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묵자를 알려주마(5) – 묵자의 天과 하느님

2012. 09. 27. 목요일
백골프

 

묵자의 天과 하느님 1

앞서 묵자의 인성론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자로 天. 앞으로 이것을 하늘, 하느님 두 단어로 섞어서 이야기할 것인데요. 인간 마음 밖에서 어떤 기준을 찾고 그 기준으로 인간을 만들고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성악설을 지지하는 사상가 중 하나인 묵자. 그 묵자는 하늘 내지 하느님의 뜻을 기준으로 삼아 인간과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묵자만 하늘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한자로 天은 근래까지도 동아시아 사상과 사회를 이해하고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이고 개념이고요, 하나의 큰 열쇠란 말이죠. 천과 관련된 아이디와 패스워드 없이 동아시아 사상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상제를 가지고 자신들의 지배와 권력의 정당성을 말하던 은나라, 그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나서 주나라는 자신들의 지배 권력의 정당성을 , 천명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천명을 받아서 다스리는 것이다, 우리 뒤에 천명, 천명을 내린 천이 있다고 그들은 말했죠. 그 뒤로 쭉 천은 동아시아 사회를 이끌어가고 설명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관념과 사상의 뿌리였는데 당연히 묵자만 천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묵자 이외에도 많은 사상가들이 자신의 사상과 이념의 근거, 정당성을 말하는데 있어서 천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묵자의 천은 다른 사상가들의 천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또 다른 맥락으로 사용되었으며 또 사상체계 내에서 천이 차지하는 비중이 달랐습니다. 그 차이는 무척이나 컸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다른 학파, 사상가들에 비해 天에 관한 진입장벽이 아주 낮았다는 점. 하지만 天이 묵자 사상에서 차지한 비중이 아주 컸다. 그리고 天이 그냥 당장 주어진 현실과 현실의 지배질서를 단순히 설명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이념, 제도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뭔가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천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묵자의 천은 단순 하늘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도 번역이 가능하죠, 다른 사상가, 학파의 천과 달리요. 다른 학파의 천은 하느님으로 번역이 잘되질 않고 그리 번역하면 상당히 어색합니다.

 

하느님이라……. 하느님하면 기독교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텐데 묵자의 하느님이 뭐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하느님과 닮은 구석이 있고 그런 신학들의 하느님을 생각하셔도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굳이 무리해서 연결짓는 건 제 능력밖의 일인 거 같고. 우선 묵자에 국한시켜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묵자가 말하는 천이 뭐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 학파의 천과 구분되고 또 그 천은 누구의 의지와 목소리를 대변하는 지를요.

 

일단 이점을 말씀 드릴께요.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어떻게 천을 바라보는지 모두 언급을 하면서 충실히 설명을 드릴텐데요, 지루해질 수도 있지만 묵자 사상의 천만이 지닌 개성과 특징을 제대로 보여드리기 위함이니, 잘 좀 따라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열다섯이 되어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 주관이 바르게 섰으며 마흔이 되어 현혹되지 않았고 쉰이 되어서 천명을 알게 되었고 예순이 되어서 귀가 순하게 되어서 일흔이 되어서……. -논어 위정편-

 

-공자가 광지방에서 위기에 처하자 말하길 “문왕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文은 여기에 남지 않았느냐 하늘이 장차 이 文을 없애고자 한다면 후에 죽은 자들은 이 文과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도 이 문을 없애지 못한다면 광의 사람들이 나를 죽인들 무엇하겠느냐?” -논어 자한편-

 

-공자가 말하길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렸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느냐?” -논어 술이편-

 

-자기의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性을 안다. 자기의 性을 알면 天을 알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보존하고 자기의 성을 배양하여 天을 섬긴다. -맹자 진심-

 

-천의 운행에는 일정한 항상됨이 있다. 이는 성군인 요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폭군인 걸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응하여 잘 다스리면 길하고 그에 응해서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흉하다. 농사일에 힘쓰고 절약한다면 하늘도 가난하게 할 수 없고 의식을 충분히 갖추고 부지런히 일한다면 하늘도 병들게 할 수 없다. 도를 따라서 어기지 않는다면 하늘도 화를 내릴 수 없다. – 순자 천론-

 

소와 말에게 각기 네 개의 발이 있는 것 이것을 천이라 한다. -장자 추수편-

 

군자다운 사람이 되어라. 정치 일선에 나서기 전에 수양으로 완성된 인간이 되어라, 인을 하라, 의를 행해야 한다, 예로 공동체를 다스려보자라고 하는 유가, 구체적으로 공자와 맹자. 그들이 도덕적, 윤리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항상은 아니어도 종종 천을 언급하곤 했습니다. 공자보단 맹자가 더 많이 천을 언급했고 또 그것을 더 비중 있게 다루며 자신의 사상 중심부에 더 가까이 위치시켰는데요. 둘의 사상에서 천은 어떤 도덕적 사명을 부여하는 것으로서 도덕과 윤리의 맥락에서 이야기 되어진다는 점 그리고 어떤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맥락에서 이야기 되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 말고 다른 유가사상의 목소리를 좀 들어볼까요. 중용이라고 있습니다, 유가 경전이고 이른바 사서중의 하나인 중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주 멋들어지고 또 현학적으로요.

