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경제 성장률의 진실 (박정희는 진짜로 경제를 발전시켰을까 후속편)

2012/9/26 by 

박정희 정부 경제 성장률의 진실 (박정희는 진짜로 경제를 발전시켰을까 후속편)

 

앞서 이 글의 전편인 “박정희는 진짜로 경제를 발전시켰을까” 라는 글을 올린 후 트위터와 커뮤니티 등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멘션과 댓글을 받았다. 5.16 쿠데타가 벌어졌을 때 미국의 원조가 줄어든 부분을 고려해야 하지 않느냐거나, 이 수치만 보면 이명박도 잘한 것 처럼 오해할 수 있느냐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고성장을 하기는 했지만, 그 기간 동안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지나친 개방으로 자본이 유입되어서 고성장을 하고 빈부 격차가 커진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앞의 글에서 예로 든 그래프만 가지고 모든 경제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해당 세계 은행 자료 웹사이트에만 가봐도 수 많은 수치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빈부격차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지니 계수의 경우 해당 자료에는 누락되어 있다. 또한, 한국과 가장 비슷한 비교 대상인 대만의 경우 해당 자료에서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이런 자료를 찾고 모든 것을 분석한다면, 그건 더 이상 블로그가 아니라 경제 관련 논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반론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전년도 대비 성장률이 누락되어 있어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해당 세계 은행 자료를 뒤져보면 바로 나오는 자료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장률 자료를 토대로 추가 분석을 해 보았다. 참고로 성장률은 GDP와 GNI 둘 다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자료를 모두 정리, 분석했다. 이 자료를 볼 때 참고할 것은, 성장률이란 일정 기간 동안의 GDP와 GNI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아무래도 가난할 때의 성장률이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후 보다는 높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석에 사용한 엑셀 파일은 여기를 클릭하면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구글 링크를 첨부하였다. 또한, 모든 그래프 자료는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먼저 연간 GDP 성장률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그래프가 훨씬 높아 보이지만 중간 중간 별로 높지 않은 구간이 존재한다. 두 번의 마이너스 성장은 2차 오일 쇼크 이후의 전세계적 불황기, 그리고 IMF 시기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에도 기록적인 저성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이것을 세계 GDP 성장률과 비교해 보자. 우리만 잘하거나 못한 것인지, 아니면 세계 경제의 여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프를 보면 거의 모든 수치가 세계 경제 변화를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살아나면 우리 경제도 살아나지만, 세계 경제가 무너지면 우리 경제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그나마 이명박 정권의 주장대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에만 세계 경제보다 다소 타격이 적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구간에서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 놓고 보면 도대체 누가 얼마나 잘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를 정권별로 해당 정부의 집권 기간 동안 평균 성장률로 표시해 보았다. 원래대로면 첫 해와 그 이전 해의 GDP와 마지막 해의 GDP를 가지고 계산해야 하지만, 시간도 없고 귀차니즘 때문에 그냥 해당 기간 연평균 선장률을 집권 기간으로 평균해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평균을 내다보니 좀 억울해 보이는 정부가 바로 김대중 정부다. 바로 집권 전 해에 김영삼 정부가 IMF로 경제를 죽여 놓다시피 한 상황에서 맞이한 첫 해는 그야말로 쓰러졌다가 일어나 앉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성장률이 낮다고 탓하기는 좀 미안해 보였다. 그래서 집권 기간에 +1년을 한 성장률, 즉 집권한 해의 경제 여파가 다음 해에도 미칠 수 있다는 관점의 그래프를 옆에 빨간 색으로 표시해 보았다. 김영삼/김대중 정부를 제외하고는 아주 큰 차이는 벌어지지 않았으니 이 부분만을 위한 자료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차이 변화는 88올림픽이 있었던 해(3저 호황을 포함한)의 경제 성장이 누구에게 속하느냐의 차이다.

 

보이는 바와 같이 박정희 정부의 집권 기간 중 GDP 성장률은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비교해서도 그다지 높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차이가 상당히 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는 좀 의외의 결과였다.

 

 

이번에는 GNI 성장률이다. 앞서의 GDP 그래프와 비슷한 양상을 그리고 있어 이것만 봐서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기가 좀 어렵다.

 

 

이번에는 재임 기간 중의 평균 GNI 성장률이다. 의외로 박정희 정부보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가 더 높게 나옴을 알 수 있다. 심지어 IMF 책임이 어느쪽에 속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김영삼 정부 혹은 김대중 정부도 이에 크게 떨어지지 않는 GNI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1인당 GDP 성장률이다. 이 그래프도 마찬가지로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는다. 다만 박정희 집권 초기의 마이너스 성장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1961-1962년에 걸쳐 있었던 상주 인구 조사로 인한 인구 변동이 원인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번에는 1인당 GDP 성장률의 재임기간 평균 그래프다. 놀랍게도 박정희 정부보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성장률이 더 높으며, 앞서 이야기했듯이 IMF 책임 여부에 따라 다르지만 김영삼, 김대중 정부와도 큰 차이가 없다.

 

 

1인당 GNI 성장률이다. GNI에 있어서는 GDP보다 좀 더 극명하게 차이가 드러난다. 마이너스 성장 부분이나 저성장 부분도 뚜렷하다.

 

 

마지막으로 재임기간 중 1인당 GNI 평균 성장률 비교다. 박정희 추종자에게는 미안하게도 파란색과 빨간색 양쪽 모두 박정희 정부는 4위를 기록했다. 파란색 그래프의 경우 노태우 – 전두환 – 김영삼 – 박정희 – 노무현 – 김대중 - 이명박 순이고, 빨간색 그래프의 경우 전두환 – 노태우 – 김대중 – 박정희 – 노무현 – 김영삼 – 이명박 순이다.

 

이 분석의 신뢰성이 얼마나 높은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지 경제학도도 아니고 관련 전문가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 언급된 자료는 앞서 이야기한 세계 은행 웹사이트에서 언제든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명확한 수치이다. 따라서, 이 수치와 그래프를 가지고 하는 판단은 이 글을 읽은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 판단 결과와 박정희를 미화하는 세력 및 언론이 주장하는 “이야기”를 비교해 보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을 할 때에는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여러 수치들도 함께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 전혀 다루지 않은, 박정희 정부 시절의 고성장 뒤에 숨겨진 아픔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 것이다. 이러한 기사를 통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갖추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 글의 목적은 무조건적으로 박정희 정부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조중동 등 언론이나 정치인들, 그리고 주변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아무 생각없이 믿어버리지 말자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손으로 찾아보고, 공부하고, 이해해서 정치인을 평가할 수 있어야 올바른 투표로 나와 국가를 윤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 글 : 박정희는 진짜로 경제를 발전시켰을까?

 

Barr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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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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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안-문 단일화를 위한 선결조건 ①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에서 최대 과제는 '시대정신'과 '정당개혁'에 대한 양 캠프의 이해에 달려있다고 본다. 안철수 캠프는 '정당 혁신'과 '국민의 요구'라는 단일화의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공을 정당으로 던졌다. 나는 이를 좋은 제안이라 생각하며 이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그런데 안 캠프의 김민전 교수는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민주당의 신패권주의 청산이 과제"라며 친노를 겨냥한 발언을 해 단일화가 쉽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이어 지난 21일 SBS 시사토론에서 김민전 교수 등 패널들은 한결같이 "문재인의 가장 큰 약점은 친노 이미지"라고 입을 모았다. 문재인이 2인자 혹은 비서실장 이미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해가 된다. 그에겐 아직도 노무현의 카리스마나 안철수의 영감이 부족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에서 '친노'란 무엇인가

▲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3주기 부산추모문화제가 지난 5월 20일 저녁 부산대 넉넉한터에서 열렸다. 사진은 '노래를찾는사람들' 공연 모습.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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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거에서 친노 이미지가 문제가 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당당하게 '나는 친노다'를 외치던 문재인이 '반노' 노선을 걸었던 손학규와 '탈노'를 시도했던 김두관을 이기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기 때문이다. <혁신과 통합>과의 통합 이후 민주통합당의 당 대표 선거에서도 친노라고 분류되는 인사가 지속적으로 당선되고 있다. 친노가 당내 조직이나 세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다. 모두 국민의 참여에 의해서 얻은 결과이다.

'친노'는 당내 선거에서만 통하나? 그렇지 않다. 2012 지방선거에서 안희정·이광재·김두관은 친노를 내세워 당선됐고, 비록 아쉽게 분루를 삼켰지만 수도권의 유시민과 한명숙도 친노였기에 선전했다. 지난 4·11총선에서도 영남이나 분당 같은 새누리당 우세지역을 제외하고 친노후보는 대부분 당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이미 국민들에 의해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참여정부 실패 프레임도 조중동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깨달았다. 그런데도 언론과 논평가는 여전히 '친노'에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다. 논리적으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다. 결국 문재인 후보도 이런 주문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문 캠프는 의도적으로 친노를 배제하고 노무현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친노가 좋든 나쁘든 통합캠프를 꾸리는 건 문재인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대중선거에서는 '친노'가 정치적 자산으로 승리에 기여하는 데 반해, 언론과 엘리트 사이에선 친노가 '동네북'이 되는 이 현상은 여전히 설명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이것이 '친노 왕따' 현상이며 요즘 학교폭력으로 주목받고 있는 아이들의 왕따와 똑같은 원리로 행해진다고 생각한다. 

'친노'는 분열 프레임

'친노'의 어원을 추적해보니 2002년 12월 28일 치 <조선일보>의 '말말말'에 "민주당내 세력을 노후보에 대한 선호를 중심으로 친노, 반노, 비노로 구분하기도 한다"고 보도한 게 시초였다. 즉, '친노'는 2002년 대선과정에서 후단협에 의해 노무현후보가 흔들리면서 벌어진 민주당 내 분열을 보여주는 상징적 용어였다.

이후 수구언론은 민주당 내 정치인뿐만 아니라 친노 언론, 친노 조직, 친노 네티즌, 친노 인사, 친노 논객 등 노무현 후보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기관·조직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해왔다. 정치권에서 정치조직이 아닌 언론·논객·네티즌까지 '친노'란 명칭을 붙이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만큼 친노는 '친이'나 '친박' '동교동' '상도동' 등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고 본다. 

우리사회에서 '친노'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일부에겐 긍정적 의미도 있겠지만 친노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게 사실이다. 친노의 선거 승리가 결속력이 강한 데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인지 친노가 아닌 사람에게는 소외감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친노에 대한 세간의 이해는 맞는 말이며, 실체가 있는 것일까?

'친노' 포괄적이며 확장성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3주기를 맞은 지난 5월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참석한 문성근 민주통합당 전 대표 대행과 유시민 통합진보당 전 공동대표가 노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찾아 헌화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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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정신에 공감하고 계승하려는 사람이라면 사실 누구든 친노가 될 수 있고 노무현재단의 문은 언제든 열려있다. 4·11총선에서 노무현정책학교를 수료한 모든 후보에게 노무현재단은 '정책위원' 타이틀을 주었다. 친노가 공천을 50% 정도 차지했다는 언론의 보도는 그래서 사실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아무나 원하면 친노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친노가 배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나의 자의적 구분에 따른 친노는 당선 가능성이 낮았던 영남을 제외하면 공천 받은 이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언론의 분류는 친노를 공격하기 위해 가공된 숫자였던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 국민은 엄밀히 말해 친노가 아니다" "민주당의 권력을 잡고 있는 친노 패권주의가 문제다" 등등. 친노의 부활이 문제라는 신율 교수에게 '친노'의 정의가 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답을 하지 못했다.

흔히 참여정부에서 한 자리 한 사람들이 친노라고 말한다. 그렇게 치면 정동영·김근태·천정배·정세균·김두관은 물론이고 이헌재·한덕수 등 경제관료들도 친노가 된다. 이들은 언론에서 친노라 불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무현과 오래된 정치적 동지를 '친노'라고 정의하면 될까? 참여정부에서 무관으로 있었던 안희정이나 유시춘도 친노라 불리니 이 정의가 앞의 것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이용섭이나 정연주처럼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인연을 맺게 된 전문가는 포괄하지 못한다.

친노의 가장 정확한 정의는 참여정부에서 한자리를 했든 안 했든 노 대통령 임기 후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노무현의 가치를 인정하고 의리를 지킨 사람들을 일컫는 게 아닐까. 이들의 공통점은 '이'보다는 '의'를 좇았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외곽에서 온갖 고생에 불이익을 받은 명계남·문성근을 골수 친노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언론에서 친노라고 공격받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이들이 선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건 노무현의 가치를 계승하고자 하는 수많은 친노 시민들 덕분이다.

노사모는 21세기 참여민주주의의 맹아였다. 참여민주주의 정신이 성숙 발전돼 나타난 것이 촛불집회였다.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이 촛불의 배후라는 확신으로 수사를 시작했던 건 촛불시민의 가치지향이 노무현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촛불정신은 진화하고 또 다변화하고 있지만 큰 흐름에서는 소통을 중시하는 안철수 현상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들은 이슈와 사람에 따라 흩어지기도 하고 모이기도 한다. 대체적 흐름은 감지할 수 있어도 실체는 잡히지 않는다. 이들은 집단주의와 거리가 먼 개인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친노는 가치공동체다. 이들이 신념과 가치를 중심으로 하나가 됐기 때문에, 어떤 언론의 이간질이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친노가 자주 모여 정치를 계획하고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실상은 각자 움직인다. 유시민은 다른 정당으로 가기도 했다.

친노 시민을 '노빠'니 '광신도'니 하면서 종교집단으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친노 시민은 정치의식이 높고 정치학 교수보다 정치적 식견이나 지식이 높다고 생각한다. 친노시민들은 근거 없는 노무현 때리기, 왕따 현상에는 단호하게 화를 내며 흔들리지 않지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증거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유연하게 생각을 바꾸는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친노, 의리와 신념 때문에 불온세력으로 낙인

이처럼 다수 깨어있는 친노 시민의 사랑을 받는 친노 엘리트들이 정치권에서는 왜 왕따를 당하는 것일까. 이들은 노무현의 신념을 그대로 빼닮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노무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는 비주류에게는 금단이었던 대통령의 자리를 감히 넘봤을 뿐만 아니라 주류의 공격에 타협도 굴복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줌으로써 제2, 제3의 노무현이 나오는 길을 시스템으로 만들려고 했다. 수백 년간 권력을 독점해왔던 기득권의 입장에서 보면 이같은 불온사상이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노무현은 빨갱이로 매도당했던 김대중보다 더 불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 땅의 주류세력은 노무현의 모든 것을 비난하고 공격하며 왕따 만들기에 돌입했다. 교실에서도 왕따의 피해자는 대개 남과 다른 경우가 많다. 가령, 너무 예쁘거나,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잘난 척을 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공부를 너무 잘하거나, 너무 못 하거나... 기존질서에 대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도전하고 대통령스럽지 않았던 노무현은 왕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노무현은 이 사회 주류에게만 찍힌 것이 아니라 진보진영 내 운동권 주류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마치 공부 열심히 안하던 아이가 운이 좋아 전교 일 등을 한 것 같으니 공부를 성실히 해왔다고 생각하는 운동권 주류에게는 미운털이 박힐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들이 왕따를 정당화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왕따는 부도덕하고 나쁜 것이다.

왕따는 단지 가해자가 피해자를 핍박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왕따가 성립하기 위해선 피해자를 중심으로 가해자, 조력자, 강화자, 방관자의 역할분담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가해자가 지속적으로 피해자를 핍박하기 위해선 이를 격려하고 환호하는 조력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가해자는 조력자들로부터 용기를 얻고 쾌감을 느낀다. 조력자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가해자보다 한 술 더 뜨는 강화자이다. 강화자는 평소엔 피해자처럼 약자로서 설움을 받다가 자신보다 더 약자가 왕따의 타겟이 되면 가해자보다 한 술 더 떠서 피해자를 괴롭히는 사람이다. 강화자의 '오버'는 강자로부터 당하지 않으려는 피해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받았던 설움을 자신보다 약자인 피해자에게 화풀이하는 보상심리 때문이기도 하다. 강화자는 피해자가 왕따를 당할만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런 핍박이 정당하다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가령, 흑인이 백인으로부터 받은 차별을 백인이 아닌 한인에게 화풀이하는 현상 같은 것이다.

노무현 왕따 현상

하지만 이것만으로 왕따는 완성되지 않는다. 왕따의 종결자는 부당한 왕따를 외면하고 방관하는 다수의 방관자들이다. 관중 중 한 명이라도 용기 있게 가해자의 부도덕성을 지적하고 나선다면 그리고 다른 방관자들의 관심과 동조를 얻어낸다면 왕따는 발생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참여정부 시절 우리 사회는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 결과 돌부리에 채어 넘어져도, 비가 와도 "노무현 때문"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노무현은 그야말로 동네북이었다.

결국 노무현 왕따 현상의 이면에는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집요한 가해가 있었다. 그들의 이런 심리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한창일 때 까불었으니 손을 봐줘야 한다는 <조선일보>의 칼럼에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가해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이나 권력을 빼앗기고 멘붕에 빠진 보수진영 지지자들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무현을 결정적으로 아프게 했던 건 수구언론보다 노무현에게 더 가혹했던 진보진영의 언론과 정치인들의 강화자 역할이었다.

그들은 노무현이 권력자인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비판이 정당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노무현은 대통령 권력만 달랑 쥐고 수구기득권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존재임을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진보 언론이나 시민단체, 정치인들이 노무현 왕따에 동참했던 이유는 물론 정책적 지향이 달라서였다. 하지만 가해자들이 친노언론, 친노시민단체, 친노인터넷 매체라며 싸잡아 공격하자 의도적으로 더 가혹하게 노무현을 때림으로써 차별화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들이 만일 강자였다면 우리는 친노 언론이 아니라며 당당하게 대응했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이들이 의도하지 않게 강화자의 역할을 하게 된 건 늘 강자에게 당하고만 살아온 약자로서의 피해의식이 작동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대개는 수구언론을 정치집단이 아니라 중립적인 언론으로 인지했기에 오해가 쌓였을 수도 있다고 본다.

참여정부 시절 논객은 노무현만 때리면 언론의 1면을 장식하며 유명세를 누렸다. 보수든 진보든 반 노무현 논객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이런 분위기에선 친노 조차도 주눅이 들어 정당한 방어를 하지 못했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노무현을 지지했으면서도 진보 언론까지 노무현을 비판하자 "나만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닌가"라며 감히 나서지 못했던 다수의 시민은 방관자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부도덕한 왕따가 브레이크 없이 지속되었던 건 노무현이 대통령이었기에 모든 비판이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왕따는 보통 피해자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난다. 노무현은 자신을 바위 아래로 던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감금되어 있던 강금원회장과 이광재 전지사, 그리고 수많은 측근을 왕따의 굴레에서 벗겨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노무현이 가장 바랐던 것은 자신의 왕따에 강화자로 참여했던 진보진영이 기회주의와 불의를 청산하고 정의가 세워지는 것 아니었을까.

노무현의 죽음으로 많은 방관자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노무현이 가해자와 조력자, 그리고 강화자로부터 부당한 왕따를 견디는 동안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책감과 후회에 빠졌다. 노무현 서거 이후 깨어난 시민들은 2010년 민주당 지방선거 승리의 1등 공신이다. 이들은 SNS로 무장하고 2012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선 정체 없는 모바일세력이 되어 제2의 노무현을 지켰다.

다수의 친노시민들의 커밍아웃으로 노무현은 부활한 듯 보였다. 추모분위기에 편승했던 일부 논객들은 시간이 지나자 "추모와 평가는 다르다"는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노무현을 왕따 시켜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을 것이다. 노무현이 잘못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은 게 그들의 심리인 것 충분히 이해한다. 한 진보주간지가 제작한 서거특집에서는 현실정치를 외면한 노무현의 도덕성 강조가 그의 죽음을 불러왔다며 한 예로 오세훈이 만든 정치자금법을 노무현의 작품이라는 잘못된 해설을 곁들이기도 했다. 강화자는 노무현의 죽음마저도 노무현 때문이라는 가해를 가했다.

안-문 단일화 위해 친노 왕따 이해 필요

▲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지난 21일 오전 경기도 평택 와락센터를 방문해 쌍용차 해고자 가족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와락센터는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들의 심리치료 공간이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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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노무현의 죽음이 친노 왕따를 멈추지는 못했다. 노무현의 신념을 상속한 친노는 왕따도 상속하게 됐다. 올 대선과정에서도 친노 왕따는 지속되고 있다. 언론에 의해서만 지속되는 게 아니라 통합민주당의 단일화 상대라 생각했던 안철수 캠프가 가해자인 수구언론의 논리를 가지고 신패권주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패권주의의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당내 선거에서 늘 1등만 차지하는 친노를 겨냥한 게 아닌지 의심이 든다. 정치적 이해가 부족해 일어난 일이라고 이해는 한다. 하지만 발언 전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수구언론의 친노 왕따 프레임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한 번 쯤 고민해주길 기대한다.

친노 왕따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올 대선 단일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안철수 캠프와 문재인 캠프가 아름다운 경쟁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안철수 후보가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증오와 적대적 정치의 하나의 예인 '노무현 왕따 현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기숙


덧붙이는 글 | 다음 글에서는 왜 왕따현상이 나타나는지, 왕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은 blog.daum.net/leadershipstory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1941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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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이 '암초 좌초'가 아니라 결론내린 이유
다져진 규조토와 패각, 돌, 자갈이 혼재한 모래톱에 좌초하였다


(서프라이즈 / 신상철 / 2012-07-28)


1. '좌초 = 암초' 라는 인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좌초(坐礁)'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 보면 '배가 암초에 얹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좌(坐)는 얹히는 것이고 초(礁)는 암초를 뜻하니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일 수 있지만 배가 반드시 암초에 얹혀야만 '좌초'인 것은 아닙니다. 모래에 얹혀도 좌초요, 뻘에 앉아도 좌초입니다. 따라서 좌초를 했지만 전혀 손상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박이 육지(해저지반)와 만나는 모든 경우를 좌초라고 일컫습니다. 물 속이든 물 위에 튀어 나와 있든 반드시 지반과 접촉해야 좌초라고 부릅니다. 빙산과 조우하여 침몰한 타이타닉 호의 경우 좌초라고 하지 않습니다. 빙산이 육지에 고착된 형태가 아니고 떠다니는 형태(유빙)라면 '빙산과의 충돌'이라고 말합니다.

좌초의 유형은 참으로 다양한 만큼, 그 손상의 형태 역시 대단히 광범위합니다. 전혀 손상이 없을 수도 있고, 완전히 반파되어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촤초된 선박의 선저하부 어느 지점이 지반과 어떻게 만나 어떤 손상이 발생할지는 오로지 하나님만 아시는 영역입니다. 

이제 좌초에는 어떤 유형이 있을 수 있는지, 모든 케이스를 다루자면 사고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겠지만, 천안함 사고를 분석하는 데에 참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암초의 존재 유무로 나누어 다루어 보겠습니다.  


2. 극단적인 두 가지 유형의 좌초

우선 손상이 전혀없는 좌초와 완전히 반파에 이르는 대형 좌초 두 가지 케이스에 대하여 먼저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1) 손상이 전혀(거의) 없는 '행운의' 좌초 - 암초가 없는 경우

좌측의 사진은 알래스카 글레이셔 만(Glaicer Bay)에서 물때를 놓쳐 졸지에  좌초된 경우인데, 부드러운 갯뻘에 앉았으니 선체손상이 거의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만약 저 배가 뻘 속에 있는 단단한 조개나 돌을 짓눌렀다면 선저 바닥의 페인트에 손상을 입혔을 수도 있고, 그러면 손상된 부위를 중심으로 부식이 확산되어 페인트가 원형으로 벗겨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천안함 선저하부의 동그랑땡 손상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저 크루즈선의 이름이 'Spirit of Glaicer Bay 號'라고 합니다. 그 동네를 다니는 토박이 여객선이라 밀물과 썰물의 시간체크를 생명처럼 했을 터인데 홈그라운드에서 저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는군요. (출처: 동아일보, '크루즈선의 굴욕') 

위의 사진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해안에 폭풍우로 좌초된 선박의 사례인데, 이처럼 경사가 완만하고 지질이 모래인 해안에 떠밀려와 좌초된 경우엔 선체손상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사진 속 세 남자는 케이프타운의 피자 전문점 직원들로 배고픈 선원들을 위해 피자를 배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 손상이 반파(침몰,전복)에 이르는 대형사고 - 암초에 좌초한 경우

선박이 반파에 이르는 대형사고인 경우 대부분 '황천(荒天, 거친바다)에 의한 경우가 많습니다. 선박이란 것이 태풍을 뚫고도 다니도록 설계되어 있긴 하지만 한계에 부닥치면 기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근의 저수심이 있거나 육지가 있을 경우 떠밀려와 바뒤나 암초에 부딫게 되면 반토막이 날 수 있는 거지요.

  • 좌상 : 육지를 올라타는 바람에 반토막이 난데다가 함미가 밀고 올라온 좌초
  • 우상 : 거친 파도에 밀려 우현 좌초로 인한 반파
  • 좌중 : 해저지형의 굴곡으로 인한 피로파괴로 유추되는 좌초
  • 중상 : 산호초에 좌초되어 반파된 상황
  • 좌하 : 뉴질랜드 앞바다에서 좌초된 이후 태풍에 반파된 상황
  • 우하 : 경주 감포 앞바다에서 좌초한 어선 (소형 어선도 좌초로 반파된 사례)

위에서 든 사례들과 같이 손상이 전혀 없든, 반파에 이르든 선박이 육지와 만나 사고을 당한(정상 기동에 제약을 받게 된) 모든 경우를 '좌초(坐礁)'라고 부릅니다.


3. <의도적인 좌초>가 목적인 상륙함의 예기치 않은 '좌초 사고' 사례

좌초관련 자료를 모으다가 귀한 사진 한장을 발견하여 소개합니다. 1950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끈 양동 군사작전으로 영덕 장사리에 상륙작전을 펼쳤던 문산호(LST)의 좌초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입니다.

