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명백(MB)을 아십니까?
(서프라이즈 / 뉴요코리안 / 2012-07-12)
원조종북 박정희와 전향 등 닮은 꼴, 박정희마저도 경계한 MB의 과거는?
<검찰이 종북사건(?)으로 몰아가자 바로 꼬리 내린 이명백(?)을 아십니까>
혹시, 이명백(MB)을 아십니까? 모르신다고요?
그렇다면 이명박(MB)은 아십니까? 아신다고요?
이분이 아마 칠레를 방문한 자리에서 최근 종북논란과 관련하여 교포와의 간담회 자리에서 "그런 것들(종북)은 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서 국민지지를 받지 못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언론들이 보도한 바 있지요?.
그 당시 이 발언은 대통령까지 최근의 종북논란에 가세하려 한다는 등 야권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종북보다 더한 국가 내란죄를 범한 바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하 MB)이 원조 종북이라 불리는 박정희처럼 자신의 뼈저린 전향(?) 경험에서 우러러 나온 발언으로 보입니다. 사실이냐고요?.
자 그럼 무슨 말인지? 역사속으로 진실탐구(Fact Finding)를 해보기로 할까요.
우선 이명백(?)은 누구일까?
이 이명백이라는 이름은 MB의 이름이 6.3항쟁 당시 잘못 사용되거나 기재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MB, 이명박은 누구인지 알아보자.
위키 백과는 이명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명박(李明博, 1941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기업인출신 정치인이며 현재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다.
학생운동가? 아 아마 6.3 항쟁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키 백과 사전의 이 부분 설명을 더 보자.
6·3 항쟁 또는 6·3 시위, 한일협상 반대운동은 1964년 6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상에 반대하여 일으킨 운동이었다.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시 절정에 이른 한일국교 정상화회담 반대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6월 3일 저녁 10시[1]에 선포한 계엄은 7월 29일 해지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매년 6·3 항쟁을 남조선 청년 학생봉기이라고 부르면서 기념하고 있다.
북한이 매년 기념을 한다? 그 이유(?)는 언급이 없으니 일단 넘어가고 이 위키 백과에 있는6·3 항쟁 설명 중, MB 관련 글을 보자.
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한일협정 반대 이슈를 선동하여 배후 조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하고, 3일 오후 6시 30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금지와 진압, 언론검열, 대학휴교 등 주동자 검거에 돌입했으며, 이 조치로 시위의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천120명이 검거되고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7]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이던 이명박은 이명백으로 이름이 잘못 알려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까지 경찰이 침투하고 수사망이 좁혀 오자 스스로 자수하게 된다.
우선 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배후 조종하였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 사건으로 내란 및 소요죄로 관련자를 처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명박은 이름이 이명백으로 잘못 알려져 피할 수 있었지만, 수사망이 좁혀오자 스스로 자수했다는 언급도 있다. 일단 이명백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의문이 풀린 셈이다.
다음으로 같은 보수주의 계열이지만 그동안 MB의 출생의혹, 병역의혹, 좌익사상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온 지만원 씨는 6·3항쟁 당시 MB의 역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해방 후 4.19 직전까지, 간첩들은 폭력시위의 전위대로 노동자 무직자들을 이용했지만, 4.19에서부터는 학생들을 폭력시위의 전위대로 이용했다가 가장 먼저 이용당한 학생들이 고건, 이명박, 이재오, 류근일 등이었다. 이들은 간첩에 의해 의식화된 빨/갱/이들이다
1. 이명박은 박정희를 증오하는 모임인 6·3동지회 지휘
이명박은 1941년생, 고대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한때 박 대통령을 괴롭힌 운동권이었다.
북한 대남공작단은 한일협정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켜 학생들을 선동했다. 그 결과 1964년 6월 3일, 1만에 이르는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4.19와 같은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 박정희 정권을 무너트리고, 남침을 유도하려 했던 국가전복 사건이었다. 대한민국 내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북한의 전문 공작단과 이에 동조하는 소수의 좌익들이 있었고, 이들이 학생들을 포섭하여 전면으로 내세우는 방법으로 소요의 불을 지폈다. 도예종(당시41세ㆍ74년 2차 인혁당사건으로 사형)및 김정강(金正剛ㆍ서울대 정치학과 3년)은 국가보안법위반, 내란소요 등의 혐의로 각각 현상금 10만원씩 전국에 수배됐고,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이른바 '데모 3인방'에 대한 현상금도 1만원씩 내걸렸다.
이런 빨갱이 집단에 이재오와 함께 적극 가담한 이명박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지금도 300명 정도로 규합된 6·3동지회가 결성돼 있고, 회장은 이재오가 맡고 있다. 지휘부는 소위 6·3동지회 3인방으로, 이재오-이명박-손학규가 잡고 있다. 6·3동지회는 반박정희 동지회이며, 지금도 이들은 6·3동지회 활동을 통해 박정희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은 고대 4학년, 상대 학생회장으로 6·3사태에 적극 가담하여 현상금이 붙어 있었으며, 손학규는 경기고 3학년으로 6·3사태에 적극 가담했다.