 

“하늘이 명하여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성(性)이라 하며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하며 도(道)를 따르고 받아들이려 공부하는 것을 敎라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중용이란 책을 흔히 이렇게 설명들 합니다. 유가 사상의 관념적, 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여 유가의 우주론과 인간관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라고. 그런 중용의 첫 머리는 이렇게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네요. 하늘이 명하여 사람에게 부여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성, 사람은 날 때부터 그러한 하늘이 준 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그래서 모든 가치를 실현할 능력과 책임을 지닌 존재이고 그런 성을 따라 확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道, 즉, 사람의 길이라고 천명한 중용의 이 첫머리, 이 구절은 유학의 천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순자의 천관념을 담아내지 못하고 주로 성리학적 맥락에서 해석되어왔지만 명쾌하게 유학의 천관념을 제대로 보여주는데 저 구절을 깊이 있게 보지 않아도 우리는 유가의 천이 어떤 도덕 내지 인간이 해야할 당위와 연관되는 것임을 잘 알 수 있죠. 사람은 도덕적인 하늘에게서 부여 받은 성을 지닌 존재고 그 성을 잘 키워 항상 도덕적, 윤리적으로 살아야하는 존재, 그런 존재로 이해하시면 무난합니다.

 

이런 천관념과 그 천관념 하에서 이해되는 인간관의 뿌리를 살펴 볼려면 유가의 시조인 공자까지 소급해야야하는데 앞서 말씀 드린대로 공자의 천은 어떤 도덕과 연관되고 도덕적으로 살라는 사명을 내리는 존재로서 어떤 종교적인 냄새까지 풍깁니다. 그런 천에 대해서 공자는 종종 위의 예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맹자만큼 비중 있게 또 자주 말하진 않았어도 도덕과 연관되는 천을 인정하고 그런 천은 자신에게 어떤 사명을 부여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천으로. 위에서 인용한 발언 말고도 술이편에서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는데 환퇴가 어쩌겠느냐, 라고 했고 팔일편에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로가 위나라의 실세인 요부 南子와 스승이 만나려고 할 때 볼멘 소리로 따지자 자신의 결백을 하늘에 맹세하며 내가 거짓되면 하늘이 날 싫어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유랑 중 죽을 고비에 몰려서도 하늘이 文(바람직한 도덕문화겠죠)를 없애지 않고자 하는 이상,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말했는데요. 이런 장면들에서 天은 도덕적 사명을 내리는 존재일 뿐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살고 윤리적으로 살려는 공자를 뒤에서 지켜주는 존재로 이야기 되어지는 것 같네요. 이렇게 논어에서 공자의 천은 도덕적으로 독해가 되고 또 경외의 대상으로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공자는 천에 대해 이런 태도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거리 두기도 같이 하면서 천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하려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거늘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등 주술적 태도나 비합리적인 사고를 멀리하는 공자는 천에 대해 마냥 종교적 태도로 접근하지는 않고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제자 자공이 “스승에게서 천도와 성에 대해서 듣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공자가 제자에게 말하길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철이 운행하고 만물이 자랄 뿐이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합니다.

 

이런 공자의 모습은 천에서 신비적이고 종교적 색채가 갈수록 엷어지고 인간과 교감하는 천의 의미 역시 쇠퇴하는 등, 합리적으로 천을 이해하려는 당시 시대 상황의 반영일 것입니다. 그리고 천에게서 신비적이고 종교적 색채를 완전히 지우고 인간과 교감하는 천을 부정하는 흐름들과 추세는 순자와 법가, 노자로 이어지면서 잘 가다듬어진 이론틀과 형식을 가지게 되지요. 그렇지만 어쨌든 공자는 천과 인간 사이의 끈 자체는 버리지 않았고 공자는 그 천을 최대한 도덕과 연관 지어 해석하고 도덕을 투영해 하늘을 읽었습니다.

 

맹자는 공자보다 천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또 비중 있게 말을 합니다. 성선 인간의 마음과 감정에서 선한 경향성 내지 가능성을 말하는 맹자는 그것이 천이 부여한 것이고 그런 마음과 감정을 잘 키울 수 있는 지식인은 선각자이자 진리의 담지자로서 왕과 백성의 스승이 되어 세상을 이끌고 구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말을 하죠. 그리고 왕에게 자신의 仁義와 仁政에 대해서 유세할 때마다 이랬는데요, 천이 부여한 도덕적 성을 아주 잘 키워서 정치를 하고 그로인해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고 대권을 잡은 과거의 군주들에 대해 환기를 아주 많이 시킵니다. 그러니 내 말 잘 들어보라는 것이죠. 내 말처럼 하면, 즉 하늘이 부여해서 지니고 있는 선한 마음의 싹을 잘 키워 정치하면 당신도 천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말하는 빈도와 그것이 차지하는 사상에서의 비중은 공자와 맹자가 좀 차이가 날지라도 어쨌든 도덕, 윤리와 연관 또는 직결되는 하늘이고 인간에게 도덕적 사명을 부여하고 선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 능력을 주는 하늘인데요. 또 그들은 천을요 어떤 운명으로서도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공자와 맹자 모두 운명으로서의 천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도덕적) 사명으로서의 천과 다른 천의 또 다른 모습이자 얼굴이죠.