LST(Landing Ship Tank)는 해안에 선체로 밀고 들어가 탱크와 병력을 수송하는 것이 목적인 상륙함입니다. 하지만 문산호는 태풍에 떠밀려 정상 접안하지 못하고 좌초하고 맙니다. 물론 수송하였던 학도병 772명을 성공적으로 내리고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만, 좌초된 문산호는 이후 침몰하여 1997년 물 속에서 발견됩니다. (영덕 장사상륙작전 기념관)

상륙함이 해안에 상륙할 때, 물이 높은 만조를 기다려 적정 위치에 후미 닻을 바다에 던지고 상당한 속도를 유지한 채 해안으로 돌진합니다. 더 이상 전진이 되지 않을만큼 배를 밀어 붙인 후 좌우 홋줄을 걸고 앞 램프를 열어 탱크와 병력을 풀게 됩니다. 반대로 상륙함을 뺄 때는 역시 만조 때 후미 닻을 윈치로 감으면서 배를 뒤로 빼내게 됩니다.

상륙함은 말하자면 <의도적인 좌초>를 수없이 반복하는 특수목적함입니다. 저는 해군 중위 때 상륙함의 항해장교(겸 갑판사관, 포술장)로 근무하면서 백령도를 포함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서해 5개 도서 수송업무를 하는 동안 사구해안에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의도적인 좌초>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4. '암초 좌초'는 대부분 심각한 손상을 야기한다

<그래 알아, 암초좌초는 대부분 심각한 손상을 야기하는 것 알아. 그러니 천안함 가운데가 터지고 반토막 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는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시고 스스로 어떤 논리적 함정에 빠져있는지 돌아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암초든 모래톱이든 '좌초(坐礁)'를 주장하시는 분들은 '폭발(爆發)'을 부정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반갑고 감사한 마음입니다만, 우선 <천안함이 암초에 좌초하여 반파되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선택의 폭이 너무나 좁고 가능성이 희박한 곳에 자신의 열정 모든 것을 걸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전 편의 글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천안함이 '암초'에 좌초하여 한방에 부러졌을 개연성은 폭발 만큼이나 희박하다>고 분석하였으며 그에 대한 확고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암초'의 주장은 '폭발'의 주장 만큼이나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까다롭고 제한적인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1) 최소한 좌초지점이 획정(추정)되어야 한다

'확정'이 아니라 '획정'입니다. 최소한 가능한 몇 개의 추정된 구획이라도 범위가 좁혀져 있어야 합니다. 국방부와 해군 그리고 좌초 당사자들은 정확한 좌초지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대해 철저히 감추거나 부인하고 있습니다.

일단, 기존의 모든 정황을 무시하고, <천안함이 암초에 좌초했다>라고 가정을 하고, 암초좌초가 예상되는 지점을 추려보기로 합시다. 

① '암초좌초' 후보지 1순위 : 단연코 희생자 가족인 이용기씨가 22전대장으로부터 <천안함이 좌초되었다>는 설명을 듣고 작전관에게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좌초했느냐?>라고 묻자 손가락으로 찍어 주었다는 바로 그 <최초좌초> 지점이 1순위 후보지입니다. 

천안함이 이곳에서 '암초 좌초'하였을까요? 설사 천안함이 이곳에서 '암초'에 좌초하여 선체 중앙부가 파손되고 반토막이 났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거나 그 조건에 따른 현상이 있어야 설득력을 얻습니다. 

첫째, 이 지역에 그 정도 손상을 입힐 만한 '암초'(R: Rock)가 명기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가 오래 전에 만들어져 허접하고 갱신이 안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손상을 입힐만큼의 대형 암초는 벌써 명기되어 있었어야 합니다. 혹시 그동안 아무도 모르는 소규모 화산폭발로 없던 암초가 생겼을까요? 

둘째, 해당 지역의 지질은 S(Sand. 모래․규조토)이며, Sh(Shell. 조개무덤)이 쌓여있다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수천년 동안 서해바다로 떠내려온 고운 입자의 모래들이 백령도를 휘감아 돌면서 유속이 느려지자 가라앉아 퇴적된 지형이니다. 'S' 나 'Sh' 처럼 항해에 위험성이 낮은 것을 명기하면서 항해에 위험한 암초가 존재하는데도 'R'을 누락시켰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저 지점에 암초가 있었고, 천안함 중앙부에 구멍이 크게 뚫렸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천안함은 구멍이 뚫렸든 반토막이 났든 상관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 일대의 수심은 8~12m에 불과하기 때문에 해수가 유입되어 더 무거워진 천안함은 함수든 함미든 어디론가 떠내려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최초좌초> 지점에서 '암초좌초'되었다면 천안함은 그 지점에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천안함 함수.함미 모두 그곳에 없었으므로, 그 지점에서 천안함이 암초를 만나 반토막이 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즉 '암초 좌초'는 없다고 결론내렸던 것입니다. 

② '암초좌초' 후보지 2순위 : 두 번째로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천안함 함미가 가라앉아 있는 지점 인근의 해역입니다. 천안함 가운데가 그 정도로 터지고 결국 반파에 이를만큼 손상을 입히는 암초가 존재한다면, 천안함 함미는 그 암초와 매우 가까운 거리(불과 몇 백 미터) 이내에 가라앉아야 합니다.

설마 천안함이 백령도와 대청도 중간에 있는 어느 암초에 좌초하여 반파되었는데 침몰지점까지 반파된 채로 항해해서 거기서 가라앉았다거나, 다른 곳에서 좌초했는데 하루만에 침몰지점으로 몰래 이동시켰을 거라는 유형의 SF소설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반파될 정도의 손상은 급격한 침수와 침몰로 이어져 그리 멀리 떠내려 갈 수가 없습니다.

단, 천안함 함수는 함수제일 앞에 절대 밀폐구획이 존재하여 16시간22분이나 떠 있었기 때문에 조류에 떠내려 갈 수 있었지만, 함미는 불과 수분만에 가라앉았다는 것이 TOD 영상을 비롯 모든 정황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므로 천안함이 암초에 침몰하였다면 함미침몰지점으로부터 불과 수 분 거리 이내에 암초가 존재해야 합니다.

천안함 함미가 가라앉아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몇백미터 이내에 천안함을 반파시킬만한 암초가 존재할까요? 만약 그 암초를 찾지 못하면 '암초 좌초' 주장은 완전히 허공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암초의 존재는 확인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해도상에 암초의 존재여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고지점에 대한 국방부의 발표가 오락가락하고 이후 수정 발표되기도 하여 침몰 포인트가 다소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사고지점들 인근에 의혹을 둘만한 암초지역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해도에 기재되지 않은 특수한 암초가 있는지 이번에는 한국해양연구원에서 제공한 자료를 해도와 비교하며 살펴보겠습니다.

암초라는 것이 남산타워처럼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해저에 기반을 두고 수면가까이까지 이어져 존재하는 것이어서 한국해양연구원에서 탐사자료를 조작하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첫째, 함미침몰지점을 중심으로 수백미터 범위내 해도와 해저지형도 상에 천안함을 반파시킬만한 암초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암초 혹은 암초가 있을만한 유사한 지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둘째, 해도에 존재하지 않는 수중여(홍합여) 등이 존재 가능한가? 백령도 주민이 이야기 하는 수중여는 적어도 육지 가까이에 있는 곳을 말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해도에 모든 수중여를 다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대한민국 어촌 어느 지역이나 해도에 존재하지 않는 수중여는 산재해 있습니다. 따라서 불특정 '수중여'를 기대하고 '암초 좌초'를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오류의 폭이 클 것입니다. 

(2) 선박이 암초에 좌초하면 대부분 빠져나오지 못한다

사실 제가 천안함이 '암초 좌초'를 하지 않고 '모래톱 좌초'를 했다고 판단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소형 고속정이 전속으로 항해중 암초를 들이받고 튕겨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 중대형급 선박들이 암초를 타면 거의 대부분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소형 선박도 아니고 천 톤이 넘는 중대형 선박이 거친 바다에서 암초를 탔다면 십중팔구 그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암초를 만나는 순간 제일 먼저 발생하는 현상이 큰 파공과 크랙이고 그 다음은 급격한 침수입니다. 선내 비어있는 공간을 바닷물이 급속히 채우며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결국 밀려 들어오는 해수와 선체하중이 합쳐져 암초를 더 강하게 짓누르게 되고 암초는 선체를 더욱 파고 들게 되며, 결국 꼼짝달싹 못하고 구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선저바닥은 이리저리 찢기면서 거의 걸레가 되기때문에 선저바닥의 손상을 보면 암초에 걸렸는지, 모래를 밀었는지 뱃사람들은 구분해 냅니다.  

중대형 선박이 잔잔한 호수가 아닌 바다에서 암초에 올라 탔다가 빠져나올 수 있는 확률은, 일반인이 '표도르'와 격투기를 벌여 맨정신으로 살아 남을 확률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앞에 사진과 함께 예를 든 반파,침몰,전복을 유발하는 좌초의 경우 암초에 걸렸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손상이 더 커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최근에 남해안에 좌초한 배, 제주 앞바다에 좌초한 배, 뉴질랜드 해안에 좌초한 화물선 모두 암초에 좌초했다가 시간이 흘러 태풍이나 파도에 의해 반토막이 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암초가 무슨 몽돌해변의 너럭바위쯤 되는 걸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암초가 그렇게 무서운 존재입니다. 

좌초가 되었음에도 그곳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은 비교적 경미한 손상에 그쳤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손상이 크게 발생했다면 암초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고 물리는 필요충분조건의 딜레마이지요. 그런데 <천안함이 크게 파손되었지만 빠져나왔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논리 자체가 '모순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이 자랑하는 핵미사일 순양함 'Port Royal'호가 하와이 앞바다에서 산호초에 걸려 좌초했던 사건을 살펴보면 천안함 사고를 유추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CG-73 USS Port Royal 진주만에서 좌초

2009년 2월 5일 미해군 순양함 ‘포트로열’(CG-73 USS Port Royal)함이 정기수리를 마치고 시운전을 나갔다가 진주만으로 복귀하던 중 항로데이터 입력을 잘못하여 연안에서 불과 800미터 떨어진 저수심 산호초에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포트로열함이 좌초하자 당황한 함장은 좌초된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엔진을 써서 프로펠러를 돌리지만 배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프로펠러만 부러지고 휘어지는 손상을 입게 됩니다.

포트로열함의 인양을 위해 그 유명한 '살보함'(천안함 사고 당시 키리졸브 훈련에 참가했던 바로 그 배)이 긴급 투입되어 포트로열호를 끌어당겼지만 배가 끄덕도 않자, 발라스트와 연료, 심지어 식수와 오물들 까지 모두 퍼내고 인양을 시도합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아예 대원들을 모두 하선시키고 앵커(닻)까지 뜯어내고 나서야 겨우 배를 빼내는데 성공합니다.

좌조된 순간 해수가 침입하여 선체가 더욱 무거워지고 암초에 단단하게 박혀버려 인양이 어려웠던 겁니다. 포트로열호 역시 좌초한 함장들의 공통점인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인해 자력으로 빠져 나오려고 프로펠러를 양껏 돌리지만 그 결과 스크류 블레이드가 휘어지고 몇 개는 부러져 나가는 등 손실만 더욱 키우는 꼴이 되고 맙니다.

손상의 형태를 보시면 천안함 프로펠러 손상과 매우 유사합니다만, 천안함의 경우 모래톱에 좌초하였기에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했으며 프로펠러의 휘어진 부분을 보면 모래톱을 파면서 빠져나왔다는 사실, 그리고 스크류가 모래톱에 파묻혀 회전하는 과정에서 그라인딩되어 따개비들어 떨어져 나가고 반질반질해 진 모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 모래톱에 좌초한 경우 - 경미한 손상

천안함의 경우 최초, 조개무덤이 있는 모래톱(S, Sh)에 좌초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천안함은 첫 사고를 당하면서 선박사고 치고는 비교적 경미한 손상을 입게 됩니다. 경미하다고는 하지만, 선체 하부가 찢어지고 부분적으로 파공이 되는 현상은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선저하부에 나타난 파공과 크랙 그리고 빌지킬 모서리에 발생한 파공 등이 육안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천안함이 모래톱 정도에 좌초했던 것은 운이 좋았던 셈입니다. 그런데 운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천안함의 당직사관은 함장과 함대와 사령부에 좌초보고를 한 후 절대로 배를 빼내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어야 합니다. 마치 교통사고 환자 목과 허리 함부로 손대지 말고 가만히 눕혀 놓고 119 불러야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기다렸어야 합니다. 

아무리 Soft Grounding(부드러운 좌초)을 했다고 해도 지질이 뻘이 아닌 이상 돌, 조개껍데기, 자갈, 어구로 인해 선저바닥이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럴 경우 해수가 유입되기 때문에 배를 다시 빼내어 깊은 수심으로 가는 것은 여간 위험천만한 일이 아닙니다. 배가 다시 물로 돌아가면 선체 하중으로 인해 수압이 높아져 해수 유입이 더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좌초된 위치에 그대로 두었다면 천안함 대원들은 단 한명도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저손상부위는 모래톱이 반창고 역할을 해줘 침수 속도도 느릴 것이고, 만조가 된다 해도 해수면은 기껏 주갑판을 넘어 오르지 못할 것이니 갑판하부에 침실이 있는 대원들은 상부갑판으로 이동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고속정을 불러 평택으로 타고 나가면 되었을 일입니다.

비록 함은 좌초된 채 인양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좌초를 유발한 장교들과 책임선상에 있는 지휘관들은 징계와 문책을 피할 수 없겠지만 소중한 인명피해는 단 한명도 발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란 얘깁니다. 그런데 좌초된 배를 다시 빼 낸 것이 화근이요, 씻을 수없는 중대한 과실입니다. 배를 빼낸 과정은 선저바닥과 프로펠러에 역사처럼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나무 나이테 속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6. 커다란 충격을 동반한 제2의 사고는 '충돌'   

모래톱에 좌초하는 정도로는 선체 중앙이 터지거나, 선체가 반파되거나, 진도 1.5 규모의 지진파가 발생하는 등의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특히 지진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엄연히 과학적인 데이타임에 틀림이 없고 그것은 당일 발생한 사고의 증거요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진도 1.5의 규모는 비록 사람이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의 충격이 발생해야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암초좌초'라면 천안함이 전속으로 달려와 암초를 정면으로 들이받지 않는 한, 그 정도의 진도가 관측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천안함이 직진이 아닌 측면으로 암초를 탔다고 보는 경우엔 더더욱 지진파 부분을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지진파의 존재가 거짓이 아니라면 '암초 좌초'의 가능성을 배척하는 합리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면 지진파가 기뢰나 어뢰의 폭발만을 뜻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폭발'이 지진파 외에 산재해 있는 다른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역시 배척된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과학의 이름표를 달고 거론되면 무게있는 신뢰를 보내면서도, 상식에 근거한 판단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진파라는 데이터는 무조건 신뢰할만한 것이고, 인간의 감각 - 시각(물기둥 없었다, 물고기 떼죽음 없었다, 그을음 없었다), 청각('쿵'하는 충격음), 후각(화약냄새없었다)의 판단은 별 것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 또한 과학적인 근거로서 우리 피부에 더 와닿는 증거인 것이지요.

360kg TNT 규모의 어뢰가 인근 바다에서 폭발했다면서 그 소리를 들은 백령도 대청도 주민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그러한 '폭발의 존재 사실' 자체를 배척합니다. 이후 어뢰에 비하면 모기소리에 불과한 76mm 함포 소리에 백령도 주민들이 모두 밖으로 튀어 나왔다고 하니 상식적 논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지요. 흡착물질과 관련한 유수한 과학자 분들의 견해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1.5 진도의 지진파를 입증해 줄 수 있는 것은 '폭발'과 '강한 충돌' 밖에 존재하지 않는데 저는 폭발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해줄만한 증거가 전무하다는 점, 과학적 근거는 커녕 상식의 수준도 부합시키지 못하는 여러 합리적 분석에 의하여 '폭발의 존재'를 배척하였고, 충돌에 집중하여 근거자료를 자신있게 확보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주장하고 확신하는 바, '제2의 사고(충돌)'은 '제1의 사고(모래톱 좌초)' 이후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의 요건에 부합합니다. TOD 영상에 나타나는 물체, 제3의 부표 아래에 가라앉았던 물체, 당시의 훈련상황, UDT 대원들의 증언, KBS 기자들의 취재내용 등이 모두 그 정황을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선체 외판이 손상된 형태를 가장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충돌에 의한 손상'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판이 찌그러지고 휘어지는 매카니즘은 '희망사항'이 아니고 철저한 '과학'입니다. 철판과 알루미늄이 부식되는 원리는 '통밥'이 아닌 '환경과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 모두 과학적으로 입증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사건 초기 천안함이 무언가 '원인미상의 물체와 충돌하여 침몰하였다'는 내용의 기사가 사고후 불과 한 시간여 만에 보도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저 기자는 누구에게 취재를 했던 걸까요? 해군측 인사는 누구일까요? 그 인사는 누구에게 보고를 받았을까요? 문제는 그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침묵을 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 우리는 그에 맞서 진실을 찾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고 순간과 사고 현장에 그리고 거짓과 조작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초기 상황 속에 진실의 대부분이 들어있다는 것은 '범죄 수사'의 기본이요 원칙이라고 하지요. 사실 천안함의 진실은 2010년 3월 26일~31일 사이에 발생한 정황 속에 대부분 고스란히 다 들어 있습니다.


7. 맺으며

그리 머지않아 금속공학, 폭발공학, 화공학, 열역학, 구조역학, 조선공학, 해양학, 항해학, 전자.전기공학, 해양생물학등 다방면의 전문가 분들이 별 부담없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천안함, 그 조작과 거짓의 역사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겠지요. 

글을 맺으며 오늘글의 주제를 다시한번 요약하지면, '선박이 암초에 걸리면 어지간해서는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 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공연히 암초 찾으러 나섰다가 함미 침몰지점 부근에서 암초 찾지 못해 낭패보실까봐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해군 2함대의 작전상황도에 정답이 기재되어 있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작전도 좌상부에 적혀있는 내용은 심심해서 적은 낙서가 아닙니다.

평균수면 6.4m라 적혀 있는 것이 보이실 겁니다. 특히 별표(★) 왼쪽에 '최초좌초'라 적혀 있고, 바로 그 밑에 6.4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왼쪽에는 물결표시 세개가 나란히 있지 않습니까?

가운데 물결이 평균수면으로 6.4m란 뜻이고 위에 물결표시가 고조, 아래 물결표시가 저조를 뜻합니다. 저조에는 4m라고 적혀 있습니다. 최초좌초지점의 수심이 그렇다는 뜻으로, 이것은 누군가의 설명이나 확인을 거쳐 기록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국민들이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까봐, 무슨 유치원생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국방부들은 딴청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 다른 해석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오늘 글도 긴 글이 되었습니다만, 천안함 사건은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해답이 나오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다와 배를 잘 아시는 분들이 침묵하고 있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게 여겨지는 요즈음입니다.

[참고] 본 글과 관련이 있는 주제의 글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상철

안녕하십니까. 신상철입니다. 저의 분석 글 어떻게 보셨습니까? 저는 항해.운항.선박.조선 분야에 매우 독특한 경력과 전문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MB정권과 국방부는 걸려도 제대로 걸린 것 같지 안습니까? 

천안함의 진실 -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의 인터넷매체 운영과 천안함 소송, 모두가 제게 너무나 힘에 겨운 문제입니다. 지치고 쓰러지지 않도록 저의 소박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시겠습니까?

소박한 부탁 들어주러 가기 -> 클릭!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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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아니라 전략이다(1) 야권의 대선운동, 개념부터 탑재하자

2012. 09. 07. 금요일
미디어전략팀장 게으른수다쟁이

 

 

 

 

원래 이 글은 지난 총선 때 기획된 것이었다. 간만에 찾아온 본격 정치시즌에 쫌 잘난 척 해볼려고 기획하고 예고편만 달랑 올려놓고는 흐믓했었더랬다. 그리고 담편들을 위해 이리저리 원고를 만들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어느 날, 홀연히 지하 벙커 공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수개월동안 햇볕 보기도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고, 그렇게 한달, 두달 밀리다보니 글이 올라갈 타이밍도 다 놓쳐버렸다.

 

마치 부킹녀 떠난 자리에 빈 양주병만 남은 허탈감처럼 무기력해진 나는 아예 자판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러다보니 벌써 올해도 9월이다.

 

이제 본격 대선국면이니 그때 쓰려던 글들을 슥샥 손질해서 다시 시작해본다. 설마 혹시라도 기다리신 분들이 있다면 아주 쵸큼이지만 그래도 좀 미안타.

 

'전략'이란 단어는 이제 보통명사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초등학생까지 전략이란 단어에 거부감이 없어졌으니 발길에 채이는 모든 것들이 '전략적 행위'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소위 전문가들이라는 네임택을 달고 있는 사람들의 사이에서도 이 '전략'이란 단어가 그처럼 흔하게 사용되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너무나 흔해지다보니 '전략'이란 단어에 무게감이 사라지고 마치 수학의 '근의 공식'처럼, 비슷한 문제에 무작정 대입시키고 답 나오기만 바라는 듯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발길에 채이는 것이 전략비평들이나 오히려 본질은 사라지고 비평만 남는다.

 

 

결과적으로 기획현장에서 '전략'을 만드는 과정과 의미, 사고 체계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오용되면서 전략적이지 못한 전략들이 난무하고 전략적이지 못한 비평들이 판단의 기준마저 흐리고 있다.

 

그리하여, 그래도 딴지미디어'전략'팀을 이끌고 있는 본인이 나선다. 괜히 팀 이름에 전략이란 단어를 넣은 것이 아니었던 거시다.

 

현업에 있는 분들에게는 일면 부족한 글이겠지만, 일반인들이나 초보 기획자들의 생각 속에 전략을 제자리로 돌려 놓기, 제대로 전략적으로 사고해보기를 유도하는 것 이게 '초짜기획자의 전략수첩' 이 시리즈의 목표다.

 

대충 읽다보면 광고든 마케팅이든 정치든 대충 전략을 입안하는 사람들의 문제의식 자체를 유추해볼 수도 있고, 그리고 초짜 기획자들에게는 그냥 한 선배가 그동안 현장에서 고민했던 결과물로 이해하고, 어쩌면 현장에서 마주치게 될 상황에서 대안들을 찾을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수차례 고쳐쓰기에도 불구하고 독자 열분들이 이런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들은 어쩔 수없다. 그냥 다 내가 부족한 탓이거니 할 수밖에.

 

 

1. '전략'-그 이름의 무게를 느껴보자.

시중의 많은 마케팅 전략서들이 서문에 전략(Strategy)의 어원을 그리스어인 스트라테고스 (strategos: 줄세우기, 집단적인 힘과 압력의 행사를 의미한다고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혹자는 이 단어를 예를 들며 군대의 오와열을 정비하듯이 마케팅이나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설명하기도 하고 체계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난 생각이 조금 다르다.

 

유사이전에 있었을 작은 집단간의 다툼이나, 싸움에서 어떤 명확한 개념이 없었을 때도 전략이란 것은 태동하고 있었을 터이다. 자신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을 걸고, 가진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집중하여 투쟁이 벌어지는 순간, 전략이란 것은 All or Nothing을 염두에 두고 적의 약점을 비집기 위해, 조금이라도 자신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적에게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들이 아니었을까?

 

테무진이 그러했고 이순신이 그러했듯이 그들이 국운을 걸었던 그 전날 밤의 그것처럼, 전략은 무겁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예고한다.

 

전략의 위엄

테무진의 전략, 전술을 강의중인 극강미남 필독(@ddanzifielddog)선생

 

결국, 생과 사를 구분 짓고 국가 또는 공동체의 존망을 결정짓는 전장에서 전략이 태동했고 발전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전략은 생과 사를 더하고, 그 성공여부에 따라 모든 것을 다 가지거나 다 잃게 되는 천근같은 '무게'를 가지고 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략의 발생이유는 그 자체로 본질이다. 전략은 태생적으로나 본질적으로 'All or Nothing'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전략이란 단어에 걸맞는 행위가 되려면 당신이 만든 문서, 당신이 뱉은 말 한마디에 사실상 해당 주체(기업이나 정치인이나 자영업자나)의 생사, 존망이 모두 다 걸어야 하는 행위여야 비로소 '전략'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그냥 시도이거나 기획으로 명명되어야 마땅하다.

 

굳이 이 무게감을 강조하는 이유는 별 것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야 전략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업에 관련된 기획자, 전략가라면 단어의 무게감을 확연하게 느끼고 전략을 입안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었다. 적어도 전략에는 아니면 말고는 없는 것이다.

 

전략은 All or Nothing의 존재 라는 것, 이것은 특히 선거 판에서 단기간에 승자독식의 결판을 내어야 할 때는 더욱 더 중요하다.

 

일단 전략의 개념을 이정도만 머리 속에 넣고 또 설명될 기회가 있을 테니 차근 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2. 전략의 시작은 '정의(Definition)'이다.

당신이 모기업의 기획실이나 마케팅실, 또는 홍보팀이나 광고대행사 등 관련업종의 종사자로 입사했다고 하자.

 

어리바리하게 출근해 있는 당신에게 사수랍시고 와서는 자사와 경쟁사의 마케팅이든 시장침투이든 시장 방어이든 여하간에 전략을 파악하고 분석해보라고 지시한다. 그 이유나 방법은 설명해주지 않았고 그 한마디만 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업무로 사라진다.

 

학교에서 분명히 환경을 분석하는 방식은 배웠다. 그 배움의 순서대로 시장자료를 출력하고 경쟁사동향을 분석하면서 소비자 자료를 층층히 쌓아놓고 정리해나가기 시작한다. 대부분 수치와 도표로 도배된 보고서들은 뭐가 유의미하고 뭐가 무의미한 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숫자가 난무하고 형형색색의 그래프들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료의 양이 아니다. 당신이 그 자료를 들여다 보고 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각각의 요소들을 주시하는 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관점의 예

'관점'이란 자료를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본 숫자나 정보가 새로운 이야기를 해줄때까지
반복해서 읽고 사고해보는 것인데…해석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이야기해 보도록하자.

 

어떠한 관점에 의해서 자료를 본다고 함은 자료를 새롭게 구성하고 재'정의'함을 의미한다. 전략은 당신이 내릴 바로 그 '정의(definition)'에서 시작되고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정의'되어졌는가에 의해서 A급 기획자가 될지 C급 기획자가 될지 좌우된다.

