무슨 상관있냐 할 것이다. 밀접하게 관련 있다. 이 막장 메커니즘 속에서 강간이 ‘학습’되기 때문이다.

순박함의 이면, 폭력의 일상성 

흑산도에서 일어난 불상사를 보면서 내 초임 시절에 겪은 일이 떠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30분을 걸어가야 닿을 수 있는 시골 학교였는데, 여느 농촌 주민들이 그러하듯 학부모들은 대체로 순박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순박함의 이면에 가부장적 폭력성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표출되고 했다. 그런 풍경이 때때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들의 일상은 농사일과 술판으로 점철된다. 하루의 힘겨운 노동을 알코올로 보상 받아 연명해 가는 이들의 소외된 삶은 에밀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에 나오는 딱 그 풍속도이다. 그리고 술판에는 반드시 ‘여자’가 동반되었다.

목로주점과 달리 이 촌락에선 ‘여자’가 너무 쉽게 공수된다. 야간업소에선 물론이고 벌건 대낮에 식당에서 술 마시다가도 전화 한 통이면 짧은 치마 입은 아가씨들이 커피를 들고 나타난다. 이른바 ‘다방 레지’다. 커피배달이지만 커피는 후진 욕망의 배설을 위한 매개체일 뿐, 고객의 관심은 온통 ‘여자’의 치마 속에 모인다. 거기서 빚어지는 행위나 서사구조에 대해 사실적 문체로 그려내기는 너무 불편하다. 그 속성에 대해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성폭력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외딴 섬, 순박한 섬마을 사람들의 이면에 숨겨진 폭력성을 다룬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장철수 감독, 2010)

아름다운 작은 섬 ‘무도’, 순박한 섬마을 사람들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 인간의 이중성과 폭력성을 다룬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장철수 감독, 2010)

폭력의 집단성, ‘동참’을 권하는 사람들 

여성의 수치는 다중에게 노출된 점에서 일대일로 벌어지는 강간보다 어쩌면 더욱 치욕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폭력의 성격은 담합에 의한 집단 괴롭힘이었고, 나를 포함해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남성은 공동의 가해자였다.

그들은 내게 동참을 권했고 나는 얼굴을 붉히며 거부했다. 그런 나를 숫기가 없니 어쩌니 했지만, 그 시점에서 내 얼굴이 붉어진 까닭을 그들은 모른다. 타오른 의협심에 술판을 확 엎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 내가 그들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자리만 벗어나면 그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엔 선량한 이웃이 룸살롱 같은 곳에서 크고 작은 성폭력을 버젓이 일삼는 페르소나는 ‘학습의 산물’이라는 논리로만 설명이 된다. 강간공화국의 남성들에게 비싼 돈 주고 술을 먹는 것은 성폭력을 저지를 권한을 구매한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의 설명방식을 빌리면, 성폭력은 비싼 술값의 등가물인 것이다.

술 알코올 욕망

내 아내가 아닌 묘령의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품는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그것은 부적절한 상상력이 아니라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중요한 것은 그 상상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이고, 내 아내도 똑같은 상상력을 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적 욕망의 자기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여성을 상대로 내 욕망을 강제로 실현하는 것은 엄연한 ‘강간’이다. 더구나 그 여성은 사회적 약자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말 못할 사연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을 여성에게 성적 학대를 일삼는 행위는 사디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 야만적인 사디즘으로 여성뿐만 아니라 자신도 망가져 간다. 강간의 정신병리는 이렇게 학습된다.

소년 시절, 우린 모두 ‘일베’였다  

돌이켜보건대, 강간의 학습은 우리 어릴 때부터 이루어져 왔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성욕이 한창인 사춘기 시절 우리는 ‘성행위’를 ‘여자 따먹기’의 의미로 학습했다. 영어로 표현하면, ‘making love’도 ‘sleeping with’도 아닌 ‘fucking’이 성에 대한 우리 통념의 전부였다. 이런 학습이 이루어진 소년에게 여성은 오직 ‘따먹음’의 대상이었다.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품는 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성욕을 금기시하지 말고 성에 대한 담론을 공론화시켜 건강한 성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성 문제를 금기시하니까 음지에서 그릇된 정보와 인식을 공유하며 왜곡된 성 의식을 학습한다.

성교육을 고리타분하게 정절이니 순결이니 하는 정신교육으로 가지 말고, 이를테면 미래에 성인이 되어 섹스할 때, 여성을 ‘따먹음’의 대상이 아닌 상호존중과 배려에 기반을 둔 의기투합의 상대로 인식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사랑 남녀

다행히 나보다 젊은 이삼십대의 청년이나 청소년은 우리 때와 같은 왜곡된 마초이즘이나 가학적 성 의식으로부터 덜 오염되어 있는 듯하다. ‘일베’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사실 우리 때는 성적 감수성에 관한 한 거의 대부분이 일베였다. 지금 청년들 사이에서 일베가 찌질이 취급 받는 자체가 젊은이들의 성 의식이 진일보했음을 말해준다.

선생님의 용기에 박수를 

나는 섬마을 남성들이 특별히 악한 자들이어서 그런 야만적인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중 한 인물은 과거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경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우리에게 충격을 더해주고 있지만, 이 사실로 인해 이 사건 자체의 심각성이 퇴색될까봐 우려한다. 룸살롱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여성학대와 성폭력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성폭행 범죄의 발발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든 상존해 있다.

성범죄를 줄이기 위해 왜곡된 성 산업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이번 사건의 가해 남성들이 보여준다. 강간 전력이 있는 자를 포함해서 세 명의 가해자들이 멀쩡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평범한 성인 남성들이다. 강간이 성욕 배설 기회의 결핍이 아니라 왜곡된 섹스 체험학습의 결과라는 것은 문제의 섬마을이 성 산업과 관련하여 어떤 곳인지를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폭력 공포 여자 남자 증오 혐오

한국에서 ‘업소 아가씨’는 그저 ‘상품’ 일 뿐이다. 이들의 상품가치는 중고차 시세가 매겨지는 원리와 똑같다. 나이가 들어 상품가치가 하락하면서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그리고 촌락으로 갔다가 맨 마지막에 섬으로 팔려 간다. 그리고 갈수록 이들의 노동강도는 세지고, 달리 표현하면, 성폭력의 수위도 높아 간다.

인생의 막장에 처한 가련한 여성들에게 일부 짐승 같은 마초들이 어떤 가학적 폭력을 저지를 것인지 뻔하다. 성폭력에 만성이 된 자들에겐 자기 애 가르치러 온 초임 여교사도 성적 대상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 짐승들에게 가공할 피해를 입고도 용기 있게 대처한 선생님의 영웅적인 행위에 갈채와 존경을 보낸다. 그 자체로 그분은 이 땅의 어떠한 교사보다 훌륭한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부디 내상을 빨리 회복하고 교단에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으로 우뚝 서시길 바란다.

희망 행복 여자 사람

필인
초대필자. 교사. 교육학박사

경북 칠곡군 다부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에서 교육철학을 전공하였으며 브라질의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교사는 무엇보다 지성인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역에서 뜻을 같이 선생님들과 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교사가 교사에게(우리교육, 2015)]가 있습니다. → 블로그

 

출처 : http://slownews.kr/5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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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7시간이 중요한 이유>

근 2년이 다 돼가도록 박근혜대통령의 7시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어떤 답도 내놓고 있지 않다. 그 와중에 외국 기자가 그 문제로 기소되어 재판도 받고 출국 금지도 당하고 했지만, 여전히 그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 지는 아무 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많은 이들이 상상하고 회자하는 다소 스캔들성 소문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여전히 그 7시간동안에 대한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 '7시간'이 정권의 존폐와도 연결되는, 상상 외의 심각함 때문에 절대로 밝힐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최근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보면서, 어쩌면 그 7시간이 세월호 참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 아닌가 싶은 생각에 한 편의 소설(!)로써 추리를 해 본다.

당연히 아래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전부 소설이다.

박근혜정권은 이제는 누구나 알다시피 출범 초기 부터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개표 조작을 통한 부정 선거로 당선되었기 때문이고, 정권 초기 부터 이 문제에 대해 엄청나게 신경을 쓰게 된다. 새로 임명되는 총리 부터 시작해서 대법관, 헌법재판관에 이르기 까지 공안 검사로 채운 것 또한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본다.
취임 첫 해에는 한복 맞춰 입고 전 세계를 돌아 다니느라 부정 선거에 대한 이슈가 크게 드러날 기회도 없었지만, 태생적으로 '부정 당선'에 대한 트라우마로 부터 벗어날 결정적인 기회를 만드는 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고 본다.

2014년 들어 국정원의 선거 개입 문제를 비롯 여러 상황으로 압박 받고 있어 정권 차원의 강력한 홍보 전략이 절실하던 때였다. 그리고 그 계획은 아마도 이명박이 재미를 본 '아덴만의 영웅'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수백명의 승객이 탄 배가 침몰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을때, 대통령의 일사불란한 현장 지휘로 전원 구조를 해내는 성공적인 지도력을 보여 줌으로써, 잠재된 불씨인 부정 당선의 의혹을 사그러들게 하려는 그런 작전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승객 또한 일반인 보다는 어린 학생들로 구성하는 것이 아무래도 효과가 클 것이고, 가능한 많은 인원이면 더 좋았을 것이므로 수학여행단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사고가 나는 과정 까지는 김어준의 파파이스가 보여준 그대로이다. 섬 근처 얕은 바다로 가서 앵커를 내려 배가 걸리게 한 다음 방향타 돌려 넘어뜨리는, 자동차 경주에서 흔히 쓰는 그런 드리프트 기술이었다. 사고 전 세월호 선수에서 사람이 튀어나갈 정도 큰 충격이 있었다는 것은 앵커가 일차로 해저에 걸리면서 나타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세월호가 좌초된 이후 청와대에서는 몇 번 씩이나 반복해서 해경 123정에게 현장의 사진과 영상을 요구한다. 바로 VIP(박근혜)에게 보고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심지어 사진을 '카톡'으로 전송하라고 까지 했다. 얼핏 카톡이 간편한 것 처럼 보이지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카톡' 보고를 한 이유는 분명히 있다고 보여진다.

즉, 박근혜대통령이 카톡으로 보고를 받는 것이 가장 좋은 상황, 즉 당시 청와대가 아닌 이동중인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상상을 할 수 있다.

세월호를 자빠뜨리고, 헬기를 타고 현장에 도착한 박근혜 대통령의 일사불란한 현장 지휘를 통한 전원 구출 쇼를 하기 위해서는 현장으로 가는 도중에라도 배의 상태를 확인했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탈출하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한 것 또한 대통령의 지휘에 따라 구출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으며, 해경이 아이들을 구하지 앟고 멀거니 보고만 있었던 것 또한 같은 이유이며, 해경이 방송으로 어선의 접근을 막고 통제하라고 명령한 것 또한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현장으로 출동하겠다는 해군을 비롯, 근해를 지나던 미 해군, 일본 선박등을 배제한 것도 이러한 '구출 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구출쇼가 제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아이들도 전부 살고 박근혜대통령은 하늘을 찌르는(?) 지지율 상승으로 부정 개표에 의한 당선이라는 트라우마를 당분간 잊어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너무나도 참혹한 결말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오전 잠깐 방송에서 "전원 구출" 방송이 나온 것 또한 이 시나리오에 의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자빠뜨린 세월호가 예상 보다 빠른 속도로 침몰하는 것이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현장 도착이 늦어져 작전 개시가 되지 못한데 있었다. 즉, 박근혜대통령이 도착할 당시에는 이미 구출이 불가능할 정도로 배가 기울어져 버렸고, 긴급 회의를 한 결과 '작전'은 취소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해경 등은 헬기를 이용, 승객을 구출하겠다고 나섰으나 그것으로는 그 많은 승객을 구해내기에는 역 부족이었고 결국 사상 최대의 참극으로 이어진 것이었을 것이다.

