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⑥ 박정희의 언론장악 (3) ‘신동아’ 필화 사건
12명이나 불려다녔는데… 모든 언론이 비굴한 침묵

박정희는 체질적으로 언론을 싫어했다. 5·16 군사반란 직후 최고회의를 출입했던 어떤 기자는 박정희가 언론을 ‘가상적’으로 취급한다고까지 말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군을 동원해야 할 만큼 격화된 것은 아니었는데도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그래야 언론에 재갈을 물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상적’들의 고지 언론사를 하나씩 빼앗은 박정희는 황용주(부산일보·문화방송), 서정귀(국제신보), 왕학수(부산일보), 조증출(문화방송), 김여원(서울신문) 등 대구사범 동기생들을 언론사 사장으로 앉혔다. 이들 중 몇몇은 자신이 사장을 맡은 개별 언론사의 장악에 그치지 않고 언론사 경영을 통해 얻은 노하우로 1964년의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당시 일부 언론에 대한 보복조치라는 몹쓸 꾀를 내기도 했다.

박정희 벌벌 떨며 “왜 내가 빨갱이입니까?”
1964년의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에 이어 1966년 <경향신문>이 강제매각 당하자,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박정희 앞에 몸을 낮추었다. 삼성재벌이 창간한 신생 <중앙일보>는 1966년 9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이병철이 궁지에 몰리자 정부를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국일보>는 사주 장기영이 1964년부터 3년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있었고, <조선일보>는 사주 방일영이 박정희의 가까운 술동무인데다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현금차관을 도입하는 특혜를 받았기 때문에 제대로 정부 비판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언론 통제가 교묘했던 것은 이들 언론이 정부 비판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해야 할 때는 입을 다물어버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는 물고 늘어지며 권력과 언론은 서로 적당히 체면을 세워주었다.

문제는 <동아일보>였다. 지금은 형편없이 추락하여 부동의 3위로 전락하였지만, 1960년대 중반 동아일보의 위세는 대단했다. 방송사를 소유한 동아일보의 반정부적 논조는 박정희 정권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는데, 이 당시 박정희 정권의 대언론 정책은 대동아일보 정책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가 언론에 대해 갖고 있는 악감정의 표적 역시 동아일보였다.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 사흘 전인 1963년 10월12일 동아일보 정경부장 김성열은 박정희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공세적인 질문을 퍼부은 것은 김성열이 아니라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동아일보가 사상논쟁을 크게 다룬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박정희는 담배를 든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흥분하면서 “왜 내가 빨갱이입니까?”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급기야 탁자 위의 담배함을 들어 바닥에 힘껏 후려치고는 그냥 나가버렸다. 다음 날 동아일보는 박정희가 여순사건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형을 받은 사실을 호외를 찍어 대대적으로 뿌렸다. 투표 당일 <동아방송> 아나운서가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박정희에게 소감을 묻자 박정희는 “동아방송 거짓말이나 하지 마쇼”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박 정권 아래서 동아일보의 수난은 예정된 것이었다. 박정희는 언론과의 관계 개선을 꾀해 동아일보 사장을 16년6개월 지낸 최두선(최남선의 동생)을 첫 국무총리로 지명했는데, ‘방탄내각’은 채 반년도 가지 않았다. 계엄선포 직후인 1964년 6월6일 일군의 공수부대 장교들은 박정희의 경호실장 박종규의 사주를 받아 동아일보를 습격하여 난동을 피웠다. 1965년 9월7일에는 동아일보 변영권 편집국장대리의 집에서 폭발물이 터져 집이 크게 무너졌고, 그 한 시간 뒤에는 동아방송 조동화 제작과장이 괴한 4명에게 납치되어 심한 구타를 당했다. 1966년 4월25일에는 박정희를 비판하는 ‘소신은 만능인가?’라는 글을 쓴 최영철 기자가 폭행을 당했다. 이어 7월20일에는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 권오기가 집 앞에서 두 명의 괴한한테 테러를 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모든 테러사건은 당국이 범인을 ‘안 잡았기’ 때문에 미궁에 빠졌다.

1971년 4월 조선일보사 편집국 앞에 내걸린 ‘기관원 출입금지’ 안내문.