 

'정의'의 또 다른 이름은 인사이트(Insight)라고 한다. 정보의 세세한 의미를 파악하고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팩트를 엮어서 새로운 환경을 재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업계용어로 인사이트라고 표현하지만, 일상어로는 '통찰'가깝다. 통찰은 한마디로 당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해야할 것들은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자료들을 모두 외우다시피 해야한다. 머 리속에 백지로 채워진 방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모든 자료들이 카테고리별로 일목요연하게 그림그릴 정도가 되어야 한다. 각각의 정보들이 다른 카테고리의 정보와 함께 해석되어질 때 이것을 입체적으로 사고한다고 말하고 소위 인사이트'Insight'가 가능해지고 궁극적으로 '정의(Definition)'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총수는 가카치세의 한국사회와 사람들, 그리고 좌우파의 진영논리, 계층간의 갈등 현상들을 한마디로 '두려움'으로 정의한다. 너불편집장은 한 발 더 나아가 '외로움'때문이라 진단한다. 총수는 이 정의를 바탕으로 '쫄지마'를 외치고 편집장은 딴지 내에서 아직은 극비인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하고 또 '외로움 극복의 서'를 쓴다.

 

상황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전략적 방향을 만드는 것이다. 상황이 '정의'되어야 행동이 '결정'되어지고 결과를 '평가'할 수 있는 기반이 생기며 이것이 하나로 바늘에 관통될 수 있어야 비로소 '전략'이란 단어가 만들어진다.

 

'정의' Definition의 예

모피 광고의 대부분은 여성의 나체에 모피만을 입힌다.
속옷과 모피가 함께 쇼를 하는 경향도 많다.
결국, 모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섹슈얼리리티를 파는 것이다.

 

섹슈얼리티- 이것이 모피시장의 'definition'이다.

 

이것이 상황분석에서 필요한 '정의'이다.

 

덧붙일 것은 정의(Definition)에 정답이 있을 것이란 환상도 역시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과 경험, 그리고 정보의 양 내에서 통찰할 수 밖에 없고, 가장 설득력있어 보이는 '정의'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늘 새로운 정의에 의해 논란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안심하라. '논란'도 '전략'의 일부다. 완전무결하고 오류 없는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3. 대부분의 전략은 논란을 만든다.

앞선 예고편에서 전략적인 관점에서만 평가한다면 역대 대통령중에서 노무현 전대통령이 최고라고 평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대선과정에서 펼쳐놓은 주된 공약들 동북아균형자론이니 행정수도니 하는 것들이 모두 대선판을 뒤흔들었다. 일반인들부터 전문가, 경쟁 집단까지 그가 한마디할 때마다 이것이 가능할지 아닐지에 대해 첨예하게 논쟁을 했다. 그리고 논쟁이 최고점에 달할 때 다시 다른 논쟁거리를 툭하니 던져 놓는다.

 

시장은 흔들리고. 이슈에 따라 사람들은 이합집산을 해가며 지지율부터 지지단체까지 마구 춤을 춘다. 마지막에 당시 정몽준의 지지철회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선되었다.

 

물론 정몽준의 행위는 최후까지 기냐 아니냐를 고민하던 사람에게 완전히 노무현후보에게 무게추를 달아준 것이기도 했다.

 

가카의 당선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평했다. 하지만 전략적인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미 대선전에 모든 키워드를 '경제'와 상대의 '무능'에 맞춰놓은 한나라당에 의해 가카가 경제를 살리겠다며 야심차게 내놓은 '한반도 대운하'로 여론은 양분되었다. 국토를 절반으로 갈라놓겠다는 그의 구상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격론을 벌이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2MB를 버릴 것인지, 가질 것인지에 집중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에 비해 야권진영에서는 가카의 개인비리에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전략'이란 것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나온 야권의 유일한 대응 이슈가 당시 정동영후보의 '달로 로켓보내기'였다. 게임은 그 순간에 끝났다.

 

대운하-가카에게는 이름은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버리는 것보다는 소비에 더 강한 면이 있는데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반응한다.
특히나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안된다'보다는 '한다'에

미묘하게 더 끌리게 되는 데 이것이 정치적으로 관점으로 볼 때
'FTA'찬반 논란에서도 동일하게 작용되었다.

 

하다 못해 마트에서도 적어도 주부가 백원 더 비싼 콩나물을 살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며 들었다 놨다를 해야 기회가 생기는 법인데, 아예 눈길하나 끌지 못했으니 이미 승부는 결정난 것이다.

 

즉각적인 반응과 결과의 세계인 홈쇼핑에서 '마감임박', '주문폭주'등의 용어를 쓰는 이유는 바로 그 순간이 바로 시청자들의 고민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게 하지 않으면 선택도 없기 때문이다.

 

논란을 만드는 전략이 아니라면, 시장의 안정된 상태를 깨트리지 못하고 그렇다면 시장 점유율이나 업계 순위를 만들지 못한다. 만약 어떠한 이슈로 사람들의 긍정적이든 부정적인 반응이든 시장이 혼란스럽다면 지금 당신은 매우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민주당 경선에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전략적이지 못했던 슬로건
잘 만들었다는 있었지만, 복지는 이미 새누리당까지 들고 나왔던 필수요소였고

저녁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손학규에게는 사람들이 '그게 가능해'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더욱 강력한 무엇인가가 더 필요했던 사람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저녁이 있는 삶'은 이번 민주당 경선에서 가장 아쉬운 선거 슬로건 중에 하나이다. 물론, 복지분야에 대한 카피의 완성도는 사실상 지금까지 봤던 선거 슬로건 중에서는 최상에 속한다.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많은 문제점을 담고 있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말이 이쁘다'를 제외하고는 선거 전략적인 속성을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혀 고민에 빠트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민이 없는데 손학규 후보에게 모아지는 눈길은 한계가 있다. 그냥 슬로건으로 수명이 끝났다.

 

손학규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잠재적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문재인에 대한 차별성이 아닌 그를 선택하게 만들지 말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이 부분은 '나는꼽사리다' 공개방송에 출연한 그의 이야기 속에서도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전략적 가이드 라인이 제대로 세워졌다면, 그 토대에서 벗어나 아무리 좋은 카피, 크리에이티브, 이미지가 만들어졌더라도, 기획자들은 그것을 버린다. 참고로, 전략가에겐 버리는 것도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손학규후보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4. 모든 전략은 1등전략이다.

모든 전략은 1등을 위한 전략이다. 3등이 2등이 되기 위한 그런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건희대제의 1등 제일주의인가 싶겠지만 이것은 냉정한 현실이다.

 

마켓쉐어 ( M/S, Market Share, 시장점유율을 말한다)상에 1위, 2위 3위는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100명의 사람 중에 50명의 사람이 1등으로 생각하는 제품이 존재하고 30명의 사람이 1등이라 생각하는 제품도 존재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 제품을 구매하거나, 그 정치인에게 표를 던질 때는 시장의 3위라서, 2위라서라는 개념은 없다. 그들이 선택한 모든 제품은 자신이 판단했을 때 가장 좋고, 타당한 1등 제품이었기에 구매한 것이다. 2번째로 좋아하는데 그것을 선택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전략은 1등을 위한 전략이어야 한다. 일단 내 앞의 경쟁자를 제치고 1위를 겨냥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1등이 되고자 하는 것에 소비자들은 호응한다. 삼성의 말도 안되는 '세계 일류 드립'은 사실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에서 모든 후보자들이 문재인을 겨냥한다. 자신들의 선명성이나 차별점을 끌어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억지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완전히 틀린 방식이다.

 

유권자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문재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그들이 싸워줬으면 하는 상대는 새누리당의 대선후보다. 그 후보와 싸워서 어떻게 이길 것인지, 누가 더 이 길수 있을 지에 대한 판단으로 경선에 임한다. 이건 앞서 말했지만 경쟁자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해서 나오는 오류들이다. 불행히도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 지 모른다는 거다.

 

1962년 미국에서 시작된 폭스바겐 'Think Small' 캠페인
베이비붐 세대가 크고 강한차를 선호하는 미국시장에서 
게다가 전범국인 독일차이기도 하여 고전하던 폭스바겐은 이 캠페인으로
10만대 수준의 판매량을 단 1년만에 20만대로 끌어올렸다.
시장의 하위그룹이었지만, 시장전체를 조망하고
자신들의 경쟁자를 '크고 강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가진 자산을 최대의 강점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이 1등 전략이다.

 

광고든 마케팅이든 전략은 자신을 시장의 유일무이한 존재 'the one'이 되고 경쟁자들은 'others'로 만드는 것이다. USP전략이든, Positioning전략이든 상관없다. 모든 전략은 시장의 1위가 되기 위해 모든 경쟁자들을 Others로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유일무이한 대안이자 길이란 사실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슈를 선점한다는 것의 중요성이 발생한다. 한 후보, 제품이 내세운 이슈에 동조하든 욕을 하든 먼저 내세운 쪽을 제외하고는 그 순간에 'others'로 전락하고 만다. 3등이 2등하겠다는 전략은 결국 수 많은 others 중에 사람들이 차이점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인데 차라리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더 낫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은 전략의 아주 일부분이지만, 가장 많이 간과되어지고 또는 무시되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전략이 담고 있는 것들은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일단 이정도의 개념을 가지고 시작해보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시야를 넓게 가지고 그리고 그것이 옳든 틀리든 정의해보고 전략의 날을 날카롭게 세워보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다음은 대선(예비)후보들의 슬로건들이다. 보고 다시 한번 차근 차근 짚어보자. 지금까지 듣던 이야기들과 다른 평가를 할 수 있다면 잘 따라온 것이다.

 

 

한 곳에 모아보면 정말 재미있다. 어떤 '정의'였고, 어떤 '논란'이 필요했으며 어떻게 '1위'가 되고자 했는 지 곰곰히 살펴보자. 의외로 아무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다른 지점의 문제의식을 느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들을 포함해서 이제 전략 설정의 구체적인 방식으로 넘어간다. 담에보자.

 

그럼 졸~라!

 

 

미디어전략팀장 게으른수다쟁이

http://www.ddanzi.com/blog/archives/103794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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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은 내년부터 1조8000억원이 투입되는 공중급유기 4대 도입사업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국방부는 내년 예산에 550억원의 착수금을 요구하였으나 기획재정부는 이를 360억원으로 조정한 뒤 청와대와 협의하였다. 그런데 8월30일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청와대 외교안보실은 기재부 예산실장에게 이 예산을 전액 삭감하라고 지시했다. “공중급유기는 일본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도 덧붙여졌다. 한국 공군의 전투기 체공시간을 늘려 작전반경을 확대하도록 하는 게 바로 공중급유기다. 독도에서 한국군 방어훈련으로 심기가 불편한 일본에 청와대가 파격적 배려를 한 셈이다.

올해 추진되는 차기전투기사업과 함께 공중급유기는 공군 전력 증강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희한한 정치논리로 성사 직전의 사업이 날아갔으니 공군은 거의 멘탈이 붕괴된 상황이다. 죽은 사업을 다시 살리려고 공군 참모총장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상황은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이런 결정이 내려진 그날 열린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는 더 황당한 결정을 내렸다. 9월7일로 예정된 독도 방어훈련에서 해병대의 입도 훈련을 취소하기로 한 것이다. 최근 상륙기동헬기와 상륙공격헬기를 도입하여 항공력으로 상륙전을 모색하는 해병대는 독도에서도 그 위용을 과시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가 갑자기 날벼락을 맞았다. 독도 방어훈련은 국민적 지지를 받는 예고된 훈련이었기 때문에 일본 눈치 보느라고 훈련을 취소한 데 대한 분노는 더 컸다.

더 심각한 결정도 내려졌다. 국방부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뒤 한-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점을 고려해 양국 군사협력 문제를 재검토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9월말에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부산항에 입항하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훈련을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냐는 문제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욱일승천기를 게양한 일본 함정이 들어와 우리 함정과 기동하면서 양국의 군 관계자가 악수하고 환담하는 것을 수용해야 할 것인지, 국방부는 연기하거나 재검토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청와대는 “예정대로 실시한다”고 결정했고, 이 때문에 국방부와 해군은 내키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하고 원치 않는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 국방부에 국민의 질타가 쏟아질 터이니 이 역시 멘탈이 붕괴될 일이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 육군도 예외일 리가 없다. 앞으로 5년간 2조5000억원을 투입하여 유도탄 전력을 증강하고 무인공격기까지 보유하려는 육군은 지대지미사일 사정거리 연장이 최대 숙원이다. 그런데 최근 언론보도에서 일본이 한국과 독도 갈등을 겪으면서 미국에 “한국의 미사일 사정거리를 연장해주지 말라”고 로비한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 미사일 사정거리가 연장되면 일본열도가 그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미국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에 미국이 흔들리고 있으니 육군의 멘탈이 붕괴될 일 아닌가?

일본이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한국군 전력 증강은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이후 북한에 대한 ‘적극적 억제전략’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의 핵심 사업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미국과 일본의 눈치를 본다면 지난 3년간 이명박 정부가 표방한 안보정책은 저절로 붕괴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 보수안보세력의 국가주의가 일본의 국가주의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뼛속까지 친일이고 친미”라고 스스로 말하는 그들의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고도 북한에 대해 무슨 원칙 있는 접근을 할 것이며, 적극적 억제를 한단 말인가? 청와대 안보수석의 황당한 궤변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0503.html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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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온라인과 언론을 뒤흔든 화제는 '안철수 협박'과 '안철수 기자회견'이었습니다. 안철수 원장 측근이었던 금태섭 변호사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새누리당에서 안철수 원장이 대선에 출마할 경우 뇌물과 여자문제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대선불출마를 종용했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금태섭 변호사는 "지난 4일 오전 7시57분께 새누리당 정준길 공보위원의 전화를 받았다.1999년 산업은행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과 서울 목동에 거주하는 음대출신과 최근까지 사귄 것을 알고 있다, 대선에 출마하면 폭로하겠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습니다.

금태섭 변호사의 기자회견 전문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태섭 변호사: 갑자기 연락을 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저는 오늘 깊은 고민 끝에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9월 4일 월요일 아침 7시 57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정준길 공보위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7분간 통화를 하면서 안철수 교수가 대선에 출마할 경우 뇌물과 여자문제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대선 불출마를 종용했습니다. 이것은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국민에 대한 협박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범죄행위입니다. 우리 국민의 변화 열망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안철수 원장에게 확인한 결과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한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국민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아니라면 대선 기획단의 음모와 활동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분명한 입장을 제시해야 합니다. 

다음은 구체적 내용입니다. 

첫째, 안철수 연구소 설립 초창기 1999년 산업은행에서 투자 받았는데 투자 팀장 강모씨에게 뇌물을 제공했다. 

둘째, 안철수가 목동에 거주하는 30대 여성과 최근까지 사귀고 있다. 

정씨는 구체적 근거는 말하지 않은 채 “우리가 조사해서 다 알고 있다. 대선에 나오면 죽는다. 안철수 원장에게 그것을 말하고 불출마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불출마를 종용했습니다. 

그 내용이 새누리당 측에 전달되고 있지 않는가, 이와 관련해 일부 언론 뒤에 숨은 보이지 않는 거대권력이 현 상황을 지휘하고 있지는 않은지 강한 의문이 듭니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의 근원지와 조직적 유포에 대한 제보가 있습니다. 국민의 염원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이는 안철수 원장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낡고 구태연한 거대 음모. 국민은 역사를 되돌리려는 어떤 사실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금태섭 변호사가 밝힌 정준길 공보위원의 협박 내용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뇌물이고, 두 번째는 여성편력입니다. 정치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장 치명적인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녹취록이 없어서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금 변호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논란이 됐던 경찰의 안철수 원장 조사 관련과 이어져 정가에 떠돌던 새누리당의 안철수 네거티브 전략팀 운영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준길 위원의 안철수 원장 대선 불출마 협박을 보려면, 과연 금태섭,정준길 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필자가 늘 주장하는 그 배경에 숨겨진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살아온 인생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검사직을 내던진 정준길'

정준길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대선기획단 공보위원입니다. 새누리당 공보위원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정준길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사시 35회를 거쳐 검사가 됐습니다. 울산지검에 근무하면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파견돼 안대희 (현재 새누리당 대선기구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 중앙수사부장과 대선자금 수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준길의 경력을 보면 검사를 그만두고 어떤 법무법인에 간 것이 아니라 CJ그룹이라는 기업으로 갑니다. 전략구매 실장이라고 하지만 직함은 상무였습니다.이런 그의 모습은 그리 흔치 않은 행보였습니다. 도대체 왜 그는 법조계가 아닌 기업으로 갔을까요? 

정준길이 기업에 간 이유는 그가 펴낸 자전 에세이 '길의 노래'에 나와 있었습니다. 
 
“평생 직업으로 삼고자 했던 검찰을 떠나면서 새로운 삶의 길로 7~8년 정도 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후 국회의원에 출마해 보겠다고 나름대로 중기 계획을 세웠었다.” 
 

▲ 정준길 변호사의 자전 에세이 '길의 노래' 출판기념회 © 디지털광진


정준길은 대한변호사협회 수석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정계 입문을 노렸고, 2008년 CJ에 사표를 내고 한나라당 광진구 지역구 공천을 신청했지만 탈락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4.11 총선을 앞둔 2011년 '길의 노래'출판 기념회를 자신이 출마하려던 광진구에서 개최했습니다. 건대동문회관에서 열린 정준길 변호사의 출판기념회에는 대표적인 친박계인 현경대 전 의원이 참석해, 그가 지금의 박근혜 대선캠프에 어떻게 참여했느냐를 짐작하게 합니다.

박근혜 후보 지지모임인 '국민희망포럼'의 법무실장을 지내기도 한 정준길은 대표적인 친박계로 분류되는 인물이었습니다.그는 2012년 4.11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추미애 후보에게 패배한 뒤 박근혜 대선캠프에 합류해 박근혜 후보의 대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대선캠프에서도 나와 앞으로 어떻게 다시 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정치판을 떠날 사람은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검찰개혁을 외치다 쫓겨난 금태섭'

금태섭 변호사는 안철수 원장 측근 이전에 대한민국 검찰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입니다. 2006년 9월 금태섭 변호사는 '현직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라는 글을 한겨레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 금태섭 검사가 기고한 연재물 © 한겨레 신문


서울중앙지검 형사부에 근무하던 금태섭 변호사는 법에 명시된 피의자의 권리를 일반인에게 쉽게 알리기 위해 10회 연재를 계획으로 한겨레 신문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단 1회 기고 후 검찰과의 마찰로 연재를 그만두게 됩니다. 

한겨레 신문에 글을 올리고 난 뒤에 6개월 후에 검찰을 나온 금태섭 변호사는 법무법인 지성에 근무하면서 서강대학교 법학전문 대학원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금태섭 변호사는 현직 검사로 '조직의 배신자'라는 말을 들었던 기고문을 쓴 이유에 대해서, 검찰이 과연 피의자를 보호하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과 선진국처럼 변하지 못하는 검찰 조직의 문제점을 고민하다가 글을 썼다고 합니다. 

안철수 원장과 금태섭 변호사가 전면에 나서게 된 배경은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박원순 시장의 멘토단으로 참여하면서입니다. 금변호사와 안철수 원장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처음 만났으며, "우리 둘 사이에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고 말해 두 사람이 각자의 행보 속에 비슷한 성향으로 친해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금태섭 변호사가 안철수 원장의 측근으로 나왔던 기자회견도 중요하지만, 그가 왜 좋아했던 검사직을 그만두었는지도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철수 원장 불출마 협박에 담긴 단편들'

정치블로거로 살다 보면 왜 지금 시점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를 자꾸 되짚어 보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새누리당이 안철수 원장 뒷조사를 적극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저로서는 과연 얼마큼 새누리당이 안철수 원장을 이용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 황우여 대표가 새누리당 당직자에게 받은 문자


안철수 원장 불출마 종용 기자회견이 열리던 시각, 국회 본회의장에 있던 황우여 대표는 새누리당 당직자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습니다. 

"안철수 관련 "협박"이 이슈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사실관계가 이슈가 되도록 해야 함"이라는 문자를 통해 우리는 새누리당이 어떻게 하든 앞서 말한 정치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뇌물과 여자문제를 진실처럼 몰아가려고 한다는 기획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또한, 9월4일 오전에 받았던 전화를 굳이 슈퍼 디데이로 불리던 민주당 광주,전남 경선이 열리던 9월6일 기자회견을 했는지도 한 번쯤은 되짚어봐야 합니다.

필자가 왜 단편들이라는 단어를 썼느냐면, 정확한 팩트가 없는 혼전의 양상이 지금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권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언뜻 들었던 얘기들이 갑자기 사실로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의 안철수전담팀 등)


과연 새누리당은 무슨 의도로 정준길을 시켜 전화하게 했고, 과연 정준길은 무엇을 노리고 '안철수 저격수'를 자처했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정준길 위원처럼 검사 출신이며 치밀한 사람이 무턱대고 트위터에 글을 올리거나 뻔히 이슈화될 수 있는데 아무리 친구지만(정준길과 금태섭은 서울대 법대 동기) 적처럼 대치 상황에 있던 금태섭 변호사에게 전화했다는 점도 무심코 넘어가기는 자꾸 배경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단락에서 필자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정치권의 모든 움직임을 그냥 단순히 보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저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가 함께 고민하며 의견을 나누고 싶기도 합니다.

▲ 4.11총선 당시 정준길 후보 지지유세를 하는 박근혜© 광진의소리


사람을 평가하면서 단순히 그가 어떤 인물이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본다면, 금태섭 변호사는 검찰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 정준길은 자신의 정치적 권력과 야망을 위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정준길은 9월6일 어제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새누리당 대선기획단 공보위원직을 사퇴했습니다. 또한 '가슴이 아프다'라며 갑자기 자신이 건 전화가 친구를 향한 우정어린 충고였다고 항변했습니다. 
 
"정치적 목적을 앞세워 20여년이 넘은 친구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정치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과연 제가 이런 행태의 정치를 계속 해야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상당히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진짜 정준길은 이런 순진한 생각으로 전화를 했을까?)

앞으로 정준길과 금태섭의 운명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정준길은 어찌 됐든 정치판의 말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잠시 사라집니다, 그러나가 그가 걸었던 한 통화의 전화는 12월 대선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대한민국 정치는 국민을 위한 정치는 퇴보하면서 정치판의 말들은 한 치 앞을 모를 정도로 치밀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치판을 보는 국민은 최소한 두세 수는 미리 보는 안목을 지니는 고수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정치를 어렵고 더럽고 추악하게 만드는 정치인들입니다. 



http://impeter.tistory.com/1960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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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가실때는 전체 복사+붙여넣기 말고 링크로만 http://konatamoe.com/20165267804 퍼가주시기 바랍니다.

애플사는 삼성에 자사의 특허들과 자사 제품들의 디자인을 카피당했다고 미국 법원에 소송을 냈고, 결국 삼성은 1조2000억원을 배상하게 되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삼성이 애플의 스마트폰, 태블릿, iOS의 인터페이스, 패키지, 악세서리, 광고까지 배끼고 있는 것은 IT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많이 느끼고 계셨을것입니다. 현재 삼성은 갤럭시 노트, 갤럭시S2, 갤럭시S3등 휴대폰 사업에서 세계 일류가 됬지만 갤럭시S가 처음 나올때만해도 삼성은 스마트폰에서 '기타'제조사로 분류되는 수준이었고 세계 스마트폰은 아이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성능도 가장 좋은 폰이었습니다.

삼성은 애플의 모든 것을 카피하며 점유율을 높여갔고 결국 성능도 좋고 모든것이 좋은 이유도 있고 결국 휴대폰에서 애플을 앞질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것들을 애플을 배꼈습니다. 제가 미국의 판사가 아니니 소송에 대한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단지 삼성이 애플의 어떤 것들을 어떻게 배껴왔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객관적인 자료를 보거나, 비교 사진을 보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우리나라 제품이 최고라는 생각과 이상한 곳에서 발휘되는 잘못 된 애국심 등의 복합적인 요인들이 합쳐져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도가 지나친 카피 행위에도 둔감하고, 국내 기업을 옹호하기에 바쁩니다. 언론은 카피에 대한 잘못과 책임은 따지지 않고 마치 대한민국이 미국에 진 것처럼 애국심을 자극하거나 패배했다는 기사만 쓰기에 바쁘고, 국민들은 범죄행위인 타사 제품을 베끼는 것이 어떻냐면서 말도 안되는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삼성의 기업 윤리나 디자인적인 침해 등의 부정적인 면을 다루는 언론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왜 소송에서 져서 억울하다는 듯한 기사만 있고 애플의 것들을 베낀 범죄 행위에 대한 사과나 문제에 대한 책임에 대한 기사는 없을까요? 만약 중국 회사가 삼성의 스마트폰이나 TV의 기술과 디자인을 훔쳐서 일류 기업이 됬다고해도 중국기업을 옹호할건가요? 잘못된 편견과 잘못된 애국심을 버리고 회사대 회사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봅시다.

국내의 많은 파워블로거들 또한 기업들의 체험단과 기업의 여러 제공들에 이미 뼈속까지 기업의 노예가 되어버려서 국내 기업을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요 언론또한 기업대 기업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잘못된 애국심에만 빠져 마치 삼성=대한민국인 것 처럼 잘못된 바탕하에 애국심을 일으키거나 삼성을 옹호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일 뿐입니다.

과연 국내 기업이 잘못된 행동을 해도 덮어두는게 우리나라 기업을 사랑하는 행위일까요? 기업이 잘못된 길을 간다면 바로잡아주는 것이 국민들이, 그리고 진정 기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 아닐까요?
타 기업의 이미지와 디자인을 그대로 베껴서 똑같이 만드는 행위는 분명한 범죄 행위이며 중국이 베껴 만들어 팔면 욕하면서, 똑같이 한국이 베껴 만들때는 감싸는 행위는 우리나라 국민의 잘못된 애국주의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매우 오래 걸리고 힘들지만, 이미 있는 것을 베껴서 모방하는 것은 쉽고 간단합니다.
이 글의 목적은 애플이 뭔가를 창조했든 안했든 원조든 아니든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삼성이 애플의 것들을 끊임없이 베낀것인가에 대한것을 근거 자료와 함께 알아본 것입니다.