진도 현장 부근까지 갔던 박근혜대통령은 작전이 취소 되어 다시 청와대로 돌아 오게 되고, 거기서 다시 비상 대책 본부가 있는 종합 청사까지 온 시간이 아마 '사라진 7시간'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청와대가 죽어도 7시간의 행적을 밝힐 수 없는 이유는, 만에 하나 다른 행적을 내 놓았다가 그것이 거짓임이 들통이라도 나는 날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에 행적이 들통날 때를 대비해서라면 가짜 행적으로 대처하는 것 보다는 아예 행적을 밝히지 않는 것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와대 뒷 뜰에서 뜨고 내리는 공군 1호기 헬기의 행적은 일반 국민들만 모를뿐, 미국, 일본, 중국의 레이더는 다 알고 있다.

즉, 이들 나라는 박근혜대통령이 세월호 침몰 당시 '사라진 7시간'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를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어마어마한 무언의 무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지금 박근혜 정권이 미국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일본이나 중국에도 꼼짝하지 못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는 이 약점 또한 단단한 한 몫을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상상을 해 본다.

그래서 박근혜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의 행적이 중요한 것이다. 어쩌면 그 당시의 행적이 세월호 참사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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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이 이야기들은 실제 이야기가 아닌 100% 상상에 의한 허구 소설일 뿐이다. 뭐가 매듭이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에는 소설로나마 답답함을 풀어 보는 것 아니겠는가.



출처 : https://www.facebook.com/VingsamKim/posts/56207467728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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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누리과정은 시작일 뿐이다

[라포르시안] 기어코 사달이 났다. 중앙 정부가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교육 공통프로그램) 예산을 시도 교육청에 미루면서 보육 대란이 현실이 되었다. 어떤 시도는 아예 예산이 없고, 그나마 나은 데라고 해야 일부를 마련했을 뿐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가?

대통령과 예산 당국은 당장 태도를 바꿔야 한다. 누가 봐도 중앙 정부의 억지에서 출발한 사태다. 국가사업(누리과정)에서 사업만 넘기고 예산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란 이야기인가. 교육 교부금을 이전했느니, 지방재정법 규정이 어떻다느니, 이런 말을 옮기고 논박하는 것도 부끄럽다. 2012년 이후 같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만 봐도 해답은 명백하다.  

여당은 교육청과 교육감이 정치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정부, 여당이 받아야 할 몫이다. 제대로 논리를 갖추지 않은 채 노골적으로 고집을 부리는 것을 보면, 기꺼이 비싼 비용을 치르며 감수하겠다는 태도 아닌가. 누리과정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첫째, 복지를 완전히(!) 재정 문제로 바꿔 놓았다. 누리과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면서 결과적으로 (모든) 복지는 ‘돈 먹는 하마’,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공적으로 연대하는 사회적 협동이자 실천으로서의 보육과 교육은 없다. 돈이 드는 개인 서비스일 뿐이다. 그 돈을 누가 내는지만 중요하니, 복지는 돈이요 곧 부담이다!  

정부와 예산 당국은 누리과정 논란이 복지재정의 산 교육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복지를, 그리고 복지 확대를 밀어붙이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똑똑하게 보라.” 설마 이럴까 싶지만, 끝장까지 몰고 가서 생생한 교훈을 원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둘째, 복지 영역 사이의 경쟁과 갈등을 노골적으로 유도한다. 정부와 여당은 교육청이 누리과정에 쓸 충분한 예산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거짓말’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고 있다(연합뉴스 관련 기사 바로가기). 예산 총액만 보면 무슨 돈이든 있긴 할 것이다. 게다가 교육 예산의 70%는 중앙 정부에서 나가는 ‘지방교육재정 교부금’이라지 않는가. 그 돈이 그 돈이니 돌려서 누리과정에 쓰라는 소리다. 언뜻 들으면, 그동안은 쌓아놓았던 돈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천만의 말씀. 교육 사업이나 교육환경 개선에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중앙 정부도 모르지 않을 터, 돌려쓰라는 소리다. 정부는 예산 운영을 개선하면 된다고도 주장하지만, 그것 역시 정도가 아니다(실무 문제를 비교적 균형 있게 보도한 기사 한 가지를 참고할 수 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중앙 정부는 내부 조정과 효율화를 요구하는 모양이다. 말이 좋다. 예산 총량 안에서 보육 예산을 지출하라는 것이라면, 그 조정은 다른 데에 쓰는 예산(교육)은 줄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가능한지는 제쳐 놓자. 서로 다른 용도의 예산을 두고 다툴 때 자원배분의 정치가 작동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교육이나 보육과 같은 사회 서비스에서 자원배분은 정치 그 자체다. 어떻게 대상을 선별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가에 따라, 그리고 재정을 누가 부담하는가에 따라, 이해관계는 나뉘고 새로 만들어진다(관련 서리풀 논평 바로가기). 지금처럼 중앙 정부가 계속 버티면 보육과 교육의 갈등은 피할 수 없고, 결국 복지를 둘러싼 분할 통치가 작동할 것이다. 
세 번째는 교육 자치에 대한 공격. 누리과정 논란을 통해 교육청과 교육감은 유례없이 큰 정치적 관심을 받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 효과는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다. 자칫 교육 자치가 문제라는 생각으로 옮겨갈지도 모른다. 

근거가 희미하고 앞뒤 연결도 잘 안 되지만, 현실 정치가 언제는 그렇지 않았던가. 시비가 있고 책임을 혼란스럽게 다투는 일에서는 흔히 정치의 비효율이 공격을 받는다. 교육청과 교육감의 ‘정치성’은 교육의 ‘비정치성’을 명분 삼아 더욱 격렬한 비난 대상이 되는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교육 자치를 무력화하겠다는 시도가 심상치 않다. 처음부터 이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겠지만, 정치는 역시 역동적인 것. “교육은 비정치적”이라는 가장 정치적인 주장이 이 일을 계기로 더 힘을 얻게 될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에 강조점이 있든, 누리과정 예산을 둘러싼 복지 정치를 가볍게 볼 수 없다. 복지 재정의 어려움, 그리고 복지와 부담의 이해관계는 누리과정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인 소득보장은 어떻게 할 것이며, 곧 닥칠 건강보험의 재정 폭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 나아가 노동과 일자리를 둘러싼 지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재정화(화폐화), 선별, 탈정치화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복지를 배제하려는 역설적 복지 정치가 상황을 독점하게 둘 것인가. 가장 중요한 저항의 힘은, 다시 역설적이게도, ‘대항’ 복지 정치와 그 이념에서 나온다고 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고 누리과정 논란의 한복판에서, 대안의 바탕이 될 “무엇이 가치이고 무엇이 수단인가”를 묻는다.        

누리과정과 그 재정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앞으로 연달아 등장할 복지와 복지 재정 논란은 또 어떤가. 재정은 좋은 삶과 사회로 가는 수단이자 방법, 즉 하나의 유력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적 토대를 무시하지 못하지만, 수단이 본질을 삼키게 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대항하기 위해서는 수단(어떻게)보다 가치(무엇을, 왜)를 먼저 묻자. 그리고 수단은 가치에 봉사해야 한다는 본분에 충실하게. 이것이 정부와 여당, 그리고 모든 현실 정치세력을 압박할 새로운 복지 정치의 출발점이다. 
출처: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2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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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배근 | 건국대 교수·경제학

소비절벽, 고용절벽, 인구절벽, 부채절벽, 수출절벽, (기업)성장절벽 등 온갖 절벽에 갇힌 한국경제가 생매장되기 직전이다. 절벽이 갈수록 늘어가는 이유는 정부 대책이 절벽을 부수기보다 새로운 절벽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절벽에서 벗어나려면 반세기 이상 지속되는 ‘한국식 산업화’ 모델의 수명이 다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대기업의 성장성과 수익성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대기업의 위기는 대외경제 환경 악화보다 제품경쟁력 약화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사업들로 구성된 대기업에 제품경쟁력 약화는 수출과 매출 부진이 수익성 악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공격적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도 불구하고 수출주도 성장 방식이 박근혜 정권이 탄생한 2012년부터 막을 내린 배경이다. 2000년 이후 연평균 10%에 달했던 수출증가율은 2011년 지나면서 연평균 1%로 곤두박질쳤고, GDP에서 수출액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2년 56.3%를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수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박근혜 정권이 선택한 것이 부채주도 성장 방식이다. 그러나 부채주도 성장 방식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전에 이미 파산한 상태였다. 노무현 정권에서 (가계+정부) 부채 1단위 증가당 GDP가 0.62단위 증가하였으나, 이명박 정권에서 0.48단위로 크게 하락했고, 박근혜 정권 첫 2년간은 0.46단위로 추가 하락했고, 지난해 3분기까지 1년간은 0.41단위까지 하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출주도 성장에 따른 내수 부족을 부채(자산)로 보완했으나 2008년 이후 부채로 수요 부족을 대체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가계부채 문제는 ‘한국식 산업화’ 모델의 생명력이 소진된 결과이다.

한국경제가 절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산업체계의 전면 개편이 불가피하다. 기존 사업의 고부가가치화나 새로운 수익 사업 창출이 한국 기업의 명운을 좌우할 최대 과제라는 사실은 기업 스스로도 인정할 것이다. 문제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산업체계의 개편 문제가 재벌체제와 박근혜 정권의 경제철학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기업)성장절벽’ 앞에서 골목상권 침탈, 목숨 걸고 다른 재벌의 면세점 뺏기, ‘학교 앞 호텔’ 짓기 등 ‘당장 살아남기’ 방식으로 대응하는 재벌에게, 그리고 ‘소비절벽’ 앞에서 기업의 ‘노동비용 절감’ 지원하기를 노동개혁으로 포장하고, ‘고용절벽’ 앞에서 공공서비스(일자리)를 시장(자본)에 넘겨주면 일자리가 증가하고 경제활성화가 된다는 정부에 무슨 기대가 가능할까. 무엇보다 박근혜 정권과 재벌이 산업경쟁력 악화 및 고용 위기에 무능한 이유는 이들이 집착하는 ‘한국식 산업화’ 모델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과는 상극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산업화 모델은 자본 중심, 자본의 보조물로서 표준화된 노동력, 위계적 질서, 경쟁 등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21세기 사업 모델의 키워드들은 아이디어(사람), 차이(다양성, 개성), 협력, 공유 등이다. 애플의 앱스토어 사업, 우버, 에어비앤비 등은 제조업이나 서비스업도 아닌 아이디어 업종으로, 이들 21세기형 사업 및 기업들은 ‘협력의 경제’ 원리에서 작동한다. 차이와 다양성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개성을 죽이는 사회, 협력을 배척하고 무한경쟁만 요구하는 사회, 통제와 획일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는 기대하기 어렵고 사회적 기술 개발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간판기업인 삼성전자가 제조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노동자의 희생과 검증된 선진기술의 빠른 학습에 익숙한 재벌 대기업의 신수종 사업 찾기가 성과를 내기 어려운 이유이다. 일본이 뒤늦게 장기불황의 해법을 산업체계의 전면 개편에서 찾고 90년대 후반부터 창조산업 육성을 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는데, 그 이유가 창조산업의 육성을 제조업식 사고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일본의 ‘산업활력법’을 수입해 만든 이른바 ‘원샷법’으로 재벌 대기업의 사업체계 재편을 하겠다고 한다.

일본의 수출이 2007년 이후 하락한 이유가 강한 엔화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일본 제품의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외신의 조롱(?)을 이들은 외면한다. ‘박근혜표’ 창조경제의 결과가 명약관화한 이유이다. 이처럼 절벽에 둘러싸인 한국경제는 노동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무한경쟁만을 강요하는 ‘한국식 산업화’ 모델과 그 압축판인 재벌체제의 시효 만료를 의미한다. 청년들이 한국에서 못 살겠다고 떠나고 “붕괴 후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고 절규하는 배경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142024285&code=9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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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948년 대통령이 되어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을 거쳐 종신집권의 가도를 달리다, 4·19 혁명으로 하야했다. 집권 중에 ‘고마우신 우리 대통령’ 노래를 학교마다 부르게 했고, 그의 탄생일은 나라의 공식 행사가 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민족의 태양’이란 칭호는 4·19 이후 그의 동상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현행 헌법하에서, 이승만이 ‘국부’란 주장이 전파되고 있다. 그가 나라를 건국하고, 6·25 동란 때는 자유 대한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여기선 6·25 때 그의 행적을 살펴본다.