 

이상적인 질서인 도가 행해지는 것도 하늘의 명이요. 행해지지 않는 것도 하늘의 명이라고 말하고, 공자는 아끼는 제자가 중병에 걸렸는데 그것 역시 하늘의 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천명(天命) 그것은 인간에게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라라고 말하는 사명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도덕주체가 어찌할 수 없는 결과 내지 운명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인간에 도덕적으로 살고 행위하라, 사명을 부여하고 가능성을 주는 존재이지만 현실에서 그 도덕 주체에게 어떤 결과를 보증해주지 못하며 잔인한 결과와 운명을 주기도 하는 하늘. 이렇게 이중적인 맥락으로 공자와 맹자에게 천은 이해되고 이야기 되어집니다. 이렇게 사명과 운명, 공맹의 천은 두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말고도 또 공맹의 천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천은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천명 역시 아무나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

 

 

위에 예문 중 첫 번째 오십이 되어서야 천명을 알 수 있었다, 즉 천명에 대해 깨달았다는 공자의 말 보이시죠? 지천명이라고 유명한 말인데 학문에 뜻을 둔 지 35년만에 알았답니다. 서른이 되어서 뚜렷한 지향점과 자기 주관이 섰고 그 후로 10년 후 마흔이 되어서 자신의 길과 지향점에 대해 어떤 의혹도 일지 않게 될 정도로 수양되고 공부된 사람이 다시 그 후로부터 10년 후에나 알게 된 천명. 뭐 이렇게 천명에 대해 알기 어렵나요? 공자 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고생, 고생해서야 겨우 천명에 접근하고 알게 되었는데 보통 사람들은 어디 엄두나 나겠습니까? 맹자도 이야기를 하죠,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또 그러고 난 다음에 자신 안에 어떤 내재된 성을 다 발휘하게 되는데 그리고 나서야 천과 만난다는. 이렇게 천에 접근하는 문턱이 참 높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공자와 맹자뿐만이 아닙니다. 순자와 도가, 법가 사상가 모두 마찬가지죠, 유가처럼 도덕적인 천, 윤리를 투영해서 읽는 천을 부정하고 하나의 객관적인 자연 질서내지 법칙으로서 이해를 하고 거기서 그들 각자가 예, 법, 도등 자신들이 말하는 가치 내지 기준의 정당성을 뽑아내는데 그들 역시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아무나 이해하고 꿰뚫어보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질 않았죠.

 

교육의 수혜자 중에서도 일부가, 아니면 도통한 사람, 아니면 아주 극소수의 이상적인 군주가 가진 어떤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지혜 내지 통찰력에서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도덕적인 맥락으로 해석되어지는 천이든 아니면 도덕과 상관 없는 맥락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천이든 굉장히 신비화 되어 있고 소수의 사람만이 접근해서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위에 순자의 말을 보십시오, 하늘엔 항상된 질서가 있다고 하는데 벌써 범상치 않고 꽤나 어려운 말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응해서 세상을 잘 다스리면 길하고 다스리지 못하면 불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뭔지 알아 응할 수 있고 또 응해서 어쩌고 저쩌고 해볼 수 있는 건 누구의 몫일까요? 철저히 그것은 인간사회의 스승이자 질서의 담지자가 되는 이상적 군주의 몫이라고 순자는 못박습니다. 요라는 성군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며 공자 , 맹자와 달리 도덕과 거리를 둔 채 천을 읽지만 순자 텍스트를 보면 천에 대한 진입장벽을 너무도 높게 설정해놓았습니다.

 

우리 仁을 행해보자, 아니다 禮로 다스려보자. 법대로 하자, 아니 도에 순응해서 살자고 주장들을 하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왜 仁을 행해야지? 예나 법, 도는 대체 어디서 정당성을 얻는 것이고 타당성을 얻지? 라고 물어보면 어, 천이란게 있는데 말이야, 그 천과 연관되고 거기에 근거와 정당성이 있어. 그럼 천이란게 뭐에요? 라고 물으면, 어, 그런게 있어라고 답하는 상황. 묵자 이외에 모든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든 헌법을 들춰보면 대한민국 사회의 정체성 그리고 대한민국 주권의 정당성과 근거, 또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청사진과 국가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국가가 보장하는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든 헌법에 접근해 읽어보고 그것들에 대해 알 수 있죠.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에 나라를, 또 천하를 다스리고 질서를 부여해보자는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자신들 사상에 근거가 되거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천에 대해서 보통사람이 알 수 없게 너무 크게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쳐놓은 울타리는 너무 높고 또 울타리 안에 그 천이 뭔지 명확히 말도 해주질 않고.

 

<도대체 천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문어체의 말이 아니라 구어체로, 살아 있는 현장의 언어로 기술된 논어, 그리고 그 논어에서 제자들을 자상하게 이끌어주는 공자조차도 자공에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느냐고 했고 또 자공 본인이 스승께 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했지요. 그리고 공자 자신부터가 굉장히 장시간 공부하고 수양해서 겨우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어렵게 깨달았다고 해도 자신의 사상과 직결되는 것이라면 좀 이런 것이다라고 말을 좀 해줬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해주고 않고. 참 답답한 노릇.