잘못된 애국심과 삼성을 좋아하든, 애플을 좋아하든 이런것들은 모두 버리고 단순히 카피를 했는가 카피를 한것이 아닌가에 대해서 객관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바라봅시다. 토론과 의견을 하는것은 좋지만 댓글로 주장을 할때는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만의 감정에 의한 욕설이나 앱등이, 삼엽충등 비하 발언이 아닌, 사진이나 문서 링크등의 자료를 가지고 근거있는 주장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품디자인
#A-1










아이폰3GS 출시 후 1년 뒤에 출시된 갤럭시S는 아이폰을 베껴서 만들었습니다. 
똑같은 은색 크롬 테두리 처리와 똑같은 모서리 둘이 거의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성은 갤럭시S를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최고 인기 스마트폰이었던 아이폰3GS와 같은 느낌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폰3GS의 디자인을 그대로 모방한 것입니다. 갤럭시S의 경우 모서리를 깎은 R값이 아이폰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스마트폰폰 디자인이야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이런 비슷한 디자인이 생길 수도 있는건 당연하지만 똑같은 디자인의 크롬 테두리의 모서리를 깍은 R값까지 정확하게 일치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이폰을 고의적으로 카피했다는 주장이 인정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허 번역 원문-

http://www.engadget.com/2012/08/25/breaking-down-apples-1-billion-courtroom-victory-over-samsung/


이번 미국 판결 중 - 디자인 특허

D '677 특허: iPhone의 에지-투-에지 유리, 스피커 슬랏 및 디스플레이 보더

D '087 특허: 둥근 코너들과 홈 버튼

D '305 특허: iOS에서 그리드-스타일 아이콘 배열

D '889 특허: iPad의 에지-투-에지 유리, 둥근 코너들 및 좁은 베젤


배심은 '381 바운스백 특허를 삼성의 전체 21개 기기들이 침해했다고 판정했고, 삼성 본사가 삼성 미국법인에 침해한 제품들을 팔도록 권유했다고 판정을 내렸다.

배심은 '915와 '163 주밍 및 스크롤링 특허들을 삼성의 거의 모든 기기들이 침해했다고 판정했고, 역시 삼성 본사가 미국법인에게 판매를 권유했다고 판정했다.


배심은 D '305 그리드-스타일 아이콘 배열 특허를 삼성의 모든 기기들이 침해했다고 판정했다.
배심은 D '087 둥근 코너들 특허를 삼성 갤럭시 S, 갤럭시 S 4G, 바이브런트가 침해했다고 판정했다.
배심은 D '677 에지-투-에지 유리 특허를 삼성의 갤럭시 에이스를 제외한 전 기기들이 침해했다고 판정했다.

배심은 유일하게 D '889 iPad의 에지-투-에지 특허만 삼성 갤럭시 탭 10.1과 갤럭시 탭 10.1 4G LTE가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정했다.

 

배심은 D' 087 특허만 제외하고, 모든 특허들을 삼성이 고의로 침해했다고 판정했고, 애플의 모든 특허들이 유효하다고 판정했다.



잘 모르는분들이 단순히 폰의 모서리만 둥글면 다 애플 가이드에 걸린다고 지레 짐작하시는데 모서리 R값을 포함하여 여러 복합적인 것들이 특허로 등록되어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재판에서도 애플에게 지적 된 20여종의 제품 중 모서리 디자인을 침해한 것은 크롬 테두리의 모서리 R값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갤럭시S, 갤럭시S 4G, 바이브런트(갤럭시S 변종) 뿐 입니다. 일부러 아이폰3GS 모서리의 R값에 일치시키기도 어렵습니다. 무작정 둥근 직사각형폰은 다 애플 디자인에 걸린다고 근거없는 주장을하는 분들이 많아서 알려드립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GADGET LAB 쪽에 설명되어있습니다.
똑같은 전면 디자인, 똑같은 크롬 테두리 처리, 똑같은 크롬 곡면 모서리의 R값까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카피'했다라는 것입니다. '애플의 가이드라인 따르면 휴대폰을 삼각형으로 만들어야 된다', '자동차 바퀴가 네개면 카피다'같은 말도 안되는 근거없는 주장을 하는분들은 객관적인 근거와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삼성은 애플과의 소송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2012년 초에 아이폰3GS를 그대로 똑같이 카피한 갤럭시 에이스 플러스를 중국, 유럽, 러시아, 중동, 아프리카, 남미 지역에 출시했습니다. 마치 디자인 카피 소송을 건 애플을 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기의 디자인도 똑같을뿐더러 아이폰3GS의 제품 사진 배치까지 동일합니다. 삼성은 디자인을 베끼는 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 짝퉁기업인지 한국 대기업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세계적인 대기업이라는 휴대폰 제조사가 타사 제품 디자인을 그대로 베껴서 출시하고 있으며, 이미 갤럭시S, 갤럭시탭등은 애플사에 디자인 표절 소송으로 세계 각국에서 재판이 진행중입니다. 이런 디자인의 신제품은 삼성에게 이어지는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스마트폰들이 직사각형에 모서리는 약간 둥글지만 제조사마다 모두 특색이 있고 개성이 있어서 모두 천차만별의 디자인을 갖고 있습니다. 오히려 디자인을 아이폰처럼 만들래야 만들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하지만 오직 삼성 갤럭시만이 계속 애플 제품의 디자인을 똑같이 카피하고 있습니다. 


제품 마케팅 사진
#A-2

누군가 이렇게 제품 사진을 똑같이 찍으라고 가이드라인을 정해준걸까요?
아닙니다. 삼성이 사진 구도와 배치를 베낀겁니다.

‘갤럭시S’ 광고 사진은 해외에서 유명했습니다. 갤럭시S 제품 사진은 아이폰3GS 광고사진을 그대로 베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삼성 로고만 없으면 일반인은 어떤게 애플 제품인지 삼성 제품인지 구분하지 못 할 수준입니다.



삼성은 애플 제품 사진 배치까지 그대로 카피했습니다.

 

삼성 갤럭시S, 갤럭시탭등은 기존 애플의 제품 사진 구도를 그대로 도용하여 같은 형식으로 제품사진을 찍고있습니다.
삼성만이 제품 디자인 뿐 아니라 마케팅 광고 이미지구도까지 애플을 철저히 베끼고 있습니다.
애플의 제품 사진까지 이렇게 똑같이 찍어서 마케팅하는 제조사는 엘지, 노키아, 팬택, 모토로라 어느곳도 아닌 오직 삼성뿐입니다.

삼성은 왜 애플과 같은 구도와 편집을해서까지 제품 사진을 완벽하게 똑같이 찍어야만 했을까요?
미국에서 수년간 아이폰은 최고 인기 제품으로써 수년간 판매 1,2위를 유지하며, 삼성은 스마트폰 판매량 5위에도 못들었기 때문에 기타 제조사로 분류됬을 정도로 판매량도 적고 스마트폰에서 인지도도 없었습니다. 이런 삼성이 애플의 모든것을 베끼면서 아이폰, 아이패드의 대항마를 자처했고 현재는 이로인해 인지도가 매우 많이 올라갔고 스마트폰과 태블릿 판매량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인터페이스
#A-3

아이콘의 배치방식과 아이콘 주변의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태두리를 굳이 iOS처럼 만들어 채웠습니다. 특히 전화 아이콘은 삼성의 갤럭시S가 아이폰과 상당히 많이 비슷합니다.캘린더에 날짜가 표시되는 방식도 iOS와 동일합니다. 어플리케이션이 나타나는 창과, 하단에는 아이콘 4개가 올려져 있는 움직이지 않는 "도크"가 구분되어 있는 점도 같습니다.

모든 스마트폰은 다 아이폰하고 똑같은 인터페이스를 쓸 수 밖에 없다고요?
아이폰과 똑같지 않으면 어떤 스마트폰 인터페이스도 만들 수 없다고요?



이것은 안드로이드 레퍼런스폰 넥서스원의 안드로이드 2.3 진저브레드 매뉴 서랍입니다.
어플에 씌워진 둥근 네모 배경도 없고, 아래 독도 없습니다. 아이폰의 iOS와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왼쪽부터 LG, HTC, 모토로라, 소니의 안드로이드 초기의 매뉴 서랍입니다.
어떤 안드로이드 제조사의 UI가 iOS매뉴 화면과 비슷한가요? 그 어떤 제조사도 애플의 iOS와 비슷한 UI는 없습니다. 



안드로이드 제조사들 중 오직 삼성만이 애플 iOS 인터페이스를 그대로 카피했습니다.
아이콘 배경에 iOS의 아이콘과 같게 보이는 둥근 사각형을 씌웠고, 아래 4개의 아이콘 독까지 그대로 카피하였습니다.


아래의 아이폰 비교 평가 결과 보고서 원문 링크입니다. (134페이지부터 한글로 되어있습니다.)
갤럭시S를 아이폰3GS와 똑같이 만들려고한 증거자료로 제시한 삼성의 '갤럭시S와 아이폰 SW 비교 평가 결과 보고서'입니다.
이 문서를 보면 삼설 갤럭시S를 아이폰과 인터페이스와 UX를 모든 부분에서 얼마나 똑같이 만들려고 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페키지
#B-1

아이폰 국내 출시 이후, 갤럭시S부터 아이폰 박스와 똑같은 형태로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박스 재질부터 배치 방식까지 아이폰을 베껴서 당시 최고 인기였던 아이폰처럼 갤럭시S를 똑같이 포장시켜 출시한 것 입니다.

갤럭시S2 패키지는 아이폰 패키지와 더 똑같아졌습니다.






삼성의 주장대로 패키지 디자인 인상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 중요한 요소를 아이폰 패키지 디자인을 똑같이 베꼈습니다.

자존심도 없는지 애플 제품을 똑같이 베낀걸 부끄러워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베낀 패키지 디자인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아이폰 패키지를 똑같이 베낀걸 말이라도 못하면...




 


어떻게 베꼈냐고요? 별다른 설명도 필요없이 갤럭시S2는 제품과 포장지 사이의 여유 공간이 거의 없는것까지 아이폰 패키지와 똑같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폰의 패키지를 똑같이 베끼고 있습니다. 

이게 보편적인 휴대폰 박스 디자인 아니냐고요?
아이폰 패키지와 똑같이 만들지 않으면 어떤 폰의 패키지도 만들 수 없다고요?





갤럭시S 출시전 삼성 햅틱 씨리즈와 옴니아 씨리즈의 패키지입니다.
아이폰 패키지와 전혀 다릅니다.




다른 안드로이드 제조사들의 패키지도 다양하고 개성있는 패키지도 많습니다.
삼성만은 갤럭시S부터 구지 애플 아이폰 패키지를 카피해서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베낀 이유는 설명을 안해도 되겠죠.


태블릿 페키지
#B-2

갤럭시탭과 아이패드의 포장 박스입니다. 포장이 전면 하얀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에 살짝 기울어진 각도의 제품 사진이 위치합니다. 그동안 삼성의 포장 방식에 주목해보면, 박스 전면에는 전면 / 측면의 두 가지 갤탭의 일러스트가 들어갔어야 합니다.

태블릿 박스를 만드는 방법은 다양한데도 아이패드 박스와 분위기도 똑같이 만들고 박스 재질과 크기까지 거의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내부 포장방식에 있어서도 둘 다 상자에 여유가 없는 방식으로 포장되었습니다. 갤탭이 더 길게 생긴 것 빼면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저기서 제품 가리고 뭐가 갤탭인지 아이패드인지 구분하라하면 일반인들은 거의 못 알아 볼 수준입니다.

당시 아이패드만이 95%의 점유율로 태블릿 시장에서 유일무이한 인기 제품이었기 때문에 후발주자인 갤럭시탭이 갤럭시S처럼 애플에 무임 승차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이패드를 똑같이 따라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아이패드처럼 패키지 포장을 하지 않으면 어떤 태블릿 패키지도 만들 수 없다고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시는분이 있으실까봐 다른 제조사들의 안드로이드 태블릿 패키지 사진을 첨부합니다.





디자인도 아이패드와 비슷합니다.

당시 아이패드가 태블릿 시장의 95%를 점유한 유일무이한 최고 인기 태블릿이었기 때문에 삼성은 태블릿용OS가 아닌 휴대폰용 안드로이드2.2 OS로 갤럭시탭을 아이패드 디자인과 분위기를 모방하여 급조하였습니다. 세계적인 대기업이 타사의 기기만을 계속 베껴서 비슷하게 만든다는 것은 국제 망신입니다. 중국만 짝퉁을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삼성도 짝퉁 기기를 만들어 팔고 있는 것입니다.






삼성은 국내에서 아이폰 흥행 후 mp3 제품까지 아이팟 터치 특유의 박스 포장방식으로 똑같이 베꼈습니다.
굳이 투명 플라스틱 똑같은 소재를 사용해서 케이스 모양과 배치방식까지 아이팟 패키지를 그대로 똑같이 베꼈습니다.
  
삼성은 무슨 의도로 애플을 계속 똑같이 베끼는걸까요.
왜 다른 제조사들은 애플을 베끼지 않는데 삼성'만' 모든 것에서 애플을 베끼려고 하는지는 모두 알수 있듯이 이미 세계에서 최고수준의 인기를 끌고 있는 애플의 이미지와 디자인을 베껴서 마치 애플 제품 분위기처럼 포장하려는 것입니다.


악세서리 디자인
#B-3
갤럭시탭 30핀 어댑터, 애플 30핀 어탭터

애플 어댑터를 아주 비슷한 형태와 프린팅 위치와 모양까지 거의 똑같이 배꼈습니다.
젠더도 아주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굳이 애플 어댑터를 형틀 수준으로 똑같이 베껴 만든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쓸데없는 삼성에 대한 잘못된 애국심 때문에 '젠더를 만들때는 애플 젠더 모양과 똑같이 만들 수 밖에 없다'거나 
'이 애플의 젠더 디자인이 좋은데 삼성도 똑같이 만들면 어떠냐'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색이 다르면 디자인이 똑같아도 상관없다는 주의인가봅니다. 애플의 어댑터와 젠더를 형태와 모양 디자인을 완전히 배꼈습니다.
이정도면 짝퉁을 만드는 중국만 비난할게 아니라 짝퉁을 만드는 한국을 비난해야 할 수준입니다.
전세계의 사람들은 짝퉁을 만드는 중국 기업이나 한국 기업 삼성이나 어떻게 생각할까요?


주변기기 부분에서도 삼성이 애플을 따라한 부분이 잘 보입니다.

애플 30핀과 삼성 30핀은 겉모양만 같을 뿐 실제로는 핀매열이 다르기 때문에 호환 되지 않습니다.

참고로 애플 30핀에 대항하는 PDMI라는 업계 표준 30핀 커넥터 규격이 있지만, 삼성 30핀은 PDMI와도 다른 핀배열로 호환이 안됩니다.




왼쪽은 애플 USB 케이블 광고 사진, 오른쪽은 갤럭시탭 USB 케이블 제품 사진입니다.

제품만 똑같이 베낀 것이 아니라, 판매 광고 사진까지 똑같이 제작했습니다.

제작부터 광고까지 애플의 디자인과 분위기를 그대로 도용한 것입니다. 정말 간단히 예를 들어 LG와 팬택을 보면 애플과 비슷한 것은 찾아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 많은 제조사들 중에 오직 삼성만이 이렇게 애플의 제품 디자인부터 광고까지 모든 것을 베끼고 있습니다.


충전기 디자인은 다양한 제조사마다 천차만별로 다양한데도 삼성만은 애플의 특성있는 충전기 디자인을 복사 수준으로 거의 똑같이 베꼈습니다. 이렇게 애플의 디자인을 베껴 만든 곳은 수 많은 제조사들 중에서 오직 삼성 뿐 입니다. 제품, 박스, 구성품까지 타 업체의 이미지와 디자인을 그대로 똑같이 도용하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국내의 대부분의 파워블로거들은 기업의 여러 제공들과 체험단 선정으로 이미 기업의 노예가 되버려 국내 기업에 대한 올바른 비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언론들도 기업의 광고료 때문에 삼성을객관적인 시각에서 판단하는 기사를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곳의 어떤 글을 보든 마치 삼성=한국 애국심인 것처럼 포장되어 삼성의 편에서 쓴 글들 뿐입니다. 이것이 객관적인 글일까요? 현재 대부분의 국내 블로거들과 언론들이 이런 상태입니다.

하지만 해외 유명 블로그들과 IT싸이트, 언론들에서는 삼성이 제품부터 악세서리와 UI까지 모조리 애플 제품들을 똑같이 베낀 것에 대한 비난글들이 많습니다. 과연 한국에는 이런 비판글들이 얼마나 있었나요? 기업들의 노예가 되버린 한국의 대부분의 블로거들은 이런 글을 쓸 수가 없었을것입니다. 하지만 '코나타의 모바일 생활'만은 근거와 사실을 바탕으로한 객관적이고 정직한 글을 써오고 있습니다.


해외 언론 macgasm
#C-1

아래는 원문 번역입니다. 
삼성이 또 다시 뻔뻔하게 아이폰3G의 디자인을 훔쳤습니다.
오늘 삼성이 아이폰3G갤럭시 에이스 플러스를 발표했습니다. 이폰은 아이폰3G와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명확하게 삼성의 앞으로의 계획을 보여줍니다. 삼성의 2012년 제품 계획은? 바로 애플의 공식 위조범이 되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삼성은 국제법이나 애플의 소송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습니다. 삼성은 경쟁사들로 부터오는 창조물들의 디자인을 상업적으로 완벽하게 훔치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나는 여기 앉아서 보고있는 내 삼성TV가 누군가의 디자인으로부터 베겨져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나는 아마 다음(구입할) TV는 삼성이 아닌 LG나 소니 아니면 다른 어떤 제조사의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아이폰3G 4년 후 삼성은 아이폰3G가 오리지널의 디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나봅니다. 그들이 다시 카피를 시작한 것을 보면 나는 삼성에게 너무 많은 신뢰를 준 것 같습니다.



해외 언론 Obama Pacman
#C-2

아래는 원문 번역입니다.
삼성이 애플의 아이팟 터치를 베끼다.
삼성이 2011년에 드디어  2007년에 출시된 애플의 아이팟 터치의 짝퉁을 출시했습니다.
첫 아이팟 터치는 2007년 9월에 출시됬고 사진은 2009년의 3세대 아이팟 터치입니다.
삼성의 갤럭시 4.0 안드로이드 MP3 플레이어는 2011년 10월에 출시됬습니다. 애플 아이팟 터치와 비슷해 보이지 않나요?

삼성은 2010년의 아이팟 터치의 가격까지 베꼈습니다.
2010년의 8기가 아이팟 터치 4세대는 $229 ,10월에 출시된 갤럭시 플레이어는 가격까지 베껴서 $229로 출시됬습니다.
삼성에겐 안타깝께도 10월 출시 직전인 9월, 애플에서 아이팟 터치의 가격을  $199로 인하했습니다."



해외 언론 9TO5Mac
#C-3

http://9to5mac.com/2011/09/24/oh-samsung-you-are-making-this-too-easy/  

아래는 원문 번역입니다. 

Oh Samsung, you are making this too easy.

오 삼성아, 넌 너무 쉽게 만들고있어.

삼성의 상당히 인상적인 갤럭시S2를 사용해보다가 USB 어댑터가 "비슷하다"는걸 느꼈습니다. 
직접 확인해보니 모든 방향으로 밀리미터의 차이내로 똑같은 복제품이더군요. 특히 삼성의 예전 어댑터 디자인과 비교해본다면 말이죠.



이건 아이폰 충전기를 베끼기 이전의 미국 갤럭시 충전기입니다. 삼성은 기존까지 이렇게 작게 충전기를 만들다가 갤럭시S2부터 애플과 똑같은 덩치 큰 모양의 충전기를 만들어서 오히려 더 무겁고 불편해졌습니다.



해외 언론 GIZMODO
#C-4

http://gizmodo.com/5845036/samsung-has-like-totally-never-copied-apples-designs/gallery/1 


아래는 원문 번역입니다. 
삼성은 전혀 애플을 베낀게 절.대.로. 아니라니까.
애플은 삼성이 애플의 디자인을 베꼈다고 생각하지만 삼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그리고 애플은 하늘이 파랗다고 생각하고 삼성은... 그냥 농담이었어요. 두 회사 뭔가 "우연의 일치"가 있는 모양이지만 (법정에서) 삼성을 좋게 봐줄것 같지 않네요.






삼성은 스마트폰과 태블릿에서 훨신 앞서있던 애플의 이미지를 훔쳐 무임승차하기 위해 대항마를 자처하며 제품 디자인, UI, 악세서리, 마케팅까지 모든 부분을 베꼈습니다. 분명 베낀건 베낀것입니다. 안베낀 것을 베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일방적인 비하와 근거자료와 사실을 바탕으로한 일리있는 지적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스마트폰이라는 한정된 카테고리에서 디자인은 우연히 비슷할 수도 있는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특정 제조사만을 자사의 이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끊임없이 똑같이 베끼는 행위는 분명한 범죄입니다. 어쩌다가 아니면 일부분을 한두번쯤 베낄 수도 있다고 칩시다. 어차피 같은 카테고리의 제품들이기 때문에 제품 패키지가 비슷할 수도 있는겁니다. 모서리가 둥근 부분이 어쩌다가 비슷하게 만들어졌다거나 베젤 부분이 비슷하게 만들어졌다거나 아니라면 고의적으로 한두번쯤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 정도는 괜찮다고 볼 수 있을것입니다. 저도 그런것까지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삼성은 도를 넘어서 수년간 애플의 모든 것을 고의적으로 끊임없이 베끼고 소송이 진행 된 이후에도 계속 베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와서 소송에서는 모든 것을 베낀게 아니라고 거짓말을하고 있습니다.

물론 애플도 타사의 제품이나 아이디어를 쓴적은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삼성처럼 하나의 기업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베낀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애플이 모든 제품을 새로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제품의 시초가 누구인지 전부 다 알아내고 판단하는 것은 힘듭니다. 애플이 뭐든 다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는데 못뜨고 있던 제품들을 애플이 활용해서 띄웠다고 하는것들이 많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애플이 뭔가를 창조했든 안했든 원조든 아니든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삼성이 애플의 것들을 끊임없이 베낀것인가에 대한 것을 근거 자료와 함께 알아본 것입니다. 또 '타사의 제품을 베끼는 것이 범죄가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라는 잘못된 의식이 만연한게 안타깝습니다.

요즘 삼성은 갤럭시S3와 갤럭시노트 같은 독창적인 최고의 제품들로 세계시장에서 흥행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좋은 제품들로 정당하게 승승장구 했으면하는 바람으로 글을 마칩니다.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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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독일 대졸 취업률은 98%,  한국은 59.9%일까?  
 
    
올해 한국은 대학졸업자의 평균 취업률은 59.9%, 10명 중 4명이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다


고 한다. 이에 반해 독일 대졸 취업률은 98%, 대부분 졸업과 동시에 바로 취업할 수 있다. 
  
독일의 대졸자 취업률이 한국보다 현격히 높은 이유는 단순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


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첫째, 기업이나 국가기관에서 필요로 하는 대졸인력이 부족하다. 
  
지금까지 독일 학생의 대학진학률은 40-50%사이다. 이수치도 최근에 전개된 일련의 교


육개혁(13년에서 12년으로의 초중등교육 기간 축소 등 )과 징병제 폐지의 결과로 상향된 


것이지 올해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들이 입학할 당시만 해도 진학률은 40%에도 미치지 못


했었다. 
  
이 입학 인원도 모두 졸업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중도에 대학을 떠난다. 과거에


는 중도 포기율이 50%에 육박했었으나 최근들어 졸업생이 증가하는 추세고 예전보다는 


상황이 약간은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현재 같은 연령대의 독일국민


의 대학졸업율은 30%도 못되는 셈이다. 외국인을 제외한 순수한 독일인 대졸인구는 18%


라고 한다. 
  
독일국민은 무식하다. 그런데 무식하다고 함부로 말싸움 걸다가는 된통 당한다. 학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제대로 경험할 것이다. 나도 지식인과 학벌이 무관하다는 사실을 


독일와서 처음 알았다.^^ 
  
독일과 비교했을때 한국 대졸자의 취업률이 낮은 이유는 80%가 넘는 진학률과 높은 대졸


자 비율로인해 나타난 당연한 결과다. 


  
둘째, 여전히 독일은 아우스빌둥(직업교육)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불필요한 분야에 대졸자가 포진해 있지 않다는 의미와 같다. 또 거꾸로 해석하면 대


학을 졸업한 사람이 전공 지식과 관계없는 분야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소리다. 
  
예를 들어 간호사, 유치원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장이 필요 없다. 특별히 대졸 학


력이 필요한 전문 분야를 제외한 은행원,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대학졸업자는 소수고 대


부분 아우스빌둥 출신이다. 
  
당연히 기업이나 정부기관도 불필요한 학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학력보다는 그 사람이 


종사해야 할 분야가 무엇인가에 따라 인재를 채용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직업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독일은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언론사 기자도 있다. 정보조사하고 취재해서 글로써 정리


하는 일이 반드시 대학을 나와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 기자의 경우 대


졸자가 많기는 하겠지만, 대학을 가지 않고 언론인을 양성하는 특수직업학교에서 교육받


고도 기자로 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셋째, 한국 대졸자의 비율을 높이는데 한 부분을 담당하는 전문대학, 독일에서는 


한국의 전문대학에서 취득하는 전문가 자격은 대부분 아우스빌둥 직종이다. 
  

한국 사람들은 독일의 파흐호흐슐레를 보통 전문대학이라고 번역하지만 파흐호흐슐레는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식의 전문대학은 아니다. 
  
지금은 독일도 학사 제도가 생겨났지만 과거 대학졸업은 모두 석사였다. 대학을 입학하


고 졸업했다는 말은 석사자격증을 소지했다는 의미다. 그때 파흐호흐슐레는 석사까지 하


지 않고 3-4년 안에 단기로 대학을 졸업하는 취업을 위한 실무지식 위주의 대학과정, 즉 


한국식의 학사과정이었다.  
  