침략전쟁의 예측과 대비는 대통령의 으뜸가는 필수 임무다. 북한의 남침 준비는 몇년에 걸쳐 치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승만 정권은 입으로만 ‘북진통일’을 외치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로 호언장담했을 뿐 실질적 대비를 하지 못했다.

6·25 새벽에 기습남침을 당했다고 곧바로 도망갈 이유도 없다. 전면 전투가 벌어졌고, 휴가 간 군인도 재빨리 복귀했다. 춘천의 6사단처럼 침착하게 방어하여 침략속도를 지연시킨 사례도 있다. 그런데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국민에겐 안심하라고 방송하면서 몰래 도주했다. 대통령이 사실상 유고된 가운데 전쟁지휘체계는 붕괴되었고, 국민의 목숨은 각자도생에 맡겨졌다. 질서있는 퇴각의 노력은 아예 없었다. “문서 한 장 도장 하나 아니 가지고 도망한 것이 무슨 정부요 관청인가.”(함석헌)

정부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는 무고한 인명을 무분별하게 학살했다. 보도연맹의 이름으로 무수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고, 수만명의 국민방위군들이 부정부패로 인한 보급품 부족으로 아사했다. 양민들을 공비로 몰아 처형하여 유족들의 한이 오늘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적 치하에 신음했던 서울시민들은 9·28 수복 후 대통령의 진심 어린 사과를 기대했건만, 돌아온 건 가혹한 부역자 처벌이었다. 그 처벌의 폐해가 극심하여 국회가 법개정을 하고 헌법위원회가 위헌판결을 내릴 정도였다.

이승만의 대통령 임기는 1952년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이승만은 헌병과 깡패들을 동원하여 의원들을 겁박하여 소위 발췌개헌을 단행했다. 전선에서 국군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후방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쿠데타”(김성수 부통령의 말)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1953년 휴전을 맞아 남북한 집권층들은 각기 통렬한 자기반성을 할 만도 했다. 그러나 전쟁을 야기한 김일성은 반미전쟁에 승리했다고 스스로를 ‘경애하는 수령’으로 격상시켰다. 이승만은 스스로를 공산당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전쟁 이후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면서 김일성과 이승만의 권력기반은 되레 공고해졌다. 수백만 국민들의 희생 위에 엉뚱하게 우상화 놀음을 한 게 남북 집권자의 모습이었다.

북한의 침략전쟁에 대해서는 예측도, 대응도, 주도적 해결도 못한 채, 오직 정권 연장에만 유능했던 인물에게 국부란 호칭은 당치 않다. 그는 이순신이나 처칠처럼 나라를 지켜낸 인물이 아니다. 다만 위기 시기에 대통령이었을 뿐이다.

이승만을 ‘한국의 조지 워싱턴’으로 일컫는 사람들도 있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웠고 이겼으면서, 종신 대통령의 유혹을 뿌리치고 민주주의의 모델을 만들어냈다. 전쟁과 정치 모두에서 이승만과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둘의 공통점은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뿐이다.

사실 오늘날 ‘국부’란 말 자체가 ‘국정교과서’ 부활론처럼 낡아빠진 개념이다.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국가에서 한명의 독재 대통령에게 국부 칭호를 헌정하겠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이승만과 같은 시대에 대통령을 했던 트루먼은 말했다. “민주국가에서 ‘꼭 있어야 할 인물’ 따위는 없다. 어떤 사람이 바로 그런 필수적 인물로 간주되는 순간, 그 나라는 황제국이 되고 만다”고.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27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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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한 해 보내셨습니다. 새해 인사 올립니다. 올해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이곳을 지옥으로 단정하지 마십시오. 미래의 몫으로 더 나빠질 여지를 남겨두는 곳은 지옥이 아닙니다. 종말을 확신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상상력은 최악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등 뒤로 멀어지는 모든 시점을 우리는 그나마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 과거와 작별하고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는 조만간 이 순간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연초마다 마음을 들뜨게 하던 나긋하고 아름다운 거짓말의 목록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진짜로 치유하는 희망의 언어를 들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천냥 빚을 탕감해준다는 말 한마디의 가능성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면, 대통령의 신년사에 귀기울이십시오. 작년의 첫 날 대통령은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의 기반을 다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국민소득은 4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고, 1인당 부채가 소득을 앞질러 3만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그걸로 부족하다면 작가인 제가 더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 정도면 어떨지? 로또를 사십시오, 새해에는 모두 1등에 당첨될 것입니다!

손아람 작가

손아람 작가

잠시 청년들에게 물어 주십시오. 줄줄이 늘어선 초록색 빈 병으로 어지럽혀진 대학가의 술집 취객에게, 외로움을 둘 공간조차 없이 비좁은 고시원의 세입자에게, 자정의 어둠을 몇달째 지켜온 무표정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이 나라에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 주십시오. 그들은 서슴없이 멸망을 입에 담을 것입니다. 감히 멸망을 말하지만 악의조차 감지되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에 당신들은 경악해야 합니다. 멸망은 저주나 농담이라기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외치던 백범의 소원처럼 간절하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으며, 불공평한 생존보다는 공평한 파멸을 바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국호를 망각한 백성들처럼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릅니다.

어쩌면 멸망이 우리를 덮치도록 두는 대신, 우리가 먼저 멸망의 모습을 선택할 때가 도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멸망을 고민하는 논쟁에 참여할 자격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한국은 위기가 아니다”거나 “혼란을 야기하는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격앙된 반론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20여년 전, 똑같은 문장들이 신문의 표제로써 조국의 미래를 진지하게 점치는 논쟁을 극적으로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과 몇달 뒤 외환 위기가 들이닥쳤을 때 비로소 누가 진짜 애국자인지가 명확해졌습니다. 다만 그때 경험한 것은 멸망이 아니라 추락이었고 해법은 분명했습니다. 금붙이를 녹이고, 외화를 뒤져 내놓고, 회생 가망이 없는 회사의 제품과 주식을 구입하는 운동을 청년들은 지지했습니다. 이 나라는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청년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가난과 전쟁과 경제 위기를 이 나라는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맞닥뜨린 갈등은 너무나 낯선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진짜 위기인지 철부지의 투정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역사는 세대를 건너뛴 채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한 세대가 통째로 삶을 포기한 불모지에서는 누구도 살 수 없습니다. 멸망이 공공연하게 선언된 땅을 독차지한 외로운 승자가 된다한들 개선행진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패배자로 남기보다는 차라리 멸종을 바라는 젊은이들이 환영의 인파를 조직해줄 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망한다면 신라와 고려와 조선이 망하듯이 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망국일을 정하지 못한 채 이렇게 선언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증발했다!

언어로 달래는 처방전은 위약으로나마 효과를 다했습니다. 누워버린 말에게는 질책도 들지 않습니다. 청년들의 정신이 그 어느 시대보다 가난하므로, 사라진 것은 헝그리 정신이 아닙니다. 정작 사라진 것은 가난의 필요성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부유해지는 나라에서 더욱 가난하게 살기를 강요받는 국민이 된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저 착각일까요? 이 나라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대기업 매출액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을 뿐 기업소득과 개인소득의 격차는 점점 벌어져 OECD 최하위권에 머뭅니다. 오로지 기업만이 암세포처럼 무한히 자라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봅니다. 국민소득이 30만 달러를 돌파하고, 세계 100대 기업 명단이 모두 대한민국으로 채워진들, 우리 각각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도 살 수 없는 높다란 탑을 쌓아올린 뒤 먼 발치에서 그 웅장한 풍채를 감상하는 게 이 나라 경제의 목표였습니까?

5년 전 저는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국 청년들의 삶을 취재했습니다. 대학생인 전태일들은 모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마련하는 중이었고 그 가운데 두 명은 등록금 부담으로 휴학중이었습니다. 새해를 앞두고 전국의 전태일들에게 다시 안부를 물었습니다. 전주의 고시생 전태일은 끝내 대학을 자퇴했고, 고시에 낙방한 뒤 여태껏 아르바이트를 해왔습니다. 위험한 일이라도 돈이 벌린다던 거제도의 선박공 전태일은 사고로 팔이 부러져 퇴사했고, 아직 식당 주인의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거꾸로 영화감독이 꿈이라는 부산의 극장 직원 전태일이 조선소에 들어갔습니다. 고용주인 인천의 유통업자 전태일은 오히려 자신이 약자라고 항변했었습니다. 그가 운영했던 편의점은 건물주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전태일은 우리 모두의 이름인가 봅니다. 착취의 삼투 현상은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천의 전태일처럼 가게와 권리금을 빼앗긴 홍대 인근의 상인들은 세입자 모임을 만들어 건물주와 싸우고 있습니다. 같은 처지의 칼국수집을 응원하다 만난 홍대 인근의 젊은 음악가들은, 임대료 압박으로 상업화된 클럽을 떠나 음악조합을 결성했습니다. 소속 음악가 한받씨는 리어카를 끌고 길거리 순회 공연을 벌입니다. 홍대를 벌써 등진 작곡가 김인영씨는 방송 음악을 만듭니다. 사정이 절박한 젊은 작곡가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작곡을 할 줄 모르는 음악감독은 그녀의 음악을 사서 자기 이름으로 방송에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예술가들만의 문제일까요? 이장균씨는 한의사가 된 뒤 5년 동안 제대로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그는 길목과 성격과 직종을 탓하다 마침내 사회구조를 탓하게 됐습니다. 의사 김주영씨는 식사가 끝난 뒤 작가인 저에게 계산을 부탁했습니다. 학자금 대출 수천 만원이 빚으로 남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0대 중반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던 변호사 김상현씨는 외국어를 배워 해외로 취직했습니다. 대기업 10년차 직원 최한영씨는 월셋방에 살며 여전히 첫 차를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부채를 감당할 배짱이 없다면 이 시대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청년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살지 결정하는 것으로는 어디서 살지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집 갖기’ 로 검색되는 기사의 대부분이 90년대에 쓰였다는 사실을 눈치채셨습니까? 혹시 검색해볼 의미조차 없어서 모르셨나요? 신문 경제면은 이제 그런 주제를 다루지 않고, 은행들은 그런 이름의 예금 상품을 없애고 있습니다. 어떤 상품의 수익으로도 집값을 따라잡을 수 없음이 명백해졌으니까요. 부동산은 투자 수단으로서 매력을 잃기 전에 주거 수단으로서 기능을 잃었습니다. 출근길 차창 바깥으로 보이는 빽빽한 주택들이 다 누구의 것인지 청년들은 신기해 합니다. 누군가 벌써 세상을 남김없이 소유했기에, 집을 갖는 게 왕국을 갖는 것이나 다름없어진 걸까요? 생활의 삼대 요소인 의식주의 한 축은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주거 빈민 생활이 당연한 삶의 양식이 되었기에, 이 시대는 가난을 유례없이 엄격하게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생활을 영위할 집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중산층이라는 단어는 사어처럼 더는 쓰임새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공허한 정치 구호처럼 오로지 ‘중간시민’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중간이란 장소가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을 향한 환상을 포기 못해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덧없는 치유의 주술을 그만 거두십시오. 지금 즉시 변화에 동참해 주십시오. 우리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 사정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출처: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312005461&code=9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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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양승태 대법원장, 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국정원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유죄가 인정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이 고등법원의 항소심을 사실상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판결의 핵심 증거는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김 씨의 이메일 계정에서 압수한 ‘425지논 파일'(텍스트 파일)과 트위터 공작의 근거인 ‘씨큐리티’ 파일. 대법원은 이 두 핵심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792003.html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상식에 대한 도전 

대법원 판결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상식에 대한 도전처럼 보인다.