 

그런데 묵자는 다릅니다. 천에 대해서 분명히 말을 해줍니다. 천이 뭘 싫어하고 좋아하고,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태를 보이기를 원하고 또 무엇을 하면 벌을 주고 또 상을 준다고 지루할 정도로까지 묵자는 천에 대해서 명쾌하게 이야기합니다. 신비화된 무엇, 소수만이 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란 말이죠, 묵자의 천은 이렇습니다.

 

일단 공자와 맹자는 천 관련해서 天命이라고 말을 많이 합니다, 도덕적 사명의 맥락이든 아니면 도덕주체 내지 윤리적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맥락이든 그렇게 말을 합니다. 실제 命이라는 한자가 원래 명령 내지 사명, 거기에 운명. 이렇게 두가지 뜻 모두를 가지고 있죠. 자 공맹은 천에다가 命을 붙여서 천명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묵자는 천을 天志라고 많이 이야기 합니다, 텍스트에 아주 따로 천지편이라고 있는데요. 命 VS 志, 명령 내지 운명 VS 뜻. 의미나 뉘앙스가 많이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 사명과 운명과 달리 뜻은 좀 덜 무겁게 느껴지고 위압적인 냄새가 나지 않으며 쉽게 알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이렇게 묵자가 구체적으로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라고 자세히 밝혀 말해주는 천과 천의 뜻(천지). 그것을 묵자는 어떻게 알아내서 말해주는 것일까요? 어떤 종교적 체험을 통해 절대자와 만났을까요? 묵자 텍스트를 보면 천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히 표현된 말들이 많지만 어떤 신앙고백 내지 절대자 앞에서의 묵상과 명상, 기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굴뚝이 검어질 틈새도 없이 또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여지도 없이 구세를 위해 돌아다녔다고 많은 당대 문헌에서 묵자를 종교적 열정을 가진 행동가, 구세가로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종교적 체험에 기반해서 천, 천지에 접근했다는 흔적은 묵자 텍스트를 비롯해서 다른 춘추전국시대 문헌 어디에서든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 묵자는 거짓말을 말하거나 하늘의 이름을 빌려 아니 더 직설적으로 말해 하늘을 팔아먹으면서 약을 파는 사람이었을까요?? 혹시 사이비교주??

 

 

지금까지 많이도 말씀 드렸습니다. 묵자와 묵자 사상을 말하면서 묵자는 어떤 대등한 지분 내지 몫을 가진 인간들을 전제한다, 그 인간들이 모여서 합의내지 의견수렴을 통해 뭔가 만들어내고 그것이 기준이 된다, 묵자 사상 자체가 한 개인이 자신의 창의력과 통찰력으로 뚝딱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특히 하층민들의 의견 하나 하나가 모아져서 만들어진 거 같다라는……

 

묵자가 말하는 天志는 墨志이고, 또 民志입니다. 묵자 집단의 자의식, 하층민들의 염원과 희망 등이 투영되고 또 모아져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천지의 핵심이 겸애이고 겸애가 구현되는 세상을 묵자집단이 만들려고 했던 것이죠.

 

사실 그렇습니다. 절대자, 천,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그 하느님, 그 절대자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 내지 그 사람이 대표하는 집단의 목소리와 의지, 소망이 투영된 것일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예수와 주님을 말해도 모두 같은 예수와 주님을 말하는 것일까요? 정확히 말해 모두가 예수니 주님을 말해도 예수와 주님을 말하는 사람들 하나 하나에게 예수와 주님을 보는 시각이 같을까요? 아니면 예수와 주님을 말하는 사람들이 속한 집단 각자에게 역시 예수와 주님을 보는 시각, 그리고 그 절대자들에게 기도하는 내용이 같을까요?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과 주식이 올랐다고 권사나 집사 등. 다른 교인에게 자랑하듯 말할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권사나 집사는 주님께서 역사하셨다고 그럽니다, 그런 교회가 있지요, 분명히.

 

그런데 다른 교회에서는 같은 주님을 말해도 사람들의 물질적, 세속적 욕망에 부응하는 주님을 부정하기도 하는데 같은 교인이고 똑같이 주님과 예수를 말해도 그들이 보는 주님과 예수님은 다른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면 아예 다른 범주의 종교와 그 종교의 절대자라면 말할 나위도 없겠죠. 그저 각자가, 각자의 집단이, 자신이 처한 위치, 자신이 가진 소망, 욕심, 욕망, 자신의 교양 수준에 따라 다른 신과 절대자를 만들어내고 또 믿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선 말엽에 등장한 동학, 후에 천도교가 되는 그 동학이 말하는 절대자 한얼님에겐 누구의 소망과 염원이 투영된 것일까요?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말하는 상제는 또 어떤 집단의 염원과 소원이 담긴 것일 것이구요? 그런 운동을 일으킨 집단, 그들만의 소원과 염원이 담긴 절대자이고 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동학에선 모두가 한얼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면서 시천주를 말하고, 사람들은 각자 모두 천주를 모시고 있기에 평등한 존재라고 하는데 당시 양반들은 그런 한얼님을 이해하고 그 한얼님에 동의할 수 있었겠습니까?