여하튼 한국의 전문대학졸업자의 수준은 정확히 독일과 비교하면 아우스빌둥(직업교육) 


3년을 마치고 1년 정도 현장경력을 쌓은 전문가 수준으로 보면 된다. 이 연령대가 대학 1


년차와 같다. 
  
그러나 직업현장에서의 전문성은 한국 전문대학 졸업자와는 많은 차이를 보일 것이다. 


직장을 우선으로 하는 아우스빌둥 3년을 마치고 같은 계통에서 1년 동안 일했다는 것은 


이미 그 분야의 베테랑으로 인정받는다. 2년만 경력을 더 쌓으면 마이스터에 도전할 수도 


있을 정도니 말이다. 
  
이처럼 독일은 아우스빌둥이 확실한 직업교육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대학진학률이 한


국처럼 높지 않을 수 있고, 대졸자 취업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http://pssyyt.tistory.com/612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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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재단은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와 철학,정책을 알리고 전하기 위한 추모-기념사업을 주관하는 재단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2009년에 설립된 노무현재단은 전직대통령 기념재단치고는 활발하면서 많은 시민의 지지와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는 재단입니다. 

특히 노무현재단 홈페이지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그의 가치와 정치 철학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봉하마을과 함께 온라인에서 노무현 대통령 관련 글과 동영상,사진뿐만 아니라 정치 관련 토론도 이루어지는 웹사이트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노무현재단 홈페이지가 공공기관에서 차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뉴스1은 8월 23일 기사를 통해 울산은 물론이고, 서울,부산,인천,대전,대구,광주 등 7대 광역시 구청이나 공공기관 컴퓨터에서 노무현재단 홈페이지가 열리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노무현재단 홈페이지가 문제라면 박정희기념사이트,어린이 회관도 막아야'

노무현재단 홈페이지를 공공기관에서 일부러 차단했다면,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향수를 막겠다는 의도가 보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의도적으로 노무현재단 홈페이지를 차단하는 것 자체가 선거의 중립을 위반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 대선 후보들과 지지자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차단하겠다는 것은 야당의 정치적 활동을 정부가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나선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MB정부가 정말로 공무원의 중립을 운운하면서 노무현재단 홈페이지를 차단했다면,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홈페이지는 더욱더 차단해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지금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가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이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와 박근혜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특히 박정희기념사업회 홈페이지는 공공기관에서 아예 접속시키면 안 됩니다. 


▲육영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어린이회관 홈페이지

 
박정희기념관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어린이회관 홈페이지도 공공기관에서는 접속을 차단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린이회관을 운영하는 곳이 육영재단이고, 현재 육영재단 홈페이지에는 육영수 여사 사진전을 비롯해 박정희의 사진도 버젓이 올라와 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와 노무현 대통령 모두가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지금 생존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죽은 사람을 기리는 재단의 홈페이지가 공공기관에서는 접속불가라는 사실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시작된 언론탄압'

MB정권이 들어서면서 온라인상에서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너무나 태연히 자행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국민에게 있건만, MB정부는 온라인에 올리는 글과 특정 사이트에 대한 삭제와 폐쇄,접속 차단을 수천 건씩 해버렸습니다.


2008년 5월부터 12월까지 경찰청은 1,061건,국정원은 632건의 도합 1653건의 글을 삭제해달라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요청했습니다. 방통위는 1653건의 시정요구를 지시했고, 포털 등의 사이트에 올라갔던 심의대상 게시글 전부가 삭제됐습니다.
 
알다시피 2008년 5월은 촛불시위가 처음 열리던 시점이었고, 당시 촛불집회에 관한 글은 포털 사이트에 매일 빠지지 않고 올라왔습니다. 여기에 MB정권은 취임 이후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 배경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있다는 식으로 그를 왜곡하고 촛불시위를 반정부집회로 규정하고 탄압했습니다.

MB정권은 온라인에 게시되는 글 중에서 MB정권을 반대하거나 노골적인 비판을 가하면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는 사유로 마음대로 삭제해버렸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SNS까지도 사이트 폐쇄 와 접속 차단을 요청했습니다.

▲ 트위터에 올린 글을 삭제해달라는 경찰청의 공문


천안함 합동조사단의 발표를 믿지 못해 트위터에 올린 글에 대해서는 합동조사단에 대한 명예훼손과 허위통신으로, '1번 찍으면' 이라는 문구를 가지고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사이트 폐쇄 또는 접속을 차단해버렸습니다. 

정부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그 자체가 명예훼손이 되는 세상이 됐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치졸한 복수'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에 봉하로 내려갔을 때부터 MB정권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정치적 복수의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정치 검찰의 수사는 물론이고, 그가 죽은 뒤에는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하기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공연을 부탁해 온 노무현 재단의 양정철 사무처장에게는 차마 이야기 하지 못했지만, 추모공연 '다시 바람이 분다'를 연출하고 안장식 추모문화제 ' 잘가오 그대'를 거들면서, 막연하게 느꼈던 위협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그 구체적인 위협이 나뿐 아니라 내가 연출한 공연의 출연진에게 더욱 비열하게 자행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래, 나는 두려웠다. 

이제 겨우 자리잡아가는 알량한 연출가의 이력에 '친노'니 '좌빨'이니 진보니 하는 빨간 줄이 그어질까 두려웠다. 박원순이나, 진중권이나 아니 윤도현이나, 김제동조차 한 방에 날려 보내는 저들의 비열하지만 무시무시한 힘이 무서웠다. 

처음에는 뭐 그깟 공연 하나 연출한다고 그리 대단한 위협이 있을까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익명의 촛불집회 참석자들까지도 색출해내는 저 놀라운 수사력과 연예인들의 사회적 발언조차 틀어막으려는 노력, 이유 없이 취소되는 몇 건의 공연계약과 아예 대놓고 "이제 같이 일하시기 어렵겠네요" 하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일들이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버젓이 자행된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연출가 탁현민교수)


노무현대통령님을 추모하기위해 시민들이 "노무현재단 후원의밤"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여러곳에서 정치색을 이유로 보이콧을 당했습니다 겨우 덕양종합복지관에서 오케이를 받아 초청가수도 섭외하고, 프로그램도 만들고, 홍보도하고, 야심차게 준비중이었는데.. 

어제 저녁 갑자기 대관이 안된다는 겁니다 고양시에서 압력이 들어와서 고양시로부터 지원을 받는 자기네는 어쩔수가 없다네요 .헐~~공연 딸랑 하루 앞두고..^^;;; 애들 장난합니까??  (노무현재단 자원봉사자)


이런 사례는 지난 몇 년간 부지기수로 나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로 정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콘서트가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시사] - 김제동 콘서트 취소, 문재인 죽이기의 시작?




노무현 대통령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을 사람들은 '바보 중의 바보'라고 놀려댔습니다. 대가나 특혜를 받지 않았지만 그는 2003년,2006년,2009년 세 번이나 검찰에 구속됐고,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과의 의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2009년 5월 강금원 회장은 뇌종양을 이유로 보석을 청구했지만, 검찰이 반대해 결국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지난 8월2일 노무현 대통령의 곁으로 떠났습니다. 

▲ 경찰에 짓밟힌 노무현 대통령 시민분향소 출처:오마이뉴스



지난 2009년 5월30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와 천막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 분향소와 천막을 강제 철거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죽은 사람을 기리는 장소를 군화발로 짓밟지는 않습니다. 있다면 독재자들이 정권을 장악한 나라에서나 이루어지는 사건일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인간 스스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와 누군가를 좋아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할 수도 없고, 누군가를 그리워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MB정권을 보면, 과연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의 국민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를 지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보고 싶습니다. 


http://impeter.tistory.com/1947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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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명박 독도행차 완전분석

2012. 8. 13. 월요일
물뚝심송

 

칭송하라, 가카의 무한한 령도력을…

 

 

무엇보다도 먼저 반성한다. 우리가 그 동안 너무나 소홀했었다. 해방이후 건국 65년 이래, 아니 단군왕검이 신시에 나라를 세운지 5천년이래, 가카만큼 위대한 령도자가 또 어디에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끄러운 세상사의 홍진에 묻혀 가카에 대한 찬양을 잊고, 박씨성 가진 일개 공주의 일거수 일투족에 현혹되어 온 세월, 그 세월을 반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가카께옵서는 황송하옵게도, 과감하게 우리 민족의 본거지인 한반도의 동쪽 끝, 동경 백 삼십일 북위 삼십칠, 평균기온 십칠도 강수량은 천삼백인 독도에 친히 납시어 세계 만방에 독도의 존재를 알리고, 가카의 령도력을 과시하신 거시었다.

 

세상이 안팎으로 시끄럽고 우매한 무리들은 가카의 깊은 뜻을 몰라보고 사사건건 쪼잔하게 물고 늘어지기나 하는 이 마당에 가카의 큰 뜻은 그저 국내의 정국을 평안하게 이끄는데에 멈추지 않으신 거시었다. 좁디 좁은 우리의 사회를 벗어나 니뽕국 정세까지 두루 살피시는 가카의 은덕, 이 어찌 칭송하지 않을 손가.

 

이에 우리는 가카의 깊은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우리가 직면한 작금의 현실을 되짚어 보는 경건한 시간을 갖기를 엄숙히 요구하는 바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빙자한 눈길 돌리기형 공짜유람 생쑈는 사실 무척이나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국내 거의 모든 메이저 언론사가 사설로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분석해낸 곳이 단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군소언론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이에 뽕빨 정신을 모토로 하는 국내유일의 민족정론지, 딴지일보가 이 문제를 뒤벼주지 않는다면, 과연 니들은 어디에다가 그 궁금증을 호소하겠냐는 말이다. 이에 푹푹찌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본지의 모든 취재력과 분석력을 총동원하여 연인원 육천구백육십구명의 전문 연구인력을 동원하는 척 하면서 본 정치부장 혼자 쎄빠지게 고생하면서 써내려간 분석을 게재하는 바이다. 가카를 칭송하기에 앞서 일단 딴지를 칭송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일제히 한번 외쳐보자. 졸라~

 

독도는 단순히 동해 울릉도 옆에 있는 바위섬 두 개가 아니다. 독도는 상징이며, 하나의 추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일찍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독도를 단순한 영토문제가 아닌 “역사”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그 역사적인 존재인 독도를 사이에 두고 한일 양국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서로 눈치를 봐가며 물밑에서 기싸움을 전개해 왔다. 이 양국의 치열한 물밑 투쟁은 바로 한일외교의 밑바탕이 되고 있으며, 따라서 독도문제에 어느 한 쪽 나라의 정상이 모종의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것은 바로 그 외교전의 형상을 상징하는 행동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독도는 한일외교의 상징적인 존재도 된다.

 

거기에 보통은 빠트리기 쉽지만 아주 중요한 “외교의 또 하나의 측면”이 숨어 있다. 외교는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일체의 국제적인 교섭과정이라는 기본적인 해석의 뒤에 숨어있는 어두운 면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집권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국내 정치의 어려움을 유발하는 일반 유권자들의 비판적인 시선을 민족감정이나 국가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면서 외부로 돌리는 “시선끌기” 목적의 교란행위가 외교 판에서는 흔히 벌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번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라는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도를 둘러싼 문제는 물론이려니와 양국의 내부 정치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First things first. (오늘 영어 쫌 된다.)

 

제일 먼저 독도 그 자체에 관한 문제를 정리해 보자.

 

그 동안 우리가 접했던 모든 주장과 논리들은 우리 측의 입장이었고, 그것만으로는 정확한 사태 파악이 힘들다. 따라서, 이번에는 우리의 입장보다 일본의 입장을 위주로 정리해 가면서 상황을 이해해보자.

 

독도가 역사적으로 조선의 영토였고, 조선의 뒤를 이은 대한제국의 영토였음은 일본측에서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1905년에 일본 시마네(시네마가 아니다. 이거 졸라 헷갈리지만 시마네가 맞다.)현에 편입되게 된다. 물론 이 편입과정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 점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신들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는 과정과는 별도로 다만 동해상에 있는 이름도 없고 주인도 없는 바위섬을 자신들의 행정구역에 편입시킨 정상적인 행위였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국제법상으로도 이 편입조치에 대해 한국정부(물론 당시에는 대한제국 조정)가 항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자신들의 조치가 정당했음을 강변하고 있다.

 

거기에 이어,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주도로 작성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아주 중요한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 외무성에서 운영하고 있는 다케시마 문제에 관한 페이지를 보자. 놀랍게도 한국어로 된 페이지도 존재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 "다케시마 문제의 개요" 보러가기]

 

제 6항에 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작성과정에 대해 명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이 바로 일본이 독도가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가장 중심적인 이유가 되는 부분이다.

 

이 과정을 좀더 쉽게 설명해 보자면 이런 것이다.

 

일제의 강점기가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종료되면서, 일본이 강제로 점령해오던 영토들을 반환하는 내용이 연합국들이 모여 작성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포함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 와중에 울릉도, 거문도, 제주도 이런 곳들은 모두 명시되어 반환하기로 확정되었지만, 독도는 거기서 빠졌다는 것이다. 왜? 빼앗은 땅이 아니라 원래 일본의 영토였으니까.

 

그러나 그 과정을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 역시 단순하지가 않다. 조약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1-5차 초안까지는 분명히 독도가 반환해야 할 조선의 영토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6차에서는 독도가 빠진다. 7차에서는 또 들어가고, 8,9차에서는 다시 빠진다. 그 때 이미 독도는 연합국들 사이에서도 혼란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영국이 다시 초안을 작성하게 되고, 이 영국의 초안에는 독도가 또 명시된다. 그러고 나서 최종적으로 영미합동 초안이 작성되고 이 초안으로 확정되게 되는데, 거기에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 라고 결정된 것이다. 독도는 문구에서 빠져버렸다.

 

호사카 유지 교수

 

이 부분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일본계 한국인이자 세종대학교 교수인 호사카 유지의 <대한민국 독도> 라는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조약 최종안에 독도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연합국의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독도가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고 누락된 이유로 호사카 교수는 당시 미국의 일본정치 고문관이었던 "윌리엄 제이 시볼드"를 지목한다. 일본을 사랑하던 이 친구가 사이에서 장난을 치는 바람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시볼스러운 고문관 같으니라구.

 

물론 그렇게 독도의 반환이 명시되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게 된 우리 정부가 독도를 다시 명시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결정적으로 당시 주미한국대사관은 독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일본명 다케시마가 독도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가 전쟁중이었음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무척이나 아쉬운 부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부…. 넘어가자.

 

결국 미국은 "러스크 서한" 이라는 것을 보내게 되는데, 미 국무부 극동지역 보좌관 딘 러스크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문구에 독도를 명시해 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에 대해 그럴 수 없다는 뜻을 담아 보낸 편지가 된다.

 

이 편지의 내용(번역본이다.)은 여기를 참조하시라.

 

[위키피디아 : 러스크 서한 보러가기]

 

이 편지 역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내용과 더불어, 미국 측에서 독도가 일본에 귀속되어 있는 섬이라고 "인정"을 했다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전후 반환해야 할 영토 목록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독도를, 미국도 일본의 시마네 현의 일부로 인정한 독도라는 섬을, 한국 정부가 임의대로 불법 점거하고, 일본 순찰선에 총격을 가하고 (1953년 이승만 정부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국 내무부가 독도에 경비 병력을 파견하고, 현재까지 각종 시설을 구축하며 장악하고 있으며, 이런 불법행위가 벌어질 때마다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 이런 한국정부의 행동이 불법적인 것임을 다각도로 호소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럴싸 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택도 없는 일이다. 이러한 논리적 전개과정에는 이미 곳곳에 헛점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메이지 정부가 1877년 발표한 "태정관 지령문"에서 이미 일본정부는 공식적으로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 문서는 일본정부가 지금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증거들 중의 하나이다.

 

태정관 지령문

 

이 태정관 지령문의 존재는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1905년의 “주인 없는 섬이어서 시마네 현에 편입했다”는 조치 자체를 완전 구라로 밝혀주면서 그 자체가 침략행위였다는 규정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미 주인이 있을뿐더러 그 주인이 바로 조선이었다는 점을 자기들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거든.

 

또 대한제국의 조정, 고종이 이 시마네 현 편입조치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이 시점, 그러니까 편입이 벌어진 1905년에서 겨우 2년이 지난 1907년 고종은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침략 과정에서 체결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포한 것이다. 목숨 걸고 항의했다니까. 그 덕분에 고종은 일제에 의해 쫓겨나고 순종이 즉위하기까지 했잖은가 말이다.

 

물론 해방 직후 전쟁 와중의 혼란한 과정에 주미한국대사가 멍청해서 독도가 어디 있는 섬인지도 몰랐다는 거 미안하고 쪽팔린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개 대사관의 서기관이 무식하다 해서 영토권을 빼앗겨야 할 이유는 없다.

 

이 모든 독도에 관한 사건들이 상황을 애매하게 만들면서 일본이 독도가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하게 되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에 활용되고 있긴 하지만, 일본의 주장 하나하나에 우리가 코멘트를 달면서 반박을 하게 될 경우, 일본의 주장은 정합성을 잃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어찌되었거나 독도는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땅이었지 않은가 말이다. 이게 사실이잖아.

 

그런데… 현실의 문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독도 문제로 아직도 골치를 앓고 있게 된거다.

 

현실로 돌아와서 보자면, 독도문제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는 "침묵의 전략"파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 논리는 이런 것이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는데, 그게 내 돈이라고 자꾸 사람들에게 떠들면 오히려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5년 3.1절 기념식장에서 "내 옆에 있는 여자가 내 부인이라고 모두가 알고 있는데, 굳이 사람들에게 이 여자가 내 부인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표현으로 이런 취지를 얘기한 적이 있었다. 어렵게 표현하자면, 독도를 사실상 실효지배 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독도 문제를 자꾸 거론하는 것은 별로 유리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나하나 대응을 하다보면 독도가 분쟁지역으로 선포되고, 결국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게 되면 일본의 국력이 우리보다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심지어 국제사법재판소의 판사들 중에도 일본인이 있는 상황에서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 된다.

 

이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정답이 아니무니다"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맞다. 이 사실은 독도 문제를 대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임에는 틀림없다. 이미 우리는 독도에 경찰 병력을 상시 주둔시키고 있으며, 독도에 호적을 두고 있는 사람도 훨씬 더 많다. 우리측은 1,000여명이 독도에 호적을 두고 있으며, 일본은 26명만이 독도에 호적을 두고 있다. 실제로 독도에 주소를 두고 있는 사람도 우리나라 사람이다. 김성도, 김신열 부부 2명이 독도에 주소를 두고 있다.

 

이런 현실 자체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매우 강력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끄럽게 굴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 라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사실상 일본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갈 수 없으며, 그 사실을 우리보다 일본이 더 잘 알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가 된다.

 

하나는 65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때문이다. 그 때 이미 일본 내에서는 이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독도에 관련된 영토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갈 수 없게 되었다는 분석이 아사히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었다. 조약 내용에 양국간의 분쟁이 발생했을 때, 양국간의 외교노력 또는 조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조항이 명문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이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먼저 한일기본조약 자체를 파기해야 한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전직 국제사법재판소의 판사출신인 오다 시게루에 의해서 제기되기도 했다.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규정상,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 문제를 제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국제사법재판소의 "의무적 관할"을 수락하지 않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이 필요한 독자는 아래의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국이 합의하지 않으면 독도문제 국제 재판 불가능하다" 문서 보러가기]

 

두 경우 모두 명확한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독자적으로 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런 걱정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침묵의 전략을 가져가는 이유가, 일본이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갈 우려 때문이라는 부분은 잊어 버리자.

 

그러면 왜 일본은 툭하면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설치는 걸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제소 얘기는 또 나왔다. 그거,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고 싶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론플레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계속 자신들의 주장을 지속함으로써,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불법 지배라고 항의하는 기록을 남기게 되기도 하는 거고.

 

그래봤자 우리 입장은 언제나 “그러거나 말거나” 면 충분했다. 하지만 가카의 청와대는 또 이번에는 거창하게 “거부”했다. 거부할 필요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일을 거창하게 “거부”했다는 뜻이다. 가카가 하는 일이 매번 그렇듯이 쇼에 불과한 일이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한가지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이다.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이 상황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거기에 실효지배는 우리가 하고 있다. 급한 건 일본 측이다. 지속적으로 항의를 하고 있다고 해도 실효지배기간이 50년 넘어 백년으로 이백년으로 지속되게 되면 사실상 일본은 갈수록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왜냐면 우리는 앞으로도 독도를 둘러싼 영해문제나 경제수역 문제로 끊임없이 일본과 협상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독도의 가치가 중요해지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 말이다. 단순히 물고기 좀 잡는 수준이 아니라 독도 근해에서 해저자원이라도 발견되는 순간 이 문제는 다시 국제적인 이슈로 떠오르게 된다. 독도는 단순한 영토 문제를 넘어 한일 양국 간의 밥줄 싸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독도 주변의 해저에는 다량의 메탄 하이드레이트가 있는 것으로 이미 알려져 있다. )

 

그래서 일본이 그렇게 여론전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이 홈페이지에 직접 독도가 자기네 영토인 이유를, 그것도 심지어 한글로까지 정리해서 게재해 놓고 여러 선진국에서 물밑으로 강력한 홍보전을 전개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독도가 쓸모없는 바위섬 두개라면 이럴 이유가 없잖은가.

 

결국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생겨 버린다. 바로 여론전이다. 독도에 관련된 일본 측의 주장을 하나하나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세부적인 역사적 사실을 담은 문건이라도 만들어서 전 세계에 알리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크라는 단체도 활동중이고, 김장훈 같은 사람도 있고 말이다. 부족하긴 해도 하고는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여론전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한참 밀리고 있다. 국제사회의 다수의 지식인들은 이미 "역사적으로는 독도가 한국의 땅이겠지만, 국제법상으로는 일본의 것이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정도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걸 바꿀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명박이 직접 나서서 독도를 방문하는 것은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하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측면이 더 강하다. 단순하게 독도만을 놓고 봤을 때, 이번 사건은 쉽게 표현해서 돌려막기와 유사한 "땡겨쓰기" 라고 볼 수 있다. 독도가 분쟁지역이라고 해도 우리 입장에서는 직접 현직 국가원수가 나서서 독도에 발을 딛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그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교기법이기 때문이다.

 

정상급의 독도 방문은 아주 큰 카드이다. 일본이 독도에 관해 매우 중대한 도발을 감행 했을 때 그에 대한 상징적인 대응으로 할 수 있는 중요한 비장의 카드가 된다. 이 카드는 일본은 쓸 수가 없다. 얼마 전에도 일본의 의원 몇이서 독도에 상륙하겠다고 설치다가 우리가 가볍게 눌러준 적이 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실효지배를 하고 있는 측의 잇점이다. 이 카드를 꺼낼 경우라면, 일본의 중대한 도발이 있어야 하고, 향후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외교적 맥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맥락이 전혀 없이 (물론 맥락 자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뒷부분에서 실질적으로 추정 가능한 다른 맥락에 관한 내용이 나올 예정이다.) 느닷없는 기습 방문이 벌어진 것이다. 이 건은 이걸로 묻힐 공산이 크다. 일본에서야 대사를 소환하고 난리를 치는 척 하겠지만, 국제적으로 일본이 할 대처방법도 없고, 뭔가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바로 해야 하는 협상도 없고, 아무런 타겟이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명박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전혀 필요한 때도 아닌 시점에 뜬금없이 매우 중요한 카드 한장을, 그것도 나중에 진짜 중요한 순간에 써야 할 카드를 땡겨서 써 버린 셈이 된다. 차후에 진짜 국가 원수의 독도 방문이라는 상징성이 필요한 시점이 오게 될 때, 그 때 대통령이 독도를 간다 해도 충격효과가 없어져 버린다. 그거 전에도 아무 일도 없이 이명박이 한번 왔었잖아. 그게 뭐? 이런 반응만이 오게 될 것이다.

 

뭐 이게 처음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 이미 역시나 아무 맥락도 없이 총리를 독도에 보낸 적도 있다. 마구 땡겨 쓰는 거지 뭐.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맥락없는 우리의 대통령은 왜 지금 독도에 간 것일까? 뭐가 급해서 차기 정권에서 중요하게 쓰게 될 지도 모르는 외교적 카드를 막 땡겨서 쓰고 있는 것일까?

 

일본외무성

 

이유가 있다. 독도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기나긴 독도의 역사를 읽어 오시느라 무척 고생하셨겠지만,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힘들 내시라.

 

바로 우리가 흔히 잘 모르고 있는 일본의 국내 사정이다.

 

일본은 망해가고 있다. 정말이다.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던 일본경제는 수십년에 걸친 장기 불황으로 허덕이고 있으며 만성적인 적자재정은 일본의 부채비율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밀어 올리고 있다.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외채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일본은 모라토리엄 선언이라도 했어야 할 수준이다.

 

국내에서는 이명박 정권이 레임덕에 몰렸다고 말들이 많지만 일본의 현 노다 요시히코 내각은 레임덕 수준이 아니라 멱살을 잡혀 끌려 내려올 분위기에 몰려 있다.

 

OECD 자료에 의하면 2010년 기준 일본의 국가부채 비율이 200%에 달하고 있으면 2012년 말 240%에 육박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도 뭐 가카 덕분에 만만치는 않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이미 사실상 국가부도 상황에 빠져 유로존을 탈퇴하네 마네 하고 있는 그리스도 190%가 안되는 수준이다. 제아무리 일본인들이 엄청난 규모의 외환 보유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 매년 해외교포의 국내 송금액 수준이 장난이 아닌 국가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일본도 확실히 안전하지 않은 수준이다.