국정원 직원 김 씨가 자기가 작성했다고 검찰에서 인정했던 파일(파일명 ‘씨큐리티’)에 관해 재판에서는 ‘지금은 모른다’고 번복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파일의 증거능력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일반인도 사기사건 같은 경우에도 실제로 자기가 작성한 문서에 관해 모른다고만 하면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배제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할 만하다.

‘씨큐리티’ 파일은 고등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판결의 핵심 증거다. 고등법원(김상환 부장)은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확정된 2012년 8월 20일 이후부터 선거일에 가까워질수록 단순한 ‘정치글’을 넘어서서 박근혜 후보에 유리한 ‘선거글’들을 국정원이 더 많이 인터넷에 유포했기 때문에 ‘선거운동’을 했다고 판단했다.

이 씨큐리티 파일에는 고법의 통계적 판단의 토대 대부분을 이루는 트윗글(총 27만7천여 건 중 27만5천여 건이 트윗글)들의 원트위터 계정 269개가 국정원 직원들 22명(구체적으로는 2012년 초에 만들어져 트위터 활동만을 전담한 “안보5팀” 전체)의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아래 그래프는 고등법원 판결에 나와 있는 것이다.

원세훈

전문법칙(傳聞法則) 

대법원은 피고의 인권을 보호해온 전문법칙(傳聞法則) 조항을 들어 증거능력을 부인했다. 전문법칙은, 쉽게 말하자면, 피고가 대질할 수 없는 증인의 증언은 피고에게 불공평하므로 유죄증거가 될 수 없다는 규칙이다.

특히 그 증인이 문서인 경우에는 대질 자체가 불가능하니 전문법칙 적용을 피하려면 문서 작성자가 법정에 나와서 그 문서가 자기가 작성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씨큐리티 파일에 대해서는 작성자가 확인되지 않으니 전문법칙에 의해서 증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논리다.

하지만 씨큐리티 파일은 그런 식으로만 증거 자격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위 씨큐리티 파일은 제3자에게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국정원 직원 김 씨가 자기만 접근할 수 있다고 한 메일 계정에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그런 파일의 발견 자체는 김 씨가 파일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 남자

 

가정해보자 

내가 절도 피의자라고 하자.

  1. 내 이메일 계정에서 269곳의 최근 절도 피해 장소와 일치하는 주소를 적은 문서가 나왔다.
  2. 나는 작성자임을 부인했다.
  3. 누구도 문서의 작성자를 밝혀내지 못했다.

이 사례에서 법원이 이런 문서가 내 계정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증거에서 배제할까? 내가 다른 이용자의 존재나 해킹의 가능성을 소명하지 않는 한 반드시 증거에 포함하려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천만 개의 주소 중에서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절도피해장소 269곳의 주소만을 수집해 놓은 문서가 내 메일계정에서 발견됐다.

내가 범죄와 무관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메일

이렇게 증거에 포함되었을 때 문서 내용이 진실인지를 다투는 대질을 그 작성자와 하지 못한다고 피고에게 불공평할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검사는 문서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변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용의 문서가 피고에게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만을 증거로 제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방식만 옳다 고집하는 대법원 

물론 씨큐리티 파일이 위에서 밝힌 논리에 의해 증거가 되면 증명하는 사실의 구체성은 떨어진다.

  • ‘국정원 직원들이 269개 계정을 이용했다’가 아니라
  • ‘국정원 직원 김 씨는 22명의 국정원 직원들과 269개 계정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다’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등법원에는 씨큐리티 파일만 증거로 제출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다른 정황 증거가 있고 고등법원은 이 정황 증거들을 더해 ‘국정원 직원들이 269개 계정을 이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법원은 씨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이런 논리로 인정할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고등법원이 “개괄적이고 포괄적인 정황 사실의 존재만으로 시큐리티 파일에 기재된 269개의 트위터 계정 모두를 (국정원) 직원들이 사용한 것이라고 인정한 것에 다름없다”는 이유이다.

출처: 대법원 http://www.scourt.go.kr/scourt/index.html

출처: 대법원

하지만 어떤 증거로 어떤 사실을 인정할지, 즉 사실심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개입할 권한이 없음은 대법원이 여러 차례 스스로 판결을 통해 밝힌 바 있다. 대법원은 사실을 따지는 사실심이 아니라 법적 논리를 따지는 법률심이다. 물론 대법원은 사실심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고등법원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전문법칙을 부당하게 우회하는 것이라고 본 듯 하다. 하지만 이 역시 대법원이 법관의 증거취사의 자유를 이례적으로 과도하게 제약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을 인정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가 전문법칙에 의해 막혀있다면 다른 방식을 통해서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자유심증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기꾼들이 작성 사실을 당연히(?) 부인하는 수많은 문서가 형사재판에서 유죄증거로 인정되는 상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대법원이 이런 식으로 하나의 방식만이 합당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대법원이 스스로 한정한 권한을 넘는 것이다.


출처: http://slownews.kr/43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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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5. 임란 때 왜군 절반이 조선 백성이었다

양반은 세금 안 내고 백성만 부과…민심 이반 자초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나흘 만인 선조 25년(1592년) 4월17일.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은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패배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도성(都城) 한양을 버리고 도망칠 궁리부터 했다. 선조 일행은 4월30일 새벽 서울을 떠나 5월1일 저녁 개성에 도착했다. 선조의 최종 목적지는 요동(遼東), 즉 만주였다. 조선을 버리고 요동에서 살겠다는 것인데, 이를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이라고 한다. 요동으로 건너가 명나라의 제후 대접을 받으며 살겠다는 것이다. 이때 류성룡이 “안 됩니다. 대가(大駕)가 동토(東土·조선)에서 한 발짝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게 됩니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1일)라고 반대했다. 선조는 “내부(內附·요동에 가서 붙는 것)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라고 거듭 만주로 도망갈 의사를 밝혔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간신히 위기는 넘겼으나 임진왜란은 조선 백성들을 큰 고통에 빠뜨렸다. 사진은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류성룡 등이 반대하고, 명나라에서도 달갑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자 만주로 가려는 계획은 접었지만, 이때 선조가 요동으로 들어갔다면 조선은 완전히 망하고 일본 천하가 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데 선조는 왜 조선을 버리고 도주하려 했을까. 물론 용렬한 국왕인 탓도 있지만 개인적인 성향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5월4일 선조는 개성에서 다시 평양으로 도주하려고 하면서 윤두수(尹斗壽)에게 이렇게 물었다. “적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선조실록> 25년 5월4일) 선조가 조선을 버리고 도주하려 했던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조선 백성들이 대거 일본군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도 선조가 듣기에는 일본군의 절반이나 된다고 할 정도로 많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조선의 병역제도와 조세제도 때문이었다.

조선은 16세부터 60세까지 모든 백성에게 병역 의무를 지웠다. 병역은 두 종류로 나눠서 수행했는데, 직접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정군(正軍)이 있었고, 정군의 생계를 책임지는 봉족(奉足)들이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없다 보니 정군들은 성 쌓기, 길 닦기 같은 각종 요역(?役)에 자주 동원되었다. 그래서 당시 돈 역할을 대신하던 포(布)를 납부하는 것으로 병역을 때우는 수포대립(收布代立) 현상이 발생했다. 보인(保人), 즉 봉족에게서 받은 베로 다른 사람을 고용해 병역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었다. 각 관아에서도 농민들에게 병역 의무를 지우는 것보다 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것을 이익으로 생각했다. 관아에서도 정군에게 포를 받아서 그보다 싼 가격으로 다른 사람을 고용하고 중간 차액을 사용했다. 이를 ‘군역에서 해방시켜주는 대신 포를 받는다’는 뜻에서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라고 한다. 조정에서는 금지했지만 병역 의무자와 관아의 이익이 서로 맞아떨어진 탓에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확대되었다. 드디어 중종 36년(1541년)에는 조정도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1년에 두 필씩의 군포를 내는 것이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병역 의무가 조세의 일종으로 변질된 것이다. 매년 두 필씩의 군포만 내면 되므로 재산이 있는 일부 양인들은 이를 환영했다.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부과 대상에서 제외

군적수포제의 가장 큰 문제는 양반 사대부들을 군포 부과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점이다. 가난한 양민들은 1년에 두 필씩의 군포, 즉 병역세를 납부해야 하는 반면 상대적으로 부유한 양반들에겐 납세 의무가 없었다. 양인들이 기를 쓰고 양반이 되려고 했던 이유가 군포 납부 대상에서 면제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더구나 군적수포제가 실시된 후에는 군포를 내느냐 내지 않느냐가 양반과 이른바 상놈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군포의 부담은 과중한 것이었다. 게다가 갓난아이에게도 군포를 거두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이나 이미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까지 횡행했다. 자신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가난한 농민이 세 명의 군포를 내야 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9년 전인 선조 16년(1583년)에 황해도에 순무(巡撫)어사로 나갔던 김성일(金誠一)은 군포, 즉 병역세 때문에 도망가는 백성들이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개선책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김성일은 상소문에서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제왕이 나라를 위하는 것은 그 길이 하나가 아니지만 그 근본은 안민(安民)에 있을 뿐입니다. 안민의 길에 이르는 정치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 요체는 해(害)를 제거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학봉속집> 제2권)라고 말했다. 임금의 정치는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해악을 제거하는 것이 요체라는 말이다. 김성일은 “오호라! 백성 한 사람이 제 살 곳을 잃어도 오히려 왕정(王政)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한 도가 모두 살 곳을 잃었으니 어찌 말하겠습니까?…하물며 온 나라가 모두 같지 않습니까?”라고 한탄했다. 김성일이 보기에 가장 큰 해악은 족징(族徵)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이 도망가면 그 군포를 가족에게 대신 부담시키는 것이 족징이었다.

“신이 이 도에 이르자 군민(軍民) 중에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들이 이르는 곳곳마다 뜰에 가득 찼는데, 일족이라는 이유로 추징당한 자가 열에 아홉이었으며, 일족 중에는 일족이 아닌데도 이웃이라는 이유로 추징을 당한 자가 또 절반이었습니다…한 사람이 도망가면 그 역(役)이 구족(九族)에게까지 미치는데, 구족이 내지 못하면 인보(隣保)에게까지 미치며, 인보들이 내지 못하니 마침내 일족은 죽고 마을은 텅 비게 됩니다.”(김성일 ‘황해도를 순무할 때 올린 상소’) 한 사람이 도망가면 구족까지 찾아내서 군포를 씌우다가, 이것도 안 되면 이웃에게 대신 씌웠다. 이를 이웃 린(隣)자를 써서 인징(隣徵)이라고 불렀다.

앞서 말했듯이 이때가 임진왜란 발발 9년 전이었다. 김성일은 “전지(田地)에는 풀과 쑥대만이 자라고 있는데도 그 부세(賦稅·군포)는 아직도 남아 있고, 군적(軍籍)은 이미 빈 장부가 되었는데도 방수(防守)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성일은 그 대책으로 도망친 지 7년 이상 되었으면 군역을 면제할 것과 도망친 군사가 60세가 넘었을 경우 군역을 면제하자는 대책 등을 내놓았지만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이 대거 침범해오자 백성들은 형조와 장예원을 불태우고 일본군에 대거 가담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조는 조선이 망했다고 생각하고 요동으로 도주하려 한 것이다.

  
류성룡이 만든 속오군의 ‘관병편오책’. 소대장에 해당하는 대총에 노(奴:종) 송이(松伊)·춘복(春卜) 등의 이름이 보여 노비들의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류성룡의 개혁 정책, 임란 직후 다시 폐기

이때 선조의 요동행을 저지한 류성룡은 영의정 겸 전군을 지휘하는 삼도도체찰사가 되자 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 사실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 사대부들도 병역 의무를 지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류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束伍軍)을 조직했다. 군역을 지지 않은 양반과 일반 양인들을 모아서 조직한 군대가 속오군이었다.  또한 류성룡은 중앙에 훈련도감(訓練都監)도 만들어 군사 1인당 1개월에 쌀 6말을 주었는데, 양반뿐만 아니라 공사 노비들까지 함께 근무하게 했다. 즉 그동안 병역 의무에서 면제되었던 양반들과 사노(私奴)들을 유급을 조건으로 같은 부대에 편성한 것이다. 여기에다 그간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같은 액수의 세금을 내던 공납(貢納)을 농토의 많고 적음에 따라 부과하는 작미법(作米法)으로 바꾸었다. 모두가 같은 액수를 내던 간접세를 부자가 더 많이 부담하는 직접세로 바꾼 것이다.