필자의 이번 진실탐구의 본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사실(fact)관계가 많이 어긋나는 지만원 씨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은 특히 그 당시의 학생운동이 북한의 조정을 받았다는 주장을 동의하는 것은 더더욱 아님을 거듭 밝힌다. 다만 그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종북이라는 용어만 없었을 뿐이지, 이러한 민주화 운동 등을 북한의 사주로 연계해 판단하려 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이를 잠시 인용하였을 뿐임을 밝혀둔다. 그렇다면, 진실탐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사실만을 언급하도록 하자.
서슬 퍼렇던 시기에 '국가 내란소요죄' 혐의자가 집행유예 판결…왜?
우선 청와대의 누리집에 공식적으로 이명박 현 대통령의 이 6·3 항쟁 부분과 관련한 설명은 "그는 상과대학 학생회장 시절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6·3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여 반 년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석방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이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조작까지 해가며 사형까지도 선고 집행했던 이 서슬 퍼렇던 시기에 국가 내란소요죄이고 학생운동의 핵심 운동가였는데도 불구하고 집행유예라?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MB는 그 당시 고려대 상과대 학생회장으로 6·3 항쟁과 관련하여 학생운동의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MB가 당선이 확정되던 2007년 12월 20일 <연합뉴스>는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 중인 6·3 사태 당시 경찰 문건 '고대 데모 사건 개요'에는 시위 주동자인 '구국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당시 상대 학생회장이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6.3항쟁 당시 경찰이 작성한 고대 학생조직 계보도> |
이어 "이 문건에는 시위 주도단체로 지목된 '구국투쟁위원회'의 조직도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상대 4학년으로 단과대 학생회장이던 이명박 당선자는 법대, 정경대의 학생회장과 함께 부위원장으로 나와 있다"며 또한 "이에 정부는 3일 오후 6시 30분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진압과 주동자 검거에 돌입했으며 이 당선자는 피신 끝에 6월 15일 이경우 당시 법대 회장과 함께 검거돼 내란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와 함께 현재 고려대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대신문 창간 60주년 특집전에는 6.3사태 주도자로 구속된 이명박 당선자의 1차 공판 기사도 전시돼 있다"며 "'공소 사실을 부인'이라는 제목이 달린 1964년 9월 26일자 고대신문에는 수의를 입은 이 당선자의 사진도 함께 실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명박의 6.3 공판 사진 가운데 이명박의 얼굴이 보인다.> |
당시 검찰이 종북(?)으로 몰아가자… '질서문란 미안" 바로 꼬리 내린 MB?
진실 탐구 작업을 하다 보면 드러나지 않은 여러 사실들이 발견된다. 왜 이명박이 아니고 이명백이라는 가명(?)을 썼거나 혹은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검거를 피할 수는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드러난 사실처럼 MB는 곧 자수하고 재판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위에서 일부 언급한 것처럼 당시 검찰이 경찰서 기물 파손은 물론 북한과 연계된 국가 문란이나 소요죄 등 내란죄 혐의로 강력히 몰아가자 MB는 그런 공소사실을 강력히 부인하며 "위정자들에게 우리의 분노를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데모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6•3사태 같은 사회적 분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여 미안하다"며 재판장에서 선처를 부탁해 MB의 행동을 종북화(당시는 이런 표현이 없었다. 하지만 의미 전달상 쓰는 것임을 밝힌다) 하려는 세력에게 바로 꼬리를 내렸다.