 

묵자, 그리고 묵자 집단이 대변하는 묵자의 하늘과 하느님의 뜻은 그들 집단의 하느님이고 천지라는 하느님의 뜻은 그들 집단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뜻이었죠. 더구나 묵자가 말하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보면 모두가 하느님의 신하고 모든 국가, 도시와 지역이 하느님의 지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하느님은 당시에 사람들을 묶고 있는 질서의 칸막이와 틀을 괄호치며 보류하는(지우는 게 아닙니다. 보류입니다. 이건 상동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는데, 묵자는 신분질서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실제 공동체에 기여한 정도와 기여하는 능력에 따라, 즉,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신분이동과 상승, 하강을 하자는 거죠.) 하느님이고 또 하층민들을 동정하고 그들을 공격하고 착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명백히 묵자는 천지, 하느님의 뜻으로 다스려야한다고 말하면서 그 하느님이 뜻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구성되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데 그것을 보면 그들의 하느님 뜻인 천지가 묵지이고 민지임을 알 수 있죠.

 

상동편에서 사람들의 이익주장으로 읽혀지는 義를 어떤 과정과 시스템을 거쳐 통일해야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통일 후에 나온 公義가 바로 천지이고요. 또 비명편에서 삼표를 말하면서 세가지 틀로 통치의 기준 내지 규범,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3가지 틀 중에 두가지를 말해보자면 첫째가 전체 백성들의 이익에 합치해야 한다는 것이고 , 둘째가 전체 백성들의 여론과 합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민들의 의견과 이해관계를 종합하자는 것이죠. 이것도 다분히 하층민들의 의사를 염두해두고 한 이야기고 그것들 사이에서 통치의 기준을 끌어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치 기준을 만들어내는 세가지 방식에서 나머지 하나가 과거의 이상적인 군주인 성왕의 지도이념과 그들이 실제 행했던 전적인데요. 삼표법은 그냥 간단히 말해서 앞서 말한 두가지 방법에 성왕의 지도이념과 실제 행적을 더해 이것들로 기준삼아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공의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왕이 말입니다. 그 성왕의 지도이념과 정치적 업적 역시 묵자 무리의 의사와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왕, 성왕, 성왕……. 과거에 존재했던 성인군주라는 것, 참 고대 동양사상에서 많이도 여럿이 우려먹는 것인데 일단 묵자가 말하는 성왕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요? 사실 그 묵자가 말했던 성왕과 성왕의 전적이라는 것은 존재의 진실여부를 가릴 수도 없고 가리는 것이 무의미한 존재인데, 왜 그러냐면요. 묵자집단의 이상과 가치기준에 맞게 만들어내고 재구성한 역사의 성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런 기준의 이상적인 정치를 해보자. 과거에 이상적인 성인군주가 이렇게 했거든 이렇게 전개되는 이야기로 묵자는 자주 설득을 하고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실제로 과거의 성인군주가 묵자들의 이념과 기준으로 정치를 했고 묵자가 그것을 계승해 현재의 대안으로 삼자는 것일까요? 아닌 거 같습니다.

 

사실 역사란 게 좀 그런 거 같아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에 관여하거나 발 담구고 있는 집단의 가치관과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역사적 기억을 말하고 그 기억을 가지고 또 역사를 재구성하고 사회구성원들을 재교육하려고 하죠.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갈등과 헤게모니 싸움, 우리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구약만해도 그것이 정말 역사적 진실이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과거의 기억 다시 만들기에서 자유로운 것일까요?(최동훈선생님의 구약의 하느님은 신약의 하느님일까를 한번 읽어보세요)

 

불과 대한민국은 한세기도 지나지 않은 근현대사의 기억을 가지고 싸웁니다. 각자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르고 부여잡고 있는 가치와 기준이 다르기에 그렇죠. 누구에게는 건국의 아버지, 조국 근대화의 국부지만 누구에겐 무수한 국민을 죽인 살인마, 권력욕에 눈 먼 독재자, 그렇지 않습니까.

 

묵자가 말하는 성왕, 성왕의 이념과 행적은 묵자의 가치관과 이념에 따라 만들어내고 재구성한 것이겠죠. 그리고 사실 묵자, 아닌 유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가는 수시로 자신들의 이념과 이상을 말하고 과거 우리 이상대로 한 요와 순, 문왕 모두 성공했고 천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과거 성인군주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정말 요와 순, 문왕, 무왕이 유가에서 칭찬하는 군주의 모습 그대로였을까요?

 

단적으로 유가는 그들이 무력이 아닌 평화와 덕을 가지고 정치를 해 천하를 평정했다고 하는데 어디든 정치권력의 기원을 따라가보면 무시무시한 폭력이 있습니다, 근데 저들이 정말 평화와 덕으로 권력을 잡고 세상을 다스렸다??그냥 현재 유가가 고집하는 이상과 이념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일 뿐이고 유가는 어쩌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역사를 왜곡한 사람들일 겁니다. 그것의 결과물이 서경이라는 3경 중의 하나인 텍스트이고요. 실제 유가가 말하는 평화를 일군 과거 성인군주에 대해서 중국의 다른 문헌에서는 반대로 폭력과 무력에 능한 그들의 모습이 서술되기도 했고요.

 

 

자, 이야기가 많이 돈 거 같은데 정치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기준을 만들어 내는 세가지 방법으로서 삼표법이란 게 있다, 세가지 틀과 수단으로 기준을 만들어보자는 것인데 하나가 인민들의 이익에 합치 여부 두 번째가 인민들의 여론 세 번째가 성인들의 이념과 행적. 그리고 이 세가지가 모두 하층민들을 대변하는 묵자의 생각과 의견에 직결되는 것이고 묵자가 말하는 천지가 되는 것이라는 것.