류성룡의 이런 개혁 정책들이 성과를 거두면서 떠났던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왔고, 결국 조선은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양반 사대부들은 류성룡을 낙마시켜 이런 개혁 입법들을 무효화시키려 했다. <연려실기술>에 이런 현상이 잘 나타나 있다. ‘남이공(南以恭) 등이 두 번째 상소를 올렸는데 대략, “(류성룡이)…국정을 담당한 6, 7년 동안에…훈련도감과 체찰군문(?察軍門)에서 속오(束伍)·작미(作米)법을 만들고…서예(庶?·서자들과 노비)의 천한 신분을 발탁하여…’(<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부자 증세인 작미법을 제정하고, 양반에게도 병역 의무를 부과한 속오군을 만들고, 서자들과 노비들을 발탁했다는 비판이었다. 이런 공세에 밀려 류성룡은 전란이 끝나면서 거꾸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류성룡이 실시했던 대부분의 개혁 조치들을 폐기시켰다. 농민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말하자면 선거 때 각종 공약을 내놓아 집권하고 난 후 대부분의 공약을 팽개친 셈이었다. 임진왜란이 종결(1598년)된 지 불과 29년 후에 북방의 후금(後金)이 쳐내려오는 정묘호란(1627년)이 발생했을 때 양반 사대부들이 의병을 모집해도 농민들은 가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조는 강화도로 도주해야 했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란을 가야 했다. 병자호란 때도 농민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지배층이 더 많은 의무를 지고, 부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평범한 상식과 거꾸로 간 결과 발생한 일들이었다.

현 정부의 조세정책은 과연 어떤가? 소득세·법인세 등의 부자 증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할 생각 대신 담뱃값 인상과 주민세· 자동차세 인상 등 서민의 호주머니만 노리는 행태는 양반 사대부들을 군역 의무에서 면제시켰던 과거 군적수포제와 얼마나 다를까. 여기에 ‘배당소득 증대세제’를 도입해 고배당 기업의 주식에서 발생하는 배당소득에 대한 원천징수세율을 14%에서 9%로 인하하고, 금융소득종합과세를 받는 고소득자의 경우도 25%의 분리과세를 적용받을 수 있게 한다는 방침이니 그야말로 서민들의 호주머니는 털되 부자들의 곳간은 채워주겠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한국의 조세 체계가 이대로 가면 50년 후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소득 불균형이 심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정부는 이렇게 해도 국민들의 계속된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조선의 농민들이 우매하지 않았듯이 대한민국 국민도 우매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임계점에 이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출처: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6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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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이 글을 쓴 하트만(Thom Hartmann)은 기업가이자, 심리치료사, 진보 성향의 정치평론가이자 라디오쇼 진행자입니다.

자본주의는 원래 평등과는 거리가 먼 경제 체제입니다. 한 사회의 부가 소수에게 쏠리지 않고 비교적 평등하게 나누어질 때 등장할 수 있는 중산층도 자본주의 원래 개념과는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의 모습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떠올리면 가장 정확할 겁니다. 경제 체제의 정점에 극소수의 부자들이 군림하고 있고, 그 바로 아래 전문직, 혹은 중상주의자(mercantilist)라 불리는 역시 아주 적은 수의 중산층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의 90%가 넘는 나머지 계층은 빈곤 노동자에 속하는 이들로 공식적으로는 노예 신분은 면했지만 대부분 사실상 평생 갚지 못할 빚 때문에 운신의 폭이 매우 제약된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자본주의 사회라면 부가 보통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한 사회가 창출해내는 이윤과 이를 통해 축적되는 부는 극소수 부자, 권력층에게 집중되기 마련이고, 불평등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내재된 개념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첨단을 달린다는 미국에서 상당히 탄탄한 중산층이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공황 이후 세계 2차대전을 거쳐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와 정부가 시장을 규제하고 소수의 자본가, 대기업에 집중됐던 부에 높은 세금을 매겨 이를 적극적으로 재분배했던 시기가 바로 그 시절입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던 기업은 GM이었습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당시 노동자들의 임금은 시간당 50달러를 상회했습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뒤 레이거노믹스라는 혁명적인 정책을 들고 나왔는데, 이를 단순히 요약하면 규제를 풀고 부자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공급자 중심의 경제학(supply side economics)”에 기반을 둔 방침이었습니다. 레이거노믹스 이후 35년이 흐른 지금, 미국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기업은 월마트입니다.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시급 10달러입니다.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시기 가운데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이단아에 해당되는 건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됐던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입니다. 원래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산층의 등장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대격변에 해당되는데, (중세시대 유럽을 자본주의 사회라고 칭할 수 있다면) 14세기 흑사병으로 노동인구가 급감했을 때나 가능했고, 산업혁명 이후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부사들에게 높은 세금을 물리지 않는 한 중산층이 발을 붙일 곳은 없었습니다. 피케티(Thomas Piketty)가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밝혔듯이, 세계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중산층이 등장할 수 있었던 건 개인의 소유 아래 세습되던 부가 전쟁으로 철저히 파괴됐기 때문이고, 새로 창출되는 이윤과 부에는 정부가 전쟁 상황이라는 명목 하에 높은 세금을 물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자본주의와 시장의 순수한 논리를 무시하고 개입과 규제를 일삼던 시절 경제적 불평등은 가장 낮았습니다.

피케티는 특히 부가 소수에게 독점되는 걸 막기 위한 제도로 누진세(progressive taxation)를 언급했는데 이는 정확한 지적입니다. 자본가, 고용주가 이미 버는 소득 외에 추가로 벌어들이는 돈에 막대한 세금을 내야 한다면 그만큼 노동자를 착취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죠. 2차대전 직후 미국에서 최고 소득 과표구간의 소득세율은 91%였습니다. 당시 기업 CEO의 연봉은 가장 기본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들에 비해 평균 30배 정도 높았습니다. 레이건 정부는 최고 소득 과표구간의 소득세율을 28%로 떨어뜨렸습니다. 중산층, 서민에게 흘러내리던 부는 빠른 속도로 소수의 부자들에게 다시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레이거노믹스 이후 소득 불평등은 빠른 속도로 심화되기 시작했고, 현재 CEO들의 평균 연봉이 일반 노동자들에 비해 평균 수백 배 높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상대적으로 많은 계층이 부를 나눠갖기 시작하면, 다시 말해 중산층이 탄탄해지면 이들은 정치적인 권리를 포함해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등장해 사회적인 토론에 불이 붙죠. 1960, 1970년대 미국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인권 운동, 여성 운동, 반전 운동, 반 권위주의 문화, 환경 운동, 소비자 권익에 대한 성찰에 이르기까지 새로 등장한 중산층은 사회적인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이슈를 찾아내 공론화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에겐 끔찍한 대혼란이나 다름없었죠. 레이건의 당선으로 정권을 잡은 보수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혼란을 타개하려 했습니다. 부자 감세를 통해 중산층의 기반을 무너뜨린 건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말그대로 신의 한 수였죠. 중산층은 빠른 속도로 빈곤 노동계층으로 편입됐습니다.

레이거노믹스는 그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도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적어도 부자감세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부시 정권에서 추가로 진행한 부자 감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클린턴 정부도, 오바마 정부도 최고 소득 과표구간의 소득세율, 상속세율을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 게 반드시 옳은 목표인 건 절대 아닙니다. 이는 사회적인 토론과 합의가 필요한 문제죠. 독과점 자본주의를 이대로 유지하느냐 중산층을 되살려 보다 다원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느냐,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섰습니다. 만약 우리가 중산층을 되살리는 쪽을 택한다면, 그 첫 번째 정책은 레이건의 부자 감세를 철회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AlterNet)


출처:http://newspeppermint.com/2015/03/11/reagano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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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헌법의 추억

 

각종 자격이나 임용 시험을 위해 헌법 강의를 듣게 될 경우 제일 먼저 배우는 판례가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위헌결정(헌법재판소 2004. 10. 21. 2004헌마554 )이다. '수도=서울'이라는 공식은 관습헌법에 해당하므로이에 반하는 행정수도 이전 법률은 위헌이라고 했던 바로 그 판례다관습헌법 운운하는 헌재의 결정을 뉴스로 이해했던 당시에는 나 역시 비웃었던 게 사실이지만몇 년이 지나 헌재의 결정문을 진지하게 뜯어보고 나서는 그 논리의 정교함과 치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결정은 헌법적 근거에 의해 관습헌법은 인정될 수 있으며 일정 부분 불가피한 측면도 있음을 밝힌 뒤어떤 규범이 관습헌법으로 인정받기 위한 요건을 제시함으로써 수도의 설정과 이전이 이에 해당한다는 점을 논증하였다.그리고 이러한 관습헌법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폐지되거나 변화할 수 있는 것이나 이를 위해서는 국민적인 합의가 필요하며 이는 헌법 개정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따라서 헌법이 아닌 법률의 형식으로 그 내용을 건드릴 경우 위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딱 한 가지관습헌법은 성문헌법과 대등한 효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개정에 있어서도 성문헌법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었다관습()법은 개념 자체부터 무엇이 그에 해당하고 무엇이 해당하지 않는지를 가리기 애매한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그런 허깨비 같은 내용을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 2/3 이상의 찬성과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면 이건 사실상 언터처블의 막강한 규범이 되는 것이다.그리고 그걸 판단하고 결정할 권한은 오로지 헌법재판소에게 귀속되는 것이기에 개인적으로는 영 마땅치 않은 논리였다아울러 이로 인해 일반 법률로 관습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는 위헌을 면치 못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으니톱니바퀴 돌아가듯 정교한 논리체계에서 딱 하나의 나사를 바꿔 끼움으로써 결론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셈이라고나 할까사후적으로 보았을 때 결론을 내려놓고 논리를 짜 맞춘 것 같다는 느낌그럼에도 막무가내로 결론을 향해 달려가기 보다는 논리와 근거를 들어 접근하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우리 헌재가 달라졌어요.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에 대한 결정이 하필이면 어수선한 연말정부 입장에서 절묘한 시기를 골라 선고된다는 소식을 접하고도아마도 해산결정을 예상했을 이정희 대표와 통합진보당원들이 국회에서 필사적인 농성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설마 해산결정이 내려지랴 했던 건 이 나라 헌법질서의 마지막 보루인 헌법재판소의 논리와 양식을 믿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헌법 조문과 이론에 따르면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럼에도 해산결정이 내려졌을 때 난 혹시나 내가 알지 못하는 획기적인 논리와 근거가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아니 적어도 행정수도 이전 위헌결정처럼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으나 논리의 일관성이랄지 치열한 고심의 흔적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결정문을 살펴보았다.

 

틀렸다아무 것도 없었다결정문의 요지는 '통합진보당은 NL이고 이석기 일당이다그들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들이 행한 내란 관련 회합비례대표 부정경선중앙위원회 폭력관악을 지역구 여론조작은 오롯이 당의 활동으로 귀속된다그러므로 해산'이라는 결론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뿐 이를 뒷받침할 아무 근거가 없다.

 

당황스러웠다아직 확정판결이 나지 않은 이석기의 행동을 유죄로 전제한다 해도 말이다하나도 둘도 아닌과반수인 다섯도 정족수인 여섯도 아닌달랑 한 명 빼고 전부 다 모인 여덟 명씩이나 되는 헌법재판관이 저런 형편없는 의견에 동조해 정당해산이라는 무서운 결정을 내렸다는 게 충격적이었다이제 법은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수단이라는 탈을 벗어던지고 강자를 위한 강력한 무기라는 날것으로만 기능하게 되었다그것도 무려 헌법의 이름으로.

