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중근
1879. 9. 2.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시다.
30세 전후의 청년 안중근은 조선500년 사직이 다 했음을 직감하고
구국의 길에 나서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청국 령 만주로 넘어간다.
이때 만주에는 안중근과 같은 뜻을 가진 조선청년들로 넘쳐났다.
안중근은 이들과 의기투합하여 조선독립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1909. 3. 5. 이를 확약하기 위하여 12인의 왼손 무명지 끝 마디를 자른다.
12인의 손가락 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로 태극기의 4괘 자리에 돌아가면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글씨를 써 넣어 “건”, “리”. “감”, “곤”을 대신한다.
“대(大)” “한(韓)” “독(獨)” “립(立)”
안중근 의사가 남긴 수형(手形)에서 네 번째 무명지가 끝의 새끼손가락보다 약간 짧게 나타나는 게 바로 이 단지 때문이다.
그러니 그 수형은 안 의사께서 단지를 하신 1909. 3. 5이후에 수결하신 것임이 확실하다.
1909. 10. 26,안중근의사,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재무장관과 열차회담을 마치고 자신의 열차로 돌아가던 우리겨레의 철전지 원수 이토히로부미를 대한독립군 의병중장자격으로 15개 죄목으로 처형을 하시다.
일설에는 이토를 저격하고 나서 러시아경찰과 왜경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러시아어로 “대한 만세”를 외칠 때 흔들었던 태극기가 그 단지동맹현장에서 그린 태극기라고 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은 것 같다.
1910. 3. 26. 그가 그렇게 걱정했던 한일병탄을 5개월 3일 앞두고 형이 집행되어 31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을 하시다.
2, 박정희 !
1917. 11. 4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어미 뱃속을 빠져나옴
안중근의사께서 세상에 태어나신지 38년 뒤이고, 순국을 하시고 나서 7년 뒤였다.
1937년 20세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훈도(오늘날의 초등학교 선생)가 되어 문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음
당시는 일본이 전 아시아를 점령하고 미국까지 넘보던 시절로서 조선의 일본병탄은 영원할 것 같은 시기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만주와 상해에서는 눈물겨운 독립투쟁이 전개되고 있던 시기이다.
당시는 전 조선백성이 애써 농사지은 쌀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모두다 왜놈에게 빼앗기고, 왜놈들이 배급을 준 썩은 깻묵과 콩비지 그리로 초근목피로 죽지 못해 연명을 하던 시기이다.
오늘날도 초등학교 교사는 선망의 직업이지만 당시의 초등학교 선생은 조선 사람으로서는 꿈과 같은 직업이었다.
우선은 의식주에 걱정이 없었고, 조선 사람으로서 한 번 끌려가면 8~90%는 죽거나 불구가 되는 강제징용에서도 훈도는 예외가 되던 시절이다.
20대 초반의 팔팔한 청년 박정희는 출세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길이 매국이 되었던 애국이 되었건 그런 것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출세만 할 수 있으면 되었다.
그렇게 좋은 직업인 훈도를 다 떨어진 짚신짝 내 팽개치듯 미련 없이 차 버리고 출세의 길을 찾아 만주로 건너가서 왜군장교가 되는 군관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초등학교훈도를 하느라 박정희로서는 3년 허송세월을 보낸 바람에 연령초과로 군관학교의 입교를 거절당했다.
여기서 박정희가 생각해 낸 것이 안중근 의사를 본뜬 손가락을 째는 것이었다.
군관학교에 입교거절을 당한 박정희로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고 군관학교에 입교만 할 수 있다면 목숨을 내놓는 것 빼 놓고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큰 한지 한 장을 사다놓고 미련 없이 제 이빨로 제 손가락을 우지끈 깨물어 쏟아져 나오는 피로 일필휘지로 써 갈겼다.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
“조국 일본과 히로히또 천황폐하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천 번인들 못 바치겠으며 뼈가 가루가 된다 한들 어찌 망설일 수가 있겠느냐!”
한 손가락에서 피가 다 나오면 다른 손가락을 깨물고, 그 손가락에 피가 멈추면 또 그 옆 손가락을 깨물고, 오른손 손가락이 다 뭉뚱그려져 조막손이 되어도 관계없었다.
그저 번쩍이는 일본도를 옆구리에 차고 가죽장화 신고 말 타고서 조선독립군의 목을 벨 수 있는, 대일본제국 히로히또 천황폐하의 신군(臣軍)만 되면 그만이었다.
원래 글씨, 특히 붓글씨에는 조금은 소질이 있었다.
그 혈서가 왜의 괴뢰 국 만주신문에 실리고, 히로히또의 눈에 까지도 뜨이게 되어 만주국신경군관학교에 특별입학이 하락되고, 다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일본 육사에 편입되어 일본이 패망하기 바로 1년 전에 꿈에도 그리던 왜군장교가 되어 만주로 금의환향을 했다.
그 때는 상해에서 출발한 임시정부가 중국천지를 떠돌며 헤매는 노숙자 신세가 되어있을 때였다.
아마 박정희가 한 5년 먼저 태어났고, 왜군장교를 5년 정도 일찍 시작했다면 우리의 피로 얼룩진 만주독립운동사가,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독립운동사가 되었을 것이다.
광복이후의 변절, 밀고, 악행 등은 건너뛰고 1961. 5. 16이후 18년의 행적은 세상에 낱낱이 밝혀졌으니 그 더러운 죄상을 구태여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69. 10. 26, 아비는 제 막내딸보다도 어린 여성들을 사흘거리로 납치 해다 성폭행으로 순결과 정조를 짓밟는 것을 보다 못한 김재규가 박정희의 골통에 콩알 두 방을 쑤셔 박아 매국과 변절과 밀고와 반란과 살인과 성도착증으로 점철된 더러운 60평생의 막을 내리게 했다.
3. 오늘은 현충일
도대체 어디를 찾아가서 누구의 넋을 기리고, 누구의 묘소 앞에 꽃다발을 바쳐야 한단 말인가?
안중근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어서 효창공원의 김구주석 묘소 밑 윤봉길과 이봉창의사의 묘 옆에 가묘만 덜렁 있을 뿐이고,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던 분들의 후손들은 오늘도 어느 뒷골목 헤매면서 빈병과 빈 박스를 주어 어렵게 연명을 하거나 물대포 맞고 전경에 쫒기면서 오늘도 “민주회복!”을 외쳐 대야만 하고
박정희와 육영수의 뼈다귀는 국립묘지의 최 상석에 자리 잡고 자신과 같이 왜정시대 일본헌병 오장으로 독립군을 때려잡던 김창룡의 굄을 받으며, 그 아래 누워계신 수많은 순국선열들을 바라보며 왜 그렇게 세상을 어리석게 살았느냐고 비웃으며 더러운 뼈다귀를 썩혀 가고 있다.
그 딸은 대한민국의 다음 번 대통령을 가등기나 설정해 놓은 양 설쳐대고 있다.
이게 2012년의 대한민국이다.
하늘에 계시는 순국선열들께서 왜놈인 이명박이 중얼거리는 추도사를 어찌 들으실 것이며, 왜군장교의 딸이 휘젓는 나라꼴을 어찌 내려다보신단 말인가?
올 12월 19일 대한민국 국민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려나?
이명박과 박근혜를 내 치고 대한독립(大韓獨立)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박근혜의 치마꼬리 잡고 대를 이어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의 길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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