 

이제 좀 정리해볼까요.

 

묵자가 말하는 천지(天志) 하느님의 뜻은 결국 하층민들의 의지가 투영된 것이고 그들의 의견과 목소리를 수렴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천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게 쳐놓아 소수의 특권적 세력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해놓았고 천을 신비의 장막에 둘러놓았는데 묵자는 애초에 하층민들의 여론을 토대로 천지를 만들어놓았으니 진입장벽이나 신비의 장막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묵자가 말하는 천의 뜻과 의지는 누구든 알 수 있고 또 그 천지를 만드는데 있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천지의 핵심은 겸애이다. 통치권력이 분배해주는 기본적인 물질적 혜택의 범위를 늘려보자는 겸애가 하느님의 뜻이니 그 겸애를 실현하는 통치시스템을 만들어보자, 즉 국가과 국가시스템을 천의 대행자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묵자의 주장이고 이상… 입니다.

 

 

묵자의 天과 하느님 2

묵자의 천, 하늘, 하느님에 대해서 장황하게 떠들었습니다. 어떤 의지를 가진 것이기에 하느님이라고 독해해도 되고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의 천에 비해 문턱이 낮고 또 그들이 말하는 천의 뜻, 의지는 하층민들의 뜻이고 하층민들의 바람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묵자 텍스트에서 공동체를 이끌 공의를 만들 방법과 수단들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든 민들의 의지를 합하고 합의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통해 나온 것이 곧 천지, 하느님의 뜻과 동의어다. 그리고 그 뜻을 대행할 철저한 정치시스템, 통치시스템, 행정망을 만들어보자. 뭐 이렇게 이야기한 거 같은데

 

묵자의 천에 대해서 좀 부연설명 더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아주 길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면 여기서 너무 많이 이야기하면 묵자 텍스트를 여러분들과 본격적으로 읽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뒤에 천지편이라고 아주 중요한 편이 있는데 그 때 가서 해야 할 이야기를 여기서 말하면 다 김이 세 버리니까요. 여기선 그냥 예습 좀 하신다고 생각하시고 들어주세요. 그리고 뒤에 다룰 천지편이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여기서 살짝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서 뒤에 천지편 읽으시면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그러니 예습차원에서 좀 보신다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또 다른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꺼내야겠는데요. 묵자 아닌 제자 백가 사상가들이 말하는 천은 묵자와 비교해서 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고 말씀 드린대로 아무나 접근하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묵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천은 현실과 연속된 존재라는 것. 그런데 묵자는 역으로 현실과 단절된 것입니다. 아리송하시죠? 연속된 것은 뭐고 단절된 것은 또 뭔지? 잘 이해가 안가실겁니다. 그리고 연속과 불연속 그것이 왜 중요할까 하는 의문도 드실 수 있습니다.

 

 

음….. 순자가 말하는 예, 공자가 말하는 인, 맹자가 말하는 인의, 그리고 한비자와 상앙이 말하는 법. 노자가 말하는 도. 이것은 어디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상가들이 생각하고 있는 천 위에 서 있습니다. 바로 전 시간에 예를 좀 든 것처럼 공자와 맹자만 해도 인의 길을 가자, 의의 길을 가자. 왜냐면 하늘이 인의 길을, 의의 길을 가라고 했단다. 뭐 이렇게 말하고 있는거 같은데 공자와 맹자 둘다 자신들 사상의 근거내지 토대로 천을 자주는 말하지 않고 어떻게 연관 되고 연결되는지 성의껏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건 한비자나, 상앙이나 노자나 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건 그들 모두 천이란게 자신들 사상의 핵심과 따로 떨어진 것도 아니지만 현실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것.

 

묵자가 말하는 천도 그들 사상과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묵자만의 의로움, 공의, 겸애 역시 묵자의 천은 하늘에서 뽑아낸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묵자는 그것들이 천과 어떻게 연관되고 그것들을 천에서 어떻게 뽑아낸 건지 더 충실히 설명해주고 천을 여러 가지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또 현실에 적용시키려 했는데 묵자의 천과 그들 사상의 핵심이 단절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과 단절여부입니다. 공맹과 순자, 상앙과 한비자, 노자 모두 천이 그들 사상과 연속되어 있고 또 현실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묵자의 천은 현실과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다루고자하는 문제는 현실과 단절된 천이라는 것입니다.

 

유가의 인의 등은 예 아니면 전통관습과 현실의 도덕규범으로 현실에 존재하고 있고 상앙과 한비자가 말하는 법, 노자가 말한 자연과 인간의 질서로의 도 모두 어쨋거나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구성원들이 잘 안따르기도 하고 왕이나 지배층이 그것을 체계화 시키고 제대로 적용하고 하고 아니고 문제가 있을 수 있어도 어쨋거나 저것들은 현실에서 무시할 수 없거나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의 기초가 되는 천은 현실과 끊어진 게 아니라 현실과 이어져 있거나 현실 안에 있는 것이죠. 다만 천은 현실에서 확실히 눈에 보이진 않고 잠겨져 있습니다.