 

정당해산심판제도의 의의와 기원

 

정당해산심판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8조 제4항은 방어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위헌적인 정당을 해산시킬 수 있다는 근거규정이라기 보다는헌법에 규정된 엄격한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강제적으로 해산할 수 없도록 하여 정당을 보호하려는 취지가 강하다는 게 학계의 다수설이다헌법재판소 또한 이를 부정하지 않았거니와이 조항이 헌법에 도입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스토리를 잘 알고 있을 헌재가 해산의 칼날을 그 따위로 휘둘러서는 안 될 일이었다.

 

때는 1958이승만 정권 때의 일이다. 1952년과 1956년 두 번의 대선에서 연거푸 2위를 차지하며 이승만의 정적으로 떠오른 죽산 조봉암독립운동가이며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졌던 그는 보수 야당이던 민주당에 입당하는 대신 진보당을 창당하여 독자 노선을 걷는다대중적 인기가 높던 그를 두려워하고 꺼려했던 건 자유당만이 아니었는지, 1956년 대선 당시 민주당은 신익희 후보가 사망하여 본의 아니게 후보 단일화가 된 상황에서도 조봉암을 지지하는 대신 '신익희 추모표'(라고 쓰고 무효표라고 읽는다)를 찍도록 독려함으로써 이승만의 3선을 방조하는 졸렬한 선택을 하였다.

 

가까스로 집권은 했지만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과 자유당은진보당 창당 과정에서 북한의 공작금이 흘러들어갔다는 이유를 들어 조봉암을 간첩죄로 체포하였다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변변치 않았고 결정적인 증인이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는 등 좌충우돌결국 1심을 맡은 유병진 판사는 간첩죄는 무죄국가보안법위반과 불법무기소지죄만을 유죄로 인정하여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였다정권 차원의 의지가 엿보이는 사건에서 이 정도의 소신 돋는 판결을 하는 건나름대로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쉽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실제로 유병진은 오늘날 일베와 어버이연합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반공청년단의 '용공판사타도'와 같은 비난에 시달린 끝에 법관 연임 심사에서 탈락법복을 벗어야 했다.

 

검찰은 당연히 항소했고 2심과 3심은 간첩죄 부분을 유죄로 인정하여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이후 국내외의 다각적인 구명노력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1959년 7월 31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명백한 사법살인당시 검찰의 지휘권자이며 사형집행을 결재한 법무부장관이 홍진기그러니까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아버지이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는 것은 그 분의 애국심에 대한 경의의 표시라고 해두자.

 

그럼 진보당은 어떻게 되었나위 판결에서 "북한 괴뢰집단의 주장과 같은 평화통일을 정강정책으로 하"며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된 "결사"라고 언급된 진보당은 조봉암에 대한 재판이 열리기도 전인 1958년 225일 당시 정당 사회단체의 등록을 주관하던 정부기관인 공보실의 등록취소라는 행정처분으로 허망하게 와해되었다.

 

당시 정부는 위법한 통일방안 주장, 북한 간첩과 접선, 공산당 동조자들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려 기도했다는 세 가지를 진보당의 등록취소 사유로 들었으나, 먼훗날 대법원은 "진보당의 경제정책은 사회적 민주주의의 방식에 의하여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부작용이나 모순점을 완화·수정하려는 데 있는 것이지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체제의 골간을 전면 부인하는 취지가 아님이 분명하고진보당의 정치형태 역시 주권재민과 대의제도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 등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내용이 아님이 분명하다"며 "진보당의 통일정책인 평화통일론이...이 사건 재심대상판결 당시 우리 사회의 주도적인 통일론이었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을 들어 곧바로 진보당의 통일정책이 헌법에 위배된다거나 또는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주창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대법원 2011. 1. 20. 선고 2008재도11 전원합의체 판결)고 하여 당시의 헌법에 의하더라도 해산될만한 빨갱이 집단이 아니었음을 명백히 하였다.

 

이처럼 정권에 위협적인 정당을 용공으로 몰아 손쉽게 해산시켜버린 뼈아픈 경험을 교훈삼아, 4.19 혁명으로 집권한 제2공화국 정부는 헌법 차원에서 정당해산심판제도를 규정하여 반대파라고 막무가내로 해산시킬 수 없음을 명확히 하였다. 2014년의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처럼 법도 논리도 없이 해산결정을 내리라고 준 권한이 아닌 것이다.

 

헌재결정문 디벼보기

 

헌재 결정에서 통합진보당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는 근거로 제시된 사안은 내란 관련 회합비례대표 부정경선중앙위원회 폭력관악을 지역구 여론조작 등이다물론 이 가운데 잘했다고 칭찬할만한 일은 하나도 없으나관악을 지역구 여론조작의 경우 개별 지역구에서 일어난 일탈적 행위로 당 전체에 책임을 묻기에는 무리가 따르며 비례대표 부정경선이나 중앙위원회 폭력사태의 경우에도 당내 문제로 엄밀히 따지면 통합진보당과 당원들이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사안이다당내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당해산을 명할 것 같으면 ''자로 시작하는 정당들 또한 자유롭지 않다는 걸 헌법재판관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내란 관련 회합은 아직 상고심 계속 중이지만항소심 판결을 전제로 해도 RO의 실체나 구체적인 내란음모 여부가 입증되었다고 보긴 어렵다굳이 문제를 삼는다면 이석기의 내란선동 정도인데그가 당 소속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의 언동이 당을 대표해서 이루어졌다고 볼 근거는 없다헌재의 주장처럼 이석기와 추종자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다면 비례대표가 되기 위해 부정경선을 해야 할 필요까지도 없었을 터정의당과 분당 전의 일이기는 하나 이석기는 부정경선 사유로 당에서 제명되기 직전까지 갔었다이는 통합진보당이 헌재의 주장처럼 순결한(?) NL 빨갱이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반증한다.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이라니?

 

그럼에도 당 소속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내란음모같이 숭악한 일에 연루되었다면 그 당에도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이들에게진보당 사건 말고도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죄로 사형을 당했던 흑역사를 알려주고 싶다.

 

1969년 중앙정보부는 유럽과 일본을 거점으로 한 북한 지하 공작단 사건을 발표하며현직 국회의원 김규남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초청연구원 박노수 등 다수의 관련자를 구속하였다이 가운데 박노수와 김규남은 영국 유학 시절 동베를린을 왕래하다가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지령을 받고 금품을 수수하였으며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72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이 사건은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이었다는 점 때문에 1969년 국내 10대 뉴스에 오를 정도로 센세이션한 사건이었는데, 더욱 놀라운 건 김규남이 야당이나 무소속이 아닌 여당(민주공화당소속이었다는 점간첩을 국회의원으로 공천했을 뿐 아니라 남로당 출신의 당 총재를 모시고 있던 공화당은 얼마 뒤 소위 3선 개헌안이라 불리는 헌법개정안을 날치기 처리하는 등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활동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으나당시에는 헌법재판소가 없었기 때문에 위헌정당으로 해산당하기는 커녕 이후로도 10년 동안 위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불법구금과 가혹행위 등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결정을 내렸고,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선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나 이미 40년이 지난 일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책임질 수도 없었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북한의 위협이 여전히 남아 있는 분단국가에서 국가안보를 위해 어느 정도 자유와 권리의 제한은 불가피하며그 옛날에는 더욱 그러했을 거라고그러나 정작 김규남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은 박정희 정권 18년 가운데 북한의 위협이 가장 적었다고 볼 수 있는 7.4 남북 공동선언 발표 9일 후(1972년 7월 13)였다북한 탓도 어디까지나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법도 논리도 없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종북 논란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이 겉으로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실제로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다고 단정 지었지만현실적으로 선거를 비롯한 정상적인 정당 활동을 통해 달성하기엔 불가능한 목표로 보이므로 남아 있는 방법은 폭력 뿐헌재는 이에 대해서도 '(통합진보당 주도세력은저항권적 상황이 전개될 경우 무력행사 등 폭력을 행사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헌법제정에 의한 새로운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여 집권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정당화하였다그러나 헌재의 주장대로라면 당이 강제로 해산당하고 재산이 몰수되는 정도의 '저항권적 상황'이 발생했는데도 폭력투쟁으로 나가지 않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설령 그들이 정말 과격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일정한 세력을 갖추고 있고 실제로 조직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이상정당해산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제도권 밖으로 내보내 지하화하는 것과 제도권 안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선관위의 회계감사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직간접으로 통제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사회 안정에 기여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법도 논리도 없는 결정을 진지 빨며 반박하려니 참개그콘서트 정명훈의 말마따나 '아이고 의미 없다'. 결국 이 모든 건 법보다는 힘의 문제우리는 완벽하게 패한 것이다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게 패배가 아니라, 10년씩이나 집권을 했으면서도 국가보안법을 일자일획도 고치지 못한 것이, '천안함은 북한 소행이라고 볼 수 없다'도 아니고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정부의 발표를 신뢰한다그러나 법률가로서 직접 보지 않은 사안에 대해 확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 야당 추천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지키지 못한 것이그러면서도 공안검사 출신 헌법재판소장이 취임하는 걸 막지 못한 것이임기도 한참 남은 헌법재판관이 검찰총장이 되겠다고 검증 동의서에 사인할 정도의 검찰 공화국을 만든 것이 우리의 패배다정치적 유불리만을 따지며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하거나 혹시나 불똥이 튈까 싶어 선 긋기 하려는 이들이여다음 차례는 당신이라는 걸 잊지 말지어다 



출처:http://www.ddanzi.com/ddanziDoctu/34663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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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비극 - 한국 대통령의 국군통수권 ①

  
▲ 김영삼 전 대통령. ⓒ 뉴스1

1994년에 미 클린턴 대통령이 영변을 포격하는 계획을 막 실행하려던 시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폭격 계획을 중단하라, 미국이 전쟁을 벌여도 나는 단 한 명의 한국군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하여 전쟁을 막았다고 위기 직후에 말한 적 있다.

이 말에 미 백악관이 발끈했다. “한국 대통령으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은 적 없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백악관은 대통령 전용 전화선의 통화기록까지 공개했다. 이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은 더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김 전 대통령은 미국이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도 한마디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했다. 그렇게 북한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던 대통령이건만 막상 전쟁의 그림자가 얼씬거리자 제일 먼저 겁을 집어 먹었다.

마침 북한에 가 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받고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주한미군 지하벙커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로 김 주석과의 대화내용을 알리며 전쟁준비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이 사실을 전했다. 카터의 회고에 따르면 ‘정상회담’이라는 말에 “김 전 대통령의 아래턱이 목 밑으로 떨어지더라”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더라”고 했다.

‘미국이 북한에 전쟁 준비 중’이라는 데 안절부절 못한 YS대통령

2010년 11월에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하는 급박한 위기상황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2012년에 퇴임 직전의 이명박 대통령은 “내가 전투기로 북한을 응징하자고 했는데 군이 반대해서 실행하지 못했다”고 언론에 밝혔다.

이 말에 현역 장성은 물론 예비역들까지 발끈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투기로 응징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합참의장이던 한민구 대장은 이후 국방장관으로 임용되기 위한 인사청문회에서 진실을 밝혔다. “공대지 미사일을 장착한 F-15K를 출격하도록 한 것은 합참의장이던 자신의 판단이지 이 대통령으로부터는 전투기를 동원하라는 지시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지시는 “단호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는 게 전부였다고도 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 대통령에게 청와대 참모들이 “전투기 동원은 유엔사 정전시 교전규칙 상 미군과의 협의사항”이라며 “전투기 동원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이런 보고가 있었다면 “미군과 빨리 협의하라”고 하면 될 것을 이 대통령이 지레 겁을 먹고 전투기 동원은 안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 버렸다.

  
 

그 때문에 위기 다음날이 11월 24일에 이 대통령의 첫 지시가 “유엔사 정전시 교전규칙을 개정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을 유엔사 탓으로 전가한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엔사령관이자 연합사령관인 월터 샤프 대장이 발끈했다. 11월 30일에 월터 샤프의 편지가 국방부 장관 앞으로 왔다. “전투기 동원 여부는 한국 정부가 자위권 차원에서 결정 사항이니 미군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적혀 있었다.