 

일본의 올해 예산이 90조엔을 넘어가는데, 이중 세금으로 충당할 수 있는 비율은 절반도 안된다. 나머지는 모두 국채 찍어서 메꾸고 있다. 거기다가 그 찬란했던 무역의 왕, 산업기술의 제왕, 수출의 강국 일본이 엄청난 규모의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 작년 한해 2조 5647억엔의 무역적자를 봤고, 올 상반기만 해도 2조 9158억엔의 무역적자를 봤다. 우리나라 돈으로 43조원이다. 이 추세로 나가면 일본은 올 한해만 6조엔이 넘는 무역적자를 보게 된다. 이런 무역적자가 지속된다면, 가뜩이나 높은 국가부채 비율을 더욱 높이게 될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후쿠시마 해일로 인한 원전의 붕괴 및 방사능 오염, 만성적인 전기부족, 이 모든 문제들이 일본 사회의 미래에 두꺼운 먹구름을 씌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증세뿐이다. 최소한 누적된 재정적자로 인한 국가 부도는 막아야 되지 않는가 말이다. 일본은 무한 달러찍기 신공을 가진 미국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파격적인 증세 법안이 참의원을 최근에 통과했다. 그 결과로 2014년, 2015년 연속으로 소비세가 파격적으로 인상될 예정이다. (현행 5%에서 2014년에 8%, 2015년에 10%로 인상되게 된다.) 그러나 이 불가피한 증세는 바로 집권층에 대한 지지율 격감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국가 부도를 막기위한 불가피한 일이라 해도, 유권자는 그런 사정 봐주지 않는다. 1997년 소비세를 3%에서 5%로 겨우 2% 인상시킨 호소카와 내각은 8개월을 못가고 붕괴되고 말았었다.

 

노다 총리는 결국 야권의 압박에 밀려 조기총선실시까지 약속하고 말았다. 조기총선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민주당 내각은 붕괴하고 자민당이 다시 집권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민당의 다니가키 사다카즈 총재는 이미 차기 수상은 자기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가 박근혜도 아니면서 말이다.

 

하지만 자민당이라고 해 봐야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일본이 처한 상황은 정말로 심각한 수준이다. 거기다가 민주당의 소비세 인상안은 이미 오래전에 다니가키가 주장하던 내용이었다는 점도 있다. 거기나 여기나 정치인들의 딴소리 신공은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다니가키의 주장은 민주당은 원래 소비세 인상안을 반대했으니 그런 정책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면 괜찮고?

 

하여간 우리가 가카의 시대를 겪어내며 인내심의 극한을 경험하는 동안 일본의 유권자들은 이미 멘붕을 넘어 거의 해탈의 경지에 빠져 있을 것이라는 점이 쉽게 예측된다. 축구도 깨지고…. 좀 불쌍하기 까지 하다.

 

자, 이 상황에서 당신이 일본의 수상이라면 어떤 방법을 쓰겠는가?

 

그렇다. 바로 시선 돌리기 수법이다. 지금 세금 몇푼 올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호들갑을 떨어야 한다. 우리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쓰기 제일 좋은 수법은 바로 총풍이다. 북괴의 위협이 코앞에 있고, 심지어 휴전선에서 총까지 쏘고 지랄인데, 지금 선거에 누굴 뽑아야 되는거냐는 질문… 이거 효과 직빵이잖은가.

 

그런데 일본에는 북한이 없다. 대신에 바로 옆에 남한이 있다. 그 남한의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우리 일본의 땅임에 틀림없는 독도에 사상 처음으로 직접 방문해서, 바위에 새겨진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자를 쓰다듬고 있단 말이다.

 

사진 : 한겨레신문

 

이 사건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시선끌기의 소재가 된다.

 

표면적으로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소식을 듣자 마자 항의를 하고 하지 말라고 말리고, 대응 조치로 대사를 소환하고 난리를 치겠지만, 내심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이 된다.

 

물론 이 이명박의 독도 방문 사건을 일본 정국 내에서 향후 어떻게 키워서 우려먹을지는 일본의 집권팀이 하기 나름이다. 군국주의의 열풍을 불러 일으켜서 군수산업을 키우거나, 아니면 그저 반한감정으로 대동단결을 외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잠깐의 모면책으로 활용하고 버리거나… 알아서 하라 그러지 뭐.

 

이게 일본의 참담한 속사정이다.

 


 

그러면 우리의 속사정은 어떨까?

 

가장 큰 테두리에서는 가카의 레임덕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카의 국정지지율은 급감하고 있으며, 이제는 무슨 일을 해도 욕을 먹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물론 총선 과정에서도 친박진영에서 청와대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언론을 피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소리가 흘러 나올 정도로 가카의 입장은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향후 4-5개월 남은 시간, 가카가 숨이라도 쉬고 살려면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긴 했던 시점이 맞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면 너무나 게으른 분석이겠지.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이슈는 바로 지난 총선과정에서 있었던 친박 진영의 공천뇌물 파동이다. 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름도 헷갈려 죽겠는 이 사건, 처음 나오자 마자 정가에는 친이계가 친박계를 치기 위해 푼 떡밥이라는 루머가 쫙 퍼졌었다.

 

그러면, 친이계가 친박계를 치기 위해 큰 사건을 하나 터트렸는데 그 시점에 느닷없이 친이계의 수장이 독도를 방문해서 물타기를 한다? 이건 앞뒤가 안 맞는다. 거기에 사건의 파급효가 자체가 꽤 커서 대통령의 독도 방문 정도로 묻히기 힘들다는 평가를 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독도 방문 사건 이후로도 공천뇌물 사건은 별로 묻히지 않고 언론에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마도 독도 방문 이벤트는 공천뇌물 사건을 덮기 위해 급조된 시나리오는 아니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뭘까?

 

기본적으로 올림픽을 통해 애국심 열풍이 불고 있고, 거기에 대통령까지 나서서 그 열기에 힘을 보태겠다는 의도로 읽어 줄 수도 있다. 거기에 사상 최초로 올림픽 메달권에 진입한 한국 국대 축구가 일본과 동메달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 시점이었다.

 

이기거나 지거나, 일본이 화두로 떠오를 시점이었다. 거기에 대통령이 직접 독도는 우리땅 노래를 부르며 독도를 방문해서 외로운 독도 경비병과 악수도 하고, 거창하게 해군 호위함도 동원하고 헬기타고 오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

 

충분히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차후를 생각지 않는 급조된 이벤트는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삼만 팔천 광년 정도 앞에 두고 살아가는 가카의 스타일에도 아주 잘 맞는다.

 

어찌되었거나, 가카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한번 시도해 볼만한 이벤트였다는 점은 충분히 추정가능하다.

 


 

결국 그런 것이었다.

 

독도문제만을 생각한다면, 이명박의 독도 방문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에도 미국은 이런 이명박의 행동에 대해 간접적인 불쾌감을 표현하고 있다.

 

[교도통신 "美, “독도는 우리 땅”…韓 주장 지지 안해" 보러가기]

 

미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독도 문제에 한해서는 엄정한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영유권을 인정하지도 않지만, 한국의 영토라고 확인해 줄 수도 없다는 태도이다. 거기에 추가하자면, 한일 양국이 돌출행동을 통해 이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이 독도 문제를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도 있다는 것을 미국은 알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울릉도, 거문도, 제주도 옆에 독도라고 한 단어만 더 써놨어도 이런 골치 아픈 문제는 안 생기는 일이었다는 거다.

 

그러니 미국은 무조건 이 문제가 물위로 떠오르지 않기를 바란다는 거다. 그러니 이번 이벤트로 인해 미국이 우리 편을 들어줄 일은 없다. 이렇게 되면 장기적으로는 독도 문제에서 우리 손해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장기적인 손실은 가카는 전혀 신경 안 쓴다.

 

거기에 앞에서도 나온, 미래에 어느 시점에 써먹어야 할 카드를 땡겨 써 버린 측면이 있다. 분명한 결론은 독도에 관련된 국익의 문제에서는 이번 가카의 이벤트가 절대적으로 손해가 나는 일이지 결코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가카에게는 이런 문제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자기 임기 끝나면 독도는 자기하고 아무 관계없는 일이거든.

 

중요한 것은 두가지 문제다.

 

일단 일본이 원하고 있다. 일본 전체가 아니라, 현재 일본의 집권층인 민주당 정권이 원하고 있다. 여기서 감히,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청와대와 일본의 노다 총리 사이에 직접적인 이해 조율이 있었다는 소설은 쓰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애타게 원하던 꺼리를 만들어 준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전에 교감이 있었건 없었건 이 이벤트가 일본의 국익에는 별 관계가 없지만, 일본의 현 집권층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역시나 일본의 언론들은 이 문제로 발칵 뒤집어 지고 있다.

 

거기에 우리 국내의 정국, 특히 그 중에서도 가카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국가 이익말고 아주 일부의 사람들 말이다. 레임덕도 약간 완화시켜 줄 수 있고, 애국열풍도 강화할 수 있다.

 

이 두가지 잇점만 해도 챙길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거기에 아주 중요한 특별부록이 하나 더 숨어 있는 것이다.

 

너무 많아서 독자들이 기억도 잘 못하겠지만, 큰 덩어리가 하나 있었다. 청와대 1제1부속실장 김희중. 대통령의 문고리를 잡고 있는 직책을 맡고 있다던 김희중 말이다. 저축은행 관련 비리로 잡혀 들어가면서도 국가와 국민에 사죄를 하기는커녕, 자신이 모시던 주군에게 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개수작을 떨고 끌려 들어갔던 김희중 말이다.

 

이 김희중이 검찰에 의해 8월 10일자로 구속기소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공교롭지 않은가?

 

앞서 얘기한 일본 민주당 내각의 증세 법안이 참의원을 통과한 날이 바로 2012년 8월 10일이다. 같은 날, 가카의 문고리를 잡고 있다던 부속실장이 부패혐의로 구속되어 기소되었다. 역시 2012년 8월 10일.

 

가카가 예고도 없이 독도를 방문한 날이 또 2012년 8월 10일. 왜 광복절도 아니고 어정쩡한 8월 10일이겠는가? 김희중이 구속기소된 날이 8월10일이고, 일본에서 증세법안이 통과된 날이 8월 10일이라는 점과 전혀 관계가 없는 걸까?

 

더욱 재미있는 것은 가카께옵서는 독도를 다녀오면서 그냥 다녀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 왔다감~” 이라는 흔적까지 남기고 돌아오셨다. 너무나 촌스러워서 읽다가 손꾸락이 오그라들뻔한 “이천십이년 여름 대통령 이명박”이라는 문구까지 음각으로 새겨서 만든 독도 표지석을 만들어 광복절날 가져다 세우겠다는 보도가 나왔다.

 

 

문구도 문구지만, 보통 저런 비석을 세우면 날짜까지 새겨 넣는게 일반적인 일일텐데 그냥 “이천십이년 여름”이란다. 왜 그랬을까? 거기다가 그냥 가는 김에 자기 갈 때 표지석도 세우고 사진도 한 장 그럴듯하게 박고 오면 좋을 터인데 왜 며칠이 어긋났을까? 왜 비석에는 정확한 날짜가 아니라 그냥 “여름”이라고만 새겨졌을까?

 

날짜를 맞춘 거라고 밖에는 볼 수 없잖아. 안그런가?

 

언론 플레이의 효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날짜맞춤은 필수다. 아마도 일본 참의원의 증세법안 통과 일시는 맘대로 조정할 수가 없으니, 일본의 일정에 모든 것을 다 가져다 맞춘 것 같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일시를 조절하다 보니 미리 제작의뢰를 해야 되는 표지석에는 정확한 날짜를 쓸 수가 없었던 거다.

 

그렇게 맞춰놓고, 국내 언론사에는 강력한 엠바고를 걸어서 8월 10일 오후에 발표하라고 해 놓고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인데, 그게 또 재수없는 SNS 때문에 또 어긋나 버렸다. 누군가 이 소식을 일본 언론에 흘렸고, 일본에서 먼저, 그러니까 8월 9일 밤중에 소식을 터트려 버린 거다. 그게 국내로 다시 들어와 트위터를 통해 쫙 퍼져 버리고, 결국 8월 10일 오후에 보도하기로 되어 있던 것이 오전 10시로 당겨져서 전 언론에 깔려 버리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이번 이벤트를 주도한 청와대 정무라인과 반대하던 외교라인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당연한 것이 이런 깜짝쇼를 외교부 쪽에서 찬성할 리가 없잖은가. 내부에서야 최고위층끼리 무슨 합의를 했을지 모르지만, 실무 라인에서는 일본 측의 엄청난 항의를 유발할 만한 사건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 엠바고 걸린 뉴스를 일본 측에 흘린 구멍이 혹시 외교부 라인에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까지 나온 모양이다.

 

이 꼴이 도대체 뭔가.

 

전형적인 좃선일보의 라면 사설 기법을 나도 한번 써보고 싶어졌다.

 

이 모든 추정이 사실이라면, 이 정권은 정말로 역사에 기록될 만큼 추악한 정권이 된다. 사실이 아니면 말고~

 

그래도 쪽팔린 건 순간일 뿐이고, 이런 저런 효과는 봤다.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8월 10일에 청와대 부속실장 김희중이 구속기소 되었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거의 모든 언론이 남한 대통령 이명박의 독도방문을 다루느라 증세법안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간만의 국대 축구 한일전에서 우리 대표팀이 멋진 승리를 올려주는 바람에, 두 MB(홍명보와 이명박)가 동시에 일본에 물을 먹였다고 좋아하는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벤트 효과는 충분히 본 거다.

 

가카는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제 아무리 국익에 도움이 되더라도 절대 안한다. 아니 반대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국가에 어떤 손실을 끼치더라도 눈 깜빡 안하고 해치운다. 그런 사람이 역사의 상징이며 한일 외교의 상징인 독도를 깜짝 방문했다. 아무 맥락이 없어 보이지만, 이런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카는 느닷없이 독도에 간 것이다.

 


 

감히 무엄하게도 가카께옵서 행하신 일에 대해 이다지도 긴 토를 단다는 말인가.

 

일제히 입 다물고 그저 경배만 하면 된다.

 

돌 한 개를 던져서 다섯 마리의 새를 동시에 잡아버리는 것처럼, 간단하게 내 돈 한푼 안 들이고 전용기 타고 강릉까지 갔다가 최고급 헬기타고 독도까지 슝~ 하고 날아갔다 오심으로써 일본 정권의 이익, 우리 정권의 이익, 최측근 비리 관련 보도 차단, 올림픽에 넋이 빠진 민초들의 애국심 고취, 군소언론사들의 기사거리 제공까지 한칼에 해치우신 가카의 위용을 보고도 칭송하지 않는 자,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져 오글오글 오그라질지어다.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이자 친애하는 위원장, 아니 대통령 동지이신 가카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따지는 놈들은 다 공산당이다. 그저 입 닫고 칭송만 하면 된다.

 

그게 진정으로 가카를 위하는 길이며 나아가 우리 민족과 국가의 무궁한 발전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행동이다. 물론 니들 인생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긴 하다.

 

어허! 아직도 칭송을 안하고 있단 말인가? 어서 칭송하라~ 칭송~

 

씨바……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http://www.ddanzi.com/blog/archives/99631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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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본 박정희 시절의 경제
(서프라이즈 / 놀랍네 / 2012-08-11)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업적을 제대로 논하고자 한다면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 GDP와 국민 1인당 GDP를 세계 순위로 따져야 한다.

1960년 
국가 GDP 순위는 세계 29위이고 
1인당 GDP는 47위였으나,

1980년 
국가 GDP 순위는 28위이고 
1인당 GDP 순위는 48위였다.

박정희 집권 19년 동안 우리나라의 GDP 순위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고, 
국민 1인당 GDP의 경우 상승은커녕 오히려 1단계 하락한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독재정권하에서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이다. 김대중 대통령 집권 5년 사이 우리나라 GDP는 세계 36위에서 11위로 수직 상승하였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중문화가 발전하여 세계적으로 한류라는 단어가 생겨났고, 발전된 대중문화는 국가 브랜드를 상승시켜 기업의 해외 수출에 지대한 공헌과 IT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1961 박정희 공화당 : -2억8천 달러 적자
1962 박정희 공화당 : -3억7천 달러 적자
1963 박정희 공화당 : -4억7천 달러 적자
1964 박정희 공화당 : -2억9천 달러 적자
1965 박정희 공화당 : -2억9천 달러 적자
1966 박정희 공화당 : -4억7천 달러 적자
1967 박정희 공화당 : -6억8천 달러 적자
1968 박정희 공화당 : -10억 달러 적자
1969 박정희 공화당 : -12억 달러 적자
1970 박정희 공화당 : -11억 달러 적자
1971 박정희 공화당 : -13억 달러 적자
1972 박정희 공화당 : -9억 달러 적자
1973 박정희 공화당 : -10억 달러 적자
1974 박정희 공화당 : -24억 달러 적자
1975 박정희 공화당 : -22억 달러 적자
1976 박정희 공화당 : -11억 달러 적자
1977 박정희 공화당 : -7억6천만 달러 적자
1978 박정희 공화당 : -23억 달러 적자
1979 박정희 공화당 : -53억 달러 적자
합계 : -250억 달러 적자

1980 전두환 정부 : -48억 달러 적자
1981 전두환 정부 : -49억 달러 적자
1982 전두환 정부 : -24억 달러 적자
1983 전두환 정부 : -18억 달러 적자
1984 전두환 정부 : -14억 달러 적자
1985 전두환 정부 : -8억5 달러 적자
1986 전두환 정부 : 31억천 달러 흑자
1987 전두환 정부 : 63억 달러 흑자
합계 : -59억 달러 적자

1988 노태우 정부 : 89억 달러 흑자
1989 노태우 정부 : 9억 달러 흑자
1990 노태우 정부 : -48억 달러 적자
1991 노태우 정부 : -97 달러 적자
1992 노태우 정부 : -51 달러 적자
합계 : -98억 달러 적자

1993 김영삼 정부 : -16 달러 적자
1994 김영삼 정부 : -63억 달러 적자
1995 김영삼 정부 : -100억 달러 적자
1996 김영삼 정부 : -210 달러 적자
1997 김영삼 정부 : -85 달러 적자
합계 : -374억 달러 적자

1998 김대중 정부 : 390억 달러 흑자
1999 김재중 정부 : 239억 달러 흑자
2000 김대중 정부 : 118억 달러 흑자
2001 김대중 정부 : 93억 달러 흑자
2002 김대중 정부 : 103억 달러 흑자
합계 : 943억 달러 흑자

2003 노무현 정부 : 150억 달러 흑자
2004 노무현 정부 : 294억 달러 흑자
2005 노무현 정부 : 232억 달러 흑자
2006 노무현 정부 : 158억 달러 흑자
2007 노무현 정부 : 146억 달러 흑자
합계 : 980억 달러 흑자

2008 이명박정부 : -53억 달러 적자

<박정희시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cpi)>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 해인 1979년에는 18.3%였다.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노무현. 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시대의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 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 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도 찬양의 대상인가? 
노무현. 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시대의 수출현황>
박정희는 날이면 날마다 수출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 18년간 수출 638억불에, 수입 871억불, 무역적자 233억불 
박정희시절; 233억불의 무역적자 
-전두환시절; 8억불 무역흑자 (전두환은 8억 흑자를 자랑으로 여긴다) 
-노태우시절; 132억불의 무역적자, 
-김영삼시절; 366억불의 무역적자, 
-김대중시절; 846억불의 무역흑자,

이게 바로 박정희가 자랑하는 수출의 모습이다.

박정희가 노무현. 김대중의 수출실적과 수출흑자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야 한다. 
(박정희정권은 언론과 합작으로 수출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나 엄청난 적자의 이야기는 속 빠진 체였다)

<박정권시절, 농민들 농촌을 떠나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농촌이 잘사는 나라 운운해도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시절은 년간 약 50만 명씩 이농을 했다. 
박정희정권 전 기간에 걸쳐 농촌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로 떠났다. 
농촌이 잘 사면 왜 이농을 하는가?

1960년 농업인구가 58.3%였는데 박정희의 저곡가. 공업화정책과 미국에서 들여온 엄청난 잉여농산물로 살기가 어려워 그리고 농촌부채로 이농을 함으로 1975년에는 37.5%까지 줄었다. 1967-1976 년 사이에 67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를 떠났는데, 이는 한국전쟁동안의 인구이동보다 더 심대한 것이었다.

박정희시절은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곡가 정책이 강행했다.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은 몰락해갔다.

충남대 박진도 교수의 말

(박정희시절은) 저임금으로 수출을 했다. 저임금으로 수출을 하자면 농촌에서 사람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렇게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런 면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시절의 부동산>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다.

이래도 박정희가 위대하다고 하면 도대체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대중.노무현 같으면 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도시빈민. 판자촌. 광주폭동>
박정희시절에 살기 어려워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그들은 산동네에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는데 서울의 경우 박정희 정권은 그들을 강제로 철거, 광주(성남)으로 이주를 시켰다.

도로도 없고,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지역에 사람만 추방을 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다 못해 대대적으로 저항에 나선 거였다. 20만 명의 철거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게 소위 광주폭동이라는 거다.

1970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만-300만 명이 판자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서민들의 삶>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쫓겨 나든가 OOO로 몰리기도 했다.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률>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면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다. 그리고 성장율은 대체로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김대중과 전두환의 경제는 박정희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김대중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국란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세계 최고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김대중은 또한 경제성장에서 세계 최고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단 5년만에 대한민국을 IT강국, 전자제품강국, 생명공학의 강국으로 올려 놓았고, 수출 최대 그리고 흑자,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고 세계 4위로 올렸고, 한국의 영화산업을 세계 2위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한류의 꽃을 피웠다.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이 말은 박정희 이후에 이루어진 엄청난 경제적인 성장은 다 박정희가 밑바탕을 잘 닦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것 또한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박정희경제는 처음 5년간은 부정부패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6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베트남으로부터 돈이 들어오면서 좋아졌다. 
말기에는 또 완전히 망할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수치로 표현하면 박정희말기에 박정희경제는 거의 몰락상태에 있었다.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박정희 경제의 후유증인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했다고 해야 말이 맞다.

(다음은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에서)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년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이 등장하고 일본에서 40억 달러를 빌려 수습을 합니다. MBC의 <5공화국>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둘째 박정희정권이 들어서고 초기에 박정희가 초능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뭔가를 이루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전혀 아니다. (경제가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하다) 초기 박정희 정권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165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1위이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억3,000만 달라였다. 
당시(60년대) 외화보유고는 3억 달라에도 미달 했으므로 한국외환 보유고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또한 한국 총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거였다.

(다음의 경제학자 최용식의 글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다. 
성장률이 57년에 7.6%, 58년 5.5%, 59년 3.9% 등을 기록하여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매년 50% 안팎으로 오르던 물가도 57년부터는 한 자리수로 안정되었다.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던 60년에는 성장률이 1.2%에 그쳤지만, 4ㆍ19혁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군사정권이 선전했던 61년에는 다시 5.9%로 뛰어올랐다. 또한 물가 역시 안정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완벽하게 은폐되고 말았다.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 -고려대교수 이필상

<동아시아 : 1965년 ~ 1980년 연평균 경제 성장률>
1. 일본 : 10.5%
2. 싱가포르 : 10.1%
3. 대만 : 9.8%
4. 한국 : 9.4%
5. 홍콩 : 8.6%

북한 : 57년 ~ 69년 연평균 21% 성장했다..

그후 
70년대 중반까지 연평균 10% 가량 되던 경제성장은 80년대 이후 완전 몰락 원인은 박정희와 같은 독재경제의 종말이였다.

동아시아 경제 성장률인데요.
한국만이 특별히 성장한 것이 아니란 것,
오히려 박정희 시대 한국의 성장은 동아시아 선발 개도국과 비교해서 미흡했고…
민주화 되면서 더 탄탄해 졌다는 것.

대부분의 독재국가는 망했고 망하게 되어 있는데 독재자를 찬양하는 이유가 뭘까요?

한국 국민들이 깨어 있어서 일하면서 독재자에 저항한 결과가 오늘의 한국이다.
독재자 덕이 아니다.

독재자는 쿠테타로 자리 차지하고 있었을뿐.
그 당시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60-70년대는 말뚝박는 시대였다.

 

놀랍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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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칼럼] 독도 밀약, 이제는 말해야 한다

군사독재 정권이나 보수정권이 가장 거론을 기피했던 문제는 희한하게도 독도였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면 일쑤 들고나와, 반일감정을 자극해 국면을 전환시키곤 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관심이었다. 이걸 모르고, 정치적 퍼포먼스에 말렸다가 선의의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다.

역사적으로 독도를 지킨 건 국가가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조선조 울릉도와 독도에서 왜구를 내쫓은 건 민간인 안용복이었다. 해방 후 독도를 지킨 건 예비역 특무상사 홍순칠과 33인의 민간인이었다. 홍씨는 전쟁을 틈타 독도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정부 지원도 없어, 가산을 처분하고 의연금을 모아 기관총·박격포 등을 구입하고 의용대도 모집했다. 수비대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의 침범을 두 차례나 격퇴하고, 가짜 해안포를 설치해 일본 함정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기지도 발휘했다.

문제는 그 열정이었다. 수비대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다. 박정희 정권은 부담스러웠다. 홍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씨는 전했다. 학교 조례 때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떠들도록 한 정권이 왜 그러는지 홍 대장은 알 수 없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서도 똑같았다.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6년 숨졌다.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독도

1965년 1월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의 홈바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우노 소스케 의원이 하나의 메모에 사인을 했다. ‘미해결의 해결’이란 원칙에 따라 성안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도밀약이었다. 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획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은 하지 않는다.(노 다니엘 저 <독도밀약>) 결국 미해결 상태를 해결로 간주하고, 독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주일 뒤 1년 넘게 교착됐던 정상회담 예비회담은 재가동됐고, 6월22일 한-일 협정이 체결됐다. 함께 발표된 한-일 어업협정은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했다. 밀약 내용 그대로였다. 공동규제수역 혹은 중간수역 규정은 지금까지 지켜진다. 임기 말에 돌연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일전불사를 외쳤던 김영삼 정부도 독도 인근 해역을 잠정적 조치수역(중간수역)으로 수용했다.

밀약도 밀약이지만,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일본 정부와 민간에게서 막대한 정치성 자금을 받아 썼다. 박정희는 청구권 자금 이외에 1965년까지 5년 동안 6개 민간기업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았고,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일본 나카소네 정부로부터 40억달러의 차관을 받았다. 그러니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홍 대장을 가만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공세를 높이고 있다. 일왕까지 거론했다. 물론 뒷감당도 못하면서 쏘아대는 말대포라는 시각이 많다. 실제 박종우 선수는 그 피해자였다. 그러니 진정성이 있다면 밝혀야 한다. 독도밀약의 진상과 파기 여부를 말이다. 그래야 ‘독도 쇼’니 정치 선동이니 하는 소모적 논란을 막고 홍순칠, 박종우 같은 어이없는 희생도 막는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72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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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는 반드시 내기만 해야 하는 건가?
 