경향신문이 강제 매각된 뒤
언론들은 정권 앞에 몸을 낮췄다
문제는 동아일보였다

정부 차관도입 비리를 보도한
신동아 기자 등 12명이 조사받고
간부 3명은 사표까지 냈지만
이를 보도한 곳은 없었다
“신문이 스스로 자살을 택했다”
탄식과 비난이 쏟아졌다

‘신문사 출입기자’ 기관원의 언론사 상주
이 무렵 박정희는 김형욱에게 언론담당 조정반을 중앙정보부 내에 설치하라고 특명을 내렸고, 김형욱은 국내담당 제3국장 전재구의 책임하에 각 신문사 담당 요원을 임명했다. 김형욱은 “당시 중정의 언론담당반들의 공작 내용”은 “기껏해야 신문사 주변에 얼쩡거리며 영향력 있는 기자나 간부들을 만나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협조를 사실상 사정사정하고 자극적인 기사를 완화하도록 무마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변명했지만, 정보기관원들이 신문사에 상주하게 되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정보부, 치안국, 시경, 관할경찰서에 보안사까지 보통 4, 5명의 기관원이 신문사 안팎을 배회했다. 기자들이야 청와대다 국회다 검찰이다 출입처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신문사에 나와 죽치고 있는 정보기관원들을 당시의 언론인들은 “신문사 출입기자”라고 야유했다.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이라는 장기집권 음모의 첫발을 떼면서 동아일보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으려 했다. 그 와중에 발생한 것이 1968년 11월의 <신동아> ‘차관’ 기사 필화사건이었다. 신동아는 1968년 12월호에서 막대한 차관 도입의 의미와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김진배, 박창래 두 기자가 심층취재한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글은 외자 도입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20억달러에 가까운 외국빚을 얻어오는 데 얼마의 돈이 정치자금 또는 뇌물조로 바쳐졌을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필자들은 지난 6년간 지불보증 과정에서 뜯은 돈이 상업차관 8억달러의 5퍼센트만 잡아도 4천만달러, 즉 100억원은 훨씬 넘으리라 추산했다. 이 글에 나오는 ‘5퍼센트 커미션설’, ‘정치자금 4인 공동관리설’,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 등등은 당시 정가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정부에서 외채 총액도 발표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일반 독자들은 활자로는 처음 접하는 희한한 얘기였다.

독자들도 충격을 받았지만, 정치자금을 주무르는 것으로 지목된 김성곤(이름이 거명된 것은 아님)이 김형욱의 표현을 빌리면 “길길이 뛸 만도 했다”고 할 만큼 기사 내용은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김성곤은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을 부추겨 동아일보를 손보라는 박정희의 특명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김형욱 스스로 “도대체 어디다 시비를 걸 수가 없을 만큼 빈틈없이 꾸며놓고 있었다”고 인정하듯이 ‘차관’ 기사 어디에도 꼬투리를 잡을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점이다.

중앙정보부는 그동안 이 기사의 필자인 박창래와 김진배 이외에도 신동아 주간 홍승면, 신동아 부장 손세일,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 유혁인 등을 연행하여 조사했는데, 아무리 중앙정보부라지만 이북방송이 이 기사를 인용보도한 것만으로 반공법 위반으로 잡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동아일보 주필인 천관우가 ‘신동아 필화’라는 긴 사설을 집필한 것은 정보부가 이 사건의 처리를 놓고 고심중인 11월29일이었다. 천관우의 사설은 장행훈의 표현을 빌리면 호랑이의 수염을 건드린 꼴이 되었다. 정보부는 사태를 극한으로 몰고 가 부사장 겸 발행인 김상만, 주필 천관우, 신동아 주간 홍승면, 신동아 부장 손세일 등을 다시 연행하여 홍승면과 손세일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이때 문제 삼은 것은 ‘차관’ 기사가 아니라 10월호에 게재된 미국 미주리대 교수 조순승의 ‘북괴와 중소분열’이라는 논문이었다. 영어원문을 번역하면서 김일성을 ‘공비 두목’이라 하지 않고 ‘빨치산 지도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차관’ 필화 사건 이전에 신동아가 정보부의 지적을 받고 11월호에 정정기사를 실어 일단락된 것인데, 정보부가 다시 들고나온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구속된 홍승면과 손세일을 석방하고 법적 소추를 하지 않는 대신 동아일보에 관련자 전원의 해직을 요구했다. 동아일보는 천관우, 홍승면, 손세일의 사표를 받았다. 당시 사장인 고재욱은 사위인 손세일의 사표를 받는 참담한 일을 겪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박정희가 미워했던 김성열도 해직시킬 것을 요구했는데, 김성열은 사실 신동아 필화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회사에서는 주영특파원으로 출발 예정인 박권상 대신 김성열을 런던으로 귀양 아닌 귀양을 보냈다. 1975년 백지광고 사태 때와 다른 점은 해직된 세 사람이 곧 복직했다는 것이다. 정보부도 모르는 척 해주었다.