MB는 연평도 포격시 ‘전투기 동원하라했다’고 거짓말

항상 안보와 보수를 입에 달고 다니는 한국 대통령들은 막상 위기가 벌어지면 어쩔 줄 모르며 미국의 눈치만 본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뭘 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국방부와 합참의 고위 직위자들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김태영 국방장관은 “전투기 동원은 미군과 협의사항”이라고 하다고 경질되었고, 그 후임인 김관진 국방장관은 “우리 정부가 결정할 일”이라고 전임자의 말을 뒤집었다. 과연 누가 말이 옳은 것인가를 판단하기에 앞서 도대체 한국의 통수권자와 그 부하들은 전쟁에 대한 기초지식이나 있는 것인지, 위기관리가 뭔지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한 번도 자신이 국군통수권자라고 생각한 적 없이 오직 미국만 바라보는 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연평도 포격 위기가 끝나고 일주일 후인 11월 말에 김민석 대변인은 “자위권과 유엔사 정전시 교전규칙 적용여부에 대해 국제법 학자에게 연구용역을 주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앞으로 전쟁 위기가 발생하면 국제법 교수나 변호사에게 “쏠까요, 말까요?” 물어보겠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박근혜 대통령은 어떠한가? 더 기가막힌 사실이 있다. (계속) 

※ 외부 기고의 글은 국민TV뉴스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한국미래발전연구원과 동시에 게재됩니다.

김종대/<디펜스21+> 편집장 kukmin2013@gmail.com



출처 : http://m.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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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주의는 죽었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 김동진

 

판사와 검사의 책무는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것이다. 선거에 의하여 다수의 지지를 얻은 정권은 때때로 힘에 의한 ‘패도정치(覇道政治)’를 추구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국가의 핵심기능을 좌지우지하고,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마음 내키는 대로 통치를 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아무리 다수결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정신의 한 축인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유린하는 것이다.

헌법이 판사와 검사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면서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에 임하라”고 하는 준엄한 책무를 양 어깨에 지운 것은, 판사와 검사는 정치권력과 결탁하지 아니한 채 묵묵히 ‘정의실현(正義實現)’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전제돼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판사와 검사에게 ‘신뢰(信賴)’를 부여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들의 심연(深淵)에 있는 출세욕, 재물욕, 공명심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사심(私心)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는 상황을 보고 있다.

2013년 9월부터 올해의 이 순간까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 정권은 ‘법치정치’가 아니라 ‘패도정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한 소수의 양심적인 검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관하여 의연하게 꿋꿋한 수사를 진행하였던 전임 검찰총장은 사생활의 스캔들이 꼬투리가 되어 정권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2013년 9월부터 10월까지 검사들을 비롯한 모든 법조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밝히려고 했던 검사들은 모두 쫓겨났고, 오히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덮으려는 입장의 공안부 소속 검사들이 국정원 댓글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이 한 편의 ‘쇼(show)’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각종 언론은 이런 상황을 옹호하면서 나팔수 역할을 하였다. 내가 바라본 2013년의 가을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기 시작한 암울한 시기였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였다. 당연히 구조됐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어이없게 죽었다. 인명구조를 담당한 해경의 대응에 직무유기적인 형사책임의 요소가 있었으므로, 마땅히 그런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언론보도가 이루어져야 했고, 또한 검찰이 선장과 선원 등을 수사함에 있어서도 해경의 구조 담당자들을 아울러 수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법치주의 정신에 입각해 보면 당연히 진행돼야 할 이러한 과정들이 정권에 의하여 차단이 되었고, 국민들은 현 정권이 뭔가를 은폐한다는 의혹을 품은 가운데 사태가 커지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궐선거에서 현 정권이 승리하면서 이런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세월호 유족들은 아직도 민간기구(특별조사위원회)에게 수사권과 공소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어제 국정원 댓글 판결을 선고하였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개입’을 한 것은 맞지만, ‘선거개입’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공직선거에 관한 무죄판결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위법적인 개입행위에 관하여 말로는 엄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동기참작 등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슬쩍 집행유예로 끝내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찾아 출력한 다음 퇴근시간 이후에 사무실에서 정독을 하였다. 판결문은 204쪽에 걸친 장문(長文)인데, 주로 개별적인 증거들의 취사선택에 관하여 장황하게 적혀 있고, 행위책임을 강조한다는 원론적인 선언이 군데군데 눈에 띄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선거개입의 목적』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공직선거법위반죄를 무죄로 선고하였다.

판결문을 모두 읽은 후에, 나는 이런 의문이 생겼다.

(1) 2012년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인데, 원세훈 국정원장의 계속적인 지시 아래 국정원 직원들이 조직적인 댓글공작을 했다면, 그것은 ‘정치개입’인 동시에 ‘선거개입’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도대체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이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가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일까? ... 이것은 궤변이다!

(2) 판결문의 표현을 떠나서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독백을 할 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니...』 허허~~ 헛웃음이 나온다.

(3) 재판장은 판결의 결론을 왜 이렇게 내렸을까? 국정원법위반죄가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원세훈 국정원장에 대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하였으니, 실질적인 처벌은 없는 셈이다.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에 국정원장이 정치적 중립의무를 저버리고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처리해도 되는 것인가? 이 판결은 ‘정의(正意)’를 위한 판결일까? 그렇지 않으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심사를 목전에 앞두고 입신영달(立身榮達)에 중점을 둔 ‘사심(私心)’이 가득한 판결일까? ...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다시 돌아와서, 판사님들과 법원 가족들에게 고사 성어 하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중국의 고사 성어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는 권력을 잡고서 허수아비 왕 호해에게 사슴(鹿)을 바치면서 “말(馬)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인 호해는 “왜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말하며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부분의 신하들이 조고의 편을 들면서 “말이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단지, 몇 명의 신하들만이 “말이 아니라 사슴입니다.”라고 진실을 말했는데, 환관 조고는 나중에 진실을 말했던 그 신하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하겠다. 나는 어제 있었던 서울중앙지법의 국정원 댓글판결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국정원이 2012년 당시 대통령선거에 대하여 불법적인 개입행위를 했던 점들은 객관적으로 낱낱이 드러났고, 삼척동자도 다 아는 자명(自明)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백한 범죄사실에 대하여 담당 재판부만 “선거개입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지록위마가 아니면 무엇인가? 담당 재판부는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2013년에 형사정책연구원이 성인남녀 17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법집행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3%가 “돈과 권력이 많으면 법을 위반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수단으로 “법(法)”을 꼽은 응답자는 43%로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3년 전에 전국의 성인남녀 2937명을 대상으로 한 법률소비자연맹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2%가 “법을 지키면 손해”라고 대답해 법치주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4. 3. 26.자 세계일보 참조).

사법부가 국민들의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지록위마의 판결』을 할 때마다, 국민들은 절망한다. 지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제발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국민들은 더 큰 “뭔가”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제발 상식과 순리가 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논어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다. 신뢰가 없는 곳에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여당/야당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누군가 “편 가르기” 풍조에 입각하여 나를 향하여 “좌익판사”라고 매도한다면, 그러한 편견은 정중히 사양하겠다. 나는 판사로서,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몰락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뿐이다. ... 법치주의 수호는 판사에게 주어진 헌법상의 책무이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4894.html?_fr=mt1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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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월호 사건의 철저한 규명을 위해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기소권을 주자는 유족들의 요구에 대해 법을 좀 안다는 새누리당 의원들이나 법조계 원로라는 인사들이 ‘사법체계를 흔드는 발상’이라고 훈계한다. 하지만 상식과도 어긋나는 허튼 논리들이 많다. 일반인에게 낯선 법률 용어를 동원해 사태를 호도하려는 게 아니라면,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이 점에 대해선 아래에서 더 이야기하겠다).

 먼저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사법체계의 본령이 진실을 밝혀 정의를 세우는 것일진대, 진실과 정의로 나아가는 길을 더 넓히기 위해 기존의 사법체계에 수정을 가하면 안되는 것일까?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이 질문에 답을 해주는 사례가 있다.

 1993년 4월 영국 런던에서 18살 흑인 청년 스티븐 로런스가 일군의 백인 불량배들에게 살해됐다. 인종 혐오 범죄의 정황이 짙었다. 하지만 경찰 수사는 의문 투성이였다. 용의자를 지목하는 많은 제보가 답지했지만 2주가 지나도록 아무도 체포하지 않았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수사를 담당한 경찰 조직 자체가 인종차별주의에 젖어 있었다. 어떤 경찰관은 한 용의자의 아버지인 마약상으로부터 뇌물을 상납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심지어 정보과 형사를 동원해 유족들을 사찰하고, 유족들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공작도 벌였다. 검찰 역시 증거가 부족하다며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 유족들이 나서 5명의 용의자를 기소했지만(영국에서는 피해자도 기소권을 갖는다), 경찰의 부실한 수사 결과를 뒤집지 못해 모두 무죄 판결이 났다.

 하지만 유족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각계의 지원도 이어졌다. 결국 1998년 내무장관의 지시로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조사 책임자의 이름을 딴 맥퍼슨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는 경찰 수사가 총체적 부실·부패와 인종차별로 얼룩졌음을 밝히면서, 정의 실현을 위해 ‘이중위험 금지 원칙’(Double Jeopardy)을 폐지하자고 제안했다. 같은 혐의로 다시 재판을 받게 해선 안된다는 이 원칙이 유지되는 한, 이미 무죄를 선고받은 로런스 사건 용의자들을 다시 단죄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중위험 금지는 무려 천년을 이어온 영국법(Common Law)의 대원칙이었다. 이를 깨버리자는 대담한 제안에 영국 사회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영국 의회는 살인·성폭행·유괴·마약 등 중대 범죄에 대해 이중위험 금지 원칙을 폐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2005년부터 시행에 들어간 이 법은 이름도 ‘형사정의법’(Criminal Justice Act)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이중위험 금지와 비슷한 일사부재리 원칙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헌법을 바꾸는 정도의 사법체계상 대격변이었다. 경찰은 재수사에 착수해 2명의 용의자 옷에서 로런스의 혈흔 등을 발견했다. 2011년 이들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건 발생 18년 만에 뒤늦게 찾아온 정의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무고한 죽음과 이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한 국가의 치부를 바로잡기 위해 개헌 수준의 결단을 내린 영국 사회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00명이 넘는 무고한 죽음과 국가의 총체적 무능이라는 참사를 겪고도, 그 진상을 제대로 밝혀 안전한 나라를 만들자는 유족들의 특별법 제정 요구가 외면당하고 있다. 새누리당과 일부 보수진영은 고작 ‘사법체계를 흔든다’는 핑계나 대고 있다. 그나마도 그릇된 핑계들이다.

 

 2. 세월호 진상조사위에 수사·기소권을 주는 것은 위헌 문제가 있는 것도, 사법체계를 흔드는 것도 아니다.

 검사의 권한인 수사·기소권을 민간인에게 주는 게 문제라고 하는데, 이런 논리를 펴는 이들은 이미 도입·정착된 특별검사 제도에 애써 눈을 감아버리고 있다. 특검이란 게 바로 민간인에게 검사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특검법을 위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국회가 특검법처럼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조사위 위원 한명(유족들의 특별법안에 따르면 판사·검사·변호사의 직에 10년 이상 재직한 자)에게 검사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무런 법적 걸림돌이 없다. 이와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행정부의 권한인 수사·기소권을 입법부에 넘겨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는 입법부 소속이 아니라, 특검처럼 독립기구로 운영되는 것이다.(엄밀히 기소권은 행정부가 전적으로 독점하는 권한도 아니다. 현행 법체계는 재정신청 제도를 통해 사법부인 법원에도 일정한 기소권을 부여하고 있다.)