 
임금론에 맞먹을 만큼 복잡한 이론이 있다면 그것이 이자론이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다루었고다루고 있고또 다룰 문제다하지만 우리로서는 그런 학구적인 이론은 관심 밖이다다만 진짜로 이자를 내야만 하는 것인지또 이자는 낸다면 얼마나 내는 것이 적절한지를 따져보고 싶은 것뿐이다.
이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이자 금지론부터 맬더스의 생산력설이나 피셔의 시간선호설케인즈의 유동성선호설까지 다들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고 있다.
여러 이론들이 다 나름의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지만 오늘날 대체로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인정받는 시간선호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미래재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뿐 아니라현재재가 갖는 투자 이익을 감안할 경우 화폐의 자본화에 따른 자본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다케인즈는 현금이 갖는 유동성 자체가 인간의 선호점이며이것이 이자 발생 원천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경제 원리의 파악을 노동가치로부터 출발하기로 했기 때문에 케인즈의 유동성선호설을 다루기는 어렵다.
다만 시간선호설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해석을 내 놓을 수 있다인간은 기본적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사실이며또한 현재의 자본이 분명 그 자체로 생산성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이 모든 가정들은 이미 노동가치가 화폐화 되고또 자본화 한 이후의 얘기다우리가 따질 것은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이다.
인간은 분명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한다그래서 인간은 불안한 미래를 위해 노동을 저장하고자 한다.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인간의 노동력 저장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논밭을 경작한다든가도구를 만든다든가혹은 곡식이나 과일사냥감 등 잉여 생산물을 저장하는 식으로 말이다하지만 이 어떤 형태의 원시적인 노동저장 수단도 미래에 그 노동 가치가 불어나도록 하는 저장 방법은 없다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의 노동생산물이 갖는 교환가치나 사용 가치는 줄어들기만 할 뿐이다곡식은 썩거나 부패하기 쉽고,도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낡으며힘들게 경작한 논도 한 두 해만 버려두면 황폐해지기 마련이다인간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노동을 저장하려는 의도는 당연한 것이지만결코 저절로 그 가치가 늘어나게 저장할 방법은 없으며 오히려 줄어들거나 소멸할 가능성만 있는 것이다그것은 모든 가치가 인간의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인간의 노동이 더 투입되지 않고 가치가 증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선호설에서 보는 것과 같은현재재를 투자해서 미래에 더 큰 자본 이익을 볼 수 있는 기회비용으로서의 이자를 이해하는 것은이미 노동의 교환가치가 화폐로 표시된 후그 화폐가 자본화한 이후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노동의 교환가치 그 자체가 불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괴물의 힘을 얻어, ‘권력관계로 노동력을 수탈함으로써 생기는 잉여가치이다그것은 자본주의적 수탈에 의한 가치 증식에 대한 기회비용을 뜻할 뿐이며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폐의 자본화가 이미 권력관계의 메커니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춘궁기 때 관곡을 빌려 먹거나 혹은 부잣집에서 양식을 빌려먹으면 가을에 추수하고 나면 반드시 이자를 더해서 갚아야했다지금도 우리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이자를 갚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또한 돈을 맡기면 이자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하지만 서부개척 시대의 은행은 사정이 달랐다돈을 빌려주면서 높은 이자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돈을 예금하더라도 이자를 지급하지는 않았다심지어 보관료를 받았다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도 이자를 지급하기는커녕 보관료를 징수하지 않는가그 말은 화폐자체로는 아무런 증식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반증이며이자가 생겨난 배경이 시간선호설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즉 빌리는 자와 빌려주는 자의 권력관계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인류의 역사 대부분의 시기동안 빌려주는 자가 빌리는 자보다 권력의 상위에 존재해왔다는 사실이다따라서 당연히 이자는 빌리는 자가 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화폐는 새끼를 낳지 못한다’ 는 말은 화폐가 자본화되어 그 자체가 권력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또한 시간선호설이 주장하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대가라는 이론은빌리는 사람보다 오히려 빌려주는 사람의 경우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크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모순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빌리는 사람은 현재가 불확실한 반면 미래는 상대적으로 확실하기 때문에 빌리려는 것이며빌려주는 사람도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빌려주는 것이다그로서는 미래라고 해도 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반면에 빌려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냥 보관한다면 가치가 훼손될 것이 분명하므로 미래가 더욱 불안한 것이다의외로 미래가 불안한 사람은 빌리는 사람이 아니라 빌려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경주 최부자가 풍년이 들어서 쌀을 만석이나 수확했다고 치자만약 아무도 그 쌀을 꾸어 먹지 않는다면 그 쌀은 쥐들 좋은 일 하거나 썩어 없어질 뿐이다불안한 미래는 바로 최부자 자신의 미래인 것이다그러니 이자를 요구할 입장은 아니다빌려가는 사람이 당장 굶어 죽을 처지여서 무릎 꿇고 빌려가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잉여 생산물을 미래까지 보관해야하는 사람의 경우에 만약 그 생산물을 빌려가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가만히 앉아서 그 생산물의 가치가 줄어드는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설사 그것이 화폐로 표시되었다고 해서화폐는 상하지 않으니 손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화폐로 보관하는 경우에 상하지 않고 가치가 보관되는 것은 화폐의 물리적화학적 성질 때문이 아니라 이미 화폐로 교환되었다는 자체가 빌리는 사람이 존재했음을 가정하고 있고또한 화폐가 이미 빌리는 자로부터 나중에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노동가치 교환권이기 때문이다,화폐로 보관한다는 자체는 이미 빌려주는 자와 빌리는 자사이의 권력관계 메커니즘이 이미 작용한 후라는 뜻이다.
임금이든 이자든 모두 거래 상대방 간의 권력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이자의 존재 이유는 다만 빌리고자 하는 측이 빌려주는 측보다 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 다름 아니다.
 
 
 
 
 
 
 
임금에 대한 단상
 
 
참으로 옛날부터 경제학자들은 임금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론들을 내 놓은바 있다하지만 우리가 경제학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이나 주장을 자세히 다 알고 넘어갈 필요는 없다.
여러 복잡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임금이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유일한 생산수단인 노동을 돈을 받고 파는 과정에서 결정되는 노동의 값이라고 할 수 있다마르크스 할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노동이 그 자체로 상품화가 되어 버림으로써 그 결과 생산된 상품과 노동이 별개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데 주목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대나무로 소쿠리를 짠다고 생각해보자만약 분업이 발전하기 전 원시상태였다면 그는 산에 가서 직접 대나무를 잘라다 다듬고염색해서 그것으로 바구니를 짰을 것이다완성된 바구니가 갖게 되는 교환가치의 100%가 그 사람의 노동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그가 파는 것은 눈에 보기에는 대나무 바구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가 쏟은 바구니 짜는 노동인 것이다.
반면에 어떤 자본가가 돈을 주고 사람을 시켜서 대나무를 잘라 오도록 만들고또 그것을 다듬게 만들고마지막으로 소쿠리를 짜게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자본가는 대나무를 잘라온 사람에게도다듬는 사람에게도그리고 소쿠리를 짜는 사람에게도 노동의 대가로 각각 임금을 주었다고 가정해보자완성된 소쿠리는 더 이상 그것을 짜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또 그 사람들의 노동을 대변하지도 않는다왜냐하면 그는 그 소쿠리와 상관없이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돈으로 받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생산물인 소쿠리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말하자면 후자의 노동자는 그가 소쿠리를 짜든지 그물을 짜든지아니면 베를 짜든지 간에 그 생산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그는 그냥 돈을 받고 자신의 노동을 판 것일 뿐 그 생산물과는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자의 경우 대나무 소쿠리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노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후자는 생산된 소쿠리와 그것을 만든 사람을 연관시키려야 연관시킬 수가 없다그 소쿠리는 임금을 지불한 자본가의 것이지 더 이상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런 것을 마르크스 할아버지는 노동의 소외라고 불렀다노동이 노동의 결과물과 헤어졌다는 뜻이다.
특히 자본이 축적되면서 자본자체가 생산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부터 더 이상 가내수공업적인 생산방식은 막을 내리게 된다자본가들은 그동안 축적해둔 자본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기계 장치를 마련하고 임금 노동자를 고용한다앞서 얘기한대로 자본은 그 자체로 똘똘 뭉쳐진 노동의 결과물이다따라서 원칙대로라면 자본가가 투입한 자본이 가지는 교환가치와 생산 활동을 하는 노동자가 투입하는 노동의 교환가치를 공정한 비율대로 계산한 후 최종 생산물 또한 그 비율대로 분배하면 깔끔하게 결론을 맺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자본가가 제공한 소쿠리 짜는 기계를 제공하고노동자는 그 기계를 이용하여 소쿠리를 짠다고 가정해보자최종생산물은 소쿠리 짜는 기계를 만드는데 든 노동과 실제 소쿠리를 짜는데 든 노동의 비율을 계산하여 그 비율대로 분배하면 될 일이었다하지만 자본가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그는 일정한 임금을 지불할 뿐최종 생산물과 노동자의 노동은 절대로 연관시키지 않는다당연히 노동자에게 돌아갈 임금은 투입한 노동의 비율대로 최종 생산물을 배분했을 때 돌아가는 소득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가가 소쿠리 짜는 기계를 개발해서 가지는 순간 소쿠리 짜는 것을 업으로 삼던 사람들은 더 이상 그 기술이 쓸모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소쿠리 짜는 일에 관한 한 그들은 기계를 가진 자본가에게 약자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소쿠리 짜는 기술자들의 기술을 자연스럽게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더 이상 그 기술로는 밥을 먹고 살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소쿠리 짜는 기계라는 자본이 등장하기 전에는 소쿠리 기술자는 그 자본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독립적인 생산 활동의 주체였으나기계즉 자본이 등장한 뒤로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소쿠리도 짤 줄 모르는무지렁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자본가가 시키는 일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이러한 불평등함이 양자간의 임금계약의 기초를 이루기 때문에 그 소쿠리 기술자는 단순 노동자가 되어 이전에 자신의 기술을 갖고 있을 때에 비해 자본가 앞에 예속적이 될 수밖에 없고불평등한 임금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의 힘은 이런 것이다상대방(노동자)를 건드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상대방을 무력화시키고 예속시켜버릴 수 있다임금은 발생 초기부터 불평등하게 책정되도록 하는 본질을 품고 태어났다.
임금을 화폐로 지불하는 것 또한 그 편의성을 떠나 노동을 생산물과 완전히 분리시켜버림으로써 자본가가 적정 배분 이상의 수입을 챙겨가더라도 임금 근로자로서는 전혀 알 수 없게 하는 목적도 있다고 할 수 있다당연히 임금은 최종생산물이 갖는 교환가치에 대한 적정배분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자본가가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지 못할 정도임금 노동자가 더 나은 돈벌이를 갖지 못할 정도의 최저 임금 수준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글을 읽는 당신은 당신의 임금이 어떤 메커니즘으로어떤 수준에서 결정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임금은 결국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권력 투쟁의 산물이다물론 늘 자본가의 뜻대로 결정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해마다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전 지구적 입장에서 볼 때 식량 공급은 수요를 넘는다오죽하면 애완용 개새끼 먹이만 줄이더라도 지구에서 일어나는 기아의 상당부분을 막을 수 있다는 보고서까지 있을까아프리카 난민이 굶어 죽는 가장 큰 이유는 자본가들이 아프리카 노동자들로부터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생존을 위한 식량 보다 더 큰 노동 교환가치를 얻어낼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 북한에서도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본적이 없어서 믿을 수는 없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 역시 식량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북한의 폐쇄적인 경제 운용방침이나 미국과 같은 적대국들의 북한 봉쇄정책으로 인해 자본가들이 북한 주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개성공단사업은 매우 중요한 대북한 자본 공급 통로였으나 쥐새끼 같은 정권에 의해 그 통로가 폐쇄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남북한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이 결정되는 메커니즘은 생각보다 매우 간단하다만약 누군가의 연봉이 1억원이라면그 금액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다첫째자본가는 분명히 그 사람으로부터 (평균적으로) 1억 원 이상의 노동 교환가치를 뽑아낼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물론 재수 없어서 사람을 잘못 뽑거나 임금 책정을 잘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평균적으로는 그렇다는 뜻이다.
둘째, 1억원이라는 금액은 그를 고용하기 위한 가장 낮은 금액이라는 뜻이다앞서도 얘기했지만 그 정도 노동력을 가진 사람에게 평균적으로’ 주어져야하는 임금이 아니라 최저의 임금이란 뜻이다만약 그가 임금 결정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 말이다하지만임금 결정에 참여를 하는 노동자의 경우에 그 임금결정은 달라질 수 있다우리나라도 최근 몇 년 전부터 대기업 등기임원을 중심으로 엄청난 연봉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물론 그 중에는 자본가들도 있겠으나연봉은 자본가로서 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받는 것이므로 연봉 결정 메커니즘은 같다다만 그들은 그들과 같은 정도의 노동력을 가진 사람에게 평균적으로’ 주어져야 할 임금수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주더라도 문제없이 용인될 수 있는 최대한의 임금 수준에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지금은 사퇴했지만 삼성전자의 등기이사로 재직하던 이건희 회장은 노동자로써 연봉을 연간 100억 이상씩 받아갔다그가 삼성전자의 자본가로써 배당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도 말이다과연 이건희씨의 노동력이 그에 상응하는 만큼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임금은 절대로 제공되는 노동력의 양이나 질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임금은 권력의 산물일 뿐이다.굶어 죽을지 아니면 빌붙어서 배라도 채울지를 결정하게 만드는 권력에 의해서 임금이 결정된다.
복잡한 임금론은 다 잊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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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 비례 공천헌금 사건이 터져 잊고 지내던 옛 일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문국현은 지금은 잊혀진 이름이고 대다수가 별무관심일줄 알고 있다.
그는 중국대륙 중소기업경영지도에 지금 골몰하고 있고 미국왕래도 자주하며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번 새누리 공천헌금 사건은 당시 창조당 사건과 유사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간명하게 요점만 쓰겠다.
창조당은 이한정에게 6억 당채를 발행했는데 선관위 자문과 승락을 받고 한 일이다. 그러나 검찰은 헌금으로 몰아서 당은 자연인이 아니므로 자연인인 당대표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문국현을 찍어서 기소하였다.
법원은 선관위 자문받은 당채를 벌하기가 마땅치 않으므로 판사가 검사에게 기소장 변경을 지시하여 헌금은 무죄이니 당채 이자 1%가 너무 싸서 당이 그만큼 부당이익을 받았으므로 당대표를 벌해야 한다고 해서
의원직 상실과 정치활동 십년 금지 형을 확정하였다. (기소장변경은 불고불리원칙 위배라는데 그것도 무시하고 재판을 진행했다. 몬도가네 재판이었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창조당 공심위원장을 맡았으므로 당시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박근혜는 어떤가? 박근혜는 비대위장으로 사실상 총선 당시 당대표자였다.
게다가 이것은 당채도 아니고 저율이자도 아니고 명백한 공천헌금 수수사건이다.
문국현에 적용한 법대로라면
새누리당은 자연인이 아니므로 자연인인 당대표 즉 박근혜는 대선 후보는 물론이거니와
의원직도 박탈당해야 , 그리고 향후 십년 정치활동 금지를 적용받아야 그나마 문국현과
형평성에 어느정도 맞게 된다. 사실은 창조당은 헌금이 아니고 당채이므로 무죄인 것이지만
백보 양보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이 두 사건은 전혀 다른 점이 없다. 한쪽은 당채였고 한쪽은 공천헌금이란 점만 다른 점이다.
검찰에 이 두건에 관해 의견을 묻고 싶지만 그럴 흥미도 기대도 없다. 문국현 식이라면 지금
검찰은 박근혜를 불러 엄격조사해야 마땅하다. 한국은 법치국가도 아니며 내 생각에는 민주주의도
일종의 유사민주주의(類似民主主義)에  지나지 않는다. 조폭과 같은 검찰이 ,그리고 법윤리의식이
결여된 사법부가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한국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나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http://theacro.com/zbxe/free/61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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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의원이 안철수 원장의 최태원 SK회장 구명 운동에 대한 생각을 묻자 ' 그런 것을 우리가 고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철수 원장이 최태원 회장의 구명 운동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시인했다고, 과거가 씻기는 것은 아닙니다.  안철수 원장의 SK 구명운동 관련 내용이 사실 박근혜 캠프에서 안철수 원장을 견제하기 위해 나오는 이야기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과연 박근혜 의원 자신의 과거가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냐에는 저는 의문을 갖습니다. 그것은 박근혜 의원이 지나왔던 과거를 안철수 원장과 같은 잣대로 본다면 그리 떳떳하여질게 없기 때문입니다.



1978년 11월 30일 서울 문화체육관에서는 동아그룹산하 각기업체 임직원 및 가족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마음갖기 결의실천대회및 직장봉사대 발대식'이 열렸습니다. 

새마음이란 말 그대로 새마을운동과 비슷하게 근검,절약,저축 등을 내세우며 하는 사회운동과 비슷합니다. 동아그룹처럼 거대 그룹 임직원과 산하기업체 직원,가족이 체육관을 빌릴 정도로 이런 운동에 적극 찬성했을까요? 이날 행사에는 '구국봉사단' 박근혜 총채가 참석해 격려사를 했는데, 1년 뒤에 무슨 일이 생길까요? 


1979년 5월 29일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는 동아그룹 직장새마음 전진대회에 참석해 장충체육관에 모인 동아그룹 임직원과 가족들을 향해 연설합니다. 

새마음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그룹에서 봉사단이나, 전진대회,결의대회가 계속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룹에서 돈도 안 되는 일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한 까닭은 새마음봉사단 명예총재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그것도 탱크를 앞세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슬이 퍼런 유신정권의 수장이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인데, 대한민국 그룹들이 감히 그분(?)과 그분의 따님이 하는 일에 어찌 적극적으로 돕지 않겠습니까? 그룹차원에서 인력,자금,조직을 총동원했던 이런 모습은 그 당시에는 그리 낯선 일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을 누가 주도했느냐며, 과연 깨끗한 사회운동의 일환이었을까라는 점입니다. 새마음봉사단이 어떤 조직인가를 알아보려면 최태민이라는 사람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박근혜양의 그림자로 불렸던 최태민 목사는 '구국선교단','대한구국봉사단','새마음봉사단'을 함께 조직하고 관리했던 인물입니다. 

최태민은 70년대초 불교,기독교,천주교,천도교의 교리를 합쳤다는 '영세교' 교주를 하던 중 '꿈에 돌아가신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근혜가 국모감이나 잘 도와주라고 지시하셨다'라는 편지를 청와대에 보내면서 박근혜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인연으로 최태민은 일약 박근혜양의 그림자로 등극했고, 각종 단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비리를 저질렀습니다. 


최태민에 관한 수사자료에서 밝혀진 비리혐의만 무려 44건이었습니다. 횡령14건에 2억2135만600원이고(당시 2억원이면 지금의 몇 백억원에 해당) 사기,변호사법 위반,권력형 비리,이권개입,융자 개입 등 권력형 비리라는 비리는 모두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중앙정보부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에 관한 보고서를 올렸고, 박정희는 직접 박근혜와 최태민을 청와대에 불러 심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는 최태민을 적극 옹호했고, 박정희는 오히려 중앙정보부의 보고서를 묵살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중요하게 봐야 하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습니다. 

○ 박근혜의 구국여성 봉사대가 과대한 자금을 모금으로 말썽이 나자 박근혜를 불러 '봉사단 활동을 그만하고 시집을 가라'고 했으나 박근혜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박정희는 최태민을 불러 '문초'를 하면서 봉사단 활동을 접고 청와대 출입을 금지 시켰으나 얼마 뒤 최태민은 다시 청와대에 들락날락했음( 1990년 10월26일 김계원 비서실장의 동아일보 인터뷰)

○ 박정희 대통령에게 재혼을 권유하자 '근혜가 시집을 안 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새장가를 갈 수 있느냐'고 했으며, 재혼할 뜻은 있었으나 박근혜 때문에 재혼하지 못하고, 외롭고 울적한 심사를 술로 달래곤 했다.(1990년 10월26일 김계원 비서실장의 동아일보 인터뷰)

○ 김재규 부장은 '구국여성봉사단과 연관한 큰영애의 문제점'과 관련한 사안이 '10.26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것이었다'고 밝힘 (1980년 1월 박정희 사망관련 항소 이유 보충서 중)

박정희 대통령 측근들은 박정희가 재혼하면서 박근혜를 자연스럽게 청와대에서 내보내려고 했으나 박근혜가 새마음봉사단 등을 통한 활동을 하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계속했고, 육영수 여사 사망 이후 외로운 삶을 술과 여자로 풀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박정희가 재혼했다면 궁정동 사건은 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박근혜를 어머니와 아버지가 비운의 죽음으로 사망한 감수성이 풍부한 여린 소녀처럼 포장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야심이 있던 여인이었고, 그런 그녀의 야심은 최태민이라는 사람과 합쳐 각종 봉사단 활동과 조직을 통해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는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6억1천만원을 가져간 사람입니다. 그 돈이 재벌에게 나온 정치자금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치자금, 그것도 국민 아무도 모르게 돈이 오고 갔다는 사실은 재벌과 정치가 서로 유착관계를 통해 돈과 이권을 서로 나누고 살았던 삶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안철수 원장은 최태원 SK회장 구명운동을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다'는 해명과 함께 '이 일에 대한 비판과 지적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안철수 원장을 향해 박근혜 캠프 김종인 공동선거 대책위원장은 "지금은 세상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으니 '성인(군자)'처럼 말하지만 본질적으로 정직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안철수 원장의 재벌 회장 구명운동은 잘못됐습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을 박근혜 캠프에서 지적하고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박근혜는 가만히 앉아서 유신정권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재벌의 정치자금을 모금하고 재벌의 도움을 받아 각종 봉사단 활동을 적극 했으며, 이 과정에서 숱한 비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안철수는 재벌을 구제하려고 서명했다고 정직성에 대한 비난을 받고 이를 사과했습니다. 박근혜는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위해 재벌을 동원하고 그들이 바친 돈을 가지고 청와대를 나왔지만, 아직도 떳떳하고, 당당하며 추앙까지 받습니다. 박근혜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공주처럼 자면서 정의와 불의의 잣대를 맘대로 해석하며 사는가 봅니다.


http://impeter.tistory.com/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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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을 하루 앞두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경선후보의 발언이 거의 역사 반동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2007년 대권 도전 때 5·16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규정하더니, 7월 15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에서는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며 ‘당시만 해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했던 우리나라가 오늘에 이른 데는 5·16이 초석을 만들었다’고 해괴 발언을 했다. 그리고 유신독재에 대해서는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며 슬그머니 말꼬리를 내렸다.

박정희

만주 군관학교 졸업식에서의 박정희



만주 군관학교에서 싹튼 5.16 군사쿠데타

기가 막힌 일이다.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 전혀 아니었다. 4·19혁명 이전부터 박정희가 쿠데타를 준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4·19혁명이 일어나 쿠데타를 할 명분과 조건이 사라지자 4·19혁명 1주년이 될 때 혼란을 더욱 일으켜 쿠데타의 명분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민주당 정권이 박정희 일파의 군부쿠데타를 감지하고 이를 제어하려 하자 쿠데타를 예정 일자보다 앞당겨 일으킨 것이다. 한마디로 5·16은 권력에 눈 먼 정치군인들의 계획된 군사반란이었다. 미국 또한 1950년대 이미 박정희를 ‘정치적 지향과 야심이 강한 인물’로 주목하고 있었으며, 조갑제의 책에 따르자면 이용문 장군과 함께 정치적 야심을 키우던 인물이었다. 

박정희의 정치권력 지향성은 일제강점기 그의 만주군 시절에 배태되어 있었다. 박정희의 학생 시절 일본의 관동군 참모부와 본토의 우익 장교들이 연계해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1932년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은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실제로는 관동군이 만주국을 통제하고 있었다. 또 1930년대 일본 본토에서는 ‘국가 개조’와 ‘소화유신昭和維新’을 내세우며 극우 군인들이 수 차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박정희는 1940년부터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대망의 황군(皇軍) 장교가 되었다. 박정희는 군부가 정치를 장악한 만주국과 일본군국주의 시대에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군부의 정치 개입을 극히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가 훗날 10월유신을 내세운 것도 일본의 명치유신과 소화유신을 본뜬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1930년대 이래 소화군부파시즘의 아들이다. 박정희의 내면 세계나 당시 4·19혁명 이후 상황을 볼 때 5·16은 구국의 일념과 전혀 무관했다. 권력에 눈먼 일군의 정치군인들이 쿠데타를 통해 헌법을 유린한 반역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교과서에도 쿠데타로 규정한 것을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를 위해 헌법 파괴마저 최선의 선택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국가가 혼란하다고, 빈곤에 허덕인다고 쿠데타가 정당화된다면 이 세상에 어떤 쿠데타라도 정당화할 수 있다. 사실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불가피한 국면에서는 쿠데타도 용인할 수 있다는 민주헌정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위험한 역사인식을 깔고 있다. 

박정희

박정희



5.16이 있어, 유신이 있어 대한민국 있다?

박근혜 후보는 여기서 더 나아가 5·16쿠데타가 있었기에 오늘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가 있다는 주장이다. 원인과 결과를 이렇게 단순하게 연결하는 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의 단순 무지함에 놀랄 따름이다. 차라리 박정희가 태어났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말하는 게 속이나 편하겠다. 박정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몇 가지 수치로만 보자. 