신동아 필화사건이 충격적인 이유는 동아일보 기자와 간부가 모두 12명이나 불려 다녔는데 중앙 일간지 중 어느 하나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1969년 초 기자협회보는 신동아 사태에 대한 언론보도를 특집으로 다뤘다. 당사자인 천관우는 이 사건을 “한 자그마한 필화사건”이라 부르며 “패군지졸에게 할 말이 있을 까닭이 없다”면서도 “필화사건 자체는 비교적 경미했지만, 그 사건의 여파가 도리어 경미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선우휘의 당당한 비굴
편집인협회장인 조선일보 주필 최석채는 “한국의 언론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이상으로 경영주의 손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있다”며 신문사를 “일종의 성”에 비유했다. 그는 이 성에는 경영주, 편집인, 기자가 공존하고 있는데 “이대로 나가다가는 이 성 안에서 불신이 싹트고 반란이 일어나 성주를 향해 주민들이 선전포고를 하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는 1969년 초에 벌써 “언론의 자유가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는다는 사실은 제2차적인 문제”라며 “언론이 스스로 단결하여 싸우지 못하고 성문을 열어 외적을 불러들인다면 누구에게 구원을 청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최석채는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없지 않다면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노조의 결성이고 둘째는 신문사의 주를 사원들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조선일보 회장을 지낸 원로 언론인 홍종인은 “한국의 신문들은 언론자유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중대한 위기에 빠져” 있는데, “한국의 언론을 대표한다는 서울의 소위 ‘대신문’이란 신문들은 자살·자멸의 길을 스스로 택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홍종인은 “있는 것을 없는 것같이 만드는 사람들이, 없는 일을 있는 것같이, 또 있어서는 아니될 일을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아니 말하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라고 우려했는데, 이는 사실 ‘할 말은 하는 신문’ 조선일보의 앞날을 정확히 예언한 것이다.

여러 신문에서 사회부장만 9번을 지낸 오소백은 “다른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동아일보 자신도 자기네 필화사건 보도에 갈팡질팡 주책이 없었던 것”이라며 이는 “허약이 아니라 비굴”이라고 규정했다. 오소백은 신문의 정신적 지주가 무너진다면 신문사에는 건물과 휴지만 남게 될 것이라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용감한 신문인’도 필요하지만 “더 절실히 요구되는 건 비굴하지 않은 신문인이 보다 많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문이 기자와 편집인의 손을 떠났다면 최석채의 진단도 예리한 것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선우휘가 보인 ‘당당한’ 태도였다. 대선배 홍종인에게 보내는 답글에서 그는 “오늘날 언론이 왜 그렇게 됐는지 그것은 뻔한 것이 아닙니까? 비굴이 좋아서 비굴할 언론인이 어디 있겠으며, 타락하고 싶어 스스로 타락하는 신문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했다. 그는 홍종인에게 “과연 언론의 자유란 언론인이 싸우면 얻어질 수 있는 것인지” 가르쳐 달라고 들이대면서 현재의 언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론이 그토록 약하다는 인식을 투철히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존경하는 홍종인 선생님’께 “후진과는 달리 선생님은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될 입장”에 있으니 “선생님께서 화살을 밖으로 돌려 권력에 대해 과감한, 그리고 강력하게 발언”해 달라고 촉구했다.

나라가 망해갈 때 “이놈들아 의병도 안 일으키고 뭐하느냐”라는 노스승의 질타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셔야 합니다”라고 가둬 놓고 굶겨 죽였다는 기막힌 옛이야기의 재판일까? 다행인 것은 최석채도, 홍종인도, 천관우도 죽지 않은 것이지만, 불행인 것도 그들이 그때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 ‘대세에 순응’하여 수많은 친일 글쪼가리를 남긴 것처럼 시간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최석채, 홍종인, 천관우 같은 한국 언론의 큰 별들도 결국 군사정권에 협력했다. 별이 진 깊은 어둠, 다가오는 새벽을 기다리며 <문화방송>(MBC), <한국방송>(KBS), <연합뉴스>, <와이티엔>(YTN), <국민일보>, <부산일보> 등의 노조는 외적이 임명한 성주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1331.html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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