 최근 들어, 피해자인 유족들에게 수사·기소권을 주는 것은 현형 법체계에서 금지된 ‘자력구제’에 해당한다는 논리를 펴는 이들도 있다. 이는 자력구제(또는 사력구제)의 뜻도 제대로 모르는 주장이다. 이때 자력구제란 국가만이 행사할 수 있는 형벌권을 개인이 사적인 물리력을 써서 직접 실현하는 행위, 예를 들어 범죄자를 응징한답시고 흠씬 두들겨 패거나 납치해 가두는 따위의 행위를 뜻한다. 유족들이 이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력구제 논리를 펴는 이들은 아마도 ‘사인 소추(기소)’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인 소추는 피해자나 제3자가 증거를 수집해 가해자를 직접 기소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만이 기소권을 가지는 우리나라에선 낯선 제도다. 일부에선 복수심에 의한 기소를 허용하는 이상한 제도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영국 등 영미법계 나라들에서 오래 지속돼왔고 독일·프랑스 등 대륙법계 나라들도 부분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제도다.(앞서 소개한 대로 스티븐 로런스의 유족들도 이 제도를 이용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세월호 유족들이 직접 기소권을 갖자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법률로써 구성된 독립된 진상조사위에 기소권을 주자는 것이므로 이는 사인 소추와 거리가 멀다.

 나아가, 유족들의 요구대로라면 ‘사적 재판’을 허용하는 셈이 된다거나 사법권을 침해하게 된다는 주장마저 나오는 모양이다.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진상조사위에 아무리 수사·기소권을 줘도 재판은 엄연히 법원이 하게 된다. 유족들은 결코 재판권을 요구한 적이 없다.

 유족들이 일부 추천권을 가지는 진상조사위 위원에게 수사·기소권을 부여하면 수사·기소의 공정성이 침해된다는 논리도 있다. 하지만 수사·기소의 공정성은 (로런스 사건에서 보듯) 수사 주체가 용의자 쪽에 치우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용의자 쪽에 유리하도록 수사를 대충 하거나 증거가 나와도 눈감는다면, 사건은 묻히게 되고 이를 바로잡기란 매우 어려워진다. 역으로 수사 주체가 피해자 쪽에 유리하도록 수사를 열심히 한다면? 이는 오히려 모든 수사 주체에게 요구되는 바다. 국가의 형벌권 행사 자체가 죄에 대한 응보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혹여, 의욕이 앞선 탓에 수사 대상자의 인권을 침해한다거나 증거를 조작하는 등 불법적인 수사를 하지 않을지 걱정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선 법원의 영장심사나 언론의 감시 등 견제장치가 늘 작동하고 있다. 결국 수사 주체가 유족들의 뜻을 받들어 무리한 수사를 하지 않겠냐는 논리는, 범인을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정의감에 불타는 강철중 같은 형사나 검사는 수사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논리나 마찬가지다. 수사 주체가 피해자로부터 완전히 절연돼야 한다면, 국민 모두가 피해자인 수많은 공익침해 사건(뇌물·국고횡령·조세포탈 등)은 누가 수사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는 청와대·정부가 조사 대상인 만큼 오히려 대통령과 여당이 수사 주체 선정에 개입하는 게 더 중요한 공정성 문제를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시 청와대가 조사 대상이 됐던 ‘내곡동 특검’ 때 야당이 특검 추천권을 가졌던 건 그래서 순리인 것이다.

 

 3. 청와대와 집권 여당이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 지금의 태도를 고수한다면, 유족들은 18년이 지나도 진실의 발끝에조차 당도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치부가 영영 가려지기를 원하는 것일까. 유족들이 지쳐 쓰러져 세월호의 기억마저 침몰하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지금 사태의 배경에 그런 냉혹한 계산이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니길 바란다.

 로런스 사건에 대해 덧붙이자면, 건축가를 꿈꿨던 로런스의 이름을 딴 왕립학회 건축상이 제정되는 등 각계에서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자메이카 출신 이민자인 로런스의 어머니는 2013년 귀족 작위를 받고 상원의원으로 취임해 인종차별 문제 해결에 힘쓰고 있다.

박용현 탐사·기획 에디터 piao@hani.co.kr


출처: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24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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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요한바오로2세 교황이 남한을 방문했을 때, 이 나라는 독재에 의해 탄압받고 상처 입은 상태였다. 4년

전, 전두환 장군은 특수부대를 이용해 광주 항쟁을 유혈로 진압하였고, 수백 명의 시민이 사망하였던 것이다.

 30년이 지난, 8월 14일 목요일, 프란치스코 교종이 5일간 방문일정으로 이 나라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 나라는

 민주주의이긴 하나 여전히 상처받고 있다: 4월 16일, 페리[여객선] 세월호의 침몰이 이 나라에 깊은 상처를 주

고 있는 것이다. 약 3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다.

5개월이 지나도 한국은 여전히 충격에 빠져있다. 한국인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이 참극을 직접 지켜봤던 것이다.

 아이들은 배가 옆으로 기운 채 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의 휴대폰을 이용해 그들의 부모들에게 문자메시지, 사

진, 동영상들을 보냈다. 즐거워하다가 공포에 질리고 끝내 절망하는 [모습들을]. 회피, 관할권의 갈등, 속수무

책 [속에]. 아이들은 죽어 갔다.

서울은, 그 거대성(확대지향성)으로 인해 모든 것이 과잉인 도시이자, 격렬한 리듬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분위

기가 무겁다. 최빈곤 계층에 대한 대한 지식인 사회의 불안감이 매우 크다. 투자자들에 따르면, 제도에 대한 신

뢰의 위기로 인해, 한국인들이 과거에 신뢰했던 "굳건하고 확실한" [경제]발전 모델에 대한 회의감들이 배가되

고 있다. 정치평론가 심재훈씨는 "기차는 정시에 떠나는데, 승객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말한

다.


<한국인들에게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1960년대에 경이적인 경제성장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한국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다. [세월호]참사가, 주민

의 안전을 희생해서라도 성장과 이익에 우선권을 인정한 정치-경제 시스템의 결함을 드러낸 것이다. 언론은 이

 비극의 원인에 대한 개인적이고 대중적인 관심들의 뭉치로부터 매일 매일 부차적인 실(이야기)을 뽑아 냈다.

한국인들에게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사고 직후부터 추락한 소비는 계속 침체 중이다. 서울 중심의 광화문 광장

과,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장이 세워졌던 서울시청 광장에는 수많은 노란 리본들(노란 국화는 애도의 상징이

다)로 장식된 흰색 텐트들이 자발적인 참여자들로 인해 추모의 장소가 되고 있다. 한 게시물에서는 "이것은 여

러분의 아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읽을 수 있다. 리본들 위에는 가책과 연민의 메시지들이

적혀 있다.("용서해 주세요") 통행인들도 노란 리본을 달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동대

문 시장의 한 상인은 말한다.

40년전,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노동자가 이 구역의 작은 작업실에서의 [열악한] 근로 조건에 항의 하면

서 분신하였다. 1961년 권력을 잡은 박정희 장군의 독려 속에서 "한강의 기적"이 시작되었다. 고기 맛에 굶주린

 기업가들이 앞장선 계획경제로 한국은 세계정복에 나섰던 것이다.



<투기꾼들의 탐욕에 사로잡힌 국가>

성장은 달아 올랐다 : "Palli, Palli" ("빨리, 빨리"). 지도층들이 조장하는 긴박감에 나라는 긴장상태로 유지되었

다. 대다수는 생산 위주의 목표에 동조했다. 40년동안 한국은 번영의 문들을 열고 나왔다. 1980년대 말의 민주

화는 이러한 리듬을 감속시키지 않았다. 1인당 국민소득 25000달러, 세계 경제 15위로,한국은 최근 몇 년 동안

에는 때로 터무니없는 야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성공하는 듯 했다: 녹색 첨단 기술, 지능형 도시들

등. 그러나 "경제 민주화"는 제 때 이뤄지지 않았다. 사회적 결속력은 와해되고, 중산층들은 성장의 혜택에 대

한 환상을 잃어 버렸다.

사람들은, 흑막 뒤에선, 언제나 이익이 안전 기준에 선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소기업들에서 매년 3000여

명이 근로 사고로 사망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지난 20년간 재난들이 반복되었다 (다리 붕괴, 전철 사고

 등). 세월호의 침몰은 비뚤어진 사회의 불안감을 폭로했던 것이다.

노인들은 국가 부흥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자신들이 왜 그토록 많은 노력과 희생을 용인했는지 자문한다. 

(여기에는 가톨릭 교회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결국은 투기꾼들의 탐욕에 사로잡힌 국가가 생겨난 것이다. 젊

은이들은 고도의, 그러나 고통스런, 교육 체제 속에서 몇 년을 보낸 후에도 취직에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들을

 여객선 속에서 버림받았던 아이들과 운명적으로 동일시 한다. 그들은 그들의 선배들처럼 진압 경찰들과 대치하

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망(SNS)을 통해 모이고, 촛불집회에 참가한다. 

   "독재시대에 우리 부모님들은 하나의 [타도] 대상이 있었다. 오늘날의 고통은 제도로부터 나온다. 무엇에 대

항하여 투쟁하나?" 

시청광장의 추모식장 근처에 있던 한 학생이 자문한다.

<생산지향적인 기세가 비등하기 시작하다>

젊은 세대는 이 재난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기 위해 국회에서 다투고 있는 모든 진영의 정치인들 그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 다수 집권당은 야당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기능에 필

요한 최소한의 정치적 합의마저 부족해 보이며, 생산지향적인 기세가 비등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혁을 약속 했다. 그러나 2013년에 권좌에 올랐지만, 이미 그 미숙함들로 인해 권위가 실추되

었다. [개혁] 작업은 어려울 것이다. [왜냐면] 이 나라는 지지자들의 조직과, 지역, 혈연 또는 파벌 등의 연대 

조직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 또한 퇴직 공무원들의 관행화된 "사기업으로의 이직"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

회 시스템의 모든 단계에 선물(뇌물)과 특혜가 기생하며 조직들의 기능을 [방해하고 있다].

성리학의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위계체제에 대한 존중과 희생정신이 국가 부흥에 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어떤 한계점에 이르렀다. 후원과 야합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러한 관행들은 법률적인 관점에선 

비난 받을 수 없지만,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격렬한 충돌과 계엄령을 동반한 태국 식의 혼돈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한국의 젊은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Philippe Pons (<르몽드> 서울 특파원)

번역: 파리이장


Le pape François va découvrir une Corée du Sud en plein doute

LE MONDE |  • Mis à jour le  |Par 
Lorsqu'en 1984, le pape Jean Paul II se rendit en Corée du Sud, le pays était muselé et meurtri par une dictature. Quatre ans auparavant, le général-président Chun Doo-hwan avait recouru aux unités d'élite de l'armée pour mater dans le sang une émeute à Kwangju, dans le sud-ouest du pays, causant la mort de centaines de civils. Trente ans plus tard, le pape François arrive jeudi 14 août pour une visite de cinq jours dans une démocratie, mais dans un pays également meurtri : le naufrage, le 16 avril, du ferry Sewol, qui a fait près de 300 morts, pour la plupart des enfants, a affecté profondément le pays.
Cinq mois après, la Corée du Sud reste sous le choc. Les Coréens ont assisté à la catastrophe en direct à la télévision. De leurs mobiles, les enfants prisonniers du ferry couché sur le flanc qui flottait encore envoyaient à leurs parents des messages, photos et vidéos, amusés, affolés puis désespérés. Tergiversations, conflits de compétence, impréparation : ils périrent.
Séoul, ville de tous les excès par son gigantisme, vit à son rythme trépidant habituel. Mais l'atmosphère est pesante. Le malaise est sensible, des milieux intellectuels aux couches les plus humbles de la population. La crise de confiance dans les institutions se double de doutes sur un modèle de développement, « robuste et sûr », selon les investisseurs, dont les Coréens étaient fiers. « Les trains partent à l'heure, mais les passagers ne savent pas où ils vont », commente l'analyste politique Shim Jae-hoon.
POUR LES CORÉENS, LE DEUIL N'EST PAS TERMIN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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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regardsurcoree.blogspot.fr/2014/08/blog-post_14.html?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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