사실 확인을 위하여 1964년 9월 22일 자 경향신문 보도내용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이날 고대생 이경우 군과 이명박 군은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데모를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한 데모로 이끌기 위해 고대 내에 구국투쟁위원회를 조직한 것이지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한 것은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이들에 대한 사실심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검(檢)=지난 6월 1일 데모를 하기 위해 구국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는데 왜 데모를 하려고 했나? ▲답(答)=수차 학생들의 데모가 있었으나 위정자들의 각성이 없었고 군인법원난입사건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학생들을 분개케 해오던 중, 몇 명의 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 국가의 장래를 얘기하다 데모로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시켜보려고 결사하게 된 것이다. ▲검(檢)=데모의 목적이 박정희 씨의 하야(下野)를 원한 것이 아닌가? ▲답(答)=그렇지 않다. ▲검(檢)=구호에 "박정희 하야 하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답(答)=꼭 하야시켜야겠다는 것이 아니고 과격한 구호를 내걺으로써 위정자들의 각성을 바라는 뜻에서 지나친 구호를 쓰게 된 것이다. ▲검(檢)=학생들의 데모로 사회질서가 문란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답(答)=위정자들에게 우리의 분노를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데모 한것이지 6·3사태 같은 사회적 분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검(檢)=6·3사태를 4·19학생혁명과 비교해본 적이 없었나? ▲답(答)=비교해볼 필요가 없었다. 현 정권은 자유당 12년의 독재정권과는 다르다. ▲검(檢)=자유당 때보다 더 부패했단 말인가? ▲답(答)=그렇다. ▲검(檢)=다른 대학이나 한국학생총연합회와 사전에 횡적 연락을 갖고 데모한 것이 아닌가? ▲답(答)=우연한 일치일지는 몰라도 사전 연락이 없었다. ▲검(檢)=학생들의 데모에 국민들이 호응하니 4.19와 같은 사태를 야기치 않았느냐? ▲답(答)=4.19때는 부정선거나 마산에서 김주열군과 같은 죽음으로 전국민의 분로를 산 것이었으나 군인법원난입 사건과 같은 것과는 다르다. ▲검(檢)=학생들은 6.3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나? ▲답(答)=6.3 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되어 대외적으로 국가 위신을 추락시켰으며 대내적으로는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여 미안하게 생각한다. |
<1964년 9월 22일자 <경향신문> 공판관련 보도 > |
이에 따라 10월 2일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이명박, 이경우, 박원규, 김실, 이정재 등 데모학생 5명에 대해 보석을 허가, 오후에 석방했다. 이후 보석으로 풀려난 다섯 사람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 1964년 12월 22일, 이명박, 이경우, 김실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박원규, 이정재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학생운동가 출신? 남로당활동 사실 탄로나자 바로 꼬리내린 박정희와 닮은꼴…
이상에서 살펴본 사실(fact)을 정리하자면 6.3항쟁이 북한의 조정에 의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명박은 고려대 학생조직의 핵심이었으며 이명백(?)이라고 이름이 잘못(?) 알려져 도피할 수 있었으나 이내 자수하여 재판을 받았다.
또한 내란죄를 범했다는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하였으나 이명박은 이 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다만 공판 과정에서 6.3 데모로 국가 위신을 추락시키고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한 점 등을 사과(미안)하는 등 전향(변신)성이 인정되어 집행유예의 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실질 감옥생활은 반년도 아닌 공판 기간이었던 몇 달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주영회장에 자기랑 닮은 변신(?)의 귀재 MB 믿지 마라. 조언했건만…
익히 알려진 대로 MB는 이러한 내란죄까지 범하면서 박정희를 증오하였으나, 졸업 후 취직이 안 되자 청와대에 진정서를 넣고 청와대가 이 진정을 받아들여 현대건설에 입사하게 된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청와대 누리집도 이 부분과 관련하여 "운동권 학생이라는 이유로 취직을 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청와대와 담판 끝에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청와대와의 담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청와대가 MB의 현대건설 입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이후 MB는 본인의 자서전 등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의 총애를 받고 출세 가도를 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위키리크스 등에 의해 밝혀진 미 비밀외교 전문에 따르면, 2007년 2월 2일 당시 알랙산더 버시바우 대사는 미 본국에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 MB에 관한 비밀 보고서를 전송한 바 있다. 이 문서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에게 "MB를 조심하라(look out for him)"고 전했는데 이를 정 회장이 "MB를 돌봐주라(take care of him)"로 잘못 들어 MB가 출세가도를 달린 이유 중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고 이 버시바우 대사는 미 본국으로 타전한 바 있다.
<2007년 2월 2일자 미 본국보고 주한대사 비밀외교 전문 > |
아무튼, 사실관계야 (관심이든 조심이든) 밝혀지지 않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을 조직해서 자신의 하야를 요구하는 등 자신의 과거처럼 종북(?)의 혐의가 있었던 MB가 변신하여 이제는 현대건설에서 전혀 반대의 길을 걷고 있음을 보고 당시 박정희가 정주영 회장에게 어떠한(?) 관심을 표명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MB, 이제 "내 과거는 북한연계 내란죄가 아니다" 주장해도 알아줄 국민 없어...
또한, 이 재판장에서의 전향 후에도 취직이 안 되자 청와대와 담판하였고 그 덕에 현대건설에 입사했다고 청와대 누리집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MB는 아마 지금도 그 당시 국가기관이 MB 등 학생운동 지도자가 북한 등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판단한 것은 터무니없는 날조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자신은 오직 순수하게 한일협정을 반대하고 정부 부패를 규탄한 학생운동가였을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MB는 이제 그러한 주장에 하나를 더 보태어야 한다. 순수했던, 지령을 받았던, 저 이명백, 아니 이명박, "MB는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저의 행동이 국가 위신을 추락시켰으며, 사회질서를 문란케 한 점을 반성하여 바로 살아남았습니다"라고 그리고 "그래도 취직이 안 되어 청와대와 담판하여 당당히 현대건설에 입사했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러하지 않는다면 MB 말대로 "종북세력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일지도 모르나, 그보다도 이 내란소요죄 사건이 북한과 직접적 연계는 없었던 종북사건(?)이었다고 변명을 한들, 이제는 MB 말을 믿고 지지해줄 국민도 없는 현실이다.
뉴요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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