18년 6개월, 6738일. 1961년 5월 16일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박정희가 집권한 기간이다. 대한민국 64년 가운데 무려 18년 이상을 혼자 국정을 농단한 것이다. 그리고 집권 6738일 가운데 군정이 945일이었다. 전체 집권기간 중 14퍼센트에 해당한다. 유신시대 박정희가 발동한 긴급조치 가운데 제9호는 그 기간이 무려 1669일 9시간이었다. 4년 6개월 이상 온 국민이 감옥 아닌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된 민주 인사들의 선고 총량 합계는 1650년이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한일회담을 진행하면서 쿠데타세력은 아예 일본 기업으로부터 6천 6백만 달러를 받았다. 과거 적성국가인 일본과 한일회담을 진행하면서 뒷돈을 받아먹은 것도 총살감이거니와, 당시 민주공화당 총 예산의 3분의 2를 받아먹었으니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은 사실상 대한민국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이 만들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1년 대통령선거 때 야당의 김대중을 꺾고자 무려 600억원 이상을 쏟아 부었다. 그 해 국가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거액이 방방곡곡에 뿌려진 것이다. 어디 이 뿐인가. 박정희 정권은 대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칼텍스사로부터 4백만 달러, 걸프사로부터 3백만 달러의 정치헌금을 받고 한국의 석유산업을 이들 기업들에게 내어 주었다. 1973년 외화벌이 수단으로 ‘기생관광도 일종의 애국’(당시 문화공보부 총무과장 발언)이라며 국가 차원의 국제매춘산업을 벌여 국제사회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생산직 월 노동시간은 1978년의 경우 260시간 주당 65시간이나 되었다. 일요일을 제외하자면 공장 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의 장시간 중노동에 노동자들이 시달렸다. 여름방학 때가 되면 청량리역이나 서울역에서는 교외로 놀러가는 청년들의 기타를 압수했다. 기타를 치는 것 마저 퇴폐향락으로 규정한 것이다. 머리가 귀를 덮으면 장발이라고 해서 파출소에 끌려가 강제로 머리를 잘렸다. 여성들이 치마를 입으면 경찰이 줄자로 재서 무릎에서 일정 길이 이상 허벅지가 드러나면 즉각 미니스커트 단속에 걸려 길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대학가에서는 사복 경찰이 상주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경찰이 교실에 들어와 앉아서 강의 내용을 현장 검열했다. 히틀러 시대에 있었던 일들이 박정희 시대에 재현된 것이다. 이게 정상적인 국가인가. 박근혜 후보는 이것이 정상적인 나라라고 보이는가? 

박근혜 후보는 도덕성에서도 문제가 많다. 박 후보는 얼마 전 유신 때 본의 아니게 피해를 받은 분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박정희가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혔다는 것인지 피해자들이 본의아니게 피해를 당했다는 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이런 모호한 발언으로 책임을 살짝 빠져나가는 태도는 공인으로서 책임성도, 도덕성도 결여한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에 민주화 운동을 목숨을 걸어야 했다. 붙잡히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감옥을 나와도 먹고 살 길마저 막아버렸다. 감옥을 살고 나와도 보복이 지속되었다. 잔인함 그 자체였다. 이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가.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죽여 놓고 ‘본의 아니게’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린 아이도 그렇게 사과는 하지 않는다. 

쿠데타 미화하고 유신독재 평가는 후대에 맡기자?

박근혜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 참석해 물을 마시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유신은 역사나 국민이 판단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역사가 판단하기 이전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게 도리일 것이다. 왜? 첫째 대통령 후보로서 자신의 역사적 식견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게 당연하다. 어떤 역사인식을 가졌는지 유권자들은 알 권리가 있다. 두 번째로 박근혜 후보는 유신시대에 박정희의 딸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후보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피격 사망한 이후 5년 이상 청와대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 유신독재 7년 가운데 5년 동안 그녀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고 다양한 정치지도자를 만났다. 1976년에는 항간에 많은 의혹과 물의를 빚었던 최태민 목사와 함께 '새마음봉사단‘이란 것을 만들어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봉사라는 외양을 띠었지만 새마을운동과 함께 정권의 외곽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냥 후대의 역사 평가에 맡기자고? 본인 스스로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미화하고 오늘날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박정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면서 그 가운데 특히 혹심했던 유신시대에 대해서는 왜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며 발뺌을 하는가. 유신체제는 유례없는 1인 종신독재채제라는 것은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상식이다. 오로지 박근혜는 아버지를 감싸고 아버지를 찬양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역사관으로 삼고 있는 게 아닐까? 20대까지 거의 전 시기를 청와대에서 보낸 박근혜는 어쩌면 박정희를 대한민국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은 아버지가 만든 나라, 그리고 그 딸이 박정희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모든 발언이 제헌절 전날 박근혜 후보가 국민에게 던진 메시지이다. 요컨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의 기본 정신마저 부정하는 발언을 제헌절을 앞두고 국민에게 선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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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pssyyt.tistory.com/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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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박근혜가 또다시 경제민주화를 들고나왔다. 지난 총선 때 톡톡히 재미를 봤으니 대선에 또다시 써먹겠지. 이번에도 전번처럼 포장만 잘하면 되니까.

국민들이 이번에는 속지 말아야 한다.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재벌개혁이 허구임을 알아야 한다. 허구성의 증거는 여기저기 많지만 여기서는 지면의 한계상 쟁점이 되고 있는 순환출자 문제만 집중해서 보기로 하자. 박근혜 측은 재벌들의 기존 순환출자를 모두 인정해주고 신규 순환출자만 막아도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게 바로 허구인 거다.

예를 들어, A사가 B사에 10원을 출자했다고 하자. B사는 출자받은 돈을 가지고 사업을 열심히 해서 돈 잘 벌고 일자리만 많이 만들면 된다. 여기까지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지극히 정상적인 기업의 출자행위다. 그런데 B가 그 10원을 다시 C에 출자하면 원래의 10원은 B에서 C로 갔으니 이제 돈은 B에 없고 C에 있는데 A의 출자액은 B에 대한 출자 10원과 C에 대한 출자 10원, 이렇게 합계 20원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제 C가 그 10원을 다시 D에 출자하면 출자액은 합계 30원이 되고, 이렇게 E, F사로 연쇄적으로 출자하면 10원이 옮겨가면서 총 출자액은 점점 더 늘어 F까지 가면 합계 50원이 된다. 그룹의 모기업 격인 A사가 처음 계열사에 출자한 10원은 50원으로 뻥튀기되었고 A사는 이제 B~F라는 5개 계열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런 연쇄출자만으로도 재벌 총수는 원래 자기 출자액의 5~6배나 되게 지배력을 크게 확장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순환출자라는 또다른 마술이 있다. 이제 F사가 10원을 A에 출자하면 이 그룹의 계열사간 총 출자액은 60원으로 늘어나고, 출자한 돈은 A에서 시작해서 한바퀴 빙 돌아 다시 A로 돌아오는 환상형 순환출자 구조가 완성된다. A사의 주머니에서 나간 애초의 출자액 10원이 모두 회수되어 A사 주머니로 다시 다 되돌아왔으니 이제 이 그룹이 실제 출자한 액수는 0원이 되는데 계열사간 출자액은 60원으로 늘어나 있다. 완전 가공자본 60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F사가 A사에 9원을 출자하면 A사는 애초 출자액 10원 중 9원을 회수했으니 이 그룹의 실제 출자액은 1원밖에 안되는데 계열사간 출자액은 59원으로 늘어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벌 총수 일가는 평균 1%를 출자하여 계열사 지분 60%를 지배한다고 한다. 60배 뻥튀기 출자의 비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순환출자 해소는 이런 환상형 출자구조에서 한 고리를 끊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위 환상형 연결고리의 마지막 단계인 F사의 A사 출자 9원을 끊으면 1원이 59원을 지배하는 구조에서 10원이 50원만 지배하는 출자구조로 바뀌게 된다. 지나친 가공자본 형성을 막아 재벌의 지배력 확장과 경제력 집중을 조금 막아보자는 거다. 그러나 순환출자를 금지했다고 A사가 B~F사를 거느리는 계열사 구조를 자동적으로 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별개의 문제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이게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건가? 기존 순환출자를 해소하라고 하면 재벌들이 해체되어 큰일 난다고 야단법석인데 정말 몰라서 그러나? 알면서도 재벌의 기득권을 지켜주기 위해 그러는 거겠지.

이처럼 재벌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것이 박근혜표 재벌개혁이요 박근혜식 경제민주화라면, 이건 기득권을 모두 다 인정해줄 테니 소나기 피해가듯 당분간만 좀 자제해 달라고 재벌들한테 구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재벌의 불공정 거래행위, 부당행위를 막겠다는 박근혜의 약속은 또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광고 카피를 정책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재벌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눈속임과 구걸인 모양이다. 기득권집단의 눈으로 보면 중산·서민층의 권리는 아마도 권리가 아니라 특권 기득권층이 하사하는 시혜인 모양이다. 그러니 박정희가 꾼 복지의 꿈(?)을 국민의 꿈으로 생각하고 그런 나라를 만드는 것을 맞춤형 복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박근혜표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어차피 광고 카피인데 뭘.

 

[이동걸 칼럼]

이동걸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25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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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어머니인 육영수가 서거한 다음 해인 1975년에 위로 격려편지와 전화를 준 최태민이라는 목사를 알게 된다,

한국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박근혜와 최태민이 만난 시점은 1975년 3월 6일 이라고 한다

이후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관계를 내세워서 기업인을 자신이 운영하던 구국봉사단의 운영위원으로 위촉하고 이들로부터

1인당 2천만~5천만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원의 운영비를 받았다,

이에 대해 박정희가 대통령이었을 당시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영은 2005년 11월 월간조선의 인터뷰를 통하여

1977년 9월 12일 밤 박정희가 물의를 일으킨 최태민을 거세하고'최태민과 관련된 구국봉사단도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자신의 비망록을 공개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는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김재규의 변호인은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

'항소이유서' 외 '항소이유 보충서' 를 군법회의 측에 제출하였다, 이 두 서류에 992자 분량으로 최태민 관련 내용이 작성되어 있다,

김재규 측은 10.26 사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최태민을 거론하였고, 김재규 변호인 항소이유서의 밝힌 최태민 관련 전문은 아래와 같아

피고인 (김재규 본인)은 1975년 5월 구국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이 있는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의 태도를 보고 놀랐으며, 대통령은 큰딸인 박근혜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근혜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여

대통령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조사 후에 최태민이란 자를 총재직에서 물러나게는 했으나 그후 알고보니 근혜가 총재가 되고

그 배후에서 연전히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봉사단에서 손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히하게 해야 합니다, 란 건의를 받아드리지 않았던 일도 있어서,

대통령 주변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재규 변호인은 '항소이유 보충서' 에서 아래와 같이 최태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구국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데,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대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본인은 백관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헤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김재규 측에 이러한 증언과 관련하여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되어 최태민을 수사를 하였던 박광현은 김재규가 10.26의 명분으로 주장한

최태민 사건은 김재규가 억지로 10.26의 명분으로 주장하였을 뿐이라고 증언하였다,

이후 최태민은 활동이 문제 삼아져서 1980년 초 신군부에 의하여 활동을 못하도록 잠시 강원도로 보내졌다,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 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서영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에 따르면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또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연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여다'고 한다,

이에 박근혜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밝히었다,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최 목사는 1988년 박정희 기념사업화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 이 때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인 박서영과 박지만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해달라며,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최태민은 1994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박근헤는 언론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저에게는 고마운 분' 이라며 두둔하였다,

한편 박근혜 관련 의혹을 파헤친 '안철수등의 한판 승부-박근혜 벗기기'

(이상윤 저, 높은새 출판사 ISBN 978-89-93989-04-5)의 박근혜 남자문제편에 따르면,2011년12월 현재 당시 박근혜와 최태민 관련을 조사했던

중앙정보부 백광현검사와 신모 수사관은 살아있다고 한다.

박정희 박근혜 최태민



독재를 암살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

독재자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 차지철 암살하는 재연 김재규



마지막 모습 집행직전 김재규

 

Posted by skid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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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명백(MB)을 아십니까?
(서프라이즈 / 뉴요코리안 / 2012-07-12)


원조종북 박정희와 전향 등 닮은 꼴, 박정희마저도 경계한 MB의 과거는?
<검찰이 종북사건(?)으로 몰아가자 바로 꼬리 내린 이명백(?)을 아십니까>

혹시, 이명백(MB)을 아십니까? 모르신다고요?
그렇다면 이명박(MB)은 아십니까? 아신다고요?

이분이 아마 칠레를 방문한 자리에서 최근 종북논란과 관련하여 교포와의 간담회 자리에서 "그런 것들(종북)은 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서 국민지지를 받지 못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언론들이 보도한 바 있지요?.

그 당시 이 발언은 대통령까지 최근의 종북논란에 가세하려 한다는 등 야권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종북보다 더한 국가 내란죄를 범한 바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하 MB)이 원조 종북이라 불리는 박정희처럼 자신의 뼈저린 전향(?) 경험에서 우러러 나온 발언으로 보입니다. 사실이냐고요?.

자 그럼 무슨 말인지? 역사속으로 진실탐구(Fact Finding)를 해보기로 할까요.

우선 이명백(?)은 누구일까?

이 이명백이라는 이름은 MB의 이름이 6.3항쟁 당시 잘못 사용되거나 기재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MB, 이명박은 누구인지 알아보자.

위키 백과는 이명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명박(李明博, 1941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기업인출신 정치인이며 현재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다.

학생운동가? 아 아마 6.3 항쟁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키 백과 사전의 이 부분 설명을 더 보자.

6·3 항쟁 또는 6·3 시위, 한일협상 반대운동은 1964년 6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상에 반대하여 일으킨 운동이었다.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시 절정에 이른 한일국교 정상화회담 반대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6월 3일 저녁 10시[1]에 선포한 계엄은 7월 29일 해지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매년 6·3 항쟁을 남조선 청년 학생봉기이라고 부르면서 기념하고 있다.

북한이 매년 기념을 한다? 그 이유(?)는 언급이 없으니 일단 넘어가고 이 위키 백과에 있는6·3 항쟁 설명 중, MB 관련 글을 보자.

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한일협정 반대 이슈를 선동하여 배후 조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하고, 3일 오후 6시 30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금지와 진압, 언론검열, 대학휴교 등 주동자 검거에 돌입했으며, 이 조치로 시위의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천120명이 검거되고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7]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이던 이명박은 이명백으로 이름이 잘못 알려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까지 경찰이 침투하고 수사망이 좁혀 오자 스스로 자수하게 된다.

우선 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배후 조종하였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 사건으로 내란 및 소요죄로 관련자를 처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명박은 이름이 이명백으로 잘못 알려져 피할 수 있었지만, 수사망이 좁혀오자 스스로 자수했다는 언급도 있다. 일단 이명백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의문이 풀린 셈이다.

다음으로 같은 보수주의 계열이지만 그동안 MB의 출생의혹, 병역의혹, 좌익사상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온 지만원 씨는 6·3항쟁 당시 MB의 역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해방 후 4.19 직전까지, 간첩들은 폭력시위의 전위대로 노동자 무직자들을 이용했지만, 4.19에서부터는 학생들을 폭력시위의 전위대로 이용했다가 가장 먼저 이용당한 학생들이 고건, 이명박, 이재오, 류근일 등이었다. 이들은 간첩에 의해 의식화된 빨/갱/이들이다

1. 이명박은 박정희를 증오하는 모임인 6·3동지회 지휘

이명박은 1941년생, 고대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한때 박 대통령을 괴롭힌 운동권이었다.

북한 대남공작단은 한일협정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켜 학생들을 선동했다. 그 결과 1964년 6월 3일, 1만에 이르는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4.19와 같은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 박정희 정권을 무너트리고, 남침을 유도하려 했던 국가전복 사건이었다. 대한민국 내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북한의 전문 공작단과 이에 동조하는 소수의 좌익들이 있었고, 이들이 학생들을 포섭하여 전면으로 내세우는 방법으로 소요의 불을 지폈다. 도예종(당시41세ㆍ74년 2차 인혁당사건으로 사형)및 김정강(金正剛ㆍ서울대 정치학과 3년)은 국가보안법위반, 내란소요 등의 혐의로 각각 현상금 10만원씩 전국에 수배됐고,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이른바 '데모 3인방'에 대한 현상금도 1만원씩 내걸렸다.

이런 빨갱이 집단에 이재오와 함께 적극 가담한 이명박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지금도 300명 정도로 규합된 6·3동지회가 결성돼 있고, 회장은 이재오가 맡고 있다. 지휘부는 소위 6·3동지회 3인방으로, 이재오-이명박-손학규가 잡고 있다. 6·3동지회는 반박정희 동지회이며, 지금도 이들은 6·3동지회 활동을 통해 박정희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은 고대 4학년, 상대 학생회장으로 6·3사태에 적극 가담하여 현상금이 붙어 있었으며, 손학규는 경기고 3학년으로 6·3사태에 적극 가담했다.

필자의 이번 진실탐구의 본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사실(fact)관계가 많이 어긋나는 지만원 씨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은 특히 그 당시의 학생운동이 북한의 조정을 받았다는 주장을 동의하는 것은 더더욱 아님을 거듭 밝힌다. 다만 그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종북이라는 용어만 없었을 뿐이지, 이러한 민주화 운동 등을 북한의 사주로 연계해 판단하려 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이를 잠시 인용하였을 뿐임을 밝혀둔다. 그렇다면, 진실탐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사실만을 언급하도록 하자.


서슬 퍼렇던 시기에 '국가 내란소요죄' 혐의자가 집행유예 판결…왜?

우선 청와대의 누리집에 공식적으로 이명박 현 대통령의 이 6·3 항쟁 부분과 관련한 설명은 "그는 상과대학 학생회장 시절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6·3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여 반 년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석방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이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조작까지 해가며 사형까지도 선고 집행했던 이 서슬 퍼렇던 시기에 국가 내란소요죄이고 학생운동의 핵심 운동가였는데도 불구하고 집행유예라?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MB는 그 당시 고려대 상과대 학생회장으로 6·3 항쟁과 관련하여 학생운동의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MB가 당선이 확정되던 2007년 12월 20일 <연합뉴스>는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 중인 6·3 사태 당시 경찰 문건 '고대 데모 사건 개요'에는 시위 주동자인 '구국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당시 상대 학생회장이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6.3항쟁 당시 경찰이 작성한 고대 학생조직 계보도>

이어 "이 문건에는 시위 주도단체로 지목된 '구국투쟁위원회'의 조직도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상대 4학년으로 단과대 학생회장이던 이명박 당선자는 법대, 정경대의 학생회장과 함께 부위원장으로 나와 있다"며 또한 "이에 정부는 3일 오후 6시 30분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진압과 주동자 검거에 돌입했으며 이 당선자는 피신 끝에 6월 15일 이경우 당시 법대 회장과 함께 검거돼 내란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와 함께 현재 고려대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대신문 창간 60주년 특집전에는 6.3사태 주도자로 구속된 이명박 당선자의 1차 공판 기사도 전시돼 있다"며 "'공소 사실을 부인'이라는 제목이 달린 1964년 9월 26일자 고대신문에는 수의를 입은 이 당선자의 사진도 함께 실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명박의 6.3 공판 사진 가운데 이명박의 얼굴이 보인다.>


당시 검찰이 종북(?)으로 몰아가자… '질서문란 미안" 바로 꼬리 내린 MB?

진실 탐구 작업을 하다 보면 드러나지 않은 여러 사실들이 발견된다. 왜 이명박이 아니고 이명백이라는 가명(?)을 썼거나 혹은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검거를 피할 수는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드러난 사실처럼 MB는 곧 자수하고 재판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위에서 일부 언급한 것처럼 당시 검찰이 경찰서 기물 파손은 물론 북한과 연계된 국가 문란이나 소요죄 등 내란죄 혐의로 강력히 몰아가자 MB는 그런 공소사실을 강력히 부인하며 "위정자들에게 우리의 분노를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데모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6•3사태 같은 사회적 분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여 미안하다"며 재판장에서 선처를 부탁해 MB의 행동을 종북화(당시는 이런 표현이 없었다. 하지만 의미 전달상 쓰는 것임을 밝힌다) 하려는 세력에게 바로 꼬리를 내렸다.

사실 확인을 위하여 1964년 9월 22일 자 경향신문 보도내용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이날 고대생 이경우 군과 이명박 군은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데모를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한 데모로 이끌기 위해 고대 내에 구국투쟁위원회를 조직한 것이지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한 것은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이들에 대한 사실심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검(檢)=지난 6월 1일 데모를 하기 위해 구국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는데 왜 데모를 하려고 했나?

▲답(答)=수차 학생들의 데모가 있었으나 위정자들의 각성이 없었고 군인법원난입사건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학생들을 분개케 해오던 중, 몇 명의 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 국가의 장래를 얘기하다 데모로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시켜보려고 결사하게 된 것이다.

▲검(檢)=데모의 목적이 박정희 씨의 하야(下野)를 원한 것이 아닌가?

▲답(答)=그렇지 않다.

▲검(檢)=구호에 "박정희 하야 하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답(答)=꼭 하야시켜야겠다는 것이 아니고 과격한 구호를 내걺으로써 위정자들의 각성을 바라는 뜻에서 지나친 구호를 쓰게 된 것이다.

▲검(檢)=학생들의 데모로 사회질서가 문란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답(答)=위정자들에게 우리의 분노를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데모 한것이지 6·3사태 같은 사회적 분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검(檢)=6·3사태를 4·19학생혁명과 비교해본 적이 없었나?

▲답(答)=비교해볼 필요가 없었다. 현 정권은 자유당 12년의 독재정권과는 다르다.

▲검(檢)=자유당 때보다 더 부패했단 말인가?

▲답(答)=그렇다.

▲검(檢)=다른 대학이나 한국학생총연합회와 사전에 횡적 연락을 갖고 데모한 것이 아닌가?

▲답(答)=우연한 일치일지는 몰라도 사전 연락이 없었다.

▲검(檢)=학생들의 데모에 국민들이 호응하니 4.19와 같은 사태를 야기치 않았느냐?

▲답(答)=4.19때는 부정선거나 마산에서 김주열군과 같은 죽음으로 전국민의 분로를 산 것이었으나 군인법원난입 사건과 같은 것과는 다르다.

▲검(檢)=학생들은 6.3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나?

▲답(答)=6.3 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되어 대외적으로 국가 위신을 추락시켰으며 대내적으로는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여 미안하게 생각한다.

<1964년 9월 22일자 <경향신문> 공판관련 보도 >

이에 따라 10월 2일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이명박, 이경우, 박원규, 김실, 이정재 등 데모학생 5명에 대해 보석을 허가, 오후에 석방했다. 이후 보석으로 풀려난 다섯 사람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 1964년 12월 22일, 이명박, 이경우, 김실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박원규, 이정재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학생운동가 출신? 남로당활동 사실 탄로나자 바로 꼬리내린 박정희와 닮은꼴…

이상에서 살펴본 사실(fact)을 정리하자면 6.3항쟁이 북한의 조정에 의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명박은 고려대 학생조직의 핵심이었으며 이명백(?)이라고 이름이 잘못(?) 알려져 도피할 수 있었으나 이내 자수하여 재판을 받았다.

또한 내란죄를 범했다는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하였으나 이명박은 이 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다만 공판 과정에서 6.3 데모로 국가 위신을 추락시키고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한 점 등을 사과(미안)하는 등 전향(변신)성이 인정되어 집행유예의 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실질 감옥생활은 반년도 아닌 공판 기간이었던 몇 달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주영회장에 자기랑 닮은 변신(?)의 귀재 MB 믿지 마라. 조언했건만…

익히 알려진 대로 MB는 이러한 내란죄까지 범하면서 박정희를 증오하였으나, 졸업 후 취직이 안 되자 청와대에 진정서를 넣고 청와대가 이 진정을 받아들여 현대건설에 입사하게 된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청와대 누리집도 이 부분과 관련하여 "운동권 학생이라는 이유로 취직을 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청와대와 담판 끝에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청와대와의 담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청와대가 MB의 현대건설 입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이후 MB는 본인의 자서전 등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의 총애를 받고 출세 가도를 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위키리크스 등에 의해 밝혀진 미 비밀외교 전문에 따르면, 2007년 2월 2일 당시 알랙산더 버시바우 대사는 미 본국에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 MB에 관한 비밀 보고서를 전송한 바 있다. 이 문서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에게 "MB를 조심하라(look out for him)"고 전했는데 이를 정 회장이 "MB를 돌봐주라(take care of him)"로 잘못 들어 MB가 출세가도를 달린 이유 중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고 이 버시바우 대사는 미 본국으로 타전한 바 있다.

<2007년 2월 2일자 미 본국보고 주한대사 비밀외교 전문 >

아무튼, 사실관계야 (관심이든 조심이든) 밝혀지지 않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을 조직해서 자신의 하야를 요구하는 등 자신의 과거처럼 종북(?)의 혐의가 있었던 MB가 변신하여 이제는 현대건설에서 전혀 반대의 길을 걷고 있음을 보고 당시 박정희가 정주영 회장에게 어떠한(?) 관심을 표명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MB, 이제 "내 과거는 북한연계 내란죄가 아니다" 주장해도 알아줄 국민 없어...

이상에서 살펴본 바로 MB는 6.3 항쟁 당시 이른바 고려대 구국투위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수사망이 좁혀 오자 자수하였고 당시 국가기관은 그에게 내란죄 혐의 등을 적용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한 바 있다. 다만 그의 반성 혹은 전향(?)으로 집행유예라는 정상참작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 재판장에서의 전향 후에도 취직이 안 되자 청와대와 담판하였고 그 덕에 현대건설에 입사했다고 청와대 누리집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MB는 아마 지금도 그 당시 국가기관이 MB 등 학생운동 지도자가 북한 등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판단한 것은 터무니없는 날조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자신은 오직 순수하게 한일협정을 반대하고 정부 부패를 규탄한 학생운동가였을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MB는 이제 그러한 주장에 하나를 더 보태어야 한다. 순수했던, 지령을 받았던, 저 이명백, 아니 이명박, "MB는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저의 행동이 국가 위신을 추락시켰으며, 사회질서를 문란케 한 점을 반성하여 바로 살아남았습니다"라고 그리고 "그래도 취직이 안 되어 청와대와 담판하여 당당히 현대건설에 입사했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러하지 않는다면 MB 말대로 "종북세력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일지도 모르나, 그보다도 이 내란소요죄 사건이 북한과 직접적 연계는 없었던 종북사건(?)이었다고 변명을 한들, 이제는 MB 말을 믿고 지지해줄 국민도 없는 현실이다.

뉴요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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