 

예로 돌아가자, 법를 지켜라, 도를 따르라 말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해야하는데? 라고 물으면 슬그머니 천을 이야기합니다. 천의 명령 내지 원리에서 뽑아낸 것이거든 하면서요. 그럼 다시 묻습니다. 대체 무슨 천인데 그 천이 어떤 것인데? 라고 물으면 성실히 대답은 안해주고 응 그런게 있어, 니들이 그것까지 알 건 없는 거 같아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들의 불성실한 설명태도는 차치하고 법과 도, 예는 현실에서 부재하는게 아니고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며 사회구성원들이 인지하고 있는 것이거나 현실에서 질서로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들과 연관되는 천은 현실과 역시 연속되어 있는 것이겠죠. 공자가 말 한대로 인하게 살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현실의 전통관습과 문화(통쳐서 文, 때론 사문斯文이라고 합니다)를 준수하고 살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천과 연관되었고 위에서 말씀 드린대로 전통적인 관습이고 문화니 어쨋거나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죠. 그걸 잘 안 따르는 사람이 있을 지라도. 이렇게 현실과 천은 연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도 연속되어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가 아닌 순자와 법가, 도가쪽 진영이야기인데.

 

순자의 천 이야기 해볼까요. 순자의 천은 단순히 하늘이 아니라 인간 앞에 놓여진 삶의 조건으로서 적극적으로 바꿔가야할 것이고 천의 원리는 그런 바꿔야할 모든 대상들의 원리, 그 안의 법칙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무를 펼 수 있고 저렇게 하면 돌을 제대로 깍을 수 있고 …. 그런 객관적인 자연사물과 물질의 원리, 내재된 법칙과 습성이 천이자 천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또 그것만이 아니라 천은 인간까지 포괄하는데 인간은 이런 습성이 있어 뭘 싫어하고 좋아하고 그런 것을 가지고 유인 내지 재교육, 재사회화할 수 있다. 또 그러다보니 순자철학 안에서는 인간도 역시 가공해야할 것으로, 마치 하나의 던져진 사물과도 같은 것으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순자가 보기엔 인간도 천이죠. 순자는 물질적인 천만을 생각하고 의지와 도덕을 투영해서 보는 천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애초에 도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것입니다.

 

그러니 장자와 노자는 말할 것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도덕을 투영해 천을 읽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역시나 물질적인 천, 객관적인 질서로서 천을 파악하는 한비자와 상앙도 마찬가지. 인간을 마치 물건이나 부속품처럼 보기도 하는 법가 사상가들에게 인간도 천의 범주에 속합니다. 어떤 객관적인 법칙과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 속성과 법칙이 파악되고 장악되면 조종하고 바꿀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천인데 인간도 그런 천의 하나로 보는것이죠, 그러니 천은 현실과 연속된 정도가 아니라 아주 현실 그 자체일 수도 있지요. 법가 사상가들에게 현실과 눈 앞의 물질세계가 그냥 천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 여기서 묵자로 화제를 돌려봅시다. 묵자가 말하는 천,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다분히 하층민들의 뜻이 투영되어 만들어졌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들의 의지와 소망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것일 뿐이지, 그 하느님의 뜻이 관철된 세상 내지 하느님의 뜻으로 빚어진 윤리, 도덕, 규범이 현실을 지배하거나 현실에서 존재한 적이 있었나요? 없었죠. 다만 그런 것이 만들어졌고 그것의 핵심이 겸애이니 겸애를 공동체에서 실현되도록 해보자며 그렇게 뛰어다니고 움직인거죠. 천과 하느님, 하느님의 뜻은 현실과 단절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죽도록 전력투구한 것이겠고요.

 

그리고 현실과 단절된 하늘,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는데 현실은 인간도 포괄합니다. 그러니 묵자의 하늘은 인간과도 단절된 것입니다. 인간들의 중지를 모아 만들어낸 하늘과 하느님의 뜻은 독립된 것일 뿐이며 그것이 인간이나 인간들 자체는 아니겠죠. 그것을 따르고 말고 구현하고 말고는 또 현실 인간들의 몫일 뿐이고 천, 천지와 현실의 인간 사이에 이런 간극과 불일치가 있습니다.(더 정확히 말해 하느님의 뜻이 하층민들의 의지가 투영되어 만들어졌으니 이런 불일치가 있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현실의 인간과도 묵자의 천은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법가와 도가, 순자는 인간 자체가 그냥 천이라고도 했지요. 객관적인 속성과 법칙으로 파악되고 어떤 물질적 단위로서 파악되고 가공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을 보기도 하기에요. 그런데 공자와 맹자는 인간자체가 천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인간 안에 천이 부여한 속성이 있다고 하죠. 그래서 공부 많이 하고 수양해서 안으로 잘 파고 들어가면 하늘을 만들 수 있어 하늘의 명대로 살 수 있다고 하죠.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즉 내 마음이 수양되어 하늘과 만난 상태가 되니 내 마음대로 해도 전통문화와 전통도덕을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공자는 말하는데 역시나 맹자와 공자도 인간을 천과 단절된 것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천인합일을 말하죠, 천과 같이 기능하고 천의 덕을 베푸는 존재가 되자고요.

 

순자와 법가, 도가 모두 현실과 현실의 인간은 천과 연결되어 있는데 묵자가 보기에 천은 인간과도 현실과도 모두 단절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잘 따라오셨고 말씀 드린게 좀 이해가셨나요? 이해하기도 힘든데 이해했다고 쳐도 제가 이장에서 말한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으실 수 있을 겁니다. 네, 중요합니다. 단절의 문제, 중요합니다.

 

 

단절되었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해 현실에서 실현된 적이 없고 하층민 의사를 대변하는 집단 사람들의 머릿 속에 합의된 채로만 있기 때문에 그것을 더 따라야하고 천의 뜻을 현실에 구현시키려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현실에서 실현된 적이 없고 단절되어 있기에 열심히 분주하게 사방으로 다니며 홍보하고 설득해야했고 또 천의 뜻을 구현할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청사진이 필요하기도 했겠지요.

 

즉, 묵자 집단이 왜 그렇게 설득의 기술과 언어에 주력했고 또 열성적으로 헌신적으로 활동을 했으며 여러 가지 국정관련 주제들에 자기 생각을 명쾌하게 각론의 형태로 말했는지 이해를 하려면 여태껏 말씀드린 단절을 좀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더 이해가 쉬워지죠. 그리고 거기에다가 단절과 연속에 대한 이야기가 그만큼 그들의 계급적 속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기에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그들이 하층민이 아니면 그들이 말하는 겸애의 보증자, 천이 그렇게 현실과 단절되었을까요?

 

자, 하층민들의 이상은 이렇게 현실과 단절되어 멀리 있는 것이고 그것을 구현하려면 뼈 빠질 정도로 열성적이며 또 조직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런 거 같긴 한데요. 그것뿐만이 아니라 국정을 구성하는 여러 분야, 또 사회의 여러 병리현상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각각의 구체적인 대안마련과 제시, 그것을 포함한 자신들의 이상과 주장을 홍보, 납득 시키기 위한 세련된 설명, 설득장치가 있어야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을 정녕 바꿀려면 투쟁도 좋고 조직적인 활동도 좋지만, 일단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홍보하고 설명하고 설득을 할 것인지 수단과 방법에 고민을 아주 많이해야하고, 또 자신들이 말하는 이상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상에 그치지 않게 하고 현실화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대안과 프로그램, 매뉴얼 개발 등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합니다. 최소한 묵자무리만큼은 노력을 해봐야지 않겠습니까. 묵자처럼 착취 없는 민들을 위한 공의의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요.

 

그들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언담이라고 언어와 설득관련 과목을 하나 만들어 제자들을 교육 시켰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겠죠. 그만큼 자신들의 대안과 이상을 설명하고 설득할 기술과 수단, 방법들에 대한 필요가 절실했던 겁니다. 그리고 참, 그들은 상동, 상현, 절장, 절용, 사과, 칠환, 삼변, 비명, 비공등 여러 가지 주제별 이야기와 대안 등을 마련해 역설하고 실현하려 노력했는데요.

 

그러다보니 제자백가 시대에 첫 번째로 주제별 글쓰기란게 이루어졌죠. 천지편은 말그대로 하늘의 뜻에 대한 이야기 사과 편은 말그대로 4가지 국정낭비에 대한 이야기. 후에 순자가 묵자의 주제별글쓰기를 발전시켜 32편의 주제별 논문이라는 엄청난 학술적 성과도 이루어 내는데 이런 주제별 글쓰기와 주장에 대해 단순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묵자 무리가 여러 가지 주제에 접근해서 주장과 이론들을 펴낼 수밖에 없었는지 일단 헤아리는 것이 우선이겠죠.

 

묵자가 보여준 설득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 다양한 주제별 글쓰기, 이상과 대안 실현을 위한 헌신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뭔가 생각할 거리를 주는거 같은데 참 묵자 무리는 신기하고 재밌고 대단한 집단이었던거 같습니다. 여러 가지로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도 많고요.

 

말 잘하기 , 설명 잘하기 , 홍보 잘하기, 설득 잘하기. 자신들이 내세우는 천지가 현실과 단절된 채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하층민 출신이니 당장에 가지고 있는 기득권과 권위, 권력도 없고 뭐 애초에 그러니까 천지가 현실과 단절되어 저 멀리 위에 있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출발을 했으니 묵자는 언어와 설득을 중시하는데 그래서 제자들에게 언어관련 과목을 독립시켜 가르쳤고 위정자들에게도 설득과 커뮤니케이션등 말 잘하고 듣는 덕목을 요구했고 또 텍스트내에서 언어와 설득에 관한 말들이 아주 많습니다. 어떻게 개념을 정의하고 논쟁에서 시비를 가리고 타당성을 따지고에 대한.

 

 

자, 현실과 또 인간과 단절된 천, 천지, 하느님의 뜻, 좀 이해가 가셨나요? 그리고 이번시간에 말씀 드린 것을 포함해 묵자가 말하는 천, 묵자가 바라보는 천이 잘 좀 들어오시나요? 그런데 묵자의 천에 대해서 아직 모든 것을 말씀 드리진 않았습니다. 왜냐면 뒤에 천지편에서 더 설명할 것들이 남아 있어서요. 지금껏 묵자의 천에 대해 말씀 드린 것만 해도 분량이나 그 중요성이 적지 않은데 뒤에서 더 살펴봐야합니다. 그만큼 천, 하느님은 묵자에게 중요합니다. 괜히 고대 동아시아의 해방신학, 민중신학이라고 하는게 아니죠.

 

자 이번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